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간 이식 개척자’ 이종수의 독일 편지

민족주의 팽배…독일에 한국혼은 없다

재독동포 2·3세로 살아가기

  • 이종수|독일 본대 의대 종신직 교수

    입력2017-11-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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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 이후 독일 사회는 귀화한 외국인을 동화(同化)하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외국인에 대한 관대함도 줄어들고 있다. 강력한 행정력을 동원해 의식구조마저 바꾸려는 상황에서 동포 2·3세가 현재 살고 있는 독일에서 성공하고, 고국도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16년 7월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2016 중·고생 재외동포 청소년 초청연수’ 행사에 447명의 재외동포 청소년이 참가했다.[서영수 동아일보 기자]

    2016년 7월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2016 중·고생 재외동포 청소년 초청연수’ 행사에 447명의 재외동포 청소년이 참가했다.[서영수 동아일보 기자]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2006년 1월 29일 일요일 밤 독일 제1-TV 인기 토론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하면 외국인을 좋은 독일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주제를 다뤘다. 사회는 유명 토크쇼 진행자 사비네 크리스티안센 여사가 맡았다. 토론자로는 독일 보수당을 대표해 주 내무부장관 1명, 업계를 대표해 중소기업주 1명, 범죄학자 1명 그리고 독일 진보정당을 대표해 녹색당수가 참석했다. 범죄학자가 끼여 있는 것이 이채롭지만 이는 외국인 2세의 범법행위가 독일인 2세보다 많기 때문인 듯했다. 

    독일 통일 이후 외국인도 독일의 기본법인 독일헌법(1949년 공포)에 따라 살아가고, 독일의 관습과 민족문화에 융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베를린의 여러 학교에선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같은 나라에서 온 외국인 자녀들끼리도 독일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정계 및 사A회단체 내에서도 어떻게 하면 젊은, 혹은 어린 외국인 자녀들을 독일 사회에 인테그라치온(Integration·동화) 시키느냐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독일인들은 “우리는 다문화사회(multi-kuli)를 원하지 않으니 독일에 사는 외국인은 자기 나라 고유의 문화생활을 피하라”고 강조한다. 내가 살고 있는 북라인 서팔렌 주 정부에서는 외국인의 독일화를 전담하는 인테그라치온 장관까지 임명해 외국계 이주민의 독일화에 행정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좋은 독일 사람 만들기

    이런 사회 여론을 반영해 독일 제1-TV가 개최한 이날 토론회의 주제는 외국인을 ‘좋은 독일 사람’으로 만들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보수당인 기독교민주연합과 기독교사회연합이 통치하는 주에서는 “외국인은 독일 전통문화에 동화돼야 할 뿐 아니라 독일의 역사적 우수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외국인이 독일 국적을 취득하려면 사전에 좋은 독일인이 될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이에 대한 테스트에 합격해야 한다”며 각 주 나름대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가고 있다. 이런 독일 사회에서 우리 동포 2·3세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4년 후인 1959년 내가 독일에 왔을 때는 독일 사회에서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지금과 많이 달랐고 외국인에 대한 대우도 아주 좋았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경제부흥 시대로 노동자가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터키 수도 앙카라에 수송기를 여러 대 대기해 놓고 독일 의사가 터키 노동자들의 건강을 진단해서 건강하기만 하면 독일어를 몰라도 독일로 수송할 정도였다. 



