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21세기 소설의 지도와 영토의 현상학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2-09-20 10:2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1세기 소설의 지도와 영토의 현상학

    ‘지도와 영토’<br>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문학동네, 518쪽, 1만4800원

    지난 8월 4일 자정 무렵 파리에 도착해 날이 밝자마자 달려간 곳은 센 강변 지척의 지베르 조제프라는 단골서점이었다. 프라하에서 파리로 오자마자 곧바로 프랑스 북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랭보의 고향 마을 샤를르빌 메지에르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후 사흘 동안 프랑스와 벨기에를 자동차로 돌아볼 예정이었다. 자동차를 골목에 잠시 세워놓고 늘 그렇듯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늦었지만) 올해 미슐랭 지도를 샀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그것도 세계 디지털 초강국인 삼성 본사가 있는 한국에서 온 작가로서는 뜻밖의 행동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 해도 매년 신판 지도를 살 것이고, 그것에 의지해 낯선 길을 떠날 것이고,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벅찬 감동을 느낄 것이다.

    아버지가 차에 기름을 가득 채우는 동안 제드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크뢰즈 지역의 미슐랭 지도를 샀다. 비닐 포장된 클럽 샌드위치 진열대에서 두어 발짝 떨어져 지도를 펼쳐들었을 때, 제드는 생애 두 번째로 커다란 미학적 발견을 했다. 지도의 아름다움에 전율이 일었다. … 그는 크뢰즈 지역과 오트 비엔 지역을 15만분의 1로 축소해놓은 이 미슐랭 지도만큼이나 훌륭하고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물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문학동네, ‘지도와 영토’ 중에서

    내가 처음 지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러니까 지도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은 한글을 막 깨쳤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숙제까지 마친 오빠와 나는 지명 찾기 놀이에 열중하곤 했다. 딱히 놀잇감이 없던 때였고, TV보다는 라디오에 친숙했던 시절이었다. 미션으로 주어지는 지명은 작고 희미하게 적혀 있는, 주로 오지였고, 때로는 눈앞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대도시가 슬쩍 수색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도는 광활한 우주였고, 지명은 셀 수 없이 퍼져 반짝이는 별이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별, 아니 지명을 훗날 지나가거나 직접 방문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는데, 그때는 마치 영화나 소설 속 가상의 도시 속으로 들어가듯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쩌면 일찍부터 먼 곳, 낯선 곳을 동경하며 틈만 나면 떠나려는 노마드적인 기질은 그때 지도찾기의 황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때로 나는 이렇게 당당히 외치며 사는지도 모른다. 지도, 그것은 곧 나에게 사전이고, 세상이고, 문학이다.

    지도 속에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기술적 이해와 모더니티의 본질이 동물적 삶의 본질과 한데 섞여 있었다. 색깔로 구분되는 약호만 사용한 그림은 복잡하고 아름다웠으며, 완전무결한 명료함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도에 따라 달리 표시된 각각의 마을과 촌락들에서 수십, 수백여 생명과 영혼들의 맥박 소리와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중 어떤 영혼들에게는 천형이, 어떤 영혼들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을 터였다. - 위의 책 중에서

    ‘지도와 영토’의 선해석



    지도애호가를 넘어 지도예찬자인 나에게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는 프랑스에서 출간되던 순간(2010)부터 제목만으로도 나를 사로잡았다. 1년 후 한국어판으로 번역돼 나오자마자 점검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나는 즉시 그것을 읽고 쓰지 않았다. 겨울과 여름 중앙아메리카와 유럽으로 떠났다가 돌아와서 서재 벽과 서가에 현지 지도들을 붙여놓고 그 앞에 서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것은 책상 한 편에서 길어지는 침묵에 항의하듯 수시로 나를 자극했다. 그러면 나는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컴퍼스를 든 채 몸을 비스듬히 굽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을 응시하는, 베르메르의 유화‘지리학자’(1668)를 떠올렸고, 그때마다 정신의학자 크리스토프 앙드레가 쓴 이 ‘지리학자’에 대한 통찰을 환기했다.

