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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겸재 정선 연구에 40년 바친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굿바이 겸재, 웰컴 추사’

  • 안기석│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겸재 정선 연구에 40년 바친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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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연구에 40년 바친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겸재를 만나게 해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조상 앞에 선 최완수 실장.

▼ 음양의 원리를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산천 속에서 발견하고 재구성한 것이군요.

“그러니까 천재지요. 그러나 이미 그 시대 우리 문화의 역량이 그만큼 축적되어 있었던 거지요. 당시 사대부들이 그런 그림을 요구하니까 점점 그런 그림이 많아지고 겸재가 대접받은 거예요. 당시 사회가 뒷받침한 겁니다.”

▼ 숙종과 영조 시대에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습니까? 예술이란 우선은 배가 부른 후에야 즐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겸재가 처한 시대가 참 독특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직교역을 하지 못했어요. 청나라 초기에 대만을 정벌하는 문제로 일본과 사이가 좋지 않아 교통이 단절됐어요. 그래서 조선이 중개무역을 하게 된 겁니다. 당시 평양감사와 경상감사의 위세가 대단했어요. 동래 왜관이 수백만냥의 은화를 우리나라에 빚질 정도였어요. 문물의 거래가 많을 수밖에 없었지요.”

최 실장은 당시 겸재의 그림이 인기 있는 수출품이었음을 알려줬다.



“청나라 화가들과 비교하면 겸재는 동북아 최고의 화가였어요. 겸재 그림이 중국에 가면 고가로 팔렸다고 합니다.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날 때면 역관들이 그림을 구하려고 겸재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것 아닙니까. 청나라에 가져가서 고가로 파는 거죠. 이와 관련된 일화가 상당히 많아요.”

▼ 어떤 일화가 기억에 남습니까.

“하루는 겸재의 이웃집 처녀가 잔치를 벌이는 겸재 집에 와서 실수로 비단 치마에 고깃국물을 흘렸어요. 그 치마를 빨아서 겸재 집에 보관해뒀는데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겸재가 화흥(畵興)이 이니까 그 치마에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좍 그렸단 말입니다. 그래도 치마에 여백이 있으니까 별도로 해금강도 그렸어요. 그러고 나서 이웃집 주인을 초대해서 ‘내가 화흥이 일어서 비단을 찾으니 마침 비단 치마가 있어서 그렸네’라고 말했어요. 이웃집 주인은 너무 좋아 한상 잘 차려드리고 그 그림을 받아갔어요. 그런데 ‘금강산전도’는 자기 집 가보로 두고 ‘해금강도’만 역관을 통해 중국에 팔았는데 그 대가로 비단 수십 필을 받은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웃집 처녀가 또 비단 치마를 입고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니까 겸재가 늘 그러는 것은 아니라며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때 그린 ‘금강산전도’는 이야기만 전하지 어떤 것인지 몰라요.”

겸재, 금강산 그림으로 ‘스타 화가’ 되다

겸재는 금강산을 그리기 좋아했다. 겸재가 ‘스타 화가’로 데뷔하게 된 것도 바로 금강산 그림 덕분이었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에는 겸재가 36세 때 그린 것으로 보이는 13폭의 금강산 그림이 남아 있다.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시로 묘사해놓은 제화시(題畵詩) 21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원래 금강산 그림은 21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금강산 그림을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이라고 하는데 현재 그렸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금강산 그림의 일부가 ‘신묘년풍악도첩’에 실린 것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때 겸재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진경시의 대가였던 사천(?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금화현감으로 있었어요. 당시에는 내금강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가는 길목에 금화가 있었어요. 사천이 겸재를 초청해서 금강산으로 가 겸재는 산수화로, 사천은 제화시로 사생한 겁니다. 이들이 쓴 그림과 시를 보고 두 사람의 스승이었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은 제사(題詞)를 씁니다. 시가 아닌 산문을 쓴 거죠. 이처럼 셋이 진경화, 진경시, 진경문으로 시문화첩을 꾸며놓고 ‘해악전신첩’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이 화첩을 사천이 가지고 있으면서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금화에 들르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니 겸재가 요즘 말로 떴어요. 이 화첩의 인기가 대단했어요.”

▼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후(後)해악전신첩’은 언제 그린 겁니까.

“36년 뒤인 72세 때 겸재가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젊은 시절에 그린 화첩을 재현했는데 바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해악전신첩’입니다. 36세 때 그린 것과 비교하면 만폭동, 장안사 등 거의 같은 곳을 그렸는데 72세에 그린 것은 굉장히 세련된 것을 알 수 있어요. 여기에는 제화시가 일일이 다 적혀있어요. 겸재가 72세 때 그린 ‘해악전신첩’은 같은 장면을 그린 것인지 다른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생본이 있었는데 최근 나타났어요. 화첩 두 벌이 이번에 나온 책에 실려 있어요.”

▼ 새로 발견한 화첩과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첩 중 어느 것이 먼저 그린 것인지 알 수 있어요.

“나는 발견했다는 표현이 싫어서 출현했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먼저 그린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번에 출현한 것이 사생본인 것 같은데 먼저 그린 거지요. 금강산을 주유하면서 사생한 겁니다. 이번에 출현한 것은 겸재서문만 있는 것을 보니 겸재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재미있는 출현이에요.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처음 그릴 때의 화흥이 없기 때문에 기는 좀 빠져 보이지만 더 세련됐어요.”

▼ 겸재의 그림에 나이에 따른 변화는 있습니까.

“겸재는 만년에 이르면 산수를 접해도 절대 그대로 그리지 않아요. 내면세계, 즉 본질을 포착할 줄 안단 말입니다. 뺄 것은 과감하게 빼버리고 넣을 것은 과감하게 넣어요. 그래도 그린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어요.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인왕산은 백색 바위를 먹빛으로 그렸는데도 ‘아 이게 인왕산이구나’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 그림만 봐도 진경산수화를 그리게 된 겸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그렇죠. 출판기념회에서 그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만뒀는데 사실 내가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는 것도 사람을 사귈 새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낼 틈이 없는 거지요.”

1971년에 만난 겸재와 대화하고 사귀느라 그림 밖의 이성과는 사귈 틈도 없었던 것이지 특별히 독신주의를 고집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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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석│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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