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현장 속으로

“집에서 만나는 의료진, 친구이자 심리적 지지자”

호스피스·완화의료 현장을 가다

  • 입력2017-11-0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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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 범위가 대폭 확대된다. 말기암 환자에 국한됐던 시행 대상이 비암 말기질환으로까지 확대되고,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죽음이 아닌 여생에 중심을 둔 ‘사람다운’ 의료가 실현되는 것이다. 달라진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을 현장에서 직접 살펴보았다.
    가정형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있는 말기암 환자 김씨와 충남대병원의 담당간호사 김은숙씨.[박해윤 기자]

    가정형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있는 말기암 환자 김씨와 충남대병원의 담당간호사 김은숙씨.[박해윤 기자]

    대전시내의 한 오래된 아파트. 앞마당 한켠에는 직접 길러 수확한 듯 모양새가 제각각인 빨간 고추가 돗자리에 옹기종기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는 알록달록 키 낮은 자전거가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서 있다. 아파트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하얀 소형차 한 대가 아파트 마당에 들어서고, 이내 꽃다발을 든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사회복지사 김순영(39) 씨.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심호흡 한 번 하고 한낮의 아파트가 머금은 적막을 차마 깰 수 없다는 듯,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가 찾아가는 곳은 말기암 환자 김모(75·여) 씨의 자택이다.

    벨을 누르자 활기찬 목소리의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순영 씨를 반갑게 맞이했다. 김씨의 남편 이모(77) 씨다. 서로 손을 맞잡고 유난히 길었던 추석연휴에 대해 시시콜콜한 안부를 주고받는 모습이 영락없는 이웃사촌이다. 김 씨의 담당간호사 김은숙(45) 씨는 먼저 와 있었다. 이씨는 연휴가 길어 아내가 힘들어했으며, 연락을 받은 은숙 씨가 연휴 중에도 짬을 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렇게 좋은데, 인터뷰해야죠”

    집안은 정갈하고 따스했다. 세간살이는 부부가 함께 산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것들이었으나 어느 것 하나 제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거나 묵은 때가 내려앉은 흔적이 없었다. 안방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 김씨 또한 한눈에 병색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수척한 모습이긴 해도 오랜 투병이 무색하리만큼 정갈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순영 씨가 가져온 꽃다발을 건네자 환자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났다. 간호사 은숙 씨가 주사와 수액 처치 등을 하는 동안 환자와 간호사 사이에는 두 사람만의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김씨는 충남대병원의 가정형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3개월째 이용 중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는 묘한 능력이 생겨난 듯했다.



    평온한 분위기이지만 역시나 취재는 조심스러웠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공간을 낯선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이 여간한 마음으로는 가당치 않았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게 있다는 걸 사람들한테 알리고 우리 같은 사람이 혜택을 더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인터뷰를) 해야죠.”

    남편 이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의 집엔 이미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고 했다. 그중에는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 확대를 위한 시범사업 운영에 필요한 실무를 익히기 위해 서울이며 강원도에서 온 의료진도 있었다. 충남대병원은 훨씬 전인 2008년부터 자체적으로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며 시스템을 구축해왔기에 전국 병원들이 이곳의 노하우를 배워가는 것이다.

    또 다른 치유의 과정

    충남대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부장 윤석준 교수.[박해윤 기자]

    충남대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부장 윤석준 교수.[박해윤 기자]

    “너무 늦었던 거죠. 정기검진 때 위내시경만 제대로 했어도 초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을 4기가 다 되어서야 알게 됐으니 손쓸 틈이 없었습니다. 위를 다 덜어내고 십이지장도 일부를 절제해 식사조차 어려워졌으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항암치료도 소용없더군요. 항암치료 몇 번에 오히려 사람이 초주검이 되었어요. 집사람도 너무 힘들었는지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더군요. 병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거리는 모두 걸어 다닐 만큼 건강하던 사람이었는데….”

