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시청자에게 평가되는 것을 보면서 모 기업 합숙 면접에서 내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나도 행동, 말투 하나하나를 신경 썼다. 억지로 웃는 모습을 유지하다 보니 나중엔 입꼬리가 떨려왔다.”
B씨는 자신의 행동 중에 잘못된 것이 없었는지 되짚어보고 무수히 자책했다고 한다.
'만능 엔터테이너’만 취업?
취업에 성공하는 일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는 것만큼 까다롭다는 말이 나온다. 높은 학점과 높은 영어 점수, 각종 자격증은 기본 스펙으로 통한다. 여기에다 자기소개 영상, 끼, 개인기, 호감형 외모, SNS 관리, 업무와 관련된 역량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까지 요구된다. “눈이 높아진 기업들은 취업준비생에게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소개 영상 아나운서나 리포터와 같이 카메라 앞에 서는 특수 직군에 요구되는 자기소개 동영상은 최근 일반직군에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서울 양재구 C사의 해외영업 파트, 서울 영등포구 D사의 영업관리직, 서울 강남구 L사의 마케팅 직군, 서울 마포구 J사, 서울 마포구 E사는 지원자들에게 60~100초 분량의 자기소개 동영상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이런 회사에 들어가려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소개 영상을 평범하게 제작하면 탈락하기 쉽다. 취업준비생 F(여·23) 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G사의 한 인사담당자에게 자기소개 동영상을 어떻게 찍어야 합격하는지 물어봤다. 이 인사담당자는 F씨에게 “10m 높이에서 다이빙을 해보든지?”라며 “그 정도는 해야 인사담당자의 눈길을 끌지”라고 말했다. F씨는 그 말이 다소 과장된 표현인 것 같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10m 다이빙 해보든지…”
한 달 전 서울 종로구 G사에 지원한 H(여·24)씨는 자기소개영상을 찍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갔다. 특기가 없다면 특별한 장소에서 찍어야 다른 지원자들과 대비되는 차별점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갈 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업무를 대하겠다’는 콘셉트였다.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왕복 4시간, 공항에서 원하는 영상을 찍는 데 3시간이 걸렸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대사를 잊기도 하고 소음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히기도 했다. H씨는 “자기소개서는 자기소개서대로 쓰고 영상도 찍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개인기 적지 않은 기업은 채용 시 장기자랑을 해보라고 한다. 원하는 수준도 연예인 개인기 급이다. 몇몇 취준생에 따르면, 서울 중구 I사는 최근 면접에서 응시생들에게 장기자랑을 요구했다. J씨는 “면접 때 이름으로 기발한 삼행시를 지어 자기소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I사에 다니는 친구들로부터 얼마나 톡톡 튀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J씨와 함께 면접을 본 다른 지원자들은 노래와 함께 율동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J씨에 따르면 면접관이 “열정이 보인다”면서 아주 좋아했다.
서울 강남구 K사에 지원한 L(29)씨는 면접에서 랩을 불러 좋은 평가를 받았다. L씨는 취미가 뭐냐는 면접관 질문에 힙합 노래를 주로 듣는다고 답했다. 그러자 면접관은 L씨에게 이 자리에서 랩을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 L씨는 당황스러웠지만 유행하는 랩을 살짝 변용해 어필했다고 한다. 면접관은 L씨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취업 관련 온라인 카페에는 “면접에서 장기자랑을 해보라는 요구를 받아 곤혹스러웠다”는 경험담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취업준비생 M씨는 “충남 천안의 N사 면접에 참여했다. 면접관으로부터 ‘요즘 기업 면접에서는 장기자랑 같은 것도 본다는데 혹시 준비한 게 있으면 보여주게’라는 말을 들었다”고 썼다.
# 외모 몇몇 기업은 자기소개서에 신체 정보를 쓰라고 요구한다. 서울 중구 의류제조기업 O사에 지원한 P(26)씨는 “자기소개서에 키, 몸무게를 기록하는 항목이 있었다”고 했다. 몇몇 취준생도 의류업계에서 노골적으로 신체 사이즈를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한다. 인턴 모집 공고에 “피팅(fitting·옷맵시가 잘 어울리는 것을 뜻하는 업계 용어)이 가능한 사람을 우대한다”는 말을 대놓고 하며 이력서에 구체적인 신체 사이즈를 적어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쇼호스트 같은 직군은 외모가 정량 점수표에 들어간다. 이런 데를 지원하는 취준생들은 외모를 가꾸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감수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신모(26·서울 제기동) 씨는 “면접 보기 전 머리 손질과 메이크업을 항상 받는다. 비용은 회당 10만 원인데 최근 면접을 자주 보게 돼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신씨는 “부모의 주택 소유 여부를 물어보기도 한다”고 이야기했다.
“SNS 내용까지…숨 막힌다”

“다소 이념적인 글은 자기검열을 통해 뺀다. SNS 활동을 아예 안 하면 이 역시 취업 때 감점 요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기업이 좋아할만한 내용으로 SNS 내용을 채운다. SNS 활동이 유희가 아니라 의무가 된 기분이다. 조금 숨이 막히기도 한다.”
실제로 여러 직종의 회사는 자기소개서 항목에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 트위터 계정 주소를 입력하라고 요구한다. 취준생 R씨는 “나는 서울 마포구 S사, 서울 강남구 T사, 서울 여의도 U사에서 요구를 받았다”고 말했다. 응시생들이 SNS 주소를 적어내지 않아도 일부 기업들은 이들의 SNS계정을 찾아 들어가 살펴본다고 한다.
기업이 SNS를 보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응시생이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밝힌 내용과 상반되는 과거 행적이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 종로구 V사에 근무하는 W씨는 “우리 회사는 신입사원 선발 시 SNS 활동 내역을 많이 보는 편이다. 최종 면접 때 SNS 활동 내역을 보면서 자기소개서·면접의 진실성을 평가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한 온라인 취업 카페에선 SNS 활동이 취업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한 취준생은 “지원하는 분야와 관련된 SNS 활동을 수년간 했다. 해당 분야 기업들에 좋게 비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잡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은 취준생들의 SNS 활동을 통해 이들의 열의, 전문지식, 인간관계 등을 파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 스토리 기업들은 요즘 취준생들에게 화려한 스펙을 요구하면서 단지 스펙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며 감동적 스토리와 연결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는 취준생들에게 또 다른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취준생들이 안됐다”
취업준비생 김모(여·24·서울 관악구) 씨는 “취업가능연령도 30세 안팎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그 안에 화려한 스펙에 감동적인 스토리까지 갖춰야 한다니 ‘슈퍼맨·원더우먼 취업준비생’이 되라는 말”이라고 탄식한다.서울 X대 문과계열을 수료한 취업준비생 허모(여·24·서울 안암동) 씨는 자기소개서 작성 팁을 얻기 위해 학교 경력개발센터를 찾아갔다. 이 센터 관계자는 “좋은 스펙도 중요하지만 그 스펙과 관련된 스토리를 잘 풀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런 스토리는 주로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풀어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해 “한국 취준생은 스토리텔러가 됐다”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온다.
서울 종로구 Y사 인사팀 간부 Z(49)씨는 “기업이 ‘갑’이고 취준생이 ‘을’인 고용시장이어서 기업의 요구가 갈수록 까다로워진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취업한 우리 세대와 비교하면 요즘 취준생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고려대 재학생이 ‘고려대언론인교우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