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깨달은 동양 구루가 왜 성(性)스캔들 주인공이 됐을까?

종교적 프리즘으로 본 문명 교류

  • 성해영│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종교학 lohela@daum.net

    입력2012-03-20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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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출신 그루 묵타난다는 젊은 여성을 방으로 불렀다. 옷을 벗으라고 한 후 탄트라 수행이라고 설명하면서 성관계를 가졌다. 스캔들의 주인공이던 동양 구루들은 성적 욕망의 승화를 강조하는 ‘탄트라’적 가르침을 전했다. 문명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동양 구루들의 스캔들은 신도에게 쓰라림뿐 아니라 지혜 또한 제공했다.
    깨달은 동양 구루가 왜 성(性)스캔들 주인공이 됐을까?

    2009년 3월 인도에서 열린 요가 페스티벌에 참석한 한 종교지도자.

    종교 없는 문명은 없다. 삶의 문제에 궁극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종교가 유한한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종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행동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므로 문명이 형성·유지되는 과정에서도 중요하다. 예컨대 기독교라는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는 유럽 문명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힌두이즘, 불교, 유교, 도교의 충분한 이해 없이 아시아의 역사를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종교는 이처럼 문명의 형성과 유지 과정뿐만 아니라 문명의 교류와 만남에서도 중요하다. 십자군 전쟁, 중세 이슬람의 확산, 서양의 남아메리카 진출, 청교도의 북미 이주와 같은 중대한 사건에 종교가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현지 문화를 더욱 기름지고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는 문명 간의 교류를 대단히 거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십자군 전쟁, 유럽의 남아메리카 진출과 같은 사건은 종교적 배타주의가 문명 간의 만남을 얼마나 끔찍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종교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적성국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했던 레이건 대통령이나, 이슬람 국가들과 전쟁을 벌인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에게서 ‘종교적’ 색채를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수천 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간 9·11 테러 역시 ‘지하드(Jihad)’라는 이슬람식 성전(聖戰) 개념을 알지 못하고선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렇듯 종교는 여전히 문명의 교류에서 큰 변수로 기능하고 있다. 이 글은 20세기 후반 미국에 진출한 동양 종교 지도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문명의 교류와 충돌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동양 종교 지도자들이 미국에서 일으킨 각종 스캔들을 통해 문명의 교류와 충돌 양상을 되짚어보는 것이 이 글의 주된 요지다.

    청교도들이 이주하면서 형성된 미국은 전형적인 개신교 국가였다. 하지만 상황은 급격하게 변화한다. 19세기 말부터 활발해진 동서양의 교류로 인해 동양 종교가 미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중국인을 선두로 많은 동양인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동양 종교의 미국 진출은 가속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강기를 거치지만 전후 미국인의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특히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미국의 젊은이들은 동양 종교와 같은 새로운 것을 받아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진화론과 같은 현대적인 과학 이론을 거부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역시 동양 종교의 확산에 일조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불만이 미국인들이 동양 종교에 눈을 돌리게 된 으뜸가는 이유였다.

    동양 종교에 매혹된 서양인들



    깨달은 동양 구루가 왜 성(性)스캔들 주인공이 됐을까?

    비틀즈 멤버들은 동양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관심의 첫 번째 대상은 일본의 선불교였다. 앨런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1997)를 위시한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와 앨런 와츠(Allan Watts· 1915~1973)와 같은 인물은 서양의 물질문명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선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서 찾고자 했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에 실망한 그들에게 불교는 여러모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인간 내면을 합리적으로 탐구할 것을 강조한 불교는 과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의 기호에도 잘 맞았다. 이렇게 선불교에서 시작된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은 힌두이즘의 적극적 수용으로 이어졌다. 미국인은 유신론적 요소가 강한 힌두이즘에서 이국적 요소와 더불어 무신론적 종교인 불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독교와의 유사성 역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양 종교의 폭발적인 인기는 곧바로 영적 스승에 대한 갈구로 이어진다.

