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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⑪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비범한 존재로 거듭나는 사람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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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윈프리는 새 책을 내면서 클린턴보다 많은 계약금을 받았다.

좌천된 이유

그런 생각으로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걸린 게 라디오방송국 진행자였다. 화려한 삶을 꿈꾸던 오프라에겐 날개를 달아준 절호의 찬스였다. 그녀는 죽어라 일에 매달렸고 마침내 고교를 졸업할 무렵엔 내슈빌 WTVF-TV 방송국 첫 번째 여성 뉴스 앵커로 발탁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흑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3년을 보낸 후 규모가 큰 볼티모어 WJZ-TV 방송국 6시 뉴스 앵커로 발탁되지만 난관에 봉착한다. 방송국 담당자가 오프라의 뉴스 전달이 너무 감정에 치우친다며 아침 토크쇼진행자로 좌천시킨 것이었다. 화재 사건을 보도하던 중 사건 보도보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동정하는 데 더 치중해 객관성과 중립성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프라는 울며불며 항의했지만 이 일이야말로 그녀를 토크쇼의 여왕으로 만들어준 전화위복이 되었다.

토크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당시 토크쇼의 제왕 ‘필 도나휴 쇼’를 앞서갔다. 비결은 뜻밖에도 그녀가 뉴스를 진행할 때는 단점으로 지적됐던 ‘시청자와의 동일시’ 능력이었다. 시청자의 고통과 아픔을 자기 것으로 느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안아주는 오프라에게 스튜디오에 나온 게스트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만난 듯 속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쇼가 처음으로 전국에 방영된 1986년 근친상간을 다룬 프로그램에서 중년여인이 ‘성폭행 당했다’고 말하자 오프라는 눈물을 쏟았다. 그러고는 카메라에다 대고 갑자기 광고방송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고, 광고가 나가는 동안 스튜디오에서 그 여인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다시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성폭행의 고통이 어떤지 잘 안다면서 자신 역시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는 그녀의 행동은 매번 진심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오프라는 1984년 WLS-TV방송국 ‘시카고의 아침(A.M 시카고)’ 단독 진행자로 발탁되어 시카고로 옮긴다. 이 30분짜리 토크쇼는 방송 3개월 만에 시카고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하던 필 도나휴 쇼를 앞질러버렸다. 그녀 나이 서른이었다. 비행청소년에 못생긴 흑인처녀가 3000만달러의 연봉과 수백만의 열광적인 팬을 거느린 스타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1년 뒤 오프라에게 패배한 도나휴는 뉴욕으로 진출해버렸다. 이제 시카고는 오프라 손 안에 들어왔다. 1986년 윈프리 쇼는 전국적으로 송출되면서 이후 줄곧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아예 자신의 쇼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회사(하포 프로덕션·Oprah를 뒤집은 말)를 설립해 쇼의 소유권까지 가져옴으로써 본격적인 사업가로 나선다.

‘오프라 쇼’의 무서운 질주에 대해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렇게 분석한다.

나부터 고백하기

‘오프라 윈프리가 그렇게 단시간에 정상의 TV토크쇼 진행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터뷰를 하는 실력으로 보자면 필 도나휴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 하지만 윈프리는 자기에게 부족한 저널리즘적 요소를 솔직함과 건강한 유머,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상쇄해버렸다. 오프라는 슬픈 사연을 들려주러 나온 게스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 일쑤다. 그러면 게스트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던 가슴속 이야기를 공중파 TV시청자 앞에서 술술 쏟아놓는다. 이 토크쇼는 집단 상담 테라피다.’

아무리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작가가 써주는 시나리오가 있다 하더라도 드라마가 아닌 이상 방송 토크쇼는 게스트와 호스트 간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장 큰 경쟁력이다. 누구라도 스튜디오에 나오면 긴장하게 마련이다. 이 긴장감을 풀어주어 마음을 열어 결국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이 진행자의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오프라는 타인의 입을 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를 갖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나부터 먼저 고백하기’였다. 아홉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아버지 친구를 비롯해 삼촌은 물론 학교 동급생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급기야 미성년이던 10대 초반에 아이까지 낳았다는, 삶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경험을 방송에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자신이 어떻게 이겨나갔는지 지속적으로 시청자에게 알렸다.

낮 시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은 신비로움으로 포장된 은막의 스타들과는 달리 친근함을 주었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구나’하는 연민의 마음이 텔레비전 앞으로 시청자를 모이게 한 것이다.

오프라의 고백은 핵폭탄급 비밀 이야기부터 주말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고 어떤 유명인사를 만나 가슴이 설레었으며 콘택트렌즈 대신 안경을 쓰고 하이힐 때문에 불편해 죽겠다는 식의 시시콜콜하면서도 사소한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1991년, 체중 101kg의 오프라 윈프리.

고백하며 배운 것

‘살과의 전쟁’을 생중계한 것도 유명하다. ‘먹는 대로 살이 찌는’ 체질로 비만 때문에 늘 고민했던 오프라는 시청자에게 수년 동안 자신이 체중과 벌인 싸움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30kg에 달하는 쇠고기를 실은 작은 수레를 끌고 무대에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동안 자기가 줄인 몸무게와 똑같은 무게의 고깃덩어리였다.

그녀가 체중과 벌인 사투는 단지 날씬한 몸을 보여주겠다는 과시가 아니라 의지, 인내, 순수한 야망, 희생, 극기,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로 비쳤다.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이야기, 성공의 순간이 아닌 성공에 이르는 힘겨운 과정을 생중계하면서 ‘대중과 하나 되기’가 그녀의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삶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오(O) 매거진’에 기고하는 정기칼럼 ‘내가 확실히 아는 것(What I Know for Sure)’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름대로 영적 종교적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면 “맙소사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 어려움은 내게 뭘 가르쳐주려고 내 앞에 온 걸까?”’

늘 사랑받지 못하는 계집아이라고 느끼며 10대 시절을 보낸 오프라는 언젠가는 꼭 성공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해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이처럼 ‘삶에서 만난 장애와 고통을 해석하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능력은 고백하며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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