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영화로 읽는 세상

페미니즘 시대에 대처하는 남성의 자세

‘매혹당한 사람들’과 ‘우리의 20세기’

  • 노광우|영화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7-10-2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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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예술영화 상영관에서 상영 중인 미국 영화 두 편. 한 편은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한 ‘매혹당한 사람들(The Beguiled)’이고 다른 한 편은 마이크 밀스가 감독한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다. 공교롭게도 아역 출신 다코타 패닝의 여동생 엘르 패닝(19)이 당돌한 연기를 펼친 두 영화는 모두 여성이 다수인 공간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둘러싸인 상황을 그린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원래 1971년에 돈 시겔 감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고, ‘우리의 20세기’는 시대 배경이 1979년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1970년대 미국의 주요한 사회 흐름 하나를 담아낸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의 시대 배경은 미국 남북전쟁기다. 남부 버지니아의 어떤 외딴 여성 기숙학교 근처 숲에서 다리를 다친 북군 병사 존 맥버니(콜린 퍼렐)가 10대 소녀 에이미(우나 로렌스)에게 발견된다. 에이미는 존을 부축해 기숙학교로 데려간다.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방학을 맞은 이 학교는 여교장 마사(니콜 키드먼)와 여교사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 그리고 다섯 여학생까지 일곱 여성이 생활하는 둥지였다.

    이들은 대부분 남부의 상류층 여성이라 처음에는 북군 병사를 보고 경계심을 가지지만 다친 사람을 돕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는 행위라며 포탄 파편 제거 수술과 치료에 나선다. 학교 인근에 주둔하는 남군이 정찰을 위해 가끔 학교를 방문하지만 여성들은 적군 병사인 존을 넘기지 않고 계속 그의 치료와 회복을 돕는다.



    옴 파탈, 그 위험한 선택

    존은 점점 회복되면서 힘센 일꾼 몫을 해나간다. 여성들은 그런 그를 위해 특별한 만찬을 준비한다. 이성에 대한 관심을 접고 살아가다 존의 등장으로 은근한 설렘과 흥분을 맛보기 시작했기 때문. 그래서 저마다 한껏 치장하고 만찬석상에 나타난다. 그런 그들의 변화를 서서히 의식하게 된 존은 이를 즐기다 어느 순간부터 적극적 유혹자로 변해간다. 처음엔 성인인 미스 마사와 비슷한 연배의 에드위나와 ‘썸’을 타는가 싶더니 어느새 어린 여학생들이 던지는 추파에도 반응하며 치명적 매력을 발산하는 ‘옴 파탈(homme fatal)’이 된다.



    은밀한 유혹의 시간이 지나가고 그들의 취침시간이 살짝 지나자 존의 발길은 한 명의 방을 향한다. 누굴까. 존과 동년배로 가장 많은 교감을 나눈 에드위나는 그 대상이 자신일 거란 생각에 살금살금 마중을 나갔다가 여학생 중 가장 성숙한 알리시아(엘르 패닝)의 침대에 들어가 있는 그를 발견하고 놀라서 달아난다. 당황한 존은 불편한 다리를 끌고 그런 에드위나를 달래려 쫓아가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는다. 나아가던 다리는 더 심한 복합골절에 출혈까지 심해진 상황. 미스 마사는 존의 생명을 살리려면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다며 의식을 잃은 존의 한쪽 다리를 잘라낸다.

    의식을 되찾고 이를 알게 된 존은 자신의 간택을 받지 못한 여성들이 질투심에 끔찍한 복수를 저지른 것이라며 절규한다. 시간이 지나면 진정할 줄 알았던 존은 점점 더 폭군이 되어가고 여성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다. 한때 유혹의 대상이 이제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1971년 제작된 원작에서 존 역을 맡은 배우는 ‘석양의 무법자’와 ‘더티 해리’ 시리즈를 통해 아드레날린 넘치는 남성미를 뽐내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그런 ‘마초’가 여성들만 사는 아마존 공간에 떨어져 무차별적 성적 호기심과 도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처음엔 황홀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의 남성이 절름발이가 된다는 것은 남성적 상징과 권위를 상실한 채 여성에게 의존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굴욕과 절망이 배가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존은 자신을 남자답게 만들어주던 매너를 팽개치고 여성들의 죄의식을 한껏 자극하는 폭군으로 돌변함으로써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여성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한때 동정의 대상이었고 다시 유혹의 대상까지 됐지만 지금은 폭력과 죄의식의 대상으로 전락한 남성에게 과연 여성들은 여전히 자비로울까. 아니면 냉혹해질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남성 감독이 연출한 원작 속 일곱 여성의 변화무쌍한 심리를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차별화하면서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흔들리는 눈빛과 멈칫거리는 손길, 떨리는 입술이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도 ‘대부’ 시리즈를 감독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답게 여성 간 은밀한 권력게임 그리고 섹스와 폭력의 섬뜩한 함수관계를 한껏 무심해 보이는 자연주의 화면 구성과 대비하는 방식으로 그려낸다. 젠더 간의 오해와 억측이 초래하는 영화의 결말이 말하려는 건 무엇일까. 페미니즘을 마주하는 남성의 두려움이 여성과 소통에 실패하는 데서 기인함을 엽기적 소극(笑劇)으로 풍자하는 건 아닐까.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그에 비해 ‘우리의 20세기’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남성은 더욱 여성을 이해하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이 다르다.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소도시 샌타바버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쇼핑몰 주차장에 세워둔 낡은 포드 자동차 엔진이 폭발하면서 불타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자동차는 15세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를 데리고 사는 55세 이혼녀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의 남편이 남기고 간 것이다. 도로시아는 차의 불을 끈 소방수들을 자신의 생일파티에 초대한다. 도로시아 모자는 한때 히피들이 공동 생활하던 집을 인수해서 하숙을 치고 있다.

