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해피 MB’

  • 입력2009-11-09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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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잘나가고 있다. 지지율이 50%를 넘어섰다고 한다. 밖에서는 ‘빅 맨(대단한 사람)’이란 찬사도 들었다. 그런 만큼 자신감이 충만하다. 이 대통령은 내년 G20 정상회의를 한국에 유치하게 된 것은 “남이 짜놓은 국제질서의 틀 속에서 수동적인 역할에 만족했던 우리가 새로운 틀과 판을 짜는 나라가 된 것”이라며 기염을 토했다. 대통령의 인식은 “이제 변방적 사고에서 벗어나 중심적 사고로 나라의 격(格)을 높여야 한다”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랜드 바겐(북핵 일괄타결론)’으로 남북문제도 주도하겠다고 한다. 친(親)서민 중도실용주의로 국정의 주도권을 쥐었으니 지리멸렬한 야당은 적수가 못된다. 반(反)MB 연합의 구심이라 할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가고 없다. 언론환경도 괜찮다. 이래저래 ‘해피 MB’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다. ‘부자를 위한 정부’에서 ‘서민을 위한 정부’로 바뀌려는 노력이 대통령 지지율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면 이 또한 고무적이다. 몇몇 여론조사 결과는 정책전환의 효과가 아직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고 하지만 기대심리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보금자리 주택과 미소금융(소액서민금융), 대학생 등록금 후불제 등은 야당이 비판하는 것처럼 단지 ‘쇼’는 아니지 않은가.

    이 대통령은 미소금융에 대해 “스스로 일어서려는 서민에게 낮은 금리로 자금을 대출해주어서 자활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추진하는 중도실용 서민정책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재원은 휴면예금과 금융권의 출연금 1조원,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 1조원을 합친 2조원이고, 대기업의 1조원 출연은 대기업이 영세상공인들에게 직접 금융지원을 하는 첫 사례로서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기업 프렌들리’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접목한 것이란 얘기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재벌의 손목을 비틀어 수천억원씩 내놓게 하는 관치금융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 목적에 비추어 ‘관치에 의한 포퓰리즘 정치’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 대통령은 보금자리 주택사업과 관련해 “서민을 위해서, 집 없는 사람을 위해서 주는 서민주택을 투기에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회의 공적”이라고 말했다. 투기꾼은 ‘공공의 적’이라니! 서민들이 듣기에 속 시원할 얘기다. ‘등록금 반값’ 공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등록금 후불제(취업 후 학자금상환제) 또한 서민의 학자금 부담을 덜어줄 것은 분명하다.

    물론 몇 가지 정책의 예로 감세와 규제완화, 법질서 확립을 통해 성장을 꾀하는 ‘MB노믹스’의 본질이 변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의 첫 주례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요즘 친서민 정책을 편다고 하니 혹시 시장경제의 원칙을 훼손하는 게 아니냐는 일부의 오해가 있는데, 시장경제의 원칙은 지켜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한 ‘시장경제의 원칙’이 ‘MB노믹스의 원칙’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가 감세와 4대강 사업 등을 고집하는 것에 미루어보면 그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꿩 잡는 게 매라고 친서민 중도실용을 앞세운 ‘생활정치’의 약발이 대단한 것으로 입증된 이상 옛 방식으로 되돌아갈 리는 없다. 케인스주의자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힌 이유도 거기에 있을 터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그 진정성과 구체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정책조합의 모순(예컨대 감세와 복지지출 증대)에 따른 내적 혼란과 정치공학적 포장(예컨대 야당이 말하는 쇼)에 대한 국민 불신 등으로 중도실용은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니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자민당 체제를 ‘선거혁명’으로 무너뜨린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도의와 절도를 잃어버린 금융자본주의, 시장원리주의에 어떻게 브레이크를 걸고 국민경제와 국민생활을 지켜나갈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제기된 과제다”라고 말했다. 시장경제와 사회적 공정·평등의 균형을 잡는 것이 그가 주창한 ‘우애 혁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총리로 취임한 그가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빈부 양극화의 ‘격차 사회’를 자신의 신념대로 좁혀나갈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하토야마 총리가 시장과 성장 중심의 레이거노믹스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만은 명백하다. 그에 비해 중도실용 이후 ‘MB노믹스’가 어떻게 수정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대통령의 친서민 중도실용이 폭넓게 체감되지 못하는 근본이유다.