    그때는 물론 외국인이 독일의 전통문화에 동화돼야 한다는 견해조차 없었고, 오히려 외국인이 독일에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독일 정부가 각종 사회단체에 활동비를 지급하며 외국인을 보살피게 했다. 외국인을 도와주는 여러 단체가 독일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해 나와 같은 외국인 학생을 거의 매일 저녁 모임에 초대하는 바람에 대학기숙사에서 차분하게 공부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도와주려는 독일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외국인에 대한 인심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했다. 독일 통일 16년 뒤인 지난 2006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독일 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내가 관계된 재단이 초청한 외국인 장학생 한 명이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 병원 주임교수에게 ‘장학생이 저녁 9시 반경 그곳 역에 도착하니 병원 직원 중 한 사람이 마중 나가서 기숙사로 안내해줄 수 있겠느냐’고 편지를 썼다. 이 장학생이 도착하기 전날 이 주임교수의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교수님, 병원 직원들에게 문의했는데 자진해서 역에 나가 픽업하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 장학생에게 ‘역에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와서 수위에게 맡겨놓은 기숙사방 열쇠를 찾아서 방으로 가라’고 해주세요.” 

    같은 독일인데 통일 전과 통일 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그 친절했던 독일 사람은 전부 어디 갔을까? 실망이 컸다. 변화한 독일의 현실에 서글픔마저 들었다. 문제는 동포 2·3세도 이처럼 변화된 사회에서 경쟁을 뚫고 생존해가야 한다는 점. 2006년 6월 초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모인 세계 각국의 한인회장들은 토론회를 통해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을 잊지 않도록 한인 2·3세를 교육할 것과 거주국에서 성공해 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동포 2·3세에 대한 적극적 협조를 한국 정부에 당부했다. 

    한국 정부는 주독 한국대사관을 통해 지난 30년간 독일동포 2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일을 전담하는 교육원장을 파견해 우리 조국, 우리 민족, 우리 해외 동포, 우리말, 우리 민족문화라는 단어를 동포 2·3세가 잊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너무 다른 두 문화권

    동포 1세는 한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교교육을 마치고 이곳에 왔기에 늘 조국의 부모형제와 하늘을 그리워하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갔다. 독일어를 잘 알고 독일 문화를 이해해야 독일 땅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 독일 사회는 ‘이주자 2·3세의 의식구조도 독일화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동포 2·3세는 대부분 독일 국적을 가진 독일 국민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고국의 정부가 독일 땅에서 한국 문화의 전통을 살리며 조국을 사랑하는 해외 동포 2·3세가 되어달라고 바라는 것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같은 민족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동포 2·3세를 두고 두 나라의 정책이 이율배반적인 것이 현실이지만, 나는 두 나라의 정책이 동시에 효과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오늘날 독일 사회는 여성 만능 사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공무원 사회도, 교육계도 여성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진 곳은 정계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만이 전부가 아니다. 

    2006년 9월 8일자 독일연방의사회지에 독일 본대학병원이 혈액내과의 주임교수 공모 광고를 냈다. 거기에도 ‘여성 지망자는 주정부의 평등법 규정에 의해 남성 지망자와 그 자격이 동일한 경우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됩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남녀동권 정책이 아니라 여성우대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부인을 직장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하는 가정이 허다하다. 

    예부터 독일 사회에선 아시아, 또는 중동 지방의 경우 각 가정에서 부권(父權)이 강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내가 1963년 루르 지방의 한 병원에 취직해 병상 40개인 남자병동을 맡았을 때였다. 그때 병동 수간호사는 그 지방 출신 23세의 젊은 여성이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3주가 지났을 무렵 어느 아침, 회진을 돌 때 그녀가 내 지시에 응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부임한 지 얼마 안된 나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병동 간호사들을 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진이 끝나자 수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 

    “닥터 리, 당신네 나라에서는 여자가 별 권리가 없지요. 당신은 한 번도 ‘비테(bitte, 영어의 please)’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것은 ‘~해서 죄송한데요’나 ‘~ 하면 고맙겠습니다’ 같은 말을 잘 쓰지 않는 나의 한국적 습성과 동양인은 무조건 여자를 멸시한다는 독일인의 선입관이 부른 오해였다. 나 역시 여성을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은 물론이다. 요즘은 한국도 많이 바뀐 듯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남편이, 즉 아버지가 자식들의 교육 문제, 자식들의 결혼 문제나 기타 집안 대소사에 방향 조절의 키를 쥐고 있었다.

