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국정원 요원 살해 지시 받은 적 없다 난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

‘간첩’ 원정화 의문의 새 증언

  • 한상진 기자 │ greenfish@donga.com

    입력2014-03-17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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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위부 상선(上線) 김교학? … “2005년경 처음 본 사람”(원정화)
    • “‘김현희처럼 살게 해준다’고 수사기관이 원정화 회유”(계부 김동순)
    • 원정화가 북송시켰다는 40대 탈북 여성… “새빨간 거짓말”
    • 원정화 사건 수사기록, 대부분 원정화 진술에만 의존
    • 원정화, 검증 시작되자 “난 이미 처벌받았다”며 답변 거부
    “국정원 요원 살해 지시 받은 적 없다 난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
    지난해 ‘신동아’ 11월호에는 탈북 여간첩 원정화(40) 씨 단독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원씨가 간첩혐의로 구속돼 5년간 복역 후 출소한 지 석 달 만의 일이었다. 원씨는 인터뷰에서 북한과 중국에서의 행적과 가족관계는 물론 국내에서의 활동내역, 2008년 7월 구속된 이후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신동아’ 인터뷰 이후 원씨는 여러 방송매체에 출연해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인공이라 그의 증언과 주장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원씨는 2008년 10월 간첩 등의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를 포기한 바 있다.

    원씨의 주장은 2008년 당시 공소장, 판결문 내용과 비슷했다.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74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북한공작원이던 부친 원석희는 1974년 남파 도중 국군에 사살됐다. 이후 혁명열사 가족으로 유복하게 살았다. 모친 최OO은 1976년 미술 관련 일을 하던 김동순과 재혼했다.

    △학업 성적이 좋아 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일하고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했다.

    △특수부대 교육 중 다쳐 감정제대 한 뒤 국가재산탐오죄로 복역 후 1996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1998년 보위부에 포섭돼 간첩교육을 받고 중국으로 파견된 뒤 100명이 넘는 탈북자와 한국인을 북송시켰다.

    △원정화 본인, 여동생 김희영(가명), 남동생 김민수(가명) 등 가족 대부분이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몸담았다.

    △북한 보위부의 남파 지령을 받고 2001년 10월 국내에 잠입했다. 미군기지 등의 위치를 파악해 보위부에 보고했다.

    △2002년 10월부터 2008년 7월까지 대북무역을 이유로 14차례 중국에 잠입, 보위부 요원인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간첩활동을 수행했다. 정보요원과 황장엽 등에 대한 암살지령을 받았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원정화 인터뷰 내용이 보도된 후 몇몇 탈북 인사가 원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모두 북한과 중국에서 원씨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원씨 주장 중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제보자 중에는 중국에서부터 원정화와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에서 한때 동거했던 여성도 있다.

    제보자들의 등장

    ‘신동아’는 지난해 12월경부터 본격적으로 검증 취재에 나섰다. 제보자들의 증언을 듣는 한편, 2008년 사건 당시 원씨와 함께 간첩 혐의로 기소돼 4년간 재판을 받은 뒤 2012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원씨의 계부 김동순 씨와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씨는 본인 사건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원정화와 나눈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파일을 ‘신동아’에 제공했다. 김씨가 언론을 통해 원정화 간첩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 원씨 사건의 수사기록이 언론을 통해 확인된 것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사건이다. 왜 정화가 간첩이 됐는지, 왜 정화가 그토록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난 알고 싶다”고 말했다.

    1. 원정화 친부 원석희 의혹

    수사기록과 판결문 등을 보면, 원정화의 주장은 언제나 가족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원씨는 그동안 자신의 친부 원석희 씨를 혁명열사로 소개하면서 “혁명열사의 유가족으로 상당히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원씨를 포함해 가족 대부분이 보위부 관련 일을 하게 된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이 원정화의 일관된 주장이다. 원정화의 주장은 공소장과 판결문에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러나 기자는 최근 원씨의 친부와 관련해 다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2008년 4월 탈북해 한국에 들어온 70대의 강OO(인천 거주) 씨를 통해서였다. 강씨는 “1970년대 초 함경북도 부령군 고무산의 한 병원에서 의사로 일할 당시 원석희 씨를 알게 됐다”며 증언을 시작했다.