    제이미 아버지가 남겨준 ‘포드’ 자동차가 불타버린 것은 ‘아버지의 부재’와 그 아버지가 살던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포드주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상징한다. 공장과 기업에서 일하는 가부장 중심의 한 경제·사회 체제가 종말을 맞이하고 여성이 주도하는 가족 형태가 지배적인 포스트포드주의 체제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도로시아네 집이 한때 히피들의 공간이었다는 설정 역시 전통적 가족 형태를 벗어난 유사가족의 등장을 암시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제이미의 성장담이다. 대체로 이런 성장담에는 아버지나 형과 같은 역할 모델이 되는 성인 남성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그 역할을 여자들이 나눠 맡는다. 제이미 집 하숙인으로 신문사 사진기자인 애비(그레타 거위그)와 제이미의 이성친구인 줄리(엘르 패닝)다. 그래서 제이미는 여성에게서 여성의 특성을 알게 되고 여성이 바라보는 남성상을 습득하게 된다.

    제이미를 둘러싼 도로시아와 애비, 그리고 줄리는 각기 다른 시대의 미국 여성상을 보여준다. 1920년생인 도로시아는 ‘여자는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통적 여성관을 간직한 인물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전장에 나간 남성들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20대 이른 나이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세대다. 이전에는 남성들에게만 허용되던 것이 그녀 세대부터 부분적으로 허용되는데 그런 부분적 허용은 그녀의 흡연으로 나타난다.

    애비는 1955년생이고 뉴욕에서 예술을 공부하며 1970년대 페미니즘 세례를 받은 1세대 페미니스트다. 그래서 남성과 다른 여성의 심리적, 신체적 특성을 설명해주며 어떻게 해야 여성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지 제이미에게 차분히 알려준다. 자궁경부암으로 인해 자식을 가질 수 없던 그는 그 보상심리로 남편이 아닌 섹스 파트너만을 원한다.

    줄리는 제이미와 비슷한 또래의 10대 여성이다. 남자친구와 성 경험이 있는 조숙한 아이지만 그로 인해 임신했을까봐 불안해하기도 한다. 줄리는 제이미에게 담배 피우는 법과 여자들이 관찰한 남자의 행동양식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줄리는 애비의 전투적 페미니즘이 부담스럽다. 이는 그녀 세대가 1980년대 이후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포스트페미니즘 세대가 될 것이란 복선이다.

    물론 제이미 주변 인물로 남자도 등장한다. 제이미 집에서 하숙하는 정비공 윌리엄(빌리 크루덥)이다. 한때 히피 생활을 한 그는 제이미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은 애비의 섹스 파트너가 되어 주거나 도로시아의 말상대가 되어주면서 서로 다른 세대를 연결해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어 도로시아와 제이미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도로시아는 제이미를 이해하기 위해 제이미가 좋아하는 펑크음악에 관심을 기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펑크 취향을 발견하게 된다. 세대 공감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우리의 20세기’는 이렇게 지난 세기 페미니즘의 긍정적 영향을 잔잔하게 되돌아보면서 페미니즘이 우리 가치관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 자연스럽게 펼쳐 보인다. 이는 영화 말미 에필로그에서도 확인된다. 도로시아는 1999년 밀레니엄 버그로 인해 세계 종말이 올 것을 걱정하면서 냉전시대의 습성대로 집안 창고에 비상식량을 챙겨놓고 지내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폐암으로 사망한다. 유일한 혈육을 잃은 제이미는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전투적 페미니스트이던 애비는 이성애적 가정을 꾸린다. 줄리는 유럽에서 만난 남자와 동거하며 문화를 향유하면서 아기는 가지지 않는 딩크(DINK·Double Income No Kid)족의 삶을 꾸려간다. 윌리엄은 자동차를 고치는 손재주로 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예술가가 되지만 계속 혼자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의 삶이 실패였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노광우
    ● 1969년 서울 출생
    ●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 논문: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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