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돌 좀 사줘” “그래 알았어”. 두 사내의 간단한 통화로 수십 억 원짜리 프로젝트가 개시됐다. 2억~3억 년간 풍화와 침식 작용을 견뎌내고 심지만 남은 둥근 돌, 핵석. 양평 공사장에서 다량 출토된 이 바위들은 박은관 시몬느 회장의 재정 지원과 김창곤 조각가의 재능기부를 통해 예술로 승화되는 중이다. 두 사내는 핵석 작품으로 조각공원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기부하고자 한다.
LA를 대표하는 미술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작가의 집념이 응축된 결과다. 하이저가 이 작품을 처음 기획한 것은 1969년이고,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에서 적합한 돌을 찾아낸 것은 2006년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기술이 마땅치 않아 6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012년 3월, 이 돌은 LA 시내까지 170km의 거리를 11일에 걸쳐 천천히 달렸다.
LACMA 관장 마이클 고반(Michael Govan)은 이 프로젝트의 숨은 공로자다. 하이저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던 그는 이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 1000만 달러(약 120억 원)를 모금하고, 작품을 전시할 장소를 마련하는 등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이 대중에 공개되던 날, 고반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됐다(It makes the impossible possible)”고 자축했다.
하이저와 고반. 두 사내가 벌인 일과 닮은 ‘돌’ 프로젝트가 국내에서도 개시됐다.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큰 것도
“개수로는 100여 개, 무게로는 2800t가량 됩니다. 모두 핵석이라고 해요. 2014년 여름에 경기 양평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핵석(核石·core stone)은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 과정을 거쳐 둥근 모양으로 바뀐 화강암을 가리킨다. 설악산 흔들바위가 대표적인 예다. 보통은 흙 속에 감자처럼 파묻혀 있다가 지반공사 등을 계기로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연구부장, 지질박물관장 등을 역임하고 은퇴한 전희영 박사는 “수억 년 전 폭발한 화산 마그마가 굳어 암석이 되고, 그 암석이 땅속에서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를 거쳐 쪼개지고 마모되면서 둥글어진 것을 핵석이라고 한다”며 “한반도 지형에서 종종 발견되지만 크기가 큰 것은 드문 편”이라고 설명했다. 김 작가의 작업장에 있는 핵석 중엔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큰 것도 있다. 전 박사는 “양평에서 발견됐다면 족히 2억~3억 년 전에 생성된 암석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핵석은 생김새로 인해 예부터 진귀한 돌로 여겨졌고, 작고 둥근 핵석은 ‘용의 알’이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핵석이 경기 남부 양평에서 100km가량 떨어진 경기 북부 연천으로 옮겨오게 된 사연은 3년 전 미국 뉴욕에 출장차 머물고 있던 박은관(62) 시몬느 회장에게 김 작가가 한밤중에 전화를 건 데서 시작된다.
시몬느(Simone)는 세계 럭셔리 핸드백 시장의 10%를 책임지는 세계 1위 핸드백 제조사. 박 회장은 1987년 자본금 1억 원으로 시몬느를 설립해 30년 만에 연매출 1조 원이 넘는 회사로 키워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조각공원 만들 것
“알았어. 서울 가서 연락할게.”
2014년 여름 김 작가는 차를 몰고 경기 양평 도곡리 일대를 지나가다가 양평종합운동장 건설 현장에서 무더기로 쌓여 있는 핵석을 발견했다. 서울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대리석 산지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토스카나주(州) 카라라(Carrara)의 국립카라라미술대학에서 유학한 뒤 줄곧 돌 조각만 해온 그다. 한눈에 조각 재료로 두말할 나위 없음을 알아챘다. 현장 일꾼들에게 작은 돌 하나 가져가려면 얼마를 주면되느냐 물었다. 50만 원. 그러면 큰 것은? “알아서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공사 현장에서는 예상외로 큰 돌들이 나와 골치가 아픈 눈치였습니다. 치우는 데도 돈이 많이 드니까요. 그러나 내 눈에는 보석으로 보였어요. 돌이 좋은 조각 재료가 되려면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단단하고, 크랙(crack)이 없고, 색이 균일해야죠. 이 조건들에 맞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매우 컸습니다. 대규모 거석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제 오랜 꿈이었는데, 드디어 그 꿈을 실현할 드림 스톤(dream stone)을 만난 거지요.”
박 회장은 뉴욕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사비를 털어 ‘돌값’ 5000만 원을 김 작가에게 보내줬다.
