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침내 마추픽추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생각해보니 30여 년 전 칠레에 첫발을 디디며 중남미 근무를 시작할 때부터 잉카문명의 비밀을 간직한 그곳을 꼭 한 번 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이곳 볼리비아 라파스에 근무하면서 드디어 마추픽추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페루의 리마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것보다 이곳 볼리비아의 라파스에서 가는 것이 더욱 가깝고 경비도 덜 든다.
잉카의 비밀을 안고 있는 마추픽추 전경(왼쪽). 티티카카 호에서 자라는 갈대를 엮어 만든 섬 ‘이슬라 플로탄테’.
대합실 텔레비전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대통령궁 앞 무리요 광장에서 거행되는 종교 의식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있었다. 모랄레스 대통령과 주요 각료들이 참석한 행사였다. 가만히 보니 라파스 대주교뿐만 아니라 인디언 고유 의상을 입은 주술사도 함께 나와 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장작불을 놓았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가톨릭과 인디언의 전통 종교가 혼합된 ‘신크레티즘’이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처음에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지금은 가톨릭에 반대한다. 그는 종교가 인민을 마취시켜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말한다.
퓨마를 숭상한 잉카인
떠 있는 섬 ‘이슬라 토토라’에서 우리 일행을 맞아준 인디언 처녀들.
우리는 부두에서 배를 타고 ‘로스 안데스’라고 불리는 ‘떠 있는 섬(isla flotante)’으로 출발했다. 부두를 떠나 호수 안으로 한참 들어가니 큰 섬 한가운데에 하얀색으로 외벽을 칠한 제법 큰 관광호텔이 보인다. 섬 입구에 도착하니 입장권을 수거하는 관리인이 우리 배가 방문할 섬을 할당해준다. 이곳에 있는 40여 개의 섬에서 관광 수입에 의지해 살아가는 원주민을 위해 입구에서 방문할 섬을 공평하게 배분해준다고 했다. 우리에게 할당된 섬은 이슬라 토토라였다.
섬에 도착하자 원색의 전통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인디언 처녀가 우리를 맞아준다. 캄미사라키!(kammisaraq·안녕이라는 뜻의 케추아어)를 연발하면서. 이에 대한 답은 왈리키(waliqi·감사합니다)다. 티티카카 호수의 명칭에서 ‘티티(Titi)’가 퓨마라는 의미고, ‘카카(Kaka)는’ 바윗돌 혹은 회색이란 뜻이란다. 그러므로 티티카카는 원래 ‘회색 퓨마’라는 의미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이름이 나오게 됐는지 가이드에게서 설명을 들었는데 사연이 흥미롭다. 티티카카 호를 제일 처음 항공사진으로 찍은 것은 제미니 8호 우주선이라고 한다. 이 사진에 나타나 있는 티티카카 호를 거꾸로 보면 마치 퓨마가 토끼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 같은 모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미니 8호가 우주를 날기 이전인 잉카 시절부터 사람들이 이 호수를 티티카카라고 부른 것이다. 당시 이 호수 주변에 퓨마 무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전한다. 잉카인들은 퓨마를 힘의 상징으로 숭상한다. 그런 잉카인들이 야간에 산에서 물을 먹으러 호숫가로 내려오는 회색 퓨마를 목격했을 것이며, 이로 인해 이 호수를 회색 퓨마를 가리키는 티티카카라고 불렀으리라는 추측이다.
우리 일행은 원주민의 권유에 따라 토토라 갈대배를 타보기로 했다. 이 배는 갈대배 두 척을 나무박스로 연결한 것인데 두 사람이 노를 저어 나아가는 구조다. 뱃머리에는 퓨마의 형상을 달아놓았다. 배를 탈 때 인디언 여인들이 케추아어로 노래를 불러준다. 한 여인이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고 있어 한국어로도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며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다. 시간이 없어 노래를 일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우편물이 전달되는지 물으니 주소를 알려준다. 코레오 센트랄 푸노, 페루, 이슬라 토토라, 마르틴 차르카 코일라(Correo Central Puno, Peru, Isla Totora, Martin Charca Coila). 나중에 적당한 한국노래를 골라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떠날 시간이 되어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녀들과 작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쿠스코로 가고자 푸노 버스터미널로 되돌아왔다. 대합실은 인디오와 관광객으로 북적거렸다. 부스에서 여행객을 부르는 소리까지 뒤섞여 왁자지껄한 시장통 같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아레키파(Areguipa), 훌리아카(Juliaca), 나스카(Nasca) 등 페루의 관광지와 라파스(La Paz), 코파카바나(Copacabana), 데사과데로(Desaguadero) 등 볼리비아로 가는 버스도 있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둘러서서 맥주를 마시면서 농담을 건네며 흥겨워한다. 어떤 이들은 푸노 시장에서 산 알록달록한 인디언 바지를 보여주며 무슨 전리품이나 되는 듯 서로 자랑한다. 브라질에서 온 듯한 사람도 있고 아르헨티나에서 온 듯한 젊은이도 있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백년지기나 된 듯 친숙하다. 여행은 낯선 사람을 친숙한 관계로 만들어주는 신기한 매력이 있다. 분위기를 보니 이들도 우리와 함께 쿠스코로 가는 것 같다.