    더구나 중도실용에 대한 신뢰는 단순히 경제정책만으로 가늠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분야에서 중도실용의 가치가 하나의 맥으로 작동할 때 신뢰가 형성된다. 그런 총체적 신뢰가 집적될 때만이 친서민 중도실용에 대한 믿음도 확보될 수 있다. ‘정치 사회 문화 따로, 경제 따로’는 성립될 수 없다. 경제를 살려 국민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국민통합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경제도 살릴 수 있는 이치다. 이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다음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를 향해 나가야 한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대립과 투쟁보다는 관용과 타협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관용과 타협이야말로 중도실용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매우 좋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발언과 현실은 다르다. 대통령의 중도실용은 집권 측 내부에서부터 엇박자를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박원순 변호사 손배소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희망제작소’라는 시민단체의 상임이사인 박 변호사는 지난 6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현 정부가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시민단체의 활동을 제약한다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희망제작소만 해도 지역홍보센터 만드는 사업을 3년에 걸쳐 하기로 행정안전부와 계약했어요. 그런데 1년 만에 해약통보를 받았습니다. 하나은행과는 마이크로 크레딧 같은 소기업 후원사업을 하기로 합의하고 기자회견까지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무산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정원에서 개입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 폭로였다. 국정원은 즉각 박 변호사의 주장을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그러나 민감한 사안이니만큼 야당이 가만있을 리 없었고, 몇몇 신문은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9월 국정원은 박 변호사에게 명예훼손에 대한 2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원고는 대한민국(법률상 대표자 법무부 장관), 피고는 박원순’이었다. 그러자 박 변호사는 ‘진실은 이렇습니다’라는 문건을 통해 국정원의 사찰 의혹 사례 15가지를 조목조목 공개했다. 국정원 직원이 한 재단의 이사장을 찾아가 자신에 대해 탐문했고, 자신이 이사로 등재된 한 재단에서 돈을 얼마나 받고 있느냐고 캐물었다는 것 등이다. 사안의 성격상 박 변호사가 공개한 사례의 진위를 입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세고 두려운 기관을 상대로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주장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니냐”는 박 변호사의 호소가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더구나 원고가 특정한 공직자(국가정보원장)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점과 관련해 과연 소송이 성립되느냐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특정한 공직자도 아니고 정부가 자연인으로서 명예훼손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명예훼손소송의 근본 취지에 어긋난다. 명예훼손은 주로 자연인, 즉 민간인에게 적용된 것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소송이 아니고서는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이라는 해석이다. “국가는 독립적인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시민이 가상의 공동체를 만든 것으로 결국 국가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국가라는 존재가 자신을 억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는 주장도 있다. 국정원이 검찰 측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원고로 한) 소송이 가능하다는 자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니 당장 소송의 성립 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소송을 통해 국정원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소송에서 이기려면 박 변호사가 공개한 내용을 증거로 부인해야 하는데, 과연 무슨 증거가 있을 것이며 설령 증거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까발리는 것이 국가정보기관에 무슨 득이 되겠는가.

    소송과 관련해 문화연대,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15개 중앙 시민단체, 177개 지방 시민단체는 “2억원이라는 손해배상소송은 사상 초유의 일로 시민사회와 공존하지 않겠다는 정권 차원의 선언”이라고 주장하며 공동대응에 나섰다. 급기야 온건한 시민운동가로 알려진 박 변호사는 “내년이나 내후년이 되면 이명박 정부는 일패도지(一敗塗地·여지없이 패해서 땅속에 묻힘)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나는 박 변호사의 ‘극언’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은 관용과 타협을 말하고, 정부는 불용과 배제의 자세를 보이는 한 중도실용의 진정성은 끊임없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KBS 2TV ‘스타골든벨’의 진행자 김제동씨의 교체를 두고 외압의 결과라는 의심이 쉽게 거둬지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정부는 4대강 사업 예산 22조2000억원 중 8조원을 수자원공사에 넘겼다. 그런데 “10대 공기업 부채는 2008년말 157조원에서 2012년에는 302조원으로 늘어난다”(한나라당 김성식 의원)고 한다. 공기업 부채는 국가채무에는 잡히지 않지만 결국 국민이 갚아야 할 빚이다.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재정을 확대하고, 그로 인해 나라 빚(2009년 366조원·GDP 대비 35.6%)이 급증한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은 아직 양호한 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수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4대강 사업을 속전속결하는 것이 과연 중도실용의 자세인가? ‘해피 MB’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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