    동양 종교에 매혹된 이들은 영적 스승을 찾고자 대양을 건너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그룹 비틀스(Beatles)는 1968년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의 창시자인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Maharishi Mahesh Yogi·1917~2008)의 아시람(ashram·사원)을 방문한다. 비틀스의 인도 체류는 당시 서양을 휩쓸던 동양 종교의 인기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서양인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알게 된 동양의 이른바 ‘깨달은’ 스승들 역시 가르침을 전하고자 먼 길을 나서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로시(Roshi·老師)라고 불리던 일본 선승을 필두로 동양의 종교 지도자들이 미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이 글에서 다룰 바그완 스리 라즈니시, 스와미 묵타난다, 초감 트룽파 등이 바로 이 무렵 미국에 건너간 인물이다. 동양 출신의 종교 지도자들은 스승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구루(guru)’로 총칭됐다. 구루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을 전달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식은 ‘영적인 자기완성에 필요한 앎’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구루는 영적인 지혜를 전해줌으로써 개인의 영적 완성을 이끌어주는, 동양 출신의 종교적 스승을 의미했다. 이제 미국은 동서양 종교가 뒤섞인 도가니가 됐다. 근본주의적 개신교에서부터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 힌두이즘, 불교, 도교, 뉴 에이지, 신지학(神智學·Theosophy), 크리스천 사이언스,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 UFO 컬트에 이르는 온갖 종교가 한 공간에서 어울렸던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구루는 동양 종교의 상징으로 문명 교류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종교 간 만남은 근대 이전의 문명 교류 과정에서 흔히 목도되던 타자에 대한 노골적 폭력에서 벗어났다. 그런 덕분에 동양 종교는 종교의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한 미국에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양 종교의 미국 진출은 개인적인 원망(願望)의 투사, 과도한 이상화, 동서양 문화의 차이로 인한 갈등, 구루와 신도의 인간적 불완전함 등이 함께 어우러진 냉혹한 드라마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자.

    ‘미국이 기다리던 메시아’ 라즈니시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인물은 바그완 스리 라즈니시(Bhagwan Shree Rajneesh·1931~1990)다. 후일 오쇼(Osho)로 개명한 그는 인도 출신 구루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특히 라즈니시는 동서양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타고난 달변, 명쾌한 논리, 인간적 카리스마를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폭발적 인기를 반영하듯 라즈니시의 아시람이 있던 인도 푸나(Poona)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르침을 듣고자 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라즈니시의 가르침은 책을 통해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으나 유명세에 비해 그가 미국에서 일으킨 스캔들은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라즈니시는 1931년 인도에서 태어났다. 번뜩이는 지성과 재치를 가진 병약한 소년이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광범위한 독서로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우울증, 만성적인 허리 통증, 당뇨와 같은 질병이 그를 평생 괴롭혔다. 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했고, 스물한 살이 되는 해, 치열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스물아홉 살인 1960년 모교인 자발푸르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직을 얻었지만, 거침없는 발언으로 인해 결국 6년 만에 대학을 떠나게 된다. 이 시기 라즈니시는 간디를 마조히즘(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받고 고통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에 빠진 성도착자로, 테레사 수녀를 사기꾼으로 비난해 후일 그가 일으키는 커다란 논란을 미리 살짝 보여주기도 했다. 사직한 후 그는 영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구루로 나선다.

    그의 가르침은 ‘종교 없는 종교(religionless religion)’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윤리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타고난 욕망을 억압하는 모든 낡은 종교를 혁파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영적 탐구와 성적 에너지의 자유로운 충족을 결합해 ‘지금 이곳’에서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탄트라(tantra)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즐거움에 초점을 둔 라즈니시의 종교 공동체는 역설적으로 괴로움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초창기 그는 노동이 곧 영적 수행이라는 주장을 실현하고자 30여 명의 제자를 가족 소유의 농장에 보내 일을 시켰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과도한 노동과 영양 부실 때문에 몇몇 제자가 건강을 크게 해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외에도 공동체 내부의 자유로운 성생활은 지역 주민의 비난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고, 외국에서 온 수행자들과 주민들 사이의 갈등도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됐다. 그럼에도 라즈니시의 아시람은 한때 6000명이 동시에 머물 만큼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주민과의 마찰 역시 점증했고, 결국 400만 달러 상당의 세금을 추징하려는 지방 정부와 갈등하는 사태마저 빚어졌다.