    딸 때려 파출소 불려간 아버지

    자식 교육에 있어 독일의 동포1세들은 한국처럼 극성스럽지는 않지만 아직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압력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독일법에 저촉되며, 처벌 대상이 된다. 나는 우리 애들이 전부 의학을 전공하도록 종용하고 때에 따라서는 강압도 했다. 약 30년 전의 이야기다. 한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반에 가까워져 가는데 점심을 먹다 대학에서 전공할 학과 선택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의학을 선택해! 세계 어디를 가나 아픈 사람 치료해주면 감사하다고 하니까. 백인 사회에서 감사하다는 말 듣고 살려면 의학을 전공해.” 

    그 아들은 결국 자기 뜻을 굽히고 의학을 전공했다. 냉철히 생각해볼 때 의학 전공이 그 아들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아버지로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길을 자식이 선택했기에 나는 만족한다. 

    내가 잘 아는 어느 동포는 부부가 함께 1960년대에 독일에 왔다. 그들의 아들이 공부를 잘하지 않자 “네가 대학에 못 들어가면 아빠, 엄마 자살해 죽어버리겠다. 너를 교육시켜 훌륭한 사람 만들려고 이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네가 성공 못하면 우리가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라고 협박까지 했다고 했다. 이런 행동은 ‘좋은 독일 사람’ 조건에 어긋날뿐더러 독일 법에 명백히 저촉된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는 동포의 경우도 비슷했다. 16세가 넘어 법적으로 성인이 된 딸이 있는데, 그 아이가 저녁 늦게 들어와 주의를 줬더니 딸이 “내 자유를 속박하느냐”고 대들었다. 그 순간 그 아버지는 딸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딸은 학교 동창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즉시 인근 파출소에 가서 신고 했다. 결국 그 아버지는 파출소에 불려갔다. 

    “당신 나라에서는 그렇게 때리며 자녀교육을 할지 몰라도 독일 법에 위반되므로 우리는 당신을 기소해야 합니다.”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좋은 독일인’이 되는 교육을 따로 받은 셈이다. 독일에서는 자녀가 16세가 되면, 즉 성인이 되면 부모는 자식에 대해 법적으로 아무 권한이 없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결정한다.

    동포 2세의 우리말 교육

    독일 동베를린 지역에 자리 잡은 한식당 ‘강남포차’를 찾은 손님들.[박창규 동아일보 기자]

    독일 동베를린 지역에 자리 잡은 한식당 ‘강남포차’를 찾은 손님들.[박창규 동아일보 기자]

    이런 경험 속에서 우리 동포 1세도 독일화하고 조국의 의식구조에서 점점 이탈해간다. 특히 동성연애자들에게 결혼의 기회를 열어주고 동성연애를 애정의 한 현상으로 인정하는 것도 ‘좋은 독일인’이 되는 길이란 점을 소화하지 못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좋은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식들에게 이것도 받아들이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고 또 2세가 동성연애를 하면 부모로서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있다. 

    따라서 독일에 사는 외국계 사람은 독일 정부나 사회가 권장하는 의식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이는 독일 국적을 가진 동포 2세에게 우리나라의 전통과 미덕을 심어주고자 노력하는 한국 정부의 ‘700만 해외동포 정책’과는 상반된다. 

    우리 동포 1세는 동포 2·3세를 지도할 때 우리 조국과 우리가 거주하는 독일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현실에 일차적으로 적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녀가 생존경쟁에서 이겨나가면서 이 나라에서 삶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동포 1세의 입장에서 본 동포 2·3세의 첫째 문제는 언어교육이다. 약 30년 전의 이야기다. 서울에서 장관직을 지낸 어느 분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는 저녁식사 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동창 집을 방문했는데, 글쎄 그 친구의 아들이 우리말로 인사하지 못하고 ‘헬로’ 하지 않아요. 그 친구에게 우리말부터 가르치라고 충고했지요.” 

