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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③ 예수와 소크라테스 재판

“기득권에 저항한 자, 죽어라!”

정치범의 탄생

  • 이창무│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기득권에 저항한 자,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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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법도 법인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줄곧 아테네 정치를 비판했다. 소크라테스는 “신발 만드는 일에도 전문가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국가 관리자와 법관을 왜 전문적 교육을 통해 양성하지 않고 선거를 통해 뽑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사회 현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평화로울 때는 이러한 비판이 별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나쁘게 된 것과 관련해 속죄 내지는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야말로 그것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하는 데 원인을 제공한 알키비아데스와 민주제를 흔들었던 참주정권의 핵심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는 사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의 마음을 동요케 하는 데 적잖이 작용했다.

소크라테스 재판과 떼놓을 수 없는 게 ‘악법도 법이다’란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는 기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독배를 들이켰다는 사실과 관련해 누군가 지어낸 말로 이해된다. 일부 학자들은 ‘악법도 법이다’란 주장은 정부와 관변 학자들이 ‘잘못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준법정신을 강조하고자 소크라테스의 ‘압도적 권위’ 빌려 꾸며낸 말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악법을 지키느라고 목숨까지 잃는데 보통사람이 법을 지키는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다수 학자는 소크라테스가 유죄 및 사형판결을 스스로 유도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독배를 준 것은 아테네 시민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진보 언론인 I F 스톤 역시 ‘소크라테스의 재판(The Trial of Socrates)’이란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학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을 견디지 못해 죽음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왜 죽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호기심을 갖게 하고 죽음의 원인이 연구 대상이 되게 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철학이념을 퍼뜨리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전주의 학자 워터필드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아테네의 고질적 병폐를 치유하길 원했다고 분석했다. 자진해 ‘희생양’이 되어 아테네가 오랜 논란을 불식하고 좀 더 조화로운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게끔 했다는 것이다. 뒤르켐(Emile Durkheim)이 말하는 이른바 ‘이타적 자살(altruistic suicide)’인 셈이다. 정치철학자 그린버그(N. A. Greenberg) 역시 도망을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법률에 복종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천박해 보인다. 죽음을 경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인간적으로 보인다…(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명예의 빚을 지불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유죄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 같은 견해를 내놓은 대표적인 사람이 헤겔이다. 헤겔은 아테네 법정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의 판결에 대해 자기 양심의 법정에서는 무죄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어떤 국민도 결코 양심의 법정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한 국가의 제1원리란 국가가 법이라고 인정한 것 이외의 더 높은 이성, 양심,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철학적 순교라고 칭송한 영국의 철학자 J S 밀도 아테네 법정이 “정직하게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고 봤다.

‘만들어진’ 증인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뒤 400여 년이 지나 또 다른 역사적 재판이 열렸다. 이번에는 예수가 주인공이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자신이 그날 밤 제자 중 1명의 배반으로 인해 로마군에 잡혀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예수는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땅에 엎드려 기도한 후 잠든 제자들을 깨웠다.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니라.”(마태복음 26:46)

이윽고 로마 군인들이 대제사장들과 함께 찾아왔다. 유다가 예수에게로 오더니 입을 맞추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신호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저항하려 하자 예수가 말렸다. 예수는 조용히 끌려갔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찾은 때는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예수는 제자 몇 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자신이 메시아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성전으로 갔다.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고 좌판과 의자를 뒤엎었다. 평소의 예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성전에서 설교를 마친 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복음 24:2)

예수의 이 말은 곧바로 유대인의 귀에 들어갔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소집해 예수의 언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예수를 심판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71명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유대 사회의 최고 법원 역할을 했다. 산헤드린에서는 율법 및 종교 관련 사안을 다뤘다. 신성을 모독하거나 이단 혹은 주술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있는 사람을 상대로 재판을 열어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었다. 물론 로마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는 처벌 이전에 로마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산헤드린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증인이 최소한 두 명 이상 있어야 했다. 예수 재판 때는 두 명의 증인을 찾기 어려웠다. 예수의 행동이 신성모독이라거나 이단, 주술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인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를 처벌하려면 증인을 ‘만들어내야’ 했다.

예수를 붙잡아온 이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갔다. 두 사람이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헌 뒤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거짓으로 증언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사실이냐고 캐묻자 예수는 답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이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구했다. 결정적인 질문이었다. 만약 아니라고 부인하면 사람들의 비웃음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고 인정하면 신성모독으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태복음 26: 64)라고 답했다. 자신이 메시아라고 떳떳이 밝힌 것이다. 메시아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신성모독이 곧바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신성모독이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준 ‘야훼’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직접 부를 때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예수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왔다. 총독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예수는 “네 말이 옳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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