    곤란에 직면한 그는 제자들의 권고에 따라 미국에 진출한다. 1981년 신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미국에 도착한 그는 공항에서 ‘나는 미국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미국에 온 라즈니시는 오리건 주에 넓은 목장을 마련하고, ‘라즈니스푸람(Rajneeshpuram·라즈니시의 도시)’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곳 역시 인도의 아시람처럼 큰 성공을 거둔다. 그 단적인 예로 공동체는 1981~85년 4년 동안 1억2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라즈니시는 이곳에서 마치 왕과 같았다. 어릴 적부터 수집벽으로 유명했던 그는 무려 93대의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사들였고, 이 차를 타고 신도들이 늘어선 공동체를 주기적으로 퍼레이드했다. 심지어 신도들은 그가 날마다 다른 차를 탈 수 있도록 365대의 롤스로이스를 마련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적적인 성장 중에 라즈니시는 재발한 우울증과 허리 통증으로 자신이 좋아하던 강연조차 그만둔 채 오랜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교단의 운영은 제자이자 여비서였던 마 아난드 쉴라(Ma Anand Sheela)에게 주로 맡겨졌다. 그러나 교단의 폭발적인 성장과 힘의 집중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모금에 혈안이 된 교단은 신도들을 병에 걸렸다는 거짓말로 그들의 부모에게서 돈을 타내게 부추기는가 하면, 질서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신도에 대한 도청과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인도에서처럼 공동체와 지역 주민들의 관계는 점차 악화됐고, 이 과정에서 교단은 허위로 투표인단의 수를 늘려 안티로프(Antelope)라는 지역 명칭을 아예 라즈니시푸람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또 지역 주민과 갈등하면서 방화, 공무원 폭행 사건이 벌어졌으며, 심지어 살모넬라 균을 지역 식당에 살포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화생방 테러다. 비슷한 사례로 1995년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12명을 사망하게 만든 옴진리교의 화생방 테러가 있다.

    ‘비밀스러운 삶’을 산 구루 묵타난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당국은 교단을 수사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쉴라는 1985년 19명의 동료와 함께 독일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곧바로 붙잡혀 미국으로 송환됐다. 그는 재판을 거쳐 이민사기, 도청, 살모넬라 균 살포, 방화, 폭행 등의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자 라즈니시는 모든 잘못을 쉴라 탓으로 돌리면서도 쉴라의 전체주의적 교단 운영이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즘을 경험해 자유의 참된 가치를 알려주려는 자신의 계획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과는 별개로 그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버뮤다로 탈출하려다 이민법 위반으로 공항에서 체포됐다.

    붙잡힌 라즈니시는 사법 당국과의 협상을 통해 40만 달러의 벌금과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는 5년 안에 재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85년 미국에서 추방됐다. 인도인들에게 라즈니시의 추방은 동양 구루에 대한 서양의 탄압으로 여겨졌다. 그는 인도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1990년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쳤다.

    깨달은 동양 구루가 왜 성(性)스캔들 주인공이 됐을까?

    서구인들은 힌두 문화 중에서도 요가에 대한 관심이 특히 높다.

    스와미 묵타난다(Swami Muktananda, 1908~1982)는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스승인 니탸난다(Nityananda)를 만나고 영적인 여정에 오른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여러 스승을 사사한 끝에 탄트라(tantra)에 입문한 그는 수행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묵타난다는 회음부에 위치한 쿤달리니(kundalini)의 에너지를 정수리에 있는 차크라로 승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쿤달리니 요가를 가르쳤다. 그는 라즈니시와 마찬가지로 성적 에너지의 종교적 중요성을 강조한 탄트리카(tantrika·탄트라 수행자)였다. ‘구루를 선택할 때에는 구루의 인품과 행동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자들의 권고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 역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제자들과 그를 만난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남의 영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고,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직접 체험했을 소지도 매우 컸다. 하지만 자신의 성적 에너지 탓에 그는 커다란 스캔들을 야기한다.