탐험가, 하이람 빙엄
저녁 8시 30분 마침내 우리 일행을 쿠스코까지 데려다줄 야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합실의 젊은이들도 같은 버스의 뒤쪽에 앉아 계속 시끌벅적 떠들어댄다. 오늘 밤 잠을 자기는 그른 것 같다. 떠나기 전 운전수가 승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디오카메라로 얼굴을 하나하나 찍는다. 안전상의 이유라고 한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청해보아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내일 방문할 마추픽추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정신은 더욱 또록또록 맑아만가는 것 같다. 버스는 시골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가면서 무서운 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다. 군데군데 조그만 마을을 지나기도 한다. 이윽고 제법 큰 신작로가 나온다. 쿠스코 시내로 진입하는 듯하다.
마침내 쿠스코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3시 15분경이었다.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것이다. 산길을 그렇게 속력을 내며 내려오더니만…. 가이드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아 있어 새벽의 추운 대합실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려야 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른 새벽부터 버스를 타러 온 인디언들이 차가운 새벽공기를 막으려고 제 나름대로 몸을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다. 멀리 타 지역에 가서 팔 물건으로 보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보따리를 하나 둘씩 가지고 있다. 그들의 지친 얼굴에는 삶의 고달픔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떤 인디언 처녀는 지난밤 내내 이곳에서 기다렸는지 아예 구석에 보따리를 베개 삼아 판초(중앙에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머리를 넣어 입는 덧옷)를 덮고 잠을 자고 있다. 바닥이 찰 텐데….
마침내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가 도착했다. 인디언 처녀는 어떻게 되었는지 뒤를 돌아보니 누웠던 자리가 말끔히 정리돼 있고, 그녀도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또 각자의 삶이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일행은 쿠스코를 뒤에 남겨두고 우루밤바(Urubamba)로 향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인 모나스테리오 레콜레타(Monasterio Recoleta)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아직 체크인 할 시간이 아니었지만 호텔 측의 배려로 임시 숙소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몸을 씻으니 피로가 한결 풀리는 듯하다. 잠시 휴식 후 7시에 조찬을 들기로 했다. 이 호텔은 옛날 수도원을 개조한 것이다. 웅장한 종탑이 과거 수도원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듯 서 있다. 아침 식사는 이때까지 먹어본 어떤 호텔의 조찬보다 깔끔하고 훌륭했다. 저 멀리 보이는 눈덮인 산자락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상쾌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전 7시, 일행은 마추픽추행 기차를 타려고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 역으로 향했다. 우루밤바 강을 따라 펼쳐진 계곡은 매우 비옥한 땅인데 사위가 평화스러웠다. 잉카시대부터 우루밤바 강은 ‘신성한 강’으로 불렸다. 1911년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람 빙엄(Hiram Bingham)은 이 신성한 잉카의 강을 따라 탐험을 계속하던 중 마침내 숨은 신비의 유적 마추픽추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오얀타이탐보는 평야가 끝나는 곳에서 가파르게 치고 올라간 언덕 위에 세워진 잉카의 성곽도시다. 탐보(tambo)는 잉카시대의 역찰을 가리키는 말인데,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와 칠레 북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잉카는 요소요소에 역찰을 두었다. 역찰은 거울과 봉화를 이용한 통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잉카시대의 성벽 사이로 오얀타이탐보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었다. 성벽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그 흔적을 니초(nicho)라고 부른다. 스페인 정복군이 이 성벽을 허물고 그 기초 위에 중세식 건물을 지은 게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수직으로 선 험준한 산세
