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김팔봉에 대한 인민재판. 한국언론회관 건너편 서울시의회 앞에서 7월2일에 열렸다. 검은색 양복을 입고 수갑을 찬 사람이 김팔봉.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신문 방송 통신사를 접수하여 언론인에 대한 세뇌사업과 ‘미제구축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1945년 11월5일 결성한 조선공산당 산하의 노동운동단체) 선전부가 1950년 7월6일 작성한 ‘미제 완전구축 련합 총궐기대회’ 동원 인원은 다음과 같다.
·방송국(KBS) 197(97)·서울신문 25(1) ·조선일보 15
·서울공인사(후에 대한공론사) 30(3) ·자유신문 18(4) ·문성출판 6(1)
7월6일 현재 해방일보 종업원은 166명이었는데, 열성자대회 참가자는 70명이었다. 창간 4일 뒤였던 당시 참가인원 가운데는 편집계통, 업무계통과 공무국 종업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의 편집과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책임자는 북한에서 파견된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서울의 기존 언론사에 종사하던 언론인들도 있었다. “해방지구의 신문사 설비들을 정비하고 현직일군들을 인입하여 새로운 민주주의적 신문보도기관들을 창설하였다”고 북한의 언론사는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 많았다. 자신의 신상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고, 전쟁의 경과와 사회의 변화 추이 등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직장에 나가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절박한 문제는 통행증의 확보였다. 북한 당국이 발급하는 신분증명서가 있어야 거리를 나다닐 수 있었다. 생존에 직결되는 먹을거리를 구하려면 신분을 확인해줄 통행증을 지니는 일이 급선무였다.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의 일기는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는 6월30일 처음 학교에 나갔다가 이병기, 이병도, 최윤식, 김구경, 성백선 등 문리대 교수들을 만났고, 이튿날도 피난 못 간 교수들이 나왔다고 기록하였다. 집집마다 북한기를 달아야 하는 분위기였으므로 김성칠도 몹시 내키지 않았지만 인공기를 그려서 달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다.
시인이면서 언론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대중잡지 ‘삼천리’를 발행했던 김동환(金東煥)은 처음 한동안은 숨어 지냈지만 자수하면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사실상의 아내였던 소설가 최정희(崔貞熙)와 함께 국립중앙도서관(현재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갔다가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식량을 구하거나 바깥정세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다니던 직장에 나가고, 협조를 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북한군에 점령당한 후의 사정이었다.
언론인 가운데도 전쟁 전에 근무하던 언론사에서 어쩔 수 없이 북한의 선전매체 제작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 북한은 국군이 완전히 패퇴하여 부산까지 점령할 날이 임박했다고 선전하고 여러 저명인사를 방송에 출연시켜 김일성의 침략을 옹호하는 발언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올바른 판단능력을 상실하고 공황상태에 빠져 협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제 동원되었던 기자들은 서울 수복 이후에 부역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대체로 관용의 대접을 받아 신문사에 복직했다. 공산 치하의 불가피했던 여러 정황을 감안한 것이다.
서울신문의 김영상(金永上)은 끌려가서 조사를 받다가 풀려 나온 후에는 몸을 숨겨 납북의 화를 면한 경우였다. 동아일보의 이동욱(李東旭)은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평안북도 개천까지 끌려갔다가 국군이 북진할 때 탈출해서 돌아왔다. 그는 후에 동아일보의 주필과 사장, 회장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취재 제1부장 변영권(邊永權)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 무렵 북쪽으로 끌려가던 중 일행 200~300명 가운데 상당수는 총살당하거나 폭격에 희생되었다고 했다. 변영권은 함경도 영흥에서 홍원으로 가는 고갯길에 이르렀을 때 국군이 동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산 속에 숨어있던 반공청년들이 인민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도망쳐 서울까지 걸어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