    가족이 받은 충격도 적지 않았다. 잔병치레 한 번 않던 쾌활한 성격의 김씨가 말기암 판정을 받고 몸져눕자 남편과 자녀들은 병원을 서울로 옮기면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은 치료법은 없을까 우왕좌왕 발을 구르며 조바심을 쳤다. 서로 마음을 다치게 하고 눈물을 훔치면서도, 여기서 치료를 중단하면 아내를, 엄마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가족을 설득한 사람은 환자 김씨였다.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기까지 가족 또한 적잖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지만, 지금은 그 뜻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최선임을 가족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죽음이 아닌 남은 ‘삶’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흔히 알려진 웰다잉(Well-Dying), 즉 ‘평온한 죽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또 다른 치유의 과정으로 이해돼야 한다. 호스피스·완화의료의 목적은 통증과 증상 완화를 포함한 다양한 의료 서비스와 심리적 안정, 사회적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말기 환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 ‘삶을 한결 가치 있고 평온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환자는 물론 가족을 대상으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 평가를 시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환자는 고통스러운 치료를 이어가는 것으로 여생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환자의 가족은 환자가 평온한 상태로 자신의 생애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 효과는 충분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환자의 치료를 책임진 의료진에게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의료진이 치료 가능성이 없다고 인정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 김삼용의 의료봉사로 첫 시작

    충남대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팀 사회복지사 김순영 씨는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공한다.[박해윤 기자]

    충남대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팀 사회복지사 김순영 씨는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공한다.[박해윤 기자]

    “우리 병원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실시하던 초기에는 국가 지원이 전무해 극히 제한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와 그 가족들이 그렇게 고마워하실 수가 없더라고요. 수가시범사업을 진행하게 돼 예전에 비하면 여건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분이 이 서비스 자체를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어요. 또 거리상의 문제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호스피스와 완화의료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충남대 호스피스·완화의료팀 김은숙 간호사의 설명이다. 충남대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부장 윤석준 교수는 “여전히 호스피스 병동을 ‘죽으러 가는 곳’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일반 병동과 호스피스·완화의료는 환자를 보는 목적과 목표가 다르다”고 강조했다.

    “여전히 많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대상 환자가 일반 병동에서 치료를 이어가는 실정입니다. 그분들이 일반 병동에 머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치료를 계속하려는 의료진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식 전환과 이해를 위한 교육이 환자와 그 가족은 물론 의료진을 대상으로도 폭넓게 이뤄질 필요가 있습니다.”

    충남대병원의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는 올해 퇴임한 혈액종양내과 김삼용 교수와 황관옥 간호사가 2000년대 초 의료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 계기가 돼 오늘에 이르렀다. 국내에서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에 대한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기여서 병원 내에 자체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봉사단을 꾸려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환자와 가족들이 얻은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환자 박모(72·여) 씨의 집. 앞서 방문한 김씨에 비해 박씨는 혼자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기력이 좋은 편이었다. 서울의 다른 병원에서 수술과 치료를 반복하던 그는 치료를 중단하고 여생을 집에서 보내기로 결심한 후 자택 근처에 있는 충남대병원으로 옮겨왔다.

    “전담 간호사가 수시로 집으로 와서 주사도 놓아주고 살펴봐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런 게 없다면 통증이 있거나 몸이 힘들 때마다 병원에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거예요. 이전에는 수액 하나 맞으려고 병원에 입원하곤 했으니까요.”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도 참여

    <호스피스 · 완화의료 주요 제도 변경 사항>

    <호스피스 · 완화의료 주요 제도 변경 사항>

    <가정형 및 자문형 호스피스 시범사업 대상 기관>

    <가정형 및 자문형 호스피스 시범사업 대상 기관>

    <가정형 및 자문형 호스피스 시범사업 대상 기관>

    <가정형 및 자문형 호스피스 시범사업 대상 기관>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는 전담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그리고 자원봉사자가 팀을 이뤄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일반병동과는 의료 행위의 목적부터가 달라지는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기 전 다시 한 번 환자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는 전인적인 평가 과정이 필수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의료 조치를 처방하면, 간호사는 주기적으로 환자 집을 방문해 상태를 체크하고 적절한 의료 조치를 취한다. 처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 환자 스스로가 사전에 알아두면 좋은 자가 조치 방법 등에 대한 안내도 수시로 이뤄진다. 박씨 가족은 “북적이는 병원에서 시간에 떠밀려 진료받을 때보다 한결 안심되고 신뢰가 간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는 환자 혹은 환자 가족에게 필요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안내하고 미술치료, 음악치료 등 의료적 조치 외의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유기적 활동을 통해 이들은 환자와 가족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친구이자 심리적 지지자가 되어준다.

