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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③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나무를 사랑하며 살다가 마침내 나무가 되고 싶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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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사학과 식물학의 통섭을 꿈꾸는 강판권 교수.

소나무 숲에서 울다

강 교수가 처음부터 이처럼 나무를 통해 역사를 공부했던 건 아니다. 계명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중국 청대 농업사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나무에는 관심조차 없는 평범한 사학자였다. 강 교수는 “솔직히 말하면 평범한 축에도 못 드는, 못난 학자였다”고 했다.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촌에서 종합고등학교를 나온 뒤, 재수 끝에 간신히 계명대에 들어갔지요. 졸업하고 원래는 취직을 하려 했는데 원서를 넣는 곳마다 떨어졌어요. 1년을 허송세월한 뒤에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그런 그에게 지도교수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3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자 “박사 공부는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취업을 시도했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여기저기 대학원에 지원한 끝에 4년 만에 경북대에 입학했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다시 6년 반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동안 생계는 계명대, 대구대 등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며 받는 강의료로 근근이 꾸렸다.

“뭐 하나 한 번에 된 적이 없지요. 힘들고 괴로웠어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절대 교수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사실만 점점 분명해지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고요.”



1999년 간신히 박사논문을 쓰고 나자 이젠 정말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새로 시작할 일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두 아이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대구 팔공산 성전암에 올랐다. 절집 뒤로 펼쳐진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강판권 교수는 “나무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꽤 오랫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숲에 갔습니다. 비가 오든, 폭염이 쏟아지든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봤지요. 때로는 눈물 흘리고, 때로는 소리도 지르면서요.”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건. 우연히 접한 산림학자 차윤정씨의 나무생태서 ‘신갈나무 투쟁기’가 계기가 됐다. 신갈나무를 의인화해 나무에게도 치열한 삶이 있음을 기록한 이 책을 읽으며 강 교수는 무릎을 쳤다. 그동안 쌓은 인문학적 지식과 나무 얘기를 묶어 책으로 내면 호구지책(糊口之策)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는 시골 사람이라 나무와 함께 자랐어요. 소나무의 어린 가지를 꺾어서 달콤한 물을 빨아먹기도 하고, 지게 가득 땔감을 해 나르기도 했지요. 나무 얘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니 그런 유년 시절 추억이 떠오르면서 정신이 번쩍 든 겁니다. ‘조금만 공부하면 나도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되든 안 되든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었지요.”

호구지책

책을 쓰려면 나무의 이름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식물도감을 사서 첫 장부터 읽어나갔다.

▼ 그럼 오로지 생계를 위해 나무를 공부하신 거군요.

“그렇죠. 그때는 ‘근사’고 ‘격물치지’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교학사에서 나온 ‘한국의 수목’을 펴놓고 하나하나 이름을 익혔지요. 그 뒤엔 캠퍼스에 나가 그 나무를 찾아봤고요.”

나무 이야기에 인문학적 지식을 더하기 위해 각종 사료도 뒤졌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중국 청대의 식물학 서적들이었다. 강 교수가 서가에서 꺼내 보여준 당시의 식물도감 ‘식물명실도고(植物名實圖考)’는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웠다. 식물 1714종에 대해 기록해놓았다는 책을 펼치자, 나무 모양을 그린 세밀화 옆에 각각의 이름, 특성이 적혀 있었다. ‘측백나무’를 찾으면 ‘씨는 맛이 달다. 소나 말이 등창에 걸렸을 때 이 열매를 먹이면 낫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쓰여 있는 식이다.

▼ 오랫동안 사학을 공부하고도 살길을 찾지 못해 나무로 눈을 돌린 건데, 또 고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는 것조차 잊을 만큼 재미있었어요. 옛 식물도감에는 나무에 얽힌 역사나 그 시대 사람들이 나무에 대해 쓴 시 같은 것이 기록돼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자가 이 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는 출처를 ‘논어’라고 밝히는 식이지요. 도감을 읽다가 그런 부분이 나오면 원전을 찾아 읽고, 거기 다른 나무 얘기가 나오면 다시 또 그 책을 찾고…. 그렇게 계속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갔어요. 나무가 우리의 삶과 이렇게 깊은 연관을 맺고 있구나, 어떻게 지금까지 나무에 대해 무관심한 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도감에 나오는 나무들을 직접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름을 외우고, 특징을 알게 되니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들이 하나하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문대 앞에 서 있는 벽(碧)오동의 푸른 나무껍질이 한눈에 들어왔고, 여간해서는 볼 수 없다는 목백합의 연초록빛 꽃망울을 찾기 위해 무성한 가지 아래서 한참동안 잎새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나중엔 학교를 거닐다 모르는 나무가 보이면 조경담당자를 찾아가 물어볼 정도가 됐다. 그렇게 조금씩 진심으로 나무에 빠져들었다.

“언제부턴가 도감에서 제가 직접 보지 못한 나무 사진을 발견하면, 그 나무를 만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 됐어요. 이 이파리가 바람에 떨리면 어떻게 보일까, 나무껍질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마치 연애할 때 애인이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날까 상상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지요.(웃음)”

‘도로변에 우뚝 선 물박달나무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박달나무를 만났다는 기쁨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물박달나무가 내가 상상했던 우주목(宇宙木) 혹은 세계수(世界樹)와는 달리 너무 왜소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안아보았다. 굵지 않은 나무인지라 작은 가슴에 들어왔다. 비가 내린 뒤라 나무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갈색 수피(樹皮)와 계란형의 잎, 끈적끈적한 가지는 식물도감에서 본 그대로였다. … 숲과 구름에 가려 알아보기 힘든 나무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담아 오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때의 안타까운 심정은 한 존재를 진정으로 사랑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 교수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박달나무를 간절히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경북 문경에서 맞닥뜨렸을 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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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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