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창간기획 | 新전환시대의 5大 화두 |

위기의 역설과 대한민국의 국가전략

풍전등화- 북핵 위기

  • 김태현|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2017-11-0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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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 대통령이 꼽은 ‘내 인생의 책’은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냉전체제의 독단과 주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 책의 형식논리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적폐라는 이름의 ‘살아있는 시체’와 싸우느라 미래지향적 패러다임을 구축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세기적 ‘낡은 것’과 결별하고 21세기적 ‘새로운 것’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신(新)전환시대’라고 불러 마땅하다. 신전환시대에 반드시 완수해야 할 국가적 화두 다섯 가지에 대해 각 분야 석학들의 고견을 들어봤다.
     나라의 명운(命運)이 풍전등화와 같다. ‘미치광이(mad man)’를 자처하는 두 지도자가 인류가 개발한 가장 파멸적인 무기를 들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국민은 떨고 있다. 대피소 위치를 확인하고 생존배낭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런 민심 앞에 정치권은 서로 책임을 물어 반사적 이익을 얻고 말초적인 불안감에 호소해 표심을 얻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 평화를 외치는 여당, 미국 전술핵 재반입을 주장하는 야당의 목소리엔 영혼이 없다. 8개월 후 치러질 지방선거를 넘어 10년, 30년, 100년 후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핵무장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거듭하며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것이 노골적으로 미국을 대상으로 하면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주고받는 언행이 거칠어지고 한반도에 군사적 위기가 고조됐다. 그 거친 언사가 우발적 충돌로 비화하거나 미국이 그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 군사적 행동에 나섬으로써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우려에 국민의 심장이 떨리는 것이다. 처음이 아니다. 1994년, 2003년, 2005년에도 전쟁을 우려한 국민이 비상물품 비축에 나서거나 금융시장이 출렁거렸다. 그때 위기는 봉합했지만 문제는 풀지 못했다. 북한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먼 미래의 일로 봤다.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을 과대평가해 그전에 저절로 풀리기를 바랐다. 그 헛된 희망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살리다’엔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틀린 점이 있다. 군사적 역량을 볼 때 미국은 장갑차를 운전하고 북한은 경차를 운전하는 격이니 끝에 있는 것은 공멸이 아니다. 미국도 다치고 한국은 더 크게 다치겠지만 북한은 반드시 죽는다. 김정은 정권은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광신도가 아니다. 그런 선택을 하기엔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 한미 양국이 군사행동도 불사할 것이라고 북한이 믿어 의심치 않아 결국 핵 포기를 결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이자 필요조건이다.

    요컨대 동결이 아닌 폐기를 확고한 조건으로 걸고 경제적 압박을 통해 북한을 아사(餓死) 직전까지 몰아붙이면, 북한은 외교적 후퇴냐 군사적 행동이냐 하는 선택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그때 북한이 후자를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북한 지도부 및 핵시설에 대한 선제타격, 필요하다면 전면적 전쟁까지 감수하겠다는 결기를 보이는 것이 핵 폐기를 전제로 한 협상의 장이 열리는데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만일 북한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또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 경우에서 봤듯이) 그 때문에 북한 정권의 미래가 더욱 위태롭게 된다고 생각하면 핵 포기는 선택지가 아니다. 이판사판식 도발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핵화를 위한 두 번째 조건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조건이 첫 번째 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살려준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죽이지 않겠다’는 식의 소극적 의미다. 평화협정 혹은 다른 방식의 소극적 안전보장과 경제제재의 해제 등이 그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먹여 살리겠다’는 식의 적극적 의미다. 제재의 해제를 넘는 경제적 지원이 그에 해당한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북한이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게 만드는 것은 ‘죽이겠다’는 협박을 믿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려울지 모른다.

    클린턴이나 부시 전 대통령이 제공한 것 같은 친서 형식의 소극적 안전보장은 더 이상 약발이 없다. 의회 비준을 거친 평화조약이라면 모르지만, 여기엔 미국의 문제가 있다. 미국이 보기에 의회가 비준한 조약은 구속력 있는 법이지만 독재국가인 북한은 지도자 결단에 따라 언제든지 그것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수 있다. 또 북한이 종잇장에 불과한 평화협정을 넘어 주한미군 철수, 나아가 한미동맹 폐기와 같은 실질적 조치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한 우리 국론 분열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또 북한이 단순히 경제제재의 해제를 넘어 대규모 경제지원을 요구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운전사 말고 대장장이가 되자

    그에 대한 해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 누차 시도된 다자적이고 포괄적인 협정이다. 2005년의 9·19합의가 한 모델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출발점으로 하되, 남북 평화 공존과 사회경제적 통합, 나아가 통일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동북아 국제질서의 청사진까지 제시하고 논의하는 그런 협상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밖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될지 모를 강대국 정치의 재연을 막고 안으로는 국론을 결집하고 나라와 민족의 재도약을 위한 열정과 헌신을 이끌어내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다.

    물론 어려움이 많다. 참여국이 많고 사안이 확대되면 갈등도 많을 수밖에 없다. 자칫 동력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다. 그처럼 복합적 패키지를 만드는 것은 여러 금속을 녹여 합금을 단조해내는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높은 열과 뛰어난 대장장이가 필요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위험이 클수록 기회도 커지는 위기의 역설이다. 위기는 위험의 정도가 크고 시간이 촉박할수록 큰 동력을 가지는 법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인들은 파멸을 생각하고 고해성사를 위해 교회를 찾았었다. 그 끝에 데탕트가 시작됐다.

    북핵문제는 이제 쿠바 사태에 비견될 정도로 위험해졌다.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날아다닐 수 있다. 패권국 미국과 신흥국 중국의 패권전쟁, 소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북한 문제로 현실화할 수도 있다. 끔찍한 가능성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웬만한 갈등은 녹여 섞을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지금의 흐름대로라면 전쟁 직전과 같은 강진(强震)이 한반도를 덮칠 것이다. 그 끝에 협상의 장이 열리더라도 서로 파국을 위협하는 여진(餘震)이 거듭될 것이다. 그런 속에서 우리 정부는 장갑차의 운전대에 앉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위기가 만든 에너지를 이용, 많은 사안을 녹이고 다져서 항구적 평화와 위대한 미래를 빚어내는 대장장이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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