오얀타이탐보 기차역에 도착하니 많은 관광객이 줄을 선 채 기차 탈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사이로 인디언 여인들이 각종 기념품을 팔고자 관광객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9시 정각 쿠스코-마추픽추를 잇는 페루레일(Perurail) 열차를 타고 마추픽추로 향했다. 기차는 우루밤바 강을 따라 난 협궤철로 위를 기분 좋게 나아간다. 철로 반대편으로는 농지가 보이기도 하고 우거진 산림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곳의 산들은 서 있는 모양이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험준하다. 어떤 산은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는지 한쪽이 무너져내린 채 속살을 아프게 내보이고 있다. 저 아래 흐르는 우루밤바 강에는 무너진 산의 편린인 양 큰 바위들이 유유히 흐르는 물살을 가르고 가로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계곡 사이를 굽이굽이 돌 때나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적을 울리던 기차는 1시간 20분 만에 마추픽추 입구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기차역 앞에 ‘인류문화유산 마추픽추, 해발 2040m’라고 쓴 표지판이 서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로 흐르는 계곡에 터 잡은 기차역 주변에는 공예품을 파는 전통 상점이 즐비하다. 마추픽추 관광사무소에 들러 입장료를 지불했다. 이곳에서부터는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로 올라간다. 버스요금은 약 7달러. 산은 빽빽한 숲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한 산자락을 돌아서니 마침내 고봉이 눈에 번쩍 들어오고 그 산 기슭에서 마추픽추가 몸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저 밑 산 아래로 신비의 강 우루밤바가 실같이 흐르고 계곡 사이로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르는 이 깊은 산속에 숨은 마추픽추! 산 아래서는 전혀 윤곽도 보이지 않는 비밀의 도시가 속살을 수줍은 듯 드러냈다. 빙엄이 이 전설의 도시를 발견했을 때의 심정을 우리가 과연 상상이나마 해볼 수 있을까. 마추픽추는 잉카인의 비밀 도시다. 쿠스코의 고문서에서 그 존재를 확인한 빙엄은 우루밤바 강의 한 끝에 전설의 도시 마추픽추가 있다는 기록에 따라 강을 타고 탐험했다. 그러나 울창한 숲으로 덮인 산봉우리만 보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이곳 지형에 밝은 인디언 부족이었다. 몇몇 현지 인디언의 안내로 밀림 속에 숨어 있는 마추픽추의 흔적을 확인한 빙엄은 페루 정부의 도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 밀림 속에 감춰져 있던 마추픽추를 찾아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수도원을 호텔로 개조한 우루밤바의 모나스테리오 리콜레타의 전경.
길가에는 붉은색 헝겊을 감은 장대를 세워놓은 집들이 눈에 띄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치차를 파는 집(chicheria)임을 알리는 표시라고 한다. 치차는 잉카인이 신성시하는 음료로서 옥수수를 15일간 발효시켜 숙성(maceracion)시킨 것으로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던 음료다. 그중 딸기주스와 혼합한 로사다(rosada)가 특히 맛이 달고 풍미가 좋다고 한다. 잉카시대 때 신에게 바치는 치차를 관리하는 소녀들을 ‘처녀(virgen del sol) ’또는 ‘뉴스타(nusta)’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어린 처녀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기도 했다. 최근 페루의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발견된 후아니타(Juanita)라는 이름의 미라는 13세의 어린 처녀로서 제물로 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인디언 부락에서는 미인대회 성격의 뉴스타 선발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오얀타이탐보는 잉카시대의 성곽도시다. 거대한 돌을 다듬은 안덴(anden)이라고 하는 축대를 계단식으로 쌓아놓은 게 보인다. 현장에 있는 돌을 바로 사용한 곳도 있으나 대부분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채석해 운반했다니 당시 얼마의 노력이 기울여졌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마소도 없고 바퀴도 없던 시절에 통나무를 바퀴 대용으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육중한 바위를 얹은 뒤 수많은 사람이 줄을 당기는 방식으로 운반했다는 것이다. 최근 쿠스코의 한 축제 때 이러한 방법을 재현해보았는데 하루에 옮길 수 있는 거리가 몇m에 불과했다고 한다. 스페인군이 이곳에 왔을 때도 오얀타이탐보는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새 맞은편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콜카(Colca)라고 하는 음식 저장소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잉카인은 계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냉장고 구실을 하는 저장고를 설치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고기는 말린 상태인 차르키(charqui), 즉 오늘날의 육포 형식으로 저장했고 주식인 감자는 발로 밟아 물기를 제거한 후 말리고 얼리기를 반복한 추뇨(chuno)라는 형태로 7~8년간 저장했다고 한다.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추뇨는 과학적인 음식저장 방법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안데스의 주요한 음식으로 남아 있다. 오얀타이탐보를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모라이(Moray)를 향해 떠났다.