    묵타난다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성적 결합이 아닌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줄곧 가르쳤다. 영적 에너지를 성적 만족이 아닌 깨달음을 얻는 데 쏟으라는 주장이었다. 성관계는 당연히 금지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런 그가 많은 여성 신도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얘기가 1970년대 말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그에게 실망하고 교단을 떠난 측근들이 비밀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스탄 트라우트(Stan Trout)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묵타난다가 매일 저녁 어린 여성신도들을 침대로 유혹했다고 폭로했다.

    이 폭로를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윌리엄 로다모르(William Rodarmor)는 취재와 인터뷰를 거쳐 ‘스와미 묵타난다의 비밀스러운 삶’이라는 기사를 묵타난다의 사후에 발표한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충격적 사실들이 기사를 통해 자세하게 밝혀진 것이다.

    기사의 초점은 묵타난다의 비밀스러운 성생활이다. 1981년 73세이던 묵타난다가 탄트라 요가에 입문시킨다는 명목으로 20대 초반의 여성을 유혹해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야기에서부터 1978년 인도의 가네스푸리(Ganeshpuri)의 아시람에서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 미국 여성의 체험까지, 엄격한 금욕 수행자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성적 에피소드가 소개됐다. 익명의 보고자에 따르면 묵타난다는 어느 날 저녁 젊은 여성을 그의 방으로 따로 불렀다. 옷을 벗으라고 한 후 그를 산부인과 진료대와 흡사한 침대에 눕히고, 탄트라 수행이라고 설명하면서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보고자는 발기불능이었는데도 억지로 관계를 시도했다는 등의, 실제 경험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세부적인 내용도 언급했다. 묵타난다와 그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갔고, 묵타난다는 관계를 마친 후 돈과 보석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교단을 떠난 후 교단 관계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은 마이클 딩가(Michael Dinga)는 진료대 모양의 침대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구루에게 바쳤다고 후일 인정하기도 했다.

    기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딩가가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묵타난다의 실제 삶은 그가 신도들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금욕 수행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었다. 묵타난다는 주변의 모든 여성을 성적 유혹이나 추행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런 행동은 그가 미국에 오기 훨씬 전인 인도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도 가네스푸리의 아시람에는 그가 묵던 방에서 여성들의 기숙사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부모가 교단에 관리를 위탁한 열세 살 소녀를 그가 처녀성을 검사한다는 핑계로 성추행했다는 폭로마저 이어졌다. 게다가 폭로 내용은 성적 추문에 그치지 않았다. 공동체 내부에서 질서 유지라는 이름의 공공연한 폭행이 있었고, 이 일을 전담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또 불법적인 총기 소유에서부터 ‘봉사’라는 이름의 강제 노역까지 묵타난다의 공동체는 라즈니시 공동체와 놀랍게도 흡사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묵타난다는 이런 폭로가 예수를 비롯한 많은 성인(聖人)이 겪게 마련인 근거 없는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해명은 떠난 신도들을 되돌아오게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묵타난다의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명상 프로그램 참여 비용으로 한 주 동안 25만 달러를 벌어들인 적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탈세 목적으로 수표나 신용카드는 일절 받지 않았다. 내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묵타난다 역시 스위스 은행에 1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입금해두었는데, 이 역시 라즈니시의 경우와 유사하다. 묵타난다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지만, 폭로 기사가 나오기 전인 1982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기사가 나간 후 신도들의 탈퇴가 줄을 이었고, 이 스캔들을 계기로 깨달은 동양 구루들이 왜 이렇게 흡사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스캔들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실들