    “부령군 고무산 시멘트공장 내에 있는 병원에서 일할 때다. 당시 원석희 씨가 그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공장은 일하기 싫어하고 문제 많은 사람을 모아 국가에서 일을 시키는 곳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원씨는 발이 넓고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거짓말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협심증을 앓아 우리 병원을 자주 찾았다. 원석희 씨와 최OO 씨 사이에 딸이 둘 있었는데, 둘째가 정화였다. 원석희 씨와 최OO 씨가 이혼하는 과정, 최OO과 김동순 씨가 재혼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이들 가족과 냇가로 고기를 잡으러 간 적도 있다.”

    강씨에 따르면, 1970년대 초반 원석희 씨는 모르핀(마약)에 중독돼 당으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당에서 “원석희를 잘 살펴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정도다. 강씨는 “원씨는 최OO과 이혼한 뒤 함흥 의 어느 요양소로 간 걸로 안다. 협심증 때문에 일찍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또 “2008년 4월 탈북 직전 청진의 한 식당에서 원정화의 모친인 최OO과 원정화의 동생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청진에서 사우나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2008년 원정화 간첩사건 당시 국가정보원(국정원)에서 강씨에 대해 조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강씨는 “국정원 요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원에 있던 나를 찾아왔다. 원정화의 가족관계,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의 공소장, 법원의 판결문 어디에도 강씨의 증언, 특히 원정화의 부친 원석희에 대한 강씨의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원정화의 주장과 배치되는 증언임을 알면서도 고의로 기록에서 배제했다는 의혹이 일 수 있는 대목이다.

    원정화의 친부에 대한 강씨의 진술은 계부 김동순 씨가 2008년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주장했던 것과도 대부분 일치했다. 김씨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정화가 자기 친아버지를 모른다고 하는데 모두 거짓말이다. 원정화가 고등중학교 재학 시절 친아버지의 집에 가서 두 달 정도 살다온 적이 있다. 최근 정화를 만나 ‘너 진짜 아버지를 모르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실토했다.”

    2. 원정화의 중국 행적

    취재 중 만난 탈북 여성 박모(40) 씨는 “1999년경 중국에서 정화를 알게 됐고 이후 가깝게 지냈다. 2000년 말까지 정화가 동생 부부 등과 같이 살던 연길의 S아파트에도 자주 갔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원씨와 자주 만났다는 시기는 원씨가 보위부의 지령을 받고 100명이 넘는 탈북자와 한국인을 북송시켰다고 주장하는 때와 거의 일치한다. 박씨는 이 부분에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정화는 몸이 많이 안 좋아 거의 집에만 머물고 있었다. 탈북자를 체포해 북송시키는 일을 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탈북자인 나부터 북송시켰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당시 정화는 특별한 돈벌이가 없었고, 한족인 동생 남편이 중고자동차 밀수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살았다.”

    ‘100명 이상 북송’은 원씨의 보위부 간첩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다. 그러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원씨가 북송했다는 사람 중 신원이 공개된 사람은 경기도에 거주하던 40대의 윤모 씨뿐이다. 7명이 확인됐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정확한 건 아니었다. 당시 원씨를 수사한 합동수사본부는 “원씨가 중국에서 실종된 사람들 중에서 실종자 윤씨를 정확히 지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2008년 8월 27일 국민일보). 판결문에는 실종자 윤씨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피고인(원정화)은 1999년 9월경 중국 연길 서시장 꼭대기에 있는 노래방에서 종업원으로 위장취업해 있을 때, 손님으로 놀러 온 남한 사람 윤○○(남, 47세, 경기도 거주)을 알게 된 다음 … 보위부 박○○ 과장에게 “윤○○이 내가 탈북자라고 이야기하자 관심을 보이며 전화번호를 주면서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니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남한 정보기관 사람이거나 그 앞잡이일 수 있다”는 취지로 보고했다. … 박○○, 김진길 및 위 중국 공안 복장을 한 중국깡패들이 윤○○의 방으로 들어와 수갑을 채우고, 방 안을 뒤져 북한에서 찍은 사진이 많은 것을 확인한 다음 북한 보위부 요원들의 아지트인 두만강호텔 301호실로 납치해 갔다. 피고인은 1999년 1월경부터 2001년 10월경까지 중국 연길·훈춘 등지에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탈북자, 북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대한민국 사람들 등 총 100여 명을 두만강 호텔로 약취하였다.”

    원정화 씨는 최근 기자와 전화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중국에서 북송시킨 한 탈북여성에 대해 털어놓은 바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공교롭게도 앞서 소개한 박모 씨였다. 판결문에 등장한 남성 외에 원씨가 북송시켰다는 사람의 신원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해 기자가 원씨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당시 기자는 박씨에 대한 취재 내용을 알리지 않고 원씨와 대화를 나눴다).