모라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오얀타이탐보에 얽힌 슬픈 전설을 들었다. 원래 오얀타이는 역찰을 지키던 성주였다고 한다. 태양의 축제 기간에 오얀타이는 쿠스코에서 잉카의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지나 둘은 잉카법에 의하면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다. 당시 잉카제국은 엄격한 신분주의 사회여서 왕족은 왕족끼리만 결혼했다. 오얀타이는 귀족 신분이었지만 왕족은 아니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알려지자 공주는 쿠스코의 감옥으로 보내지고 오얀타이는 지금의 오얀타이탐보로 피신했다. 오얀타이는 쿠스코에서 온 군인들에게 체포된다. 잉카 왕은 이들의 애틋한 사연을 듣고 둘을 사면해 마추픽추에서 여생을 함께 보내도록 했다고 한다.
모라이는 잉카시대의 농업연구소로 원 모양으로 이뤄진 계단식 밭이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을 닮은 12층의 계단식 경작지. 층과 층 사이는 4개의 돌출된 돌 받침을 세워놓아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눈 녹은 물을 지하로 끌어들인 뒤 작은 홈통 모양의 수로로 연결해 경작지에 물을 댈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문명이 스페인에 의해 망했다고 생각하니 숙연한 기분이 든다.
산속 소금밭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마라스(Maras) 소금밭으로 향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저 아래 계곡에 번쩍이며 하얗게 빛나는 산속의 염전이 보였다. 이곳은 산기슭에서 솟아나오는 소금물을 받아서 태양열로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곳이다. 잉카 시절부터 소규모로 소금을 만들어왔는데 스페인 식민지 시절 대규모로 확장하면서 소금 산지로 유명해졌다. 하얀 소금은 사람이 먹고, 흙이 묻어 누런 소금은 동물에게 먹인다고 한다. 거름으로 사용하는 소금도 있다. 마라스의 소금은 너무나 유명해 “마라스에서 왔다(Seras de Maras)”는 말은 “음식이 짜다”는 것을 뜻하는 관용구라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잉카시대 계단식 농경지이던 피삭(Pisaq)이다. 가는 길에 가이드가 마추픽추 근교에 있는 것으로 상상되는 엘도라도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신부 한 명이 엘도라도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밀림 속을 헤매다 마침내 잉카의 옛길 한 자락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길은 너무나 가팔랐다. 신부는 페루 정부의 협조를 얻어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을 비행해보았으나 잉카의 길은 오간 데 없이 밀림만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인디언 사회에서 구전되는 전설에 따르면 마음이 깨끗한 한 사람만 엘도라도로 가는 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피삭은 계곡을 계단식 농경지로 만든 곳이다. 모라이에서 개량한 감자씨앗을 이곳에서 재배했다고 한다. 계단식 경작지를 만들려면 우선 산비탈에 돌로 축대를 쌓아야 했다. 그러곤 물이 잘 빠지도록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는다. 잉카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려고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구아노(guano·새의 배설물로 퇴비로 사용했다)를 가져다 흙과 혼합했다. 청정지역으로 유지하고자 가축이 들어오는 것을 막은 채 가파른 농경지를 모두 사람의 힘으로 경작했다고 하니 당시 인디오의 고생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농기구도 철이 아닌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인디오들의 작업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작은 그룹끼리 조를 짜서 함께 일하는 것으로서 ‘아이미(aymi)’라고 일컫는 방식이다. 가족 단위 또는 이웃과 함께하는 작업 형태로 소규모 농지에 적합하다. 부족 단위 협동작업은 ‘밍카(minca)’라고 칭했다. 밍카는 우리의 새마을운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국가에 노동을 제공하는 ‘미타(mita)’가 있다. 잉카의 장정은 세금을 낼 수 없을 때 노동력을 대신 제공했다. 