    이 말을 듣자 내 가슴에 수치감이 솟아올랐다. 내 자식도 한국에서 오는 손님에게 우리말로는 인사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우리말을 가르쳐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아들이 독일 고교(김나지움)에 다닐 때는 독어 성적이 좋지 않아 담임선생에게 불려가는 일이 잦았다. 담임선생은 내가 독일 의대 교수인 줄 알면서도 아들의 독어 성적 불량을 내 탓으로 돌렸다. 내가 어릴 때부터 독일어를 배우지 않아 아이에게 정확한 독일어를 가르칠 수가 없었다는 것. 그는 또 “독어가 이 나라에서 모든 과목의 기초가 되는데 독어를 잘하지 못하면 전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대학 진학이, 특히 의과대학 입학이 어렵지 않겠느냐. 그러니 만사를 제치고 독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충고했다. 

    나는 가정에서 독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동포 1세는 집에서만이라도 한국말을 써야 한국인의 긍지를 갖게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하는 수없이 우리 애를 학교 기숙사에 보내 독일 학생과 공동생활을 하게 하고 독어 과외를 시켰다.

    연방대통령의 강연

    우리 동포 2·3세는 우리말을 배워 한국의 해외동포로서 긍지를 갖기 이전에 어느 분야에서든지 이 나라의 젊은 사람들과 경합해 이겨야, 그것도 월등히 이겨야 원하는 분야에 진출해 독일인 동료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를 이해는 하겠지만 독일에 거주하며 동포 2·3세의 장래를 자나 깨나 염려하는 1세대만큼 그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 동포 2세의 한국어 교육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이때 주독 한국대사관의 한 직원이 “통계적으로 볼 때 동포 2세 중 주말 한글학교에 나와 우리말을 잘 배운 학생이 독어 성적도 좋다. 결국 부모가 열심히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이 독일어를 잘하게 되는 요소”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는 아전인수 격 주장이다. 내 생각에는, 주말에만 우리말을 배우는데도 우리말 성적이 좋고, 그에 더해 독어 성적도 우수한 학생은 어학에 선천적 소질이 있는 학생이다. 독어 성적이 나쁜 학생은 만사를 제쳐두고 우선 독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학교에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2006년 9월 21일 독일 제2 TV의 저녁 10시 뉴스에서 역대 독일연방 대통령이 정례적으로 해온 ‘베를린 강연’을 보도했다. 당시 쾰러 연방 대통령의 강연 주제는 ‘교육’이었다. 강연장은 베를린 시 뉴-쾰른 구 소재 ‘케플러 상급학교’ 강당이었는데 이 학교는 외국인 자녀가 학생의 다수를 차지하고 성적도 좋지 않아 평이 좋지 않았다. 쾰러 대통령은, 특히 외국인 자녀의 교육 문제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 인구 8000만의 독일에는 외국에 그 뿌리를 둔 자가 15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절반(50%)이 독일 국적 소유자다. 오늘날 신생아의 4분의 1이 적어도 부모의 한쪽이 외국에서 왔거나 외국인 2세다. 그런데 이 외국계 자녀의 5명 중 1명이 성적 불량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못하고 있으며 10명 중 4명이 실업자다.

    외국계 자녀 실업률이 본래 독일인 자녀의 2배나 된다. 그 기본 원인은 외국인 자녀가 독일 국적 여하를 막론하고 독어 실력과 독어 해독력 부족으로 학교 성적이 불량한 데 있다. 외국인 자녀의 독어 실력은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부모가 독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부모가 집에서 자기 모국어를 사용하면 자녀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서는 큰 장애가 된다. 만약 부모가 독어를 잘 못한다면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부모부터 독어를 배워야 한다.’

