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고고한 원추(鵷鶵)의 기상은 어디로 갔을까?”

  •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교수 kdyi0208@naver.com

    입력2012-03-20 17: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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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한 원추(鵷鶵)의 기상은 어디로 갔을까?”
    세상이 시끄럽다. 국제적으로도 시끄럽고 국내적으로도 시끄럽다. 미국과 중국은 지구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이스라엘과 중동은 끝없는 전쟁의 구렁텅이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일본은 끈질기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중국도 우리의 해양과학기지가 있는 이어도에 대해 시비를 걸어온다. 굶어죽기 싫어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를, 돌려보내면 죽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돌려보내는,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국내에서의 시끄러움 또한 이보다 못하지 않다. 국민은 이제 기존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났다. 정치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가 하늘을 찌른다. 정치인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기보다 국민에게 표를 얻을 방법, 오직 그것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孟子 “세상이 시끄러운 건 사람이 이익을 좋아하기 때문”

    국민도 매우 예민해져 있다.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참지 못하고 집단행동을 한다.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부모도 많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도 많다. 재산싸움 때문에 원수처럼 되어버린 형제자매도 한둘이 아니고, 가족에게 버림받아 노숙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는 사람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일은 어느 한 나라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공통적인 문제들이다. 참으로 시끄러운 세상이 되었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풍선효과’라는 말이 있다. 풍선의 어느 한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부풀어 오르듯, 어느 한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곳에서 다른 문제가 터져 나온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지만,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을 보면 풍선효과라는 말이 실감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지구촌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온 지구의 사람들이 한마을 사람처럼 연결되어 있고,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상에 나타나는 문제들은 공통점이 있고, 그 원인 또한 같은 것이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공통의 원인을 해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옛 성현 맹자는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근본 원인이 사람들의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에 있다고 짚었다. 맹자의 말을 직접 살펴보자.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을 때 혜왕이 말한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와주셨으니 또한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무슨 계책이 있으신지요?”

    이 말을 들은 맹자가 답했다.

    “왕은 하필이면 이익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까? 반드시 양심과 의리를 챙기셔야 할 것입니다. 왕께서 ‘무엇으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까’하고 말씀하시면, 대부들은 ‘무엇으로 우리 집을 이롭게 할까’하고 말할 것이며, 선비들이나 서인들은 ‘무엇으로 나를 이롭게 할까’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다툼을 벌이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전차 일만(一萬) 대를 가진 큰 나라의 임금을 시해하는 자는 전차 일천(一千) 대를 가진 대부들이고, 전차 일천 대를 가진 작은 나라의 임금을 시해하는 자는 전차 일백(一百) 대를 가진 대부들일 것입니다. 일만 대 중에 일천 대를 가진 것이나, 일천 대 중에서 일백 대를 가진 것은 10분의 1을 가진 것이므로 적지 않지만, 사람들이 진정 이익만을 앞세우고 의리를 저버리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은 부모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은 임금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양심과 의리를 챙기셔야지, 하필이면 이익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까?”(‘맹자’ 양혜왕 장구 상)

    위 대화는 봉건시대 때의 대화여서 오늘날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세상이 혼란해지는 원인을 사람의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라 짚어낸 맹자의 혜안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맹자가 살던 시대는 전국시대라고 하는 혼란기였다. 당시 혼란은 임금과 신하, 제후와 대부들 간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로 언급한 것이지만, 그러나 맹자가 지적한 혼란의 원인은 오늘날에 와서 더욱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향해 질주한다. 양심(良心)을 지키고 사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 세상이 시끄럽게 된 근본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익은 남과 공유하기 어렵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남에게 손해가 되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나에게 손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경쟁해야 하고 싸워야 한다.

    행복은 남의 불행을 보는 거고, 불행은 남의 행복을 보는 거라고 말하는 시대다. 온 세상이 시끄럽게 된 근본원인은 이러한 사람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다.