해마다 두세 달가량 길을 닦거나, 신전을 짓거나, 계단식 농지를 건설하는 데 동원됐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미타를 탄광 노동에 적용해 인디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미타는 오늘날에도 광산 등지에서 과거와는 성격이 다소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계단식 농경지를 경작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노동자를 수용하고자 산 정상에 마을이 건설됐다. 지금은 폐허로 바뀐 그 마을로 올라가고 있는데, 맞은편 산의 절벽에 인공 동굴들이 보였다. 잉카시대의 묘혈이라고 한다. 이쪽은 산 사람의 집, 저쪽은 죽은 이의 집인 것이다. 잉카의 장례 방법은 독특하다.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묘혈에 안치하는데, 미라는 태아가 자궁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잉카인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로 간 뒤 나중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2의 탄생을 기다리는 태아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보낸 것이다. 영혼이 사용하라고 도자기, 금, 은, 주석 등 금속과 옥수수, 콩 등 곡물, 그리고 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또한 잉카인은 죽은 사람이 굴이나 샘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샘, 굴을 파카리나(paqarina)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 잉카의 창건자 망코 카팍(Manco Kapac)의 미라는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마마 오크요(Mama Ocllo)와 함께 티티카카 호수에서 발견됐다. 이 호수가 그들의 파카리나였던 것이다.
정교한 다각형의 벽돌을 사용해 틈이 없는 신전의 건축 양식과 달리 일반 살림집은 투박한 벽돌로 지어져 있다. 침상으로 보이는 곳 밑에 구멍 3개가 나 있다. 이 반(半)지하 공간에서 잉카인이 즐겨 먹던 쿠이(cuy)를 길렀다고 한다. 쿠이는 대형 쥐의 일종으로 크기가 토끼만 하다. 과거 에콰도르 근무 당시 한 번 시식한 적이 있는데 바싹 구운 고기는 졸깃졸깃하며 기름기가 적어 단백하다. 지금도 라파스 시내 고급식당에서는 쿠이 고기가 별미로 나온다.
잉카의 주거지를 돌아보고 나오니 평화로워 보이는 피삭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피삭은 잉카의 경작지를 관리하고자 스페인 사람들이 세운 식민지풍 마을이다. 1572년 5대 부왕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는 잉카의 신전을 파괴하고, 산속에 모여 사는 인디오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켜 이들을 개종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징발했다. 인디오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터전은 폐허로 변했다. 이주한 인디오들은 도시의 날품팔이 빈민으로 전락했다.
탐보마차이(Tambomachay)는 물을 이용해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잉카인은 물을 생명이라고 여겼다. 돌로 제단을 만든 곳에서 한 줄기 물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재생을 기원하며 시체 위에 향초를 섞은 물을 뿌리는 행사도 이곳에서 행했다고 한다. 이곳의 물은 ‘젊음의 물’로 알려져 있다. 몸에 바르거나 마시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시원한 물줄기가 돌로 만든 홈을 타고 흘러나오는데 마르는 날이 없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머리칼이 빠져 고민인 일행 한 명이 머리칼에 이 물을 한번 발라봐야겠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모두가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산 아래쪽의 옛 잉카 전망대 푸카푸카라(Pukapukara)로 향했다.
푸카푸카라는 쿠스코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초소였다. 푸카는 ‘붉다’는 뜻이며 푸카라는 ‘검문소’라는 의미다. 주위의 흙빛이 검붉어서 붙은 이름인 것 같다고 한다. 이곳에서 잉카의 초병은 낮에는 소라로 만든 푸투투(pututu)와 거울로, 밤에는 봉화를 이용해 인근의 탐보마차이와 교신했다고 한다. 푸카푸카라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니 저 아래로 쿠스코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주변에는 잉카의 옛길 흔적이 남아 있다. 저 길을 따라 잉카의 전령 차스키(chasqui)가 소식을 전하고자 발걸음을 부지런히 재촉했으리라. 오늘날에도 페루에선 우체국을 차스키라고 부른다.