    ▼ 박OO 씨를 알고 있나.

    “아~ 박OO 언니. 나보다 한 살 많다. 우리 집(연길 S아파트)에도 몇 번 왔다. 얼굴이 예쁘다.”

    ▼ 그 여자가 탈북자라는 건 알고 있었나.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언니가 말해줘서 알았다.”

    ▼ 당시는 탈북자들을 북송시키는 일을 주로 할 때인데, 왜 박OO 씨는 북송시키지 않았나.

    “북송시켰다. 그런데 무슨 빽이 있는지 며칠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나도 깜짝 놀랐다. 지금 그 언니는 한국에 있다. 내가 하나원에 있을 때 어떻게 알았 는지 하나원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그 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기자는 대화 내용을 박씨에게 들려주고 의견을 들었다. 박씨는 이렇게 답했다.

    “국정원 요원 살해 지시 받은 적 없다 난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

    2008년 8월 수원지검에서 공개한 원정화 사건 관련 증거자료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중국에 있는 동안 보위부 등에 잡혀 북송된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정화에게 연길에서 유명한 사업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화는 하나원에서 나온 뒤 석 달가량 내가 살던 의정부의 오피스텔에서 딸을 키우면서 나와 같이 살았다. 그러다 집을 나갔는데, 이후 연락이 끊겼다. 내가 기억하기로 정화는 당시 중국에서 만난 아이아빠를 찾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나와 같이 살면서 당시 갓 100일을 넘긴 아이를 중국에 있는 계부에게 인편으로 보냈다. 정화가 군인을 포섭하기 위해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해 군인을 소개받았다고 TV에 나와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당시 내가 결혼정보업체에서 일하면서 남남북녀 결혼사업을 하고 있었고 정화도 나를 통해 업체에 가입했다. 내가 정화에게 ‘한국에서 빨리 정착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좋다’며 공무원, 군인 등을 소개해줬다.”

    3. 가족의 보위부 활동 의혹

    원정화는 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족이 보위부와 관련됐다고 주장해왔다. 판결문에는 원씨의 두 동생도 각각 보위부 요원과 보위부 운전기사였다고 적시돼 있다. 원씨와 사업관계에 있던 조선족 김OO 씨는 “보위부 직원인 북한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이 원정화의 계부 김동순을 회장님으로 불렀다”고 말해 원씨 부녀의 간첩 의혹을 부추겼다. 원씨도 검찰 조사에서 “김동순은 장군님의 전사”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동순 씨는 원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우리 집안은 출신성분이 좋지 않아 보위부 요원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 집안에 노동당원은 나 한 사람뿐이다. 보위부가 파견한 간첩이라는 원정화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정화의 두 동생도 보위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한 탈북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북한에서 원씨의 이복동생 김희영(가명)과 가깝게 지냈다는 탈북자 J씨였다. J씨는 “2002~2003년까지 원정화의 동생 김희영을 만났다. 그러나 김희영이 보위부 요원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2~2003년경, 김희영은 중국에서 살다가 북한으로 막 들어온 상태였다. 북한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백을 했는데, 우리 매형이 보위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통해 보위부에 돈을 좀 내고서야 살아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탈북자가 자수를 해 다시 북한에 들어가도 감옥에 가야 한다. 그런데 김희영은 돈을 주고 무마한 것이다. 당시 희영이가 보위부에 얼마를 찔러줬는지는 잘 모른다. 만약 김희영이 보위부 직원이었다면 북한으로 들어올 때 보위부에 돈을 찔러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J씨의 증언은 김동순 씨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김씨는 “1999년 10월경, 혼자 탈북해 중국에서 살던 희영이가 미화 3000달러를 들고 몰래 북한으로 들어왔다. 당시 청진의 우리 집에는 희영이가 18세 때 낳은 딸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고발로 희영이가 수남구역 보위부에 체포돼 탈북 혐의로 1개월가량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내가 찾아가 각서를 쓴 뒤에야 풀려났다. 희영이가 보위부 요원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소개한 J씨는 원정화 씨에 대해서는 “1994~1995년경에 만난 기억이 있다. 군대에 갔다가 감정제대(의가사제대)한 뒤에 집에서 놀고 있었다. 그냥 조용한 스타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4. 원한관계였던 간첩과 제보자

