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br>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문학동네, 270쪽, 8000원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사일 동안 그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처음 사십 일 동안은 한 소년이 그와 함께 나갔다. 하지만 사십 일이 지나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이젠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게 ‘살라오’, 즉 운수가 완전히 바닥난 지경이 되었다고 소년에게 말했다. … 매일같이 빈 배로 돌아오는 노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소년의 마음이 아팠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문학동네, ‘노인과 바다’ 중에서
해안선이 단순하고, 얕아보였다. 포구에서 배가 나가면 얼마나 멀리까지 갈까. 수평선을 눈으로 찾았다. 한 노인이 어둠을 가르며 노를 저어 빠르게 나아가는 환영(幻影)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수평선 위아래로 엷게 구름이 끼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려보았다. 포구 끝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한 노인이, 아니 그 옆에 한 소년이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잘못 보았나, 눈을 한번 깜박여보았다. 여전히 두 사람은 포개지듯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노인 쪽으로, 동시에 소년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행의 묘미는 목적했던 곳에 도달하는 과정에 뜻밖에 만나는 장면이나 사람, 사태, 즉 돌발성이다. 그들에게 걸어가는 사이, 나는 마치 태평양을 횡단해 북미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중남미 멕시코로, 그리고 그곳에서 또다시 유카탄 반도를 지나 카리브 해의 섬나라 쿠바까지 온 목적과 행로가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진 채, 마치 그들을 만나러 온 것만같이 신기할 정도로 반가운, 그래서 지레 느꺼운 기분에 휩싸였다. 거기, 그들, 노인과 소년이 있다니!
노인은 비쩍 마르고 야위었으며 목덜미에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다. 두 뺨에는 열대 바다가 반사하는 햇빛으로 생긴 양성 피부암 때문에 갈색 반점이 번져 있었다. …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 소년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노인이었다. 소년은 노인을 사랑했다. -앞의 책
노인이, 그리고 소년이 함께 있는 바닷가 포구의 정경. 포구에는 그들과 나, 그리고 하늘과 바다뿐이었다. 나는 행운의 여행자였고, 나는 그 행운을 사랑했다. 읽고, 또 읽어 이미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식구나 정인(情人) 되어버린 소설(허구) 속 주인공들처럼 내 앞에 그들이 있었다. 생애 첫 만남이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 작정이었다. 뭐라 할 것인가. 진정, 그들은 누구인가. 소년은 노인의 손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가는 동안 나는 노인이 바다를 사랑하는 만큼 소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소년 또한 그만큼 노인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만약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없었다면, 그리하여 태평양을 건너, 멀기도 하지만 다양하기도 한 경로를 밟아 그곳까지 오는 동안 그의 소설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관계인지를 떠나, 그들이 자신만큼, 혹, 그 이상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라 마르(la mar)’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다를 다정하게 부를 때 쓰는 스페인어였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따금 바다를 나쁘게 말하긴 하지만 그런 때도 항상 바다를 여자처럼 여기며 말했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 바다를 남성인 ‘엘 마르(el mar)’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다를 경쟁자나 투쟁 장소, 심지어 적처럼 여기며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고, 큰 호의를 베풀어주거나 거절하는 어떤 존재로 생각했다. 만약 바다가 사납고 악한 행동을 한다면 그건 바다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앞의 책
노인과 소년과 청새치
노인의 이름은 라파엘이었다. 노인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소년은 소설이나 연극의 시작이나 끝에 등장하는 존재였다. 나는 소년이 어디로 갔는지 노인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노인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생각들로 흘러온 그의 인생이 궁금했다. 마치 헤밍웨이가 이 마을에 와서 카를로스라는 늙은 어부를 만났을 때처럼. 그 어부로 인하여 불현듯 ‘멋진 이야기’(소설) 한 편을 쓰고 싶었던 것처럼. 나는 옷은 남루하고 얼굴은 ‘열대 바다가 반사한’ 강한 햇빛으로 그을고 심하게 주름졌지만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의 파란’ 노인에게 매혹됐다. 라파엘이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물고기들이 있다고 팔을 쭉 뻗어 보였다. 그는 그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그러니까 세상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포구를 빠져나와 노인을 돌아다보니, 그는 여전히 바다의 한 지점을 응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이라면, 그것도 노인의 기다림이라면 헤밍웨이만큼 통달한 작가도 없었다. 기다림이란 다혈질의 소유자로 낚시광이자 사냥광인 헤밍웨이가 특히 잘 다룰 수 있는 세계였다. 전부를 거는 모험과 도전이라는 극적인 경험을 누구보다 잘 체득한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기다림이라는 정적인 속성을 전복시킬 역동성을 품고 있는 적임자였다.