총코는 화강암 속을 지그재그로 파내어 만든 통로다. 좁은 통로를 따라가다 보니 퓨마의 머리 모양처럼 생긴 곳이 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팠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낮이 가장 짧은 동지는 퓨마를 숭배하는 날이다. 신기하게도 총코의 돌산에 드리워지는 돌기둥의 그림자가 이날엔 퓨마 모습을 띤다고 한다. 이날 잉카인은 야마를 퓨마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야마는 잉카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하고 유용한 동물이었다. 야마는 영양가 높은 고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옷감을 짜는 털도 제공했다. 야마의 뼈는 베를 짜는 바늘로 사용됐다. 배설물은 비료로 이용됐다고 하니 버릴 것이 없는 동물이었던 셈이다.
“한나절 내내 돌만 본 것 같다”
잉카시대에 만들어진 원 모양의 밭.
삭사이우아만의 수많은 돌은 먼 곳에 있는 채석장(cantera)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케추아어로 사카(saca)는 ‘배가 가득 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아만(huaman)은 송골매라는 뜻이다. 그러니 삭사이우아만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배부른 송골매라는 뜻이 된다. 쿠스코는 퓨마의 모양을 따서 건설됐는데 삭사이우아만은 머리 부분이다. 퓨마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에는 현재 중앙광장과 웅장한 성당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스페인군에 의해 파괴돼 기초만 남았지만 메스티소 출신의 기록가 가르실라소 라 베가(Garcilazo la Vega)는 어린 시절 자신이 직접 본 삭사이우아만은 현재의 것보다 성벽처럼 보이는 부분이 더 높았다고 한다. 삭사이우아만은 태양의 신전이었으나 스페인군은 그 웅장함에 압도된 나머지 이를 잉카의 성벽으로 오해하고 파괴했다. 잉카제국은 수많은 지진을 경험했다. 그래서 잉카의 건축가들은 지진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돌기둥을 이등변 삼각형의 두 개의 빗변처럼 비스듬히 세워서 돌문을 만들었다.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은 삭사이우아만이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넘어가는 해를 받아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이 장관이다.
삭사이우아만을 보고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 나름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쿠스코 성당과 태양의 궁전이 있는 코리칸차(Qorikancha) 중 하나를 행선지로 선택해야 했다. 아쉽지만 쿠스코 성당은 외부만 보기로 하고 코리칸차를 방문키로 했다. 가이드에 따르면 ‘코리’는 황금이라는 뜻이고 ‘칸차’는 공간 또는 장소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코리칸차는 황금의 궁전이라는 뜻이 되겠다. 코리칸차의 중앙에는 스페인풍으로 지은 산 크리스토발 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중세 스페인 예술의 걸작으로 불리는 이 성당은 잉카의 성전이던 태양의 궁전 위에 건축한 것이다. 1950년 대지진으로 인해 스페인이 지은 성당이 일부 무너지면서 잉카의 성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인 점령군이 잉카의 돌 벽 위에 스페인식 돌 벽을 쌓아 잉카의 신전을 감춰버렸으나 지진이 스페인식 돌 벽을 무너뜨리고 잉카의 성벽을 끄집어낸 것이다. 잉카가 세운 벽은 이음새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어 지진에도 해를 입지 않았으나 스페인 성벽은 돌과 돌 사이를 회반죽으로 마무리해 지진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보면 500년간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찬란한 잉카의 유산을 심각하게 훼손한 스페인이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잉카의 현명한 지도자 파차쿠텍의 아들 투팍 유팡기의 궁전은 벽 한 면이 ‘황금의 태양’으로 장식돼 있었다고 한다. 궁전 회랑에는 잉카 귀족의 미라가 도열해 있었고 당시 크게 유행하던 변형된 머리를 한 동자들의 금상도 진설돼 있었다고 한다. 정원은 금으로 만든 각종 동식물로 장식했다고 한다. 또한 잉카 세계의 창조신인 우아이라콜차(Huayracolcha)의 황금상이 600년 동안 우뚝 서 있었다고 한다. 황금은 포로로 잡힌 잉카 왕을 구출하고자 스페인 군인들에게 바쳐져서 금괴로 바뀐 뒤 스페인으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한다. 쿠스코는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칠레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거느렸던 잉카제국 수도다.