    원정화 사건에는 수십 명의 증인이 등장한다. 대부분 원정화와 계부 김동순의 간첩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검찰 측 증인이었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김OO(40대) 씨다. 중국 연길에 주소지를 두고 있으며 무역업에 종사하는 조선족인 그는 검찰의 요청을 받고 한국에 들어와 원정화의 간첩 혐의를 증언했다. 그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원정화가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에게 한국 군인의 신상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봤다. △원정화의 여동생 김희영의 남편도 보위부 요원이다. △김동순이 북한-중국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김동순이 “북한 정부에 연간 1억 원 이상의 외화를 바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김동순이 “내가 잘못되면 북한 보위부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OO의 증언은 김동순 씨의 간첩혐의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김OO의 증언이 대부분 사실과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김동순 씨는 “김OO는 재판 과정에서 중국 연길에서 본 북한 보위부 차량의 번호판을 ‘흰색 바탕에 빨간 글씨’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북한의 모든 차량 번호판이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라는 것이 확인됐다. 김OO는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고 말했다.

    원정화 간첩사건이 원씨의 집에서 일하던 조선족 가정부 조모 씨의 경찰 제보로 시작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2005년경의 일이었다. 당시 조씨의 고발 내용은 “탈북여성이 씀씀이가 크고 중국에 자주 들어가 북한 사람들을 접촉한다”는 것이었다. 김동순·원정화 씨에 따르면, 당시 원씨와 조씨는 금전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원씨는 지난해 ‘신동아’ 인터뷰 당시 가정부와의 갈등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가정부가 집에 있는 식재료를 빼돌리고 딸을 잘 돌보지 않았다. 가정부의 아들과 중국을 통해 대북무역을 같이 시작했는데, 많은 돈을 사기당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앞서 소개한 증인 김OO 씨가 원정화의 간첩 의혹을 처음 고발한 가정부 조씨의 아들이란 사실이다. 결국 원정화와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이 한국에까지 들어와 두 사람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는 결정적인 증언을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가정부 조씨는 원정화 사건을 제보한 공로로 상당액의 포상금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순 씨는 “2006년 내가 한국에 들어올 당시 김OO는 나의 한국행을 돕는 브로커 일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돈만 날리고 실패했다. 그런 문제 등으로 나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2007년경 나는 김OO를 마약혐의로 국정원에 신고하기도 했다. 김OO가 나와 정화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검찰과 법원에서 사실과 다른 주장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탈북 이후 北 들어간 적 없다”

    지난 2월 말, 원정화는 간첩사건 이후 처음으로 계부 김동순 씨를 서울 노원구의 김씨 자택에서 만났다. 이날 김씨는 원씨와의 대화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3월 초, 김동순은 ‘신동아’와 15시간가량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원정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는데, 그 자리에서 기자에게 원정화와 자신의 대화가 담긴 녹음파일을 제공했다. “원정화의 거짓말을 밝혀줄 증거”라고 했다.

    김씨는 인터뷰 내내 “원정화는 북한 보위부가 남파한 간첩이 아니다. 한국에 들어와 중국을 통해 대북무역을 하면서 일부 오해를 살 만한 일을 했지만, 절대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정화를 30년 키웠다. 일거수일투족, 습관, 잠버릇까지 다 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씨가 제공한 녹음파일에는 원씨가 그동안 주장해온 것과는 상당히 다른 진술이 담겨 있다. 수사기록과 맞지 않는 내용도 적지 않다. 녹음파일 내용 중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을 발췌해 게재한다.(대화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했으며, 가능한 한 원문대로 실었다. 괄호는 문장의 흐름을 위해 기자가 임의로 넣은 것이다.)

    1. 원정화 부친의 행적과 관련.

    “국정원 요원 살해 지시 받은 적 없다 난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

    3월 초 인터뷰에 응한 원정화 계부 김동순 씨.

    김동순 네가 무슨 간첩이냐? 그리고 내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있냐?

    원정화 그렇죠. 아버지가 무죄를 받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김동순 네 친아버지인 원OO 씨가 너 태어나기도 전에 남파간첩으로 갔다가 사살됐다고 했지. 너 아버지 얼굴 모르냐? 변명하지 마. 너 (친)아버지 따라가서 두 달인가 살다가 왔잖아. 근데 니가 아버지를 몰라?

    원정화 알아요. 미안해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2. 2006년 북한영사관에 들어가 지령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김동순 그리고 니가 북한영사관(심양)에 들어간 적이 있어? 언제 갔냐?

