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경북 봉화군 물야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입력2012-09-20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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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닭실마을 전경.

    춘향전은 실화다. 도발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실화라고 믿는 사람이 있고 또 그에 합당한 증거도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가장 오지인 경북 봉화 땅, 행정구역상으로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들어섰다. 이몽룡의 고향집인 계서당(溪西堂)이 ‘숨겨진 봉화의 보물’이라는 입간판과 함께 눈에 띈다.

    춘향전 주인공인 성이성 선생이 1613년 건립해 후학 양성에 힘쓴 곳이다. 선생은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여겨진다. 경북 영주에서 출생해 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간원 사간, 홍문관 교리를 거쳤다. 이어 네 차례 암행어사를 맡은 것으로 나와 있다.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밝혀진 사실이고 KBS TV는 ‘역사 스페셜’을 통해 “이몽룡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한 바 있다. 그래서 봉화 땅을 밟는 외지인에게 계서당은 의외의 놀라움을 안긴다. 요즘 말로 치면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대목이다.

    안내판과 팸플릿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아버지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재직할 당시 10대의 성이성은 남원 땅에서 과거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한루를 구경하던 중 춘향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요즈음 말로 필이 꽂힌 것이다. 이후 아버지가 한양으로 부임하자 아버지를 따라간 성이성은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두 차례 호남으로 암행했으며 자신의 저서인 ‘호남암행록’에서 “눈 내리는 겨울 광한루에 올라 옛 생각에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이몽룡의 실제 인물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무명의 춘향전 작자는 성이성의 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이몽룡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낯선 이들은 안내 입간판이 전하는 러브 스토리에 고개를 끄떡이며 저마다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봉화로 가는 길은 이미 가을빛이다. 여름은 어느새 높아진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다. 가을은 계엄군처럼 소리 소문 없이 들녘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영주 부석사를 옆에 끼고 한참 달리는 봉화군 물야로 가는 길, 개량종이 아닌 오리지널 키 작은 코스모스와 벌개미취, 구절초가 길옆에서 서걱거린다. 고추는 스스로 빨갛게 물들고 있다.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계서당 사랑채.

    한국에서 가장 외진 땅

    모두에게 잊힌 땅인 절대 오지, 봉화가 일반인에게 다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영화 ‘워낭소리’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소와 함께 자란 기성세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산골짝 마을. 그나마 읍 소재지에는 4, 5층짜리 건물이 몇 동 있다. 그러나 읍을 제외한 지역은 밋밋하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하더니, 오지라는 점 덕분에 지금 시대에 오히려 각광받고 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정자가 가장 많다. 확인된 것만 101곳, 사라진 정자까지 포함하면 170 곳을 훌쩍 넘긴다고 한다.

    춘양목으로 불리는 잘생긴 소나무가 지천이다보니 솔잎조차 풍성한가보다. 내놓을 먹을거리가 변변치 않은 곳인데 딱 한 가지 유명한 게 있다. 바로 솔잎 돼지갈비다. 솔잎 위에 갈비를 얹어두고 불을 지펴 구워낸다. 솔향이 고기 깊숙이 스며들어 송이 맛까지 난다. 언젠가 서울 강남 거리를 지나다 본 봉성 솔잎갈비의 본고장이 바로 봉성면 봉성마을이다. 빈한했던 시절, 이른 봄날 물오른 소나무 가지의 단물까지 빨아먹던 장년 세대들에게 향수라는 맛까지 더해져 찾는 이가 많다고 식당 주인이 말한다.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오전약수터.

    ‘솔잎 돼지갈비 맛’ 일품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 태백과 거기서 굽이쳐 나온 소백의 틈, 이른바 양백 사이에 자리한 데다 태백산과 청량산, 소백산으로 둘러싸여 세숫대야의 물처럼 고요히 담겨 있는 땅. 분지인 만큼 개마고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춥고 눈까지 많다. 그래서 기차역조차 봄볕이 간절한 춘양역(春陽驛)으로 불린다. 또한 이곳에서 자라는 금강 소나무의 이름마저 춘양목(春陽木)인 것이다.