    “환자 대다수는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생업 문제 등으로 가족 중 환자를 돌볼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입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설령 돌볼 가족이 있다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아플 경우 돌봄의 질이 확연히 떨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고요. 환자인 아내에게 물 한 그릇 떠다주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남편이 꽤 많습니다. 환자와 나머지 가족이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거겠죠. 환자와 가족들에게 더는 혼자가 아니니 용기 내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려워 말고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호스피스 팀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충남대 호스피스완화의료팀 이수정 간호사의 당부다.

    우리나라의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는 ‘암관리법’에 그 근거를 두고 2008년부터 시행됐다. 대상은 말기 암 환자에 국한되었고, 입원형 서비스 중심으로 운영돼왔다. 그러나 2016년 1월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면서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확대하고 보다 체계화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에 따라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 대상 질환은 말기암 외에도 비암질환 3종, 즉 말기 에이즈(AIDS), 말기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말기 만성간경화로 확대된다. 내년 2월부터는 질병을 불문하고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 대해서도 임종 돌봄 등 호스피스 서비스가 제공된다.

    기존 입원형 위주의 서비스 형태에 가정형과 자문형이 추가됐다. 입원형은 환자가 지정된 완화의료전문병동에 입원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가장 1차적인 형태다. 가정형은 앞서 소개한 사례에서와 같이 완화의료전문팀이 환자의 거주지를 방문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복지부는 2015년부터 가정형 서비스를 수가시범사업으로 운영해왔다. 한편 자문형은 일반 급성기 병원에서 호스피스전문팀이 환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지난 7월에 수가시범사업이 개시됐다.

    올 연말 열릴 예정인 호스피스·완화의료 사진전에 출품될 사진들.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의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다. 환자와 가족의 애틋한 사랑(작은 사진).[제공 환 크리에이티브]

    올 연말 열릴 예정인 호스피스·완화의료 사진전에 출품될 사진들.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의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다. 환자와 가족의 애틋한 사랑(작은 사진).[제공 환 크리에이티브]

    “비암성 말기질환까지 확대할 것”

    이외에도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됨으로써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가 설치돼 호스피스·완화의료 사업의 체계적 추진을 도모하게 됐다. 중앙 및 권역별 호스피스센터도 새롭게 지정돼 구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또한 내년 2월부터는 요양병원에서도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그간에는 병·의원 및 한방 병·의원만 호스피스·완화의료 제공기관으로 허용됐었다. 보건복지부 질병정책과 관계자는 “2016년 9월부터 12개 요양병원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실시해 제공 모델 및 수가 적정성 등을 검토하고 제도를 보완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WHO)를 중심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의 개념은 확산되는 추세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호스피스’ 서비스에 치중하던 의미에서 2002년을 기점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여명(餘命) 6개월 이하의 모든 말기 질환에 대한 완화의료(Palliative care) 개념으로 확대됐다. WHO는 2014년 제58차 세계보건총회(World Health Assembly)에서 완화의료 확산전략을 제시했는데, 만성질환 진단 초기부터 다양한 서비스로 질환 치료와 더불어 연속성을 가지고 제공하라는 것이 그 골자다.

    WHO는 또한 완화의료 제공 단계를 △완화의료 접근 △일반 완화의료 △전문 완화의료 3단계로 구분하는데, 현재 우리 정부는 이 중 세 번째인 전문 완화의료의 활성화 및 다양화에 집중하고 있다. 복지부 질병정책과 관계자는 “중장기적으로는 호스피스적인 돌봄이 모든 의료기관에서 일상적인 활동이 되는 ‘완화의료 접근’, ‘일반 완화의료’로까지 나아가 말기 환자뿐만 아니라 안정기의 만성 환자와 가족, 증상치료가 필요한 환자와 가족까지 서비스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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