    원정화 그건 맞아요. 김교학(당시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이 심부름 시켜서. 무슨 봉투를 갖다주라고 해서요. 그래서 봉투 갖다주고 나온 게 다예요. 그런데 그게 약점이 잡혀가지고. (영사관에 갔더니) 보초가 있더라고요. 못 들어가고 있는데, 대사가 나와서 나를 데리고 들어갔고 봉투만 주고 나왔어요.

    3. 원정화가 보위부 상선으로 지목한 단동무역대표부 김교학과 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원정화는 2002년 10월 북한 보위부 직원 박○○의 소개로 김교학을 알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2008년 체포 당시까지 김교학으로부터 대부분의 지령을 받아 간첩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김동순 김교학이 네가 탈북자인 걸 아냐, 모르냐.

    원정화 알아요. 내가 말했어요. (김교학에게) 북한에 가서 살고 싶다고 그랬어요.

    김동순 처음엔 몰랐고?

    원정화 네, 나중에 말했어요. (말했더니) 김교학이 놀라더라고요. 그런데 눈치는 챘었대요.

    김동순 김교학이 (국군 정보사령부 요원) 이OO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게 사실이야?

    원정화 아니, 그건 아니고. 저기 김교학이가 그러더라고요. 국정원 직원하고….

    김동순 국정원 요원을 하나 물어라? 그러니까 살해 지시는 받은 적 없지?

    원정화 아, 없지. 그런 건 없지.

    김동순 황장엽 살해 지시를 누가 했어?

    원정화 황장엽 거처 좀 알아봐달라고. 김교학이 저에게 조국(북한)에는 얼마든지, 북한에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대요. 그러면서 황장엽이 사는 거처도 알아내고 뭐 어쩌고 그때부터. 그때부터 황장엽 (관련 얘기가) 시작된 거지.

    김동순 그리고 네가 김교학이하고 안 지가 12년 됐다고 하는 거는 거짓말이지?

    원정화 아, 그건 거짓말이고. 그게 아니고 언제부터 (김교학을) 알았냐면, 안 거는 그때, 아버지, 2004년도인가 2005년도부터 알기 시작한 거고…. 나 진짜 그때는 (북한에) 가고 싶었어요.

    김동순 그러니까 니가 (한국에서) 좀 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고 하니까, 지금 가족 생각도 나고 하니까 (북한에 다시) 가고 싶었다는 거지?

    원정화 예, 예.

    (이와 관련 원씨는 지난해 ‘신동아’와의 인터뷰 당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상부에서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그러다가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는데, 도청을 통해 그걸 다 알고 있던 수사기관이 나를 긴급체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4. 보위부 파견 간첩 주장에 대해.

    원정화는 북한 보위부가 직파한 간첩으로 알려져있다. 역시 보위부 요원인 단동무역대표부 김교학 부대표로부터 지령을 받고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씨는 최근 김동순 씨와 만난 자리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김씨가 “우리 집안에 노동당원은 나밖에 없다. 우리 딸 김희영은 보위부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 네가 보위부에 언제 있어봤냐? 있어본 적 있어?”라고 묻자 “없어요. 나는 보위부의 ‘보’자도 모르는데”라고 답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원정화는 2002년 10월 17일 북한 무산으로 들어가 청진시 보위부장으로부터 청진 출신 탈북자 명단을 파악하라는 지령을 받고 다시 중국에 들어왔다. 또 2006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도문에서 여동생 김희영과 함께 북한 온성으로 들어가 보위부 직원으로부터 가짜 달러와 마약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원정화는 최근 김동순 씨를 만난 자리에서는 이런 사실도 부인했다. 김씨가 “니가 언제 북한에 간 적이 있냐. 탈북한 이후 니가 언제 북한에 들어갔냐”고 묻자 “맞아요. 난 (탈북한 이후 북한에) 가보지를 않았어”라고 답했다.

    5. 검찰 조사 과정에 대해.

    (김동순 씨는 ‘신동아’ 인터뷰 과정에서 “정화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 검찰이 술을 먹여놓고 진술을 받고 조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제공한 녹음파일에는 그와 관련된 대화도 들어 있었다.)

    김동순 니가 (진술조서에) 도장 다 찍었잖아, 지장.

    원정화 술 하고….

    김동순 아니 크게 말해봐. 술 먹여놓고 찍은 거라고? 조서에?

    원정화 응, 술. 아버지 녹음기하고 (제가 하는 말을) 녹음도(하시는 거예요).

