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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한국의 책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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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 가장동에 있는 그의 자택에는 장서 2만권이 있다. 사설 도서관 수준이다. 그 책들이 주제별, 크기별로 가지런히 정돈됐다. 그가 집필을 구상 중인 책은 호암평전말고도 ‘부기(簿記)도입사’ ‘연애 문화사’ ‘미인의 역사’ 등이다. 관심 분야가 넓은 아마추어 독서가가 공력을 쌓으면 이런 책까지 집필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생업 이외의 시간을 수도하듯, 연애하듯 독서에 쏟는다.

‘책에 미친 바보’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여승구 화봉책박물관 관장은 개화기 고서를 모으는 일을 소명으로 여긴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가 1892년 프랑스에 체류할 때 동양학자 로니와 함께 번역한 프랑스어판 ‘춘향전’ 등 역사적 가치를 지닌 책을 수집한 지가 30년 가까이 된다. 서울 인사동 모란갤러리를 인수한 그는 내년부터 화봉갤러리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전시회가 뜸한 1~2월, 7~8월엔 주로 고서 전시를 할 계획이다. “책들의 머슴에 만족한다”는 여 관장은 머슴 노릇에 충실하기 위해 칠순 육체를 운동으로 담금질한다.

컴퓨터 관련 제품을 개발 판매하는 이메이션코리아라는 회사의 이장우 대표는 ‘독서경영’의 실천가로 이름이 높다. 한 해에 정독하는 책이 100여 권, 훑어보는 책은 수백 권에 달한다는 이 대표는 임직원에게도 독서를 강력히 권장한다. 독서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면 제품 개발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는 것. 이런 실용적 목적 이외에 독서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임직원에게 책값을 회사에서 대준다. 직원 1인당 한 해 평균 100만원어치쯤 산다고 하니 50~70권씩 읽는 셈이다. 회사 안에 독서 동아리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휴게실인 ‘창의실’에서 임직원들은 책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푼다. 이 대표는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현지 서점에 들러 ‘최신간 사냥’에 몰두한다고 한다. 뉴욕, 홍콩, 타이베이, 방콕 등에 단골 책방이 있단다.

직장생활을 하며 독서의 매력을 즐기는 성수선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담당 과장은 저서 2권을 낸 저술가이기도 하다. 서강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 화학제품을 수출하는 업무를 맡은 그녀는 잦은 해외출장 때마다 책 5~6권을 갖고 나가 독파했다. 다양한 독서 편력은 영업에도 큰 도움이 됐다. 독일에 갔을 때 마침 총선 기간이었다. 독일인 바이어와 상담을 벌이다 독일 외무장관을 지낸 요슈카 피셔 후보가 화제에 올랐다. 그는 마라톤으로 심신을 개조한 체험을 밝힌 ‘나는 달린다’라는 책의 주인공 아닌가. 그녀는 이 책이 한국에도 번역돼 마라톤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고 소개했다. 독일 바이어는 관심을 나타냈고 대화 분위기는 유쾌해졌다. 그녀는 출장 경험을 정리한 ‘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을 간다’와 독서 에세이 ‘밑줄 긋는 여자’라는 저서를 냈다.

책 외에 별다른 취미 없어



직장생활 20여 년 동안 보너스로 받은 돈 전액을 책 구입에 쓴 송명근님의 ‘책탐’도 돋보인다. 그는 1980년대 대학생 시절부터 책 모으기에 탐닉해 지금까지 1만여 권을 수집했다. 수집 대상은 주로 1950년대 이전에 나온 도서 중심이다. 특히 천주교 관련 사료를 보이는 족족 사들였다. 그는 천주교 집안 4대손이므로 사명감이 발동됐다. 그가 가진 가장 오래된 천주교 관련 서적은 1836년에 나온 ‘척사윤음’이다. 소장 도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책 박물관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이 일을 남에게 맡기기보다 자신이 대학원에 진학해 전문지식을 배워서 이루어낼 작정이다. 그가 밝힌 책 수집 요령은 △자신의 전공을 정하라 △시리즈를 구상하라 △공간을 생각하라 △중심을 잡아라 △수집 뒤를 생각하라 등이다.

‘전작주의자’라는 단어를 창시한 조희봉 화천 상서우체국장은 독서인 사이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윤기 작가의 작품 전부를 꼼꼼히 읽고 작가에게 결혼식 주례까지 부탁하는 등의 일화를 담은 ‘전작주의자의 꿈’이란 저서를 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전산 관련업체인 동부정보기술에 6년간 다니며 주경야독하던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강원도 산골의 우체국장으로 갔다. 개인 별정 우체국의 하나인 이곳은 그의 부친이 개설했다. 부친이 정년퇴임하자 대를 이어 우체국을 맡았다.

과학소설(SF) 마니아인 박상준 오멜라스 출판사 대표는 SF를 읽고 모으는 재미에 매혹돼 이를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의 경영까지 맡았다. ‘오멜라스’는 SF 작가인 어슐러 르귄의 단편에 나오는 가상 도시국가다. 박 대표는 책, 만화, 비디오테이프, 포스터 등 SF 관련 자료 2만여 점을 소장한 서울SF아카이브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SF라 하면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 또는 과학을 제대로 알아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면서 “기성 문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학자들 역시 연구나 비평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이 한국의 SF 도입사를 주제로 한 석사 논문을 준비한다고 밝혔다.

이 책의 저자는 ‘책쟁이들과의 행복한 만남’이라는 에필로그에서 책 애호가들의 특성에 대해 “책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고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 쓸어 넣고 여가의 대부분을 책 읽는 데 할애한다”면서 “아내들이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노름이나 오입에 돈을 탕진하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접어주고 만다”고 썼다.

‘한국의 책쟁이들’ 임종업 지음/청림출판/338쪽/1만3800원

신동아 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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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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