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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겸재 정선 연구에 40년 바친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굿바이 겸재, 웰컴 추사’

  • 안기석│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겸재 정선 연구에 40년 바친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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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인 ‘진경시대’를 밝혀낸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은 최근 ‘겸재 정선’이라는 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최 실장을 만나 진경시대의 중심인물인 겸재 정선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40년 연구를 통해 밝힌 성과를 들어보았다.
겸재 정선 연구에 40년 바친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조선의 화성(畵聖)이라 일컬어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타계 250주년을 맞아 최완수(崔完秀·67)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이 10월7일 두툼한 ‘선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40년의 연구 성과를 마무리한 ‘겸재 정선’ 3권은 총 1400쪽에 겸재의 작품만도 200여 점이 넘게 실린 대작이다. 그는 이 대작을 통해 겸재의 가계와 학맥과 교유 관계를 정리하고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창안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을 관련 자료를 치밀하게 조사해 밝혀놓았다.

최 실장은 1971년 간송미술관 첫 전시로 ‘겸재전’을 연 후 겸재 관련 전시를 11차례 열었고 ‘겸재의 한양진경’ 등 겸재 관련 저작물도 여러 권 세상에 내놓았다. 이번에 나온 책은 그동안 겸재 연구에 바친 열정의 결정체다.

흔히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봐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달보다도 손가락을 더 보고 싶은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찬란한 문예부흥기였던 ‘진경(眞景)시대’의 중심인물이었던 겸재가 ‘달’이라면 이런 시대가 있었음을 밝혀낸 최 실장은 바로 ‘손가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최 실장은 어떤 계기로 겸재를 만났으며 그 숱한 시간을 한눈팔지 않고 겸재에 쏟아 부은 것일까. 10월10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최 실장을 만났다. 아주 연한 쪽빛의 한복을 차려입은 그는 겸재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자신의 삶에 관한 질문에는 자상하게 대답하려 하지 않으면서 “겸재에만 신경을 써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 겸재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어떤 분입니까?



“우리나라 산천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진경화풍을 창안해서 확립한 분이고 우리 생활 풍습을 최초로 그린 분이지요. 우리식으로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의 모습이나 조선의 승복을 입은 승려 모습이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의 모습을 최초로 화폭에 올리기 시작한 분입니다. 더구나 중국화풍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해서 주역의 원리에 입각해 화면을 구성했지요.”

▼ 겸재를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일제 식민사관이 조선시대 문화를 왜곡했다는 점을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화두처럼 늘 머릿속에 이 문제를 두고서 연구한 거죠. 당시에는 조선 사회나 문화가 발전이 없었다는 조선정체설이 통설이었는데 기록만으로는 극복하기 참 어려웠어요. 조선정체설의 바탕이 되는 자료가 날조된 것만은 아니거든요. 조선시대 당쟁이 심할 때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근거로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조선이 결코 정체되지 않았다는 것을 눈앞에 보여줄 수 있는 물증을 찾던 중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겸재의 그림을 보고 ‘아, 이거구나!’ 탄성을 지르게 된 거죠.”

겸재 그림을 보는 순간 ‘아, 이거구나!’

그는 일찍부터 불상을 연구하려고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해 불교 유적을 찾아 전국을 휘젓고 다녔다. 대학 졸업 후 경주박물관, 부여박물관, 공주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학예사로서 ‘옛것’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1966년 최순우(崔淳雨·1916~84) 전 국립박물관장의 소개로 고려대장경을 새롭게 편찬한 ‘신수대장경’이 간송미술관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을 읽기 위해 발을 들여놓았다가 발목이 붙잡혔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바로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62) 선생이 수집해놓은 겸재 정선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작품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우고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 겸재의 그림을 간송미술관에서 처음 본 겁니까.

“당시에는 겸재 그림 도록도 없었어요. 1971년 첫 전시회를 준비하느라고 겸재 그림을 처음으로 살펴봤는데 그림이 제 머리를 꽝 친 거죠. 오도(悟道)의 경지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 어떤 면이 최 실장을 사로잡았습니까.

“겸재 이전의 화가들이 따랐던 중국화법이라는 것은 남방화법과 북방화법이 달라요. 남방에서는 기후가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안개나 구름에 싸여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치를 묘사하기 위해서 번지는 화법, 즉 묵법이 유행했어요. 그리고 북방에서는 선으로 묘사하는 필법이 유행했습니다. 중국화가들은 한 화면에 묵법과 필법이 어우러지기를 바라며 그림을 그렸지만 출신 지역의 화법에 치우쳤지 통합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그 이상적인 통합을 겸재가 이뤄냈단 말입니다. 한 화면에 주역의 원리, 즉 음양 조화의 원리를 구현한 겁니다. 즉 흙으로 된 토산(土山)은 수목이 우거져 있으니까 묵법으로 그리고, 골산(骨山) 즉 바위로 된 암산(岩山)은 필법으로 처리해서 음인 토산이 양인 골산을 감싸게 하거나 서로 대립하게끔 화면을 구성한 거죠. 이런 겸재의 그림을 보고 당시 중국화가들이 놀란 거지요. 자기들이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런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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