    동양 구루들이 일으킨 스캔들의 원인을 묻기 전에 스캔들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두 사람은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을 동양 구루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과 음모, 신도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 의도된 연출,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면 으레 겪게 마련인 종교적 수난 등으로 해명했다.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지만, 라즈니시의 비서 쉴라가 사법 당국의 수사를 거쳐 공무원 폭행, 방화를 비롯한 폭력, 살인 미수의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았고, 라즈니시 역시 쉴라의 공소 내용을 인정하고 미국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라즈니시의 입국과 체류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추방을 미국의 음모라고 폄하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묵타난다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교단을 떠난 사람들의 일관성 있는 증언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주장하듯이 모든 폭로를 하늘이 종교적 성인인 그에게 내리는 수난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요컨대 두 사람을 둘러싸고 난무하는 얘기들이 모두 다 진실인지는 명백하지 않지만, 이런저런 정황을 볼 때 많은 부분이 사실일 공산이 크다.

    둘째, 스캔들의 주인공이 모두 인도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면의 한계로 인해 인도 구루들을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스캔들의 원인을 인도 종교 내지 인도인의 특성에서 찾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티베트 불교의 깨달은 스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초감 트룽파 린포체(Chogam Trungpa Rinpoche·1939~1987)와 그의 교단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서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룽파는 서양에 티베트 불교의 금강승(金剛乘·vajrayana) 전통을 전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정식 인가된 최초의 불교 학교 ‘나로파(Naropa) 대학’을 미국에 세운 인물이다. 그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에서 공부했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연구했으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트룽파는 환속하기 전부터 술과 담배의 남용, 그리고 학생들과의 성관계로 인해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환속한 후인 1970년 미국에 건너온 그는 ‘미친 지혜(crazy wisdom)’로 일컬어지는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억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라 할 만한 지도 방식을 택해 자주 논란거리가 됐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여전히 코카인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무절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는 1987년 알코올의존증에서 기인한 병으로 사망했다.

    특히 그는 1975년 자신의 교단에서 열린 핼러윈 파티에 참석한 머윈(W. S. Merwin)이라는 시인과 그의 여자 친구를 강제로 옷을 벗겨 교단의 ‘나체 파티’에 참석하게 만든 사건으로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교단이 얽힌 더 심각한 스캔들은 트룽파가 후계자로 지목한 오셀 텐진(Osel Tendzin·1943~1990)이 일으킨 것이었다. 오셀 텐진은 최초의 서양 출신 티베트 불교 계승자로도 유명했지만,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여러 남녀 신도와 성관계를 맺었고, 그 가운데 한 명을 에이즈로 죽게 만들었다. 이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인도 구루들만이 스캔들을 야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셋째, 텐진의 사례처럼 당시 미국에서 일어난 종교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모두 동양 구루였던 것은 아니다. 악명 높던 짐 존스(Jim Jones·1931~1978)의 인민사원(Peoples Temple) 사건을 보자. 1978년 존스를 포함한 913명이 그의 이름을 딴 존스타운(Jonestown)에서 집단 자살했고, 인민사원 역시 동양 그루들의 그것처럼 성추문, 금품 갈취, 폭력, 노동 착취 등의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인민사원이 기독교 종파라는 점에서 당시의 종교적 스캔들이 모두 동양 종교나 동양 구루에 의해서 빚어졌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종교 스캔들은 오히려 권위주의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헌신적인 신도 사이에서 생기는 일반적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양 구루들이 야기한 스캔들에 소위 ‘문화적 특수성’은 없었을까? 다시 말해 동양 구루가 서양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스캔들이라는 점에서 문명의 교류와 충돌이라는 프리즘이 이 사건들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지는 않을까?