    가르치지 않아도 무한한 애국심

    쾰러 대통령은 외국인 부모를 둔 학생들에게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데 독어 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차 강조했다. 독일연방 대통령의 이 지적은 이 땅의 격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반세기를 싸워온 해외동포 1세의 한 사람으로서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강연이 끝나고 외국인 부모를 둔 한 소녀는 기자 인터뷰를 통해 “부모의 독어가 우수하지 못해 집에선 숙제를 도와줄 수 없으니 방과 후 학교에서 숙제를 도와줄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우리 동포 1세는, 아니 나 자신부터, 자녀의 학교 숙제를 집에서 지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독어의 기초지식을 겸비하지 못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를 들면 독어 관사(der, die, das)의 변화, 동사, 특히 분리 및 비분리동사의 변화, 재귀동사의 사용 등은 어릴 때부터 배워야 통달할 수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말을 배우라고 장려하는 것은 결국 우리 동포 2세가 어학에 대한 천재적 재능을 갖지 않은 한 독일 땅의 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발목을 잡는 셈이 될 수도 있다. 

    동포 1세인 나의 처지에서 볼 때 비록 우리 동포 2세가 우리말은 못해도 독일어를 독일 사람보다도 더 우수하게 구사하면서 독일 사회의 각 분야에 지도층으로 진출하는 것이 결국 우리 조국의 위상을 높이는 애국적 해외동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독일을 포함해 유럽에 거주하는 한, 거주국 언어와 영어 구사 능력이 탁월해야 국제기구에, 다국적기업에 진출할 수 있고, 세계화의 리더가 될 수 있다. 즉 지략과 장검을 겸비한 장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해외동포 정책은 우리말 교육도 중요하지만 세계를 이끌어갈 유능한 한국인 육성에 일차적으로 치중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능력과 여유가 있는 동포 2세라면 자기 부모의 모국어를 함께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일 터이다. 해외 동포들은 비록 우리말은 몰라도 자기 얼굴을 볼 때 자연히 자기 뿌리를 찾게 된다. 가르치지 않아도 그 밑바닥에 무한한 애국심이 잠재해 있다.

    어떤 직업이 좋을까

    동포 2·3세의 또 다른 큰 문제는 직업의 선택이다. 1960, 70년대에는 독일에 인력이 부족해 우리 동포의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생계를 유지해가는 것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 후 15년이 된 2005년에는 독일 정부의 실업보험금, 또는 사회보조금 등을 지급받는 독일인 실업자가 인구 8000만의 나라에서 500만 명에 달하며 실업보험금 지급에 필요한 국가예산 부담이 너무 커져 당시의 독일 정권이 실업자 감소를 정책의 제1과제로 삼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우리 동포 2세도 자기 취미에 맞고 장래성이 있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떤 기회에 우리 동포 2세가 원하는 직장을 구했다 해도 직장 내의 분위기를 극복해가는 것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2006년의 5월 어느 날 독일 제2 TV에서 ‘독일민족도 독일인으로서의 긍지와 우월감과 애국심을 가져도 좋지 않으냐’라는 설문에 80% 이상이 ‘그렇다’ 라고 답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여론조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60년이 지난 오늘날 독일 국민도 ‘국수주의적 민족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자’ 라는 선전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통일 후 20년이 지난 2010년경부터는 독일 경제가 아주 좋아졌다. 실업자는 줄어들고 각 기업은 수출 확대에 수반되는 기술자의 부족으로 아우성이다. 기업들은 해외에서 유능한 기술자를 데려오는 데 방해가 되는 규제를 풀어달라고 정부에 부탁한다. 이런 시기에는 우리 동포 2세가 취직하기가 아주 용이하다. 그러나 각 직장에서 승진 경합 여건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이민자의 자녀로서 그 어려움은 독일의 민족주의가 강해질수록 더 심해진다. 