    수세기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학자의 탐구는 우리와 가까이 있다. 작업실의 닫힌 공간으로부터 그는 세계지도를 그리느라고 열정을 바치고 있다. … 사실 우리는 늘 행복을 찾고 있다. … 화가들은 신비를 푸는 데 그림은 하나의 가이드가 되거나 그 자체로 수수께끼가 될 수 있다. … 우리의 지리학자, 그도 하나의 수수께끼를 찾으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잘못된 방식으로 그것을 찾고 탐구하고 정정하고 성찰해왔다는 사실을 그는 마침내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들어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함정임·박형섭 옮김, 마로니에북스, ‘행복의 기술’ 중에서

    베르미르의 ‘지리학자’와 2012/13년 미슐랭 프랑스지도를 거쳐 지난 8월 10일, 나는 급기야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지도와 영토’를 펼쳐 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나는 무엇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영토(territoire)’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알기로,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프라하에서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미술랭 지도를 챙겨 달려갔던 샤를르빌 메지에르의 랭보와 관계된 것이고, 랭보가 외친 정언 ‘절대 현대 세계로 들어가라’와 관계된 것이고, 그리고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펠릭스 가타리와 철학자 질 들뢰즈가 오랜 세월 공동으로 탐구한 ‘천 개의 고원’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곧, 영토란 무엇인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를 읽으려면 그러니까, 쿤데라가 ‘커튼’에서 지칭한, ‘선(先)해석’들에 대해 점검해야 했다.

    어떤 사물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는 것과 어떤 땅에 자기 깃발을 꽂는 것은 같은 일이다. 어느 고등학교 교장은 교정에 흩어져 있는 나뭇잎을 한 장도 남김없이 주운 다음 도장을 찍어 원래대로 뿌려두었다. 서명(sign)한 것이다. 영토를 나타내는 지표는 기성품(ready-made)이다. … 소박한 예술가는 영토성의 운동 가운데 표현의 질료를 형성하고 해방시킨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토대 또는 토양을 이루고 있다. 어떤 것이라도 취해 표현의 질료로 바꾸는 것. - F.가타리 · G.들뢰즈 지음, 김재인 옮김, 새물결, ‘천 개의 고원’ 중에서

    영토보다 흥미로운 지도

    미슐랭 지도와 베르미르의 ‘지리학자’, 그리고 가타리와 들뢰즈가 앞서 해석한 ‘영토론’을 통과한 뒤에야 나는 ‘지도와 영토’의 첫 장을 열 수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이었고, 책상 한 편에 이 책이 자리 잡은 지 1년 만이었다. 소설의 기본적인 특성은 ‘재미’에 있지만, 소설이 시대를 초월해 생명력을 확보하게 된 것은 이 재미와 더불어 우리 삶의 벅찬 순간과 감동을 전하는 기록과 견해(사상), 미(美·예술)의 기능을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기록은 사실(fact·역사)의 차원에, 사상은 세계관(비전)의 차원에, 미는 새로움(도전)의 차원에 연계된다. 소설을 지속적으로 읽는 행위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이며, 탐구는 연대기적 흐름과 지금-이곳의 현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감식안의 작동과 연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파리국립예술학교 출신의 제드 마르탱이라는 사진가이자 화가를 주인공으로 현대와 예술의 관계, 인간의 삶과 죽음의 방식, 위협적으로 변화하는 21세기의 속도와 속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를 끝까지 (살피며 또 견디며 심지어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데 특히 필요하다.

    제드 마르탱이 생애 후반부에 몰두했던 작품들은 유럽 산업시대의 종말, 보다 폭넓게는 인류가 이룩한 산업 전체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특성에 대한 향수 어린 명상으로 비칠 수 있다. … 당혹감은 제드 마르탱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함께 했던 인간들을 소재로 한 작품, 즉 혹독한 기후의 영향을 받아 분해되고 박리되고 산산이 찢겨나간 사진들을 촬영한 영상을 마주할 때도 계속된다. 아마 이것이 인류의 전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리라.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문학동네, ‘지도와 영토’ 중에서

    이것은 사진가이자 화가인 제드 마르탱의 최후를 증언하는 형식의 소설 마지막 대목이다. 소설은 한 인간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성실하게 쫓아가는 전통적인 서사의 흐름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다. 작가는 인물에게 일어난 사건과 사건에 담긴 시간을 해체해 (혼란스럽게) 재배치하고, 독자는 혼란스러운 사건과 시간의 조각을 하나하나 찾아 한 편의 (반듯한) 퍼즐 작품으로 완성해간다. 작가의 기질에 따라 유발하는 혼란의 정도가 다른데, 미셸 우엘벡의 경우, 진폭도 크고 내용도 다채롭다. 소설이라는 종자가 세상에 던져진 후 지금껏 그랬지만, 21세기의 소설가들은 문자 또는 기호로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이 가능한 장르가 소설임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액자형식에다 다중시점은 기본이고 심지어 소설 속에 자신을 직접 등장시키는가 하면, 고전적인 예술비평에서부터 21세기적 디지털 매체 환경의 지식과 정보 짜깁기까지 ‘지도와 영토’를 통해 우엘벡이 이끄는 소설적 행보는 종횡무진하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가 소설 제목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주제, 곧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지도를 소설로, 영토를 현상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순전히 나, 또는 독자의 몫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