    ‘깨달은 자’에 대한 수요와 공급

    동양 구루들이 미국에서 일으킨 스캔들은 문명의 상호 교류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 점에서 어느 한쪽에 모든 책임을 지우기는 힘들다. 오히려 구루들의 인간적인 결함, 무비판적이고 헌신적인 신도, 문화의 이질성, 동양 종교와 구루에 대한 과도한 이상화, 서양 종교에 대한 뿌리 깊은 실망과 같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마치 요철(凹凸)처럼 두 문명이 맞물리는 과정에서 스캔들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닐까. 문명의 교류 혹은 상호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스캔들의 원인을 조금 더 자세하게 규명해보자.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던 구루 모두가 ‘탄트라’적 가르침을 전했기에 큰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인간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의 충족을 종교적으로 승인해 준 탓에 미국에서 크게 성공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성적 욕망을 위시해 인간의 욕구 전체를 부정하는 기독교 교리에 깊이 실망하고 있었다. 프로이트(Freud)가 날카롭게 지적했듯 서양은 성(性)을 위험천만한 것으로 간주했고, 그 억압은 주로 성(聖)스러움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덧붙여 미국에서 위세를 떨치던 근본주의적 기독교는 특히 인간 이성에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공립학교가 다윈의 진화론을 교육할 수 있는지를 두고 제기된 1925년의 ‘원숭이 재판(monkey trial)’은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인간 이성을 얼마나 불신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진화론은 성경의 창조론과 상충하기에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될 수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인해 세속 영역이 점점 더 커지는 미국에서 인간 욕망과 인간 이성의 종교적 승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고, 바로 이때 탄트라를 강조하는 구루가 무리 지어 등장했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불교, 힌두이즘 같은 동양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닌 오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체득을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믿음이 아닌 개인의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목표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수행을 통해 체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추론을 전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다. 동양 종교의 이러한 합리적 성격이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동양 종교의 탄트라는 성(性)과 성(聖)의 길항관계를 상정하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파격이기도 했다. 성(性)을 불편해하는 기독교에 비해 힌두이즘과 불교의 탄트라 전통은 성적 에너지의 종교적 승화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인간 욕망 자체를 종교적으로 승인해주었던 것이다.

    탄트라야말로 그가 주장한 ‘종교가 없는 종교’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강조한 라즈니시나, 쿤달리니 에너지가 곧 성적 에너지이자 종교적 에너지라고 주장한 묵타난다가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했다. 또 남녀가 성교하는 합환불(合歡佛)을 깨달음의 상징으로 삼는 티베트 불교의 초감 트룽파가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것 역시 자연스러웠다. 탄트리카인 그들은 종교에서 비롯된 성의 억압을 ‘종교적’으로 해방한 것이다. 라즈니시, 묵타난다, 트룽파는 무조건적 믿음과 일방적 은총이 아닌 수행을 통한 개인의 깨달음 체험을 강조했고, 인간 성(性)의 종교적 승화 가능성을 설파했다. 나아가 종교적 구원이 현세적 기쁨의 부정에 있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그 점에서 동양의 탄트라는 해방의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청교도적 금욕주의에 힘겨워하던 미국인들은 동양 탄트라에서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깨달은 동양 구루가 왜 성(性)스캔들 주인공이 됐을까?

    2007년 10월 17일 미국 워싱턴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난 배우 리차드 기어(오른쪽).