    현대인 삶 지배하는 서구 가치관

    그렇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관은 서구 근세에 대두된 합리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해 이루어진 것이다. 르네상스운동을 통해 신(神)으로부터 해방된 서구인들이 과학기술을 발달시키고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서구에 침략당한 다른 지역 사람들은 서구인의 문화와 서구인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기에 바빴다. 그리하여 서구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현대인 공통의 것이 되었다.

    그러면 ‘신으로부터의 해방’에서 구축된 서구인의 가치관과 그 특징은 무엇일까. 서구의 근세는 신을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르네상스는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과거 중세 때 교회의 횡포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신을 부정하는 걸로 귀결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신은 원래 하늘이었다. 인내천(人乃天)이다. ‘하늘에서 천벌을 받을 것’에서의 그 하늘이다. 하늘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하늘)을 부정하고 나면 뿌리 없는 나무처럼 허전하고 외로워진다. 하늘은 지상의 대나무들을 지하에서 하나로 연결시키는 하나의 뿌리와 같다. 그러므로 원래의 신을 인정하고 그 신의 품에서 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다. ‘우리가 남이가’하면 좋아하고, ‘너와는 이제 남남이다’고 하면 서운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하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대나무의 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지상에 뻗어나 있는 줄기와 가지와 잎뿐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육체적 존재일 뿐이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성립되었다.

    개인주의가 성립되고 나면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세포는 개인이다. 가정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도 개인이고,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도 개인이다. 부모와 자녀도 개인과 개인의 관계이고, 부부도 개인과 개인의 관계다. 인간을 독립적인 개체로 이해하면 인간에게는 ‘우리는 같은 뿌리’라는 한마음이 들어갈 곳이 없어진다.

    개인주의는 몸이라는 물질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개인주의는 물질을 중시하는 물질주의로, 물질주의는 또 자본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가 현대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바탕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끝없는 경쟁을 벌인다. 경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발전을 이끄는 것은 없다. 현대의 과학이 이처럼 발전하고, 산업이 이처럼 발달한 근본원인은 경쟁 덕분이다. 이러한 발전 덕분에 현대인은 과거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살게 되었다.

    서로 연결된 대나무 뿌리

    그렇다면 현대인은 행복한가. 현대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몸의 삶’에 국한된다. 마음의 문제로 들어가보면 현대인의 삶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들은 지금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라. 현대인은 몹시 불안하다. 삶이 경쟁이고 투쟁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쟁자를 죽여 없애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죽인 것이나, 일본인들이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을 죽인 것, 그리고 영국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죽인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경쟁자를 다 죽이고 혼자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낸 방법이 바로 규칙과 법을 만들고, 그것을 다 함께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규칙과 법을 지킬 때 비로소 현대인은 안심한다. 현대인에게 규칙과 법은 삶을 보장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현대인의 삶의 특징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욕심을 채우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의 바탕은 경쟁이므로 현대인이 생각하는 마음은 경쟁심이고 욕심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는 욕심을 제거한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현대인의 삶은 욕심을 채우는 삶이고, 욕심을 채우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돈과 명예를 향해 달린다. 동시에 인간의 온갖 욕심을 채우는 향락문화는 꽃을 피운다. 현대인은 진귀한 음식을 먹고, 명품 옷을 입으며, 고급 주택에서 살며, 성적(性的) 향락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을 바람직한 삶으로 생각한다.

    욕심은 채울수록 커진다. 그러므로 욕심을 채우는 사람에게는 만족이란 없다. 아무리 성공을 하더라도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허덕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온 세상이 시끄럽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못하는 짓이 없다.

    유엔에서 ‘불가’하다는 결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선택이나, 국제적인 규약이 있는 데도 그것을 무시한 채 탈북자들을 북한에 돌려보내는 중국의 처리도 이러한 맥락이다.