“‘한두 푼도 아니고 그래도 뭘 사는지 좀 봐야 할 거 아니냐’고 했는데, ‘그냥 네가 알아서 해’ 한마디만 하더군요.”(김창곤)
“창곤이는 평생 돌만 만져온 친구예요. 제가 봐서 뭘 알겠습니까. 그리고 뉴욕에서 통화할 때 그 목소리가 참으로 떨리고 설레는 음색이었어요. 운명의 짝을 만난 사내 같았지요.”(박은관)
그 여름, 김 작가는 공사 현장에서 바로 작업 활동을 개시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다가, 여기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오랜 시간을 투자해 제대로 해내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박 회장이 양평으로 왔다. 그리고 며칠 만에 둘은 ‘핵석 프로젝트’에 예산 수십억 원과 1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입하기로 뜻을 모았다. 핵석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으로 조각공원을 세워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골자다.
“걸작이 될지 졸작이 될지 모를 일에 사비를 지원하겠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박 회장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 견줄 만해요.”(김창곤)
“양평에서 돌을 쓸어내리며 ‘은관아 이거 봐라. 우리 이거 버리지 말자’고 하는 김 작가가 너무도 열정적이어서 김새게 만들 순 없었어요(웃음). 사람 인생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수억 년 된 돌을 사유하겠다는 것은 만용이지요. 우리 사회에, 자연에 되돌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에 우리와 뜻이 맞는 지역사회를 찾아 기부하려는 겁니다.”(박은관)
41대의 트레일러로 한 달간 옮겨
김 작가는 연천군 전곡읍의 옛 돼지농장을 작업장으로 빌렸다. 우선 지반 정비공사를 한 뒤 한 달에 걸쳐 100여 개 핵석을 양평에서 이곳으로 실어 날랐다. 모두 41대의 트레일러가 동원된 대작업이었다. 무게 때문에 도저히 트레일러에 실을 수 없는 핵석은 둘로 쪼개 각각 옮겨왔다. 작업장 안에서도 돌을 옮기고 자르고 다듬어야 하기 때문에 지게차와 크레인, 공업용 다이아몬드가 들어간 와이어소(Wire Saw·줄로 된 톱으로 철근, 암석 등을 절단하는 데 쓰인다) 등도 들여왔다.
일주일에 이틀은 홍익대 조소과로 강의를 나가고 나머지는 이곳 작업장으로 와 핵석과 씨름한 지 벌써 3년이 됐다. 김 작가는 40년 조각 인생 내내 돌을 재료로 삼았다. 서울 서초구 외교센터,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 경기 강화군 강화고인돌체육관 등 전국 30여 곳에서 돌로 만든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중학생 때부터 돌이 좋았습니다. 오래되고 심지가 굳은 돌의 물성에 아주 오래전부터 매료됐던 것 같아요. 로맹 롤랑이 쓴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란 책을 읽고 미켈란젤로를 흠모하게 됐는데, 그가 카라라에서 돌을 채취했다는 대목이 나와요. 카라라로 조각 공부를 하러 간 것도 그 때문이지요. 돌을 보면 늘 푸근한 기분이 들고 다뤄보고 싶어요.”
2013년 강화고인돌체육관에 두 개의 거석이 기대어 선 형태의 작품 ‘열린 세계’를 설치한 것은 김 작가에게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 ‘열린 세계’는 높이 9m, 무게 120t의 대형 작품인데,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더 큰 작품, 돌의 원시성을 더욱 드러내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핵석 작업장의 돌들은 여러 형태로 변주 중이다. 몇 가지는 환(環)의 형태로 생의 순환을 표현하고 있고, 몇 가지는 와이어소로 돌의 일부를 잘라낸 뒤 밖으로 밀어내 자연과 인위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많은 돌이 현장에서 캐내 온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 거석 위에 거석 하나를 더 얹어 높이 7m, 무게 150t가량의 거대한 미완의 조형물로 세워놓은 것도 있다. 김 작가는 “최소한의 인위적 행위로 독창성을 갖는 작품을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핵석 작업장에 거의 오지 않는다. 작업장을 구할 때 두어 번 와보고, 3년 만에 ‘신동아’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다. 김 작가는 “국내에서 예술가를 이렇게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도 드물지만, 작가가 마음 편하게 작업하도록 배려해주는 일 또한 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내 인생 또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데, 의미 있게 돈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웃었다.
‘돌의 시간’
“박 회장과 제가 이 돌들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공사 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로 깨부순 뒤 골재로 쓰든지 땅에 묻든지 했을 겁니다. 버려질 뻔한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의미 또한 있는 예술 작업인 거예요. 앞으로 이 돌들이 뿌리내릴 장소가 정해지면, 남은 돌조각들을 죄다 모아서 그곳에 또 하나의 모뉴먼트를 만들려고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의 정신을 존중하는 작업을 할 겁니다. 기대해주세요.”(김창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