    다른 한편으로 동양 구루들은 그들의 가르침이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끄는 것에 크게 고무됐다. 한때 동양인의 운명을 쥐락펴락했던 서양인들이 그들의 발밑에 엎드려 그들을 살아 있는 붓다로 떠받드는 것은 좀처럼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서양인들의 숭배를 받게 된 그들의 자아(ego)는 그야말로 무한히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던 그들에겐 미국이 그야말로 새로운 약속의 땅이었다. 마치 요철이 서로 맞물리듯 근본주의적 기독교에 환멸을 느낀 적지 않은 미국인이 보내주는 헌신과 숭배에 동양 구루들은 거대한 성취감과 자존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구루들은 이내 그들의 성공 비결을 깨달았다. 그들은 성욕을 위시한 내면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충족시킬 것과 바로 그것이 진정한 영성의 구현이라고 더욱 힘주어 설파했다. 특히 라즈니시는 서양인이 봉착한 대부분의 문제가 바로 성적 만족이 좌절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하고 자유로운 섹스가 이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가르쳤다. 덧붙여 물질적 부유함을 추구하고 즐기는 것 역시 영적인 목적과 부합한다는 주장을 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묵타난다 역시 물질적 부의 향유가 영성과 상충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전하는 대열에 곧장 합류했고, 부유한 서양인을 신도로 영입하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티베트에서 온 트룽파는 자유분방한 미국 젊은이들처럼 술, 담배, 섹스, 마약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양 구루와 신도들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과도한 이상화는 구루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고, 결국 구루의 인간적 결함이 여과 없이 증폭되도록 만들었다. 이제 구루는 깨달은 자에서 절대적 힘을 지닌 신으로 거듭났고, 사랑과 자비가 아닌 지배와 전면적인 복종이 구루와 신도들의 관계를 규정했다. 라즈니시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개개인의 에고를 철저하게 깨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구루에 대한 ‘굴복(surrender)’이 으뜸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묵타난다 역시 ‘구루보다 더 높은 신은 없으며, 구루의 은총보다 더 높은 성취는 없고, 구루에 대한 명상보다 더 높은 상태는 없다’는 말로 자신을 드높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트룽파 역시 인간의 자아가 깨달음에 가장 큰 장애물이므로, 스승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통해 개인의 아집을 깰 것을 강조했다. 신도의 무조건적 복종이 성적인 추행, 폭행, 노동력과 금전의 착취, 남용으로 귀결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고한 깨달음을 얻은 자와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각종 스캔들이었다.

    경험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인간에게 경험은 중요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지혜를 체득한다.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직접 경험한 사람과 지켜본 이에게 지혜를 주는 계기였다. 이제 미국인들은 동양 구루를 예전과 같이 과도하게 이상화하지 않는다. 또한 동양 종교를 이전처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동양 구루와 동양 종교가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노라면 실상을 제대로 보지 않는 일이 참으로 어려워진다.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 불타는 연애 기간이 끝나고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면 상대의 장점만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첫 만남에서나 가능한 과도한 이상화는 관계가 거듭될수록 힘들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기독교는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교다. 그리고 동양 구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사람의 수는 당시에도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동양 종교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동양 구루와 동양 종교가 당시 미국 지성인, 젊은이가 가지고 있던 종교의 개념을 뿌리째 뒤흔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동양 종교를 통해 비로소 개인의 체험이 종교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또 인간의 성(sexuality)이 종교적 성스러움과 근친 관계일 수 있다는, 그들로서는 참으로 ‘불경스러운’ 사실도 명백하게 알아차렸다. 이런 깨달음의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미국에 진출한 동양 구루와 동양 종교를 마주하게 된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즈음의 미국과 유럽은 한발 더 나아가 한때 그들이 동양 종교에만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들을 그들의 종교 전통에서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비주의, 서양 비의주의(esotericism), 오컬트(occult) 전통 등 그들의 종교 문화에서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렀던 것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인들은 카를 융(Carl G. Jung)의 충고를 따라 동양 종교의 무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그들에게 적합한 종교성을 재발견하려 시도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시도는 동양과 서양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어느 한편을 우월한 위치에 놓아두려는 과거의 이분법을 넘어선 것임에 분명하다. 즉 그들 속에 있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기억하고 발견해 ‘지금’ ‘이곳’에서 그것들을 구현해낸다는 의미다. 그 점에서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여러모로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그들에게 지혜를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서로 다른 문명이 교류하는 과정 역시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이기에 갈등과 긴장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특히 문명의 교류는 서로에게 거대한 크기의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렇지만 만남의 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나와 타인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보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상처의 경험은 모두에게 새로운 자기 이해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 점에서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쓰라리지만 소중한 경험이다. 즉 어떤 문명이나 종교든 만남의 과정에서 자신 혹은 타자를 절대적으로 이상화하거나 폄하한다면, 그 만남은 서로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요컨대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특히나 여러 종교가 역동적으로 얽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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