    ‘베를린공화국(통일된 후의 독일)’이 되면서 극우파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독일 국적 소유 여하를 막론하고 유색인인 외국인이 극우파들에게 구타당해 중상을 입어 입원 치료를 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2006년 6월 FIFA의 월드컵축구대회가 독일에서 개최됐는데 독일의 어떤 지역은 ‘네오나치의 공격이 우려되니 유색인종은 그곳에 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1998년 독일 헤센 주정부 선거 당시, 정치자금 관련 문제로 불리한 처지에 몰린 독일 보수당은 사회당 연방정부의 외국인 국적취득 권장 정책에 반대한다는 선거 요강 하나로 승리를 거머쥔 적이 있다. 이처럼 선거 때마다 보수당은 외국인 문제로 선거 이슈를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현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외국인에 대해 또는 외국계 독일 국적 소지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특히 실업자 처지에서는 자기네 직장을 외국인(비록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외국에서 와서 정착한 사람)이 빼앗아간 것으로 생각한다.

    인내하고 용기 가져야

    이런 환경이니 우리 동포 2·3세가 취직이 돼도 좋은 부서에 배치되거나 독일인 동료와 동일하게 진급될 리가 없다. 동포 2세가 학생 신분일 때는 자기가 외국인이란 극심한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매일 만나는 동급생과의 친구관계가 익숙해진 데다 동포 2세의 부모가 독일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을 때는 의기양양하다. 그러나 일단 취직해 직장에 들어가면 독일 동료의 멸시에 부딪히기도 하고 독일 동료에 비해 동일한 대우도 못 받고 진급도 늦어지는 데에 환멸을 느끼며 비관에 빠지거나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어느 동포 1세가 취업차 1970년 초에 독일에 왔는데 아들을 가르쳐 의과대학에 보냈다. 졸업 후 그 아들이 어느 병원의 외과에 레지던트로 취직했는데 독일 동료에 비해 수술 배당도 적게 받고 병동 책임도 맡겨주지 않아 우울증에 빠졌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우리가 외국에서 살고 있으니 그런 차별은 감수하며 이겨나가야 한다” 라고 하자 그 아들이 “그것이 전부 아버지 탓입니다. 아버지가 한국에 살면 내가 그곳에서 태어났을 테고, 그러면 이런 차별은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을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운명 속에서 우리 동포 2세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받아들여 극복해나가는 자세다. 나는 20여 년 전 어느 날 한글학교가 개최한 동포 2세의 모임에서 강연을 했다. 그곳에 모인 우리 동포 2세 학생들은 희색이 만면하고 눈동자는 희망에 차서 번쩍이고 있었다. 

    “여러분은 자신이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 생각하고 잠시 남의 집인 독일에 부모님과 같이 와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현실을 여러분이 충분히 인정하고 그 현실을 딛고 각 분야에서 세계를 지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인내를 갖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한국 기업에 취직한 2세들

    이렇게 말한 나도 독일 생활에서 독일 동료와 같은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반항한 경험이 드물지 않다. 1967년 7월의 일이다. 여름휴가가 시작되어 본대학병원의 간호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필이면 내가 책임을 맡은 병동 문을 1개월 닫고 그곳 인력을 다른 병동에 배치했다. 나는 이때 한국 국적을 소지한 외국인이고 본대학병원의 외국인 정원으로 채용돼 있었다. 봉급도 독일인 동료의 50%밖에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레지던트 2년생이 맡고 있는 병동의 의사 밑으로 배치했다. 나는 치욕감을 금치 못해 한 달간 일을 하지 않고 저항한 적도 있다. 그 당시는 의사가 부족한 상태이기에 문책받지 않고 무난히 넘겼지만, 지금이라면 상부의 명을 거역했으니 파면감이다. 

