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매니페스토 7년의 슬픔

  • 강지원│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 변호사

    입력2012-03-20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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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니페스토 7년의 슬픔

    2010년 4월 민주당 지도부가 국회에서 강지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장에게 당 정책공약집을 전달하고 있다.

    이번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새누리당 출신이 호남에서 당선되고 민주통합당 출신이 영남에서 당선되면 어떨까. 이번 선거의 최대 이변이 되지 않을까. 많이 당선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PK(부산·경남) 쪽에 바람이 약간 불고 있다고 하니 두고 볼 일이다. 그러면 범위를 좁혀서 지역색이 가장 강하다는 광주 전남과 대구 경북에서 딱 1명씩이라도 당선될 수는 없을까. 그럼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쁜 방향이 아니라 좋은 방향이므로 그 소식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곧잘 잊어버리고 지내지만 이 나라의 지역주의 선거풍토는 실로 고질적이다. 벌써 수십 년 된 이 풍토에 변화의 바람이 불 듯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이 되면 딱 벽에 부딪힌다. 재작년 지방선거 때 전국을 두 차례 순회 방문했다. 그때 변화의 낌새를 약간은 챌 수 있었다. 먼저 호남에 가서 “이제 호남에서도 민주당만 찍어서야 되겠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부분이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다음 대답이 걸작이었다. “네, 그렇지만 한나라당까지는 못 찍겠고요. 무소속은 찍어줄 거예요” 했다. 영남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똑같이 질문했다. “이제 영남에서도 한나라당만 찍어서야 되겠어요?” 대답도 똑같았다. “네, 옳은 말씀인데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무소속은 몰라도 민주당까지는 아니에요”였다.

    실제 투표 결과 무소속의 약진이 돋보였다. 지자체장이 무소속으로 당선된 곳도 나왔다. 그러나 상대 당은 아니었다. 다만 투표율이 10~20%까지 올라갔을 뿐이다. 이번 19대 총선은 어찌될까. 양쪽 모두 당명까지 갈아치웠는데 영·호남에서 각기 상대 당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줄까. 아닐 것 같다. 어쩌다 이변이 있을지 모르나 이번에도 싹수가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매니페스토 정책선거운동을 벌여온 운동가들은 올해를 ‘유권자 반란의 해’로 정했다. 우리 유권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듯이 정책투표 형태를 하자는 것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지연, 혈연, 학연 등 연고투표를 타파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기대가 난망이다. 우리가 유권자에게 아무리 호소해도 정치의 당사자인 정치인들이 단숨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불을 지르기 때문이다.

    석패율 제도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새누리당의 A 후보를 광주의 지역구 후보로 공천함과 동시에 비례대표 후보로도 공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광주의 지역구에서는 새누리당 출신의 당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낙선할 터인데, 그 득표율이 높아서 애석한 경우에 그를 비례대표로 당선시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주통합당의 B 후보를 대구의 지역구 후보와 비례대표 후보로 동시에 공천하고 지역구에서 애석하게 낙선했을 때는 비례대표로 당선시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조금이라도 타파할 수 있는 석패율 제도의 도입안(案)을 지난 2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폐기했다.



    그간 이 제도의 도입 필요성은 간헐적으로 주장돼왔다. 2010년에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가 발족하면서 나는 지역분과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구도 정치를 개선할 방안을 모색했다. 여러 학자와 함께 몇 개월 동안 토의하다가 결국 이 제도가 지역구도 탈피의 돌파구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 의견서를 각 정당의 대표자들과 국회 및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관계기관에 제공하고 사회통합위원을 그만두었다. 그 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 및 선거관련법 개정안에 석패율 제도를 포함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국회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이 제도를 도입하기로 여야 간사들이 합의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런데 선거를 두 달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채택 불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실로 기가 찼다. 저런 정치인들에게 지역구도 타파를 기대해? 바보 아니야?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먼저 군소 정당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국단위 정당득표율로 비례대표 의석을 하나라도 더 건져야 하는 군소정당으로서는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양대 정당이 편승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속셈은 뻔했다. 말뚝만 박으면 1석을 건지는데, 그 금싸라기 같은 1석을 왜 적에게 굳이 내주느냐는 것이다. 지역구도 선거가 그들에게는 독이 아니라 약이었던 것이다. 약도 그냥 약이 아니라 보약이었다. 지역주의에 편승해서 자기들 챙길 것을 신나게 챙겨 먹은 사람들이 지역주의를 타파해? 차라리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찾는 것이 나을 일이었다.