    허술한 초가 짓고 백성과 함께 한 세종대왕

    오늘날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다. 욕심을 채우는 삶에는 결코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우리의 옛 선비들은 그것을 알았다. 그들은 하늘을 받들었고 하늘의 뜻을 따랐다. 그들은 욕심을 버리고 양심을 따랐다. 양심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마음이고, 하늘의 마음이다. 우리가 늘 말하는 한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개체적 삶을 초월한다. 한마음은 바다처럼 넓고 우주처럼 크다. 한마음을 회복하면 다른 사람이 모두 형제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을 산다. 진정한 행복은 그런 삶에서 찾아진다.

    공자는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 잘 정도로 가난해도 행복이 그 가운데 있다”고 했다.(‘논어’술이편) 제자인 안연을 평가해, “도시락 밥 하나 먹고 마실 것 한 모금 마시면서 누추한 곳에 살아도 여전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고도 했다.(‘논어’ 옹야편) 우리의 옛 선비들은 그렇게 살았다.

    조선 초 황희 정승은 비가 새는 집에서 삿갓을 쓰고 앉아 있으면서, 삿갓이 없는 백성들을 걱정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생하자, 세종대왕은 ‘궁궐에서 편하게 살 수 없다’하며 광화문 거리에 허술한 초가를 짓고 거기에 기거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밥을 먹을 때 길 가던 사람이 있으면 함께 먹었고, 잘 곳이 없는 나그네가 있으면 재워주었다.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았고 풍류가 있었다.

    그러던 우리가 각박해졌다. 물질은 옛날보다 풍족해졌음에도 마음은 옛사람보다 빡빡하다. 사람들은 점점 더 욕심에 눈이 멀어져 간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도박이라도 한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카지노가 있는 먼 곳까지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부동산 투기나 부동산 경매를 해서 큰돈을 번 사람도 있고, 주식투자를 해서 큰돈을 번 사람도 있다. 그런 방법을 가르쳐주는 선생들이 인기가 있고 그런 책들이 잘 팔리고 있다.

    ‘장자’라는 책 추수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혜자가 양나라의 재상이었을 때 장자가 그를 만나러 갔다. 그때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말했다.

    “장자가 오면 당신을 대신해서 재상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혜자는 두려워졌다. 그래서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온 나라 안을 뒤져서 장자를 찾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장자는 직접 찾아가서 말했다.

    “남쪽 지방에 원추(·#54245;?)라는 이름을 가진 새가 있었다네. 그대는 그 새를 아는가? 그 원추는 남해에서 출발해 북해로 날아가지만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고, 멀구슬나무의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에서 솟아나는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지. 그런데 그때 올빼미가 썩은 쥐를 물고 있다가 원추가 지나가니까 우러러보며 (혹 빼앗기지 않을까 염려해)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네. 지금 그대는 그대의 양나라 때문에 나에게 ‘꽥’ 하고 소리를 지르는군.”

    오늘날 우리들에게 원추의 기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주어도 먹지 않을 옛 선비들의 기상과 여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하다. 부정한 돈은 주어도 받지 않는 여유, 정당한 노력으로 얻어지는 돈이 아니면 가질 수 있어도 가지지 않는 고상함, 자기의 인품과 능력에 걸맞지 않은 자리는 주어도 받지 않는 양심,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책임감, 그런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절실하다.

    “고고한 원추(鵷鶵)의 기상은 어디로 갔을까?”
    이기동

    1952년 경북 청도 출생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학·석사

    일본 쓰꾸바대 철학박사

    前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

    現 동인문화원장

    2007년 한국인 최초 사서삼경 강설 완역

    저서: ‘곰이 성공하는 나라’ 외 다수


    요즈음 ‘따뜻한 자본주의’란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심각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따뜻한’이란 말은 자본주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 두루 필요한 말이다. ‘따뜻한 정치’ ‘따뜻한 교육’ ‘따뜻한 경영’이 되살아나고, ‘따뜻한 가정’ ‘따뜻한 학교’ ‘따뜻한 사회’ ‘따뜻한 나라’가 되살아나야 한다. 그래야 시끄러운 세상이 따뜻한 세상으로 바뀔 것이다. 욕심 채우기에 급급한 우리는 이제 곰곰이 한번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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