이곳의 박물관에는 다양한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예수를 가운데 두고 성모 마리아와 산티아고가 양쪽에 자리한 작품이었다. 그림의 제목을 보니 ‘전율의 신(Senor del Temblor)’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은 이러했다. 1650년 쿠스코에 큰 지진이 발생해 진동이 계속됐다. 성모 마리아와 산티아고에게 기도해도 지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 인디언들이 검은 얼굴의 예수상(Cristo moreno)을 만들어 기도하니 지진이 멈췄다고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검은 예수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검은 예수 숭배는 잉카의 토착 신앙과 기독교가 결합한 대표적인 신크레티즘이다. 검은 예수는 다리가 안으로 휘어진 안짱다리를 하고 있으며 인디언 고유 의상인 치마를 입고 있다. 또 우측에 있는 마리아의 머리 위에 태양이 그려져 있고 좌측의 산티아고는 머리에 달을 쓰고 있다.
정복자 피사로와 잉카 왕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Cajamarca)에서 최초로 회동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인상 깊었다. 카하마르카는 현재 페루의 북부 지방에 있는 곳인데도 그림의 배경은 스페인의 전원 풍경이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를 환대했으나 결국 피사로에 의해 사로잡힌 포로 신세가 된다. 황금에 눈이 먼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2개의 큰 방을 금과 은으로 가득 채우라고 요구했다. 왕을 구출하고자 인디언들이 엄청난 양의 헌물을 바쳤으나 스페인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기독교의 토착화는 마마차(Mamacha) 숭배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마마차는 성모 마리아와 대지의 신 파차마마와의 혼합을 의미한다. 박물관에서 본 그림 속 마마차는 브로카테아도(brocateado)라고 하는 금색 옷을 입고 있으며 왕관 위에는 잉카왕의 깃털 장식이 붙어 있었다. 지금도 포마타(Pomata)에서는 이 마마차를 숭배하는 비르헨 데 로사리오 포마타(Virgen de Rosario Pomata)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도시가 ‘시작되는’ 광장
코리칸차를 나오니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쿠스코 성당은 문을 닫았다. 스트로브를 터뜨려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플라사 데 아르마(Plaza de Arma)라고 부르는 중앙 광장은 고급 호텔과 식당으로 둘러싸여 마치 유럽의 조그마한 마을을 연상케 했다. 플라사 데 아르마는 ‘무기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중세 유럽에서 전쟁하러 나갈 때 병사를 집합시키는 곳을 가리켰다. 스페인의 도시 건설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제일 먼저 마을 한가운데 플라사 마요르(Plaza mayor)라고 일컫는 중앙 광장을 건설한다. 그리고 한쪽에 카테드랄(Catedral·대성당)을 짓고, 그 맞은편에 정부 청사를 건설한다. 스페인이 건설한 중남미 도시들은 이러한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따라서 중남미를 여행할 때는 제일 먼저 플라사 마요르를 찾아가는 게 좋다. 이곳에서 도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행은 극장식 식당에서 석식을 먹는 것으로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쿠스코 중앙광장 가까이에 있는 식당은 외국인 관광객으로 만원이었다. 식당 측은 우리 일행을 위해 태극기를 급하게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식사가 준비되자 무대에서는 잉카의 전통춤 공연이 시작됐다. 식당의 벽은 쿠스케냐 화풍의 천사장(Arcangel)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다. 밥을 먹다 말고 그림을 사기 위해 산 블라스(San Blas) 시장으로 달려갔다. 오후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가게가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산 블라스는 쿠스코 대성당 뒤쪽에 있는데 토산품 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니 앞서 그림 값을 흥정해놓았던 가게가 아직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천사장 그림을 여러 점 구입하는 것으로 쿠스코 여행의 대미가 장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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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쿠스코를 중심으로 성행한 쿠스케냐 화풍은 가톨릭 성화에 잉카의 지방색을 가미한 특이한 종교화다. 유럽인에게 그림을 배운 인디언 화가들에 의해 이 화풍이 이어졌다. 대표적 화가로는 디에고 키스페 티토(Diego Quispe Tito), 바실리오 산타 크루스(Bacilio Santa Cruz), 신치 로카(Sinchi Roca) 등이 있다. 18세기 말 쿠스케냐 화풍이 대대적으로 상업화됐다고 한다. 천사장 그림을 조심스럽게 말아서 품에 안고 밤 11시 20분 출발하는 라파스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내일 정오가 지나야 라파스에 도착할 것이다. 아르캉헬 대천사장에게 안전한 여행이 되게 해달라고 빈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며 몸을 뒤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