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경주 능지탑 유물을 설명하는 정영호 관장. 석주선기념박물관은 1981년 한국 복식사 연구의 선구자인 난사 석주선이 민속유물 3365점을 단국대에 기증해 문을 열었다. 1999년 3월 단국대박물관과 통합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966년 9월 석가탑이 훼손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한국미술사학계의 태두인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 진홍섭 전 이화여대 박물관장과 함께 부리나케 경주로 내려가 망가진 석가탑을 구석구석 살피며 망연자실했다. 도굴범들의 소행으로 일부 훼손된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2층 탑신부(塔身部)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유물 45건 88점을 담은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장치)가 발견됐다. 불행 중 얻은 수확이었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해 석가탑 중수문서, 금동 사리외함, 금동 방형 사리합 등 빼어난 유물들이 쏟아졌다.
정 관장은 1952년 서울대 사범대 역사학과에 입학한 뒤 초대 문화재 전문위원, 단국대와 한국교원대 사학과 교수 및 박물관장 등을 거치며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발로 뛰어왔다. 지금도 불교미술사의 권위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 60년간 국내에서 복원된 탑은 대부분 그의 조언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11월 26일 경기 용인시 수지구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관장실에서 정 관장을 만났다. 하얀 가운을 입고 토시를 낀 차림이었다. 유물을 정리할 때 입는 복장인데 유물을 자주 다루기 때문에 아예 박물관에서는 항상 이런 복장으로 지낸다고 했다.
정 관장은 46년 전 불국사 주지스님 방에서 석가탑 사리장엄구를 열어 국보급 유물을 수습하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몰려든 기자들의 눈을 피해 자정부터 전깃불을 환히 밝히고 비밀리에 한 작업이었다. 주지스님이 끓여온 향물에 손을 씻은 뒤 경건하게 시작한 작업은 오전 4시 불국사의 아침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차분하게 이어졌다. 정 관장과 황수영 전 총장이 핀셋으로 유물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꺼내면 진홍섭 전 관장이 수첩에 그림을 그리고 꼼꼼히 기록했다. 당시 한방에서 작업한 두 스승은 고인이 되었다.
취재진 피해 유물 수습
사리장엄구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수습하던 순간의 일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살이 통통하게 찐 좀 6마리가 나왔어요. 그 귀한 불경을 갉아먹은 겁니다. 내가 그놈들을 핀셋으로 탁 집어서 빈 약병에 넣고 마개를 닫았어요. 질식해 죽으라고. 석가탑 안에 더 오래 있었으면 불경이 완전히 없어질 뻔했지 뭡니까. 그런데 채벽암 주지스님이 들어오더니 ‘내 방에서 살생(殺生)일랑 하지 마소’ 하십디다. 주지스님은 밖에 나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배불리 먹은 좀들을 풀어줬어요.”
이번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가탑의 전면 해체, 수리 및 복원 작업에 들어간 것은 탑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 모두 심각하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2010년 말 석가탑 전체를 떠받치는 기단석에서 길이 1.32m, 폭 최대 5㎜의 균열과 이격(離隔·사이가 벌어지는 현상)이 확인됐다. 3층으로 이뤄진 탑신부에서는 1층 탑신의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고 3층 모퉁이 기둥돌인 우주도 소실됐다. 상륜부에서는 꼭대기 전체를 받치는 접시 모양의 시설인 노반 모서리가 파손됐으며 꼭대기 보주에는 금이 갔다. 예산 30억 원을 들여 2014년 12월 복원을 완료할 계획이다.
이번 석가탑 전면 해체 과정에서 기단부나 지반에서 새로운 유물이 나올 가능성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이에 대해 정 관장은 신중한 의견을 보였다.
“석탑의 기단부나 땅 밑에서 유물이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어요. 훼손된 부분이 없다면 뭔가 굉장한 게 나올 거라는 ‘보물찾기’ 식 생각으로 기단부와 지대석을 파헤쳐선 안 됩니다.”
정 관장은 “탑의 핵심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사리장엄이기 때문에 설사 뭔가 발굴된다고 해도 이미 나온 사리장엄만큼 중요할 순 없다”고 말했다.
문화재에 평생을 바쳐온 정 관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그의 스승인 황수영 전 총장(1918~2011)이다. 황 전 총장은 동국대 교수,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등을 지내며 불교미술 연구에 매진했다. 개성 출신으로, 고향이 같은 진홍섭 전 관장(1918∼2010),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1916∼1984)과 함께 한국미술사학계의 ‘개성 3인방’으로 불리며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정 관장은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53년, 강의를 하러 온 황 전 총장과 처음 만났다. 정 관장의 지도교수였던 손보기 교수가 인사를 시켜준 것이었다. 당시 레슬링과 럭비를 즐기던 정 관장에게 황 전 총장은 “운동을 한다면서요? 공부하고 답사하려면 무엇보다 건강해야 해요”하며 호감을 보였다. 그때부터 정 관장은 “고고학, 미술사, 역사 공부는 발로 걸어 다니며 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어딜 가든 가장 먼저 마을 노인과 이장부터 만나야 한다는 노하우도 배웠다. 마을의 전설과 유적·유물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황 전 총장은 정 관장과 함께 답사를 갈 때면 “자네는 동네 이장을 찾아봐. 나는 고로(古老·노인)를 만날 테니”라며 역할을 분담했다.
간송, 문화재 항상 두 손으로 다뤄
“황 선생님은 참으로 소박하고 인간적인 분이었어요. 겨울철에 어느 동네에 갔을 때 추워 벌벌 떠는 사람이 있으면 입고 있던 셔츠까지 벗어주고 자신은 벌벌 떨며 돌아오셨어요. 학문적으로는 절대 실수가 없는 분이었어요. 한번 원고를 쓰면 수차 수정하곤 했어요.”
대부호로 명망 있는 문화재 수집가이자 교육자였던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도 황 전 총장의 소개 덕분이었다. 정 관장이 숙명여고 교사를 하던 1957년 황 전 총장을 따라 종로 4가에 있던 간송의 자택을 찾았다. 간송 선생의 자택을 드나들며 귀한 청자 등 문화재를 구경하고 전문가들과 교류했다.
1960년 이곳에서 시작된 단체가 광복 이후 한국의 미술사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한 고고미술동인회다. 간송 선생을 비롯해 황수영 전 총장, 최순우 전 관장, 진홍섭 전 관장 등이 참여했다. 고고미술동인회의 주소는 간사를 맡은 정 관장의 집 주소였다. 고고미술동인회는 1960년 8월 15일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 학술지 ‘고고미술’을 창간해 100호까지 발간하며 미술사학 발전에 기여했다. “당시 ‘고고미술’의 제호를 만든 분이 간송입니다. 간송이 소장하고 있던 추사 김정희의 책들에서 고고미술(考古美術)이라는 네 글자를 각각 찾아 집자(集字)해 만든 제호였지요.” 고고미술동인회는 1968년 한국미술사학회라는 이름으로 발전적 개편돼 지금에 이른다. 간송은 어떤 분이었는지 묻자 정 관장의 표정에 존경심이 우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