    독일에 주재하는 우리나라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의 외교관 가운데 동포 2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내가 잘 아는 A 대사는 독일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에 동포 2세를 취업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고용주도 고용인도 같은 민족이면 독일 기업에서보다 차별이 적을 것이고 독일에서 성장한 동포 2세가 독일 사정에 정통하니 기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내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A 대사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우리 동포 2세는 독일 땅에서 자라면서 좋은 독일 사람이 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한국 기업의 생리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독일 근로자는 연간 6주간의 유급휴가를 갖는다. 독일 사람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동포 1세들도 여름철 3~4주간 휴가를 간다. 하루 노동시간이 길어졌을 때는 독일에서는 당연히 초과수당금이 지급된다. 둘째, 동포 2세들은 학교에 다닐 때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교육을 받았다. 절대 복종형이 아니어서 한국적 기업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 수 있다. 셋째, 우리나라 기업도 독일에서 사업을 하는 데 우리말 통역이 필요치 않다. 영어만 능통하면 사업을 하는 데 지장이 없다. 이러고 보면 외모는 한민족이지만 의식구조는 좋은 독일 사람이 되어 있다는 동포 2세가 한국 기업에 굳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집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동포의 아들이 대사관 주선으로 우리나라 대기업 독일지사에 취업했는데, 반년도 있지 못하고 나왔다. 그는 한국 기업을 “인권을 무시하는 회사”라고 평했다. 외모로만 보면 분명히 한민족의 후예이지만 알맹이는 이미 ‘착한 독일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동포 2세 문제의 패러독스다.

    독일식 3대 행복관

    2015년 독일 통일 25주년과 종전 70주년을 맞아 옛 베를린 장벽 옆 포츠담 광장 남단에 세워진 통일정.[해외문화홍보원 제공]

    2015년 독일 통일 25주년과 종전 70주년을 맞아 옛 베를린 장벽 옆 포츠담 광장 남단에 세워진 통일정.[해외문화홍보원 제공]

    2005년의 12월 어느 날 독일 제1 TV에서 외국인 자녀들의 실업률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독일에선 외국인 자녀의 실업률이 독일인 자녀보다 월등히 높다. 터키 젊은이들이 주로 인터뷰에 나왔는데, 앵커는 그들이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직장을 구했다 해도 장기간의 채용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대부분이 자영업을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나는 우리 동포 2·3세도 젊어서부터 자영업을 시도해볼 것을 권한다. 유럽에서는 자영업을 시작하면 욕심 부리지 말고, 즉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고 자기 회사 또는 가게와 고객을 꾸준히 관리해가야 한다. 독일 사람의 행복관 3대 요소는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이 전부 건강하며, 그리고 나의 수입으로 가족이 최소한의 생활(집세, 식대, 기타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보장하는 것’이다. 독일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비가 없으니 자식 교육비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최근에 국가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대학등록금을 도입하는 대학이 있으나 그런 경우 국가가 등록금 및 학생들의 생활비까지 전액을 대여해준다. 

    제한된 유럽의 여건을 고려해 능력 있는 동포 2·3세는 세계를 바라보며 성장하기에 좋은 곳을 선택해 이주할 것을 권하고 싶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적절한 토양과 기후 혜택을 갖추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유럽처럼 민족주의가 강한 구대륙에서 이민국인 여러 나라로, 특히 신대륙으로 활동무대를 옮겨보는 것은 능력 있는 동포 2·3세에게 세계적 인물로 등장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는 ‘브로큰 잉글리시(Broken English·서투른 영어)’를 사용해가며 많은 아시아인이 학계, 정계, 의료계, 법조계 등에서 대활약을 하고 있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 실러는 ‘남아는 해외로 나가라’ 라고 했다. 

    동포 1세가 머리를 싸매고 힘들어하는 동포 2세의 문제는 결혼이다. 동포1세는 어느 가정에서든지 동포 2세에게 어릴 때부터 “너는 한국인과 결혼해야 해”라는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다. 그러나 유럽 사회에서는, 특히 독일에서는 중매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고 자녀가 결혼하는 문제는 부모의 과제가 아니다. 