    이들의 야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의석을 300석으로 늘리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신설 세종시를 포함해 의석을 3석 늘리는 대신에 다른 곳에서 3석을 줄여야 하는데, 영·호남에서 각 1석씩 줄인다 해도 나머지 1석을 더 줄여야 했다. 그런데 각각 자기네 텃밭에서는 절대 1석을 더 줄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아예 총수를 300석으로 늘려버린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 이 나라 정치인? 아니 정치꾼들에게 정치판을 맡겨? 이런 의구심이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 지역주의 정치풍토 쇄신의 최대 걸림돌은 영·호남이다. 영·호남 주민들이 아니라 그들을 선동해온 영·호남의 정치꾼들이다.

    지역주의 정치의 불가피성을 논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나라처럼 정치권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나라에서 어디 출신이 집권자나 의회 권력자가 된다는 것은 그 영향이 엄청난 일이다. 드러내진 않지만 온 국민이 지역 간 불신의 늪에 빠져 있다. 상대 지역 출신과는 혼사도 꺼린다는 말이 있다. 필자와 같은 영·호남 부부도 잘만 사는데,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무너짐으로 해서 그에 따른 비용 부담이 얼마나 큰지는 계량해보지 않아도 뻔하다. 게다가 오는 12월에는 대통령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이때에도 지역적 편파성은 기승을 부릴 것이다. 총선보다도 심해 정점을 찍을 것이다.

    매니페스토 운동은 1834년 영국의 보수당 당수 로버트 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사실 중세가 무너지고 근대시민정치의 일환으로 투표제도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영국도 선거문화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투표 매수, 뒷거래, 부정투표가 횡행해 수많은 사건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에 로버트 필이 처음으로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공약은 결국 실패하게 마련”이라면서 구체적인 공약으로 선거에 임하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플랫폼(Platform)이라고 하고, 독일에서는 선거강령(Wahlprogramm)이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선거매니페스토(Wahlmanifesto)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부터 매니페스토 정책선거운동이 시작됐다. 그동안 고질적인 돈봉투 선거, 연고 선거, 중상모략·허위비방 선거, 이미지·바람몰이 선거, 선전·선동 선거 등을 뿌리 뽑자고 해왔는데 이를 위한 대안이 바로 매니페스토 운동이었다. 이제는 고무신짝을 포함해서 돈봉투를 돌리는 자는 찍지 말고 좋은 정치공약을 내놓은 사람을 찍자는 것이다. 같은 지역 출신이라든지 같은 학교, 같은 성씨라고 찍어주지 말고, 말 잘한다고, 얼굴 잘생겼다고, 선전·선동 잘한다고 찍어주지 말자는 것이다. 그가 어떤 공약을 내놓았고 그것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재원조달 방법을 제시하는 등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무엇보다 그 후보가 그런 공약을 지켜낼 수 있는 인물인지를 가늠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금까지 7년째 노심초사 정치개혁 매니페스토 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는 착잡하기 짝이 없다. 우리 유권자가 변하면 좋겠는데, 문제는 유권자의 변화를 가로막는 선전·선동꾼 정치인들이다.

    매니페스토 7년의 슬픔
    姜智遠

    1949년 서울 출생

    1972년 서울대 문리대학 정치학과 학사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 합격 후 검사, 교수, 변호사 등으로 활동

    2005년부터 푸르메재단 공동실행대표로 활동

    2006년부터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상임공동대표로 활동

    2009년부터 필하모니아 코리아 단장으로 활동


    차라리 매니페스토 당을 하나 만들어버릴까. 그래서 싸돌아다니는 선거운동을 일절 배척하고 종일 좋은 공약만 내놓는 활동을 하다가 막상 선거에서는 장렬하게 전사하듯 떨어지는, 그런 정당을 만들어버릴까. 우리 세대에서는 정녕 이런 풍토를 뜯어 고치지 못하고 죽는 것일까. 7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회상해보면 절로 슬픈 생각이 앞을 가린다. 그래도 오늘, 부디 올해는 유권자 반란의 해가 되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또다시 집을 나선다. 한 알의 밀알이라도 심어보자고, 그것이 가만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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