    김동순 무슨 녹음 이러고저러고 해. 아버지는 나중에 뭐 녹음하게 됐으면 당장 와서 하지. 그러면 걔네들(합동수사본부) (너에게)술 먹여놓고 그걸(조서 날인) 시킨 게 맞아?

    원정화 아휴, 아버지. 말을 다 했어요. 아버지 복잡하게 안 하고 싶어.

    사건 초기 수사팀은 김동순 씨를 원정화 씨의 상선으로 파악했다. 중국에서 남한을 상대로 대북무역을 하면서 10억 원이 넘는 공작금을 수년에 걸쳐 원씨에게 보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원정화-김동순 간에 이뤄진 무역거래를 정상적인 것으로 판단,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북무역=간첩활동’ 공식이 깨졌다.

    원정화의 판결문에는 북한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이 2002년 10월부터 원씨에게 지령을 내리는 등 사실상 원씨를 담당한 북한 보위부 상선이라고 설명돼 있다. 그러나 김동순 씨와 원씨의 대화 내용에 따르면 판결문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원씨가 김교학을 만난 시기를 2002년이 아닌 2004~ 2005년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그 주장대로라면 원정화 사건에서 혐의가 인정된 2003년 1월부터 2005년 3월경까지 최대 5회에 걸친 간첩활동의 성립조건이 사라진다. 이 시기는 원씨의 주요 간첩활동이 이뤄진 시기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 시기 김교학이 원씨에게 지시했다는 주요 지령은 다음과 같다.

    ▲2003년 1월, 한국 정보기관 요원의 인적사항 파악 지시, 공작금 3000달러 지급.

    ▲2003년 6월, 정보기관 요원들의 동태파악 지시.

    ▲2004년 1월, 국군정보사 요원 이OO 살해 지시.

    ▲2004년 8월, 국정원 직원 살해 지시.

    ▲2005년 3월, 군사기밀을 빼내라고 지시, 정보사 요원 이OO 납치 시도, 공작금 8000달러 지급.

    게다가 원씨는 김동순 씨와의 대화에서 김교학이 원씨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증언한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교학과 원씨는 서로의 실체를 모르는 사이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김교학과 원씨가 보위부의 지령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었다는 사건의 대전제가 흔들릴 수도 있는 중요한 증언이다.

    의문투성이 보위부 간첩

    원정화 씨는 2008년 사건 당시 자신의 간첩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사건 당시 원씨와 관계된 많은 주변인물이 증인으로 채택돼 조사를 받았고, 그들의 증언을 통해 원정화의 간첩활동이 간접적으로나마 확인됐다.

    그러나 수사 기록을 검토해보니, 이들의 진술은 대부분 “원정화로부터 ‘북한에 있을 때 내가 보위부 관련 일을 했다. 아버지(김동순)도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식이었다. 원씨의 간첩 사실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는 찾기 힘들었다. 원정화의 자백이 없었다면, 사실상 공소유지가 불가능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취재 내용, 새로운 증언, 원정화-김동순 두 사람의 대화 내용만으로 “원정화 사건이 조작됐다”거나 “원씨가 보위부 직파 간첩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증거들과 당사자인 원씨의 새로운 진술이 확인된 만큼 재조사의 필요성이 있다는 게 기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만약 원정화가 보위부에서 파견된 간첩이 아니라면, 그는 왜 스스로 간첩을 자처하고 5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했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김동순씨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지난해 정화가 출소한 뒤에 전화로도 물어보고 만났을 때도 물어봤다. ‘왜 사실도 아닌 거짓말을 해서 스스로 간첩이 됐냐’고. 그랬더니 정화가 이렇게 말했다.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잘 말하면 김현희처럼 살게 해준다’고 했다고.”

    지난해 첫 인터뷰 이후 기자는 오랜 시간 원정화 씨와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기자는 원씨로부터 김동순씨가 들었던 것과 비슷한 얘기를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원씨는 “정보기관 사람들이 ‘김현희처럼 살게 해준다. 100명 넘는 사람을 죽이고도 김현희는 지금 한국에서 잘 살고 있지 않으냐’고 해놓고는 이제는 나몰라라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3월 초, 기자는 그간의 취재 내용을 원씨에게 알린 뒤 해명과 반론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씨는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취재를 거부했다. 3월 7일 경기도 군포시 금정역 인근에서 만났을 때도 원씨는 “난 그동안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난 분명히 북한 보위부에서 파견된 간첩이었다. 이미 법적인 처벌을 다 받았다. 내 과거 행적에 대해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다”는 뜻만을 전했고 이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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