‘노인과 바다’의 세계는 단조롭게 시작해서 극적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단조롭게 잠잠해지는 양상이 아니던가. 이 작품은 1939년 헤밍웨이가 코히마르에 정착한 지 13년 되던 1952년에 발표한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작가는 한 번 스치듯 일별한 어떤 강렬한 이미지나 기운을 상상력으로 창조해내기도 하지만, 대개 그 작가의 이름을 건 문제작은 오랜 시간, 그곳의 대기와 토양,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 안으로 밖으로 옆으로 위로 성찰하며 씨실과 날실처럼 한 단어, 한 문장 뽑아 ‘한 편의 작품으로 짜내는 것(織造, texture)’이다. 13년째 이 마을에 살아온 헤밍웨이가 처음 이 소설을 착상하면서 벅차오르는 흥분감을 그대로 실어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아무리 읽어도 매번 감동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야 … 카를로스 영감의 배를 타고 이 얘기가 그럴듯한지 바다로 나가보려고 해. 다른 배는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긴 싸움을 하는 중에 그가 한 모든 행동과 생각들이 그럴듯한지 말이야. 제대로만 해내면 정말 멋진 이야기가 될 거야, 작품이 되겠지. - 1939년 헤밍웨이가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앞의 책
소설은 흔히 지어낸 이야기(허구, fiction)라고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서 얼마만큼 지어내느냐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한 편의 훌륭한 소설 작품인 동시에 창작론 책이고, 나아가 인류학 책이다. 위에서 보듯, 작가는 소설의 줄거리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우는’ 이야기. 소설은 바로 이 한 문장의 한 단어, 한 단어에 뭉쳐 있거나 얽혀 있는 사실과 진실들을 풀어나가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풀어나가되, ‘그럴듯한지’ 앞뒤 사정을 살펴가며 이끌어나간다. 만약 제대로만 엮어진다면, 그래서 누가 봐도 ‘그럴듯하다’면, 소설은 ‘작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헤밍웨이가 영감을 받은 카를로스 영감 이야기로만 소설을 끝냈다면 작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듯함에 견줄 만한, 나아가 그럴듯함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창조해야 하는데, 곧 미학과 철학이 그것이다. 소설 속 소년과 청새치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뚜렷해진다. 이것은 철저히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창조해낸 헛것으로 ‘작품(예술)으로서의 소설’의 본질에 해당한다. 한 나약한 인간이 거대한 자연과 맞서는 내용(대결 구도)을 중심에 놓고 그 모든 것을 열고 닫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장치. 둘이되 하나, 정확하게는 셋이되 하나의 창조가 그것이다.
10대 시절부터 시대를 달리해서 만나온 ‘노인과 바다’, 2012년 헤밍웨이 사후 50년째 되는 해 첫 번째로 출간된 새 번역본을 품고 소설의 무대이자 작가의 집필지인 쿠바 코히마르를 돌아본 후 도달한 나의 생각은, 산티아고(노인)와 소년과 청새치는 모두 한 존재라는 것. 바타유가 헤겔의 시선으로 거창하게 풀어낸 ‘주인(노인)과 노예(청새치)의 변증법’이란 것도, 결국 내 안에 도사린 ‘또 다른 적(敵)이자 친구인 자아(세상)’와의 싸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혁명가이자 시인이었던 호세마르티의 농촌 시에 곡을 붙인 쿠바의 민중가요 ‘관타나메라’를 흥얼거리며 라 테라사로 향했다. 식당 건너편 마을 화방 벽에는 맘씨 좋게 수염을 기른 헤밍웨이와 그가 잡은, 그의 키를 넘는 청새치가 친구처럼 함께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