    동해안 울진의 해산물과 영남 내륙의 농산물이 오고 가는 땅, 봉화는 아득한 옛날, 보부상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었다.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등짐을 지고 고갯길을 집 삼아 다니던 사람들, 울진에서 해산물을 잔뜩 지고 멀리 안동 벌로 오가는 고된 여로를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피곤한 보부상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 오전약수터다. 이들이 쑥대밭에서 잠시 졸다 꿈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약수터 입구에는 보부상 조각상이 서 있다. 그러나 미적 감각을 전혀 찾아볼 길 없는 조각상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오전 약수는 탄산수다. 실제 마셔보니 탄산음료의 독특한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청암정

    약수터 옆에는 호박엿 파는 좌판이 즐비하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인데 옆에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던 권태균 선생의 설명으로 이해가 된다. 엿을 먹으면 자연스레 물을 찾게 되고 물 맛 또한 더없이 좋게 느껴진다는 해석은 무릎을 탁 치게 한다. 그래서 페트병에 약수를 담아 파는 물장수들의 상술이 호박엿 좌판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수터에서 물을 파는 것은 현행법에 엄격히 규제된다. 그래서 약수터에서는 물값 대신 페트병을 조금 비싸게 팔아 물 파는 이익을 대신 남긴다는 설명에 세상살이의 묘한 이치를 보는 듯하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정자

    가을 초입, 물야 들녘엔 담배농사가 한창이다. 군데군데 펼쳐진 들판에서 할머니들은 소박한 담배 꽃과 커다란 담배 잎을 따 자루에 담느라 손을 바쁘게 움직인다. 새벽 5시 반에 나와 열 시간 일하고 받는 일당은 6만5000원. 게다가 새참과 중식, 커피까지 제공돼 벌이가 쏠쏠하다고 건강한 모습의 팔순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는다. 그런데 도대체 이 땅의 영감님들은 모두 어디 가셨는지, 들녘에는 할머니들뿐이다. 사실 여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오지를 찾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봉화읍 유곡리에는 닭실마을이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충재 권벌의 후손들인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충재 고택 입구의 정자가 눈길을 끈다. 푸른 바위에 지은 정자, 청암정(靑巖亭)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위의 땅을 파내 정자를 두르는 연못을 만들었다. 바위틈에다 단풍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했고, 둑에는 크고 작은 느티나무, 향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이 둘러 있다. 그 틈을 뚫고 허리를 잔뜩 구부린 떡버들나무가 수백 년 세월을 지키고 있다. 자연을 절묘하게 이용해 건축가들이 다투어 찾는 곳이다. 영화 ‘바람의 화원’ ‘음란서생’, ‘스캔들’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정자를 보며 셔터를 누르는 젊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봉화 땅 물야 들녘은 이미 푸른빛을 시름시름 잃어가고 있다. 나락은 하루가 다르게 금빛으로 물들고 들녘의 콩은 태양빛에 여물어간다. 곧 가을은 깊어갈 것이며 과꽃들도 머리를 떨어뜨리고 저 혼자 바싹 마를 것이다.

    칸나에 얽힌 추억들

    이렇게 생명의 기운이 잦아드는 들녘에 나 홀로 핏빛으로 독야청청 서 있는 꽃이 눈에 띈다. 칸나다. 아뿔싸, 칸나만큼 기성세대에게 각인된 꽃이 또 있을까. 서울대 미대를 거쳐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구혜영의 소설 ‘칸나의 뜰’은 그 시절 청춘들이 밤새워 읽던 책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때의 청춘들은 졸업 시즌이 되면 저마다 칸나 앨범을 주고받으며 꽃말처럼 ‘행복한 미래’를 맹세하곤 그랬다. 그래서 추억의 또 다른 이름인 칸나 앨범은 그 시절 청춘에게 찌릿찌릿한 설렘을 안겨주던 서랍장 안의 보물이었다. 그런 연유로 1978년, 지금은 역사가 되어버린 TBC에서는 동명의 소설을 토대로 ‘칸나의 뜰’이라는 주말 연속극을 방영해 장안을 울린 바 있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한때 그토록 소중했던 앨범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고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 꽃마저 지금의 도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태양이 뜨거워지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이국적인 칸나는 청춘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러나 잠시 칸나가 남몰래 말라가면 가을이 깊을 대로 깊어진다. 그 농익은 핏빛 꽃잎 때문에 시인 나희덕은 봄이 와도 칸나가 필 때까지는 여전히 겨울이라고 노래했다. 가을이 신작로에 흠뻑 젖어들었다.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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