    “나는 애들 대학 교육시키고 결혼까지 다 시켰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어.” 

    나는 서울 친구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들었지만,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도 독일에 있는 자녀에게 한국에서 결혼 중매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으나 그 얘기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내가 중매 얘기만 하면 “제가 그렇게 못난 줄 아세요? 제 배우자 하나 제가 구하지 못할 정도로?” 하며 대화를 피해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골치 아픈 건 결혼 문제

    독일 젊은이 거의 대부분이 직장과 자기 생활권 내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니 중매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보다는 선택의 범위가 좁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내가 함께 일생을 살아갈 상대는 내가 선택한다’라는 말도 나는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교육의 정도, 사회의 계층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하면 일단 동거생활을 먼저 해본다. 우리 동포 2세라고 예외는 아니다. 몇 년을 동거하다가 불합리성을 발견하면 헤어지고, 서로 조화가 잘 맞아 어린아이를 갖게 되면 결혼식을 올린다. 인구 8000만의 독일에 3만여 명의 한국 동포가 거주하고 있으니 인구 비율로 볼 때 동포 2세들은 독일인 배우자를 선택할 기회가 월등히 많은 셈이다. 

    동포 2세가 ‘국제결혼’을 했을 때 시부모, 또는 처부모인 동포 1세와의 관계도 문제다. 이곳에서 한국식으로 시부모나 처부모를 공대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서울에 있는 나의 중학 동창 중 한 사람이 내게 자기 사위와 며느리 자랑을 한다. 

    “우리 사위는 결혼해서 2년이 넘었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전화해. 우리 며느리는 자기 봉급에서 매달 시어머니 잡비로 쓰라고 일정 금액을 보내와.” 

    이런 한국식 가정 관계를 우리는 바라지도 않는다. 국제결혼을 했을 때 성생활이 왕성한 20대에서 40대 초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운 부부 사이의 문제를 성생활이 덮어줄 수 있다. 그러나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정신적인 교감, 생활관의 상호이해 등이 지속적인 부부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독일 측 배우자의 외국인에 대한 자세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40대 후반부터 국제결혼한 부부의 이혼율이 증가할 수 있다.

    운명의 별이 결정한 대로

    국제결혼에서 내가 관찰한 또 하나의 문제는 부부가 독일 사회에 완전히 속하지도 못하고 한국인 사회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 친척이나 주변에도 국제결혼한 분이 많다. 이런 부부가 한국인 모임에 가면 독일인 배우자가 한국어와 한국의 습관을 모르니 소외감을 느끼고 온다. 반면 독일인 모임에 가면 한국인 배우자가 인종적인 억압감도 받기가 쉽고 언어 소통의 어려움으로 대화에서 오해를 갖고 돌아온다. 이런 상황이 때에 따라서는 가정불화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 동포 2세와 한국에서 성장한 젊은이의 중매결혼도 생각해본다. 같은 도시에 사는 한 동포의 이야기다. 어느 날 한국에서 친척인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아니 혼기가 됐으니 독일의 동포 자녀와 중매라도 해볼까.” 

    “그런 말씀 마세요. 내 친구 중 미국 동포와 중매결혼 해서 갔다가 못살고 되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역시 한국인들끼리라도 성장 과정이 다른 이들의 결합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또한 언어 장벽도 무시하지 못한다. 결국 독일 부모들처럼 우리 동포 1세도 독일에 거주하는 한 2세들의 결혼 문제는 운명의 별이 결정한 대로 본인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 방법이라고 본다.

    이종수


    ● 1929년생
    ● 1964년 독일 뒤셀도르프대 의학박사
    ● 1969년 유럽대륙 최초 간 이식 성공
    ● 1975년 본대 의대 이식과 과장
    ● 1994년 간질환연구소장
    ● 저서: ‘새로 쓰는 간 다스리는 법’ ‘간이 두 개인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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