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에서 벌어진 버스테러 사건으로 한국인 3명이 사망했다. 이슬람 무장단체의 자살폭탄테러로, 이집트의 관광업을 겨냥한 경제범죄였다. 2011년 시작된 ‘이집트 혁명’으로 독재자 무바라크가 축출됐지만, 이집트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다. 군부와 이슬람세력, 그리고 시민이 갈등을 빚고 있다. 수천 명의 이슬람계 시민이 군부에 학살되는 참상도 벌어졌다. 군부는 이집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집트의 목줄인 관광업은 부활할 수 있을까.
2월 이집트에서 발생한 버스테러 현장. 40m 밖 호텔 담장이 무너질 정도로 폭발력이 강력했던 테러 현장에서 이집트 경찰관과 주민이 대화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이집트 관광객을 노린 이슬람 무장단체의 자살폭탄테러(지하드)로 밝혀졌다. 현장을 수사한 이집트 경찰 아흐만 압부자드는 “현장에서 허리와 복부가 사라진 범인의 시신이 발견됐다. 테러범은 시나이에 거주하는 21세 청년이며 폭발에 사용된 폭약은 10㎏ 이하”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이집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안겼다. 이집트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테러가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관광산업이 국가 재정의 90%를 차지하는 이집트에서 관광객이 테러의 대상이 됐다는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경제와 직결된다. 게다가 이집트의 관광산업 연중 최대 성수기에 벌어져 타격이 더욱 컸다. 사건 이후 수도 카이로의 현지 여행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아하마드(42) 씨는 “한국인 테러 사건은 우리 여행업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자살폭탄테러가 벌어지는 나라에 누가 관광을 오겠는가. 사건 이후 세 건의 계약이 취소됐다”며 한탄했다. 필자가 가는 곳마다 한국인임을 알아보는 여행사 직원들은 “미안하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교통경찰도 “한국인이냐? 사과한다”고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한국인에게 미안하다”
수도 카이로에서 차로 불과 1시간 거리에 피라미드가 모여있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있다. 제4왕조(BC 2575~2565년경) 때 만들어진 3기의 피라미드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가장 오래된 제4왕조 두번째 왕 케오프스의 피라미드를 비롯해 6기의 피라미드가 한곳에 모여 있다. 피라미드들은 기술적 정교함이나 공법에서 탁월한 걸작품이자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밖에도 스핑크스, 마스터바 등을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관광객이 몰린다. 이 피라미드 주변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다. 입구에는 각종 기념품과 엽서 등을 파는 상인이 북적이고 관광객을 태우고 피라미드 주변과 사막을 도는 낙타몰이꾼들이 진을 친다.
그러나 테러가 발생한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낙타몰이꾼 아부 이슬람(32)은 “아랍이나 이집트인 관광객은 돈을 쓰지 않는다. 낙타는 주로 서구 관광객이 좋아한다. 한창 시즌일 때는 하루에 30명을 태운다. 그러나 요즘엔 하루에 한 건 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낙타 관광 비용은 기본 1시간에 우리 돈 5만 원 정도다. 그가 말한 대로 이집트의 관광업은 그야말로 위기다. 외국인 관광객이 이집트 사람보다 더 많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집트는 인구의 10% 정도가 관광업에 종사한다. 호텔과 여행사, 기념품으로 파는 파피루스와 향수 제조업, 운전기사와 택시업 등으로 이집트는 한때 연간 14조 원이 넘는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세계 최고의 관광대국인 이집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집트 관광업이 몰락한 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집트 혁명’이 있다. 2011년 초, 이집트의 소셜네트워크(SNS) 페이스북에 한 청년의 죽음이 화제가 됐다. 부패한 경찰이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올렸다 경찰에게 맞아죽은 28세 사업가 칼레드 사이드의 사연이었다. 한 청년단체가 그를 추모하며 페이스북을 통해 집회를 제안했고 8만5000여 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시민혁명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시민들이 만든 ‘우리 모두 칼레드 사이드’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무려 50만 명이 넘는 가입자가 몰렸다.
이집트 시민들은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몰려가 30년간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 과정에서 2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희생됐다. 그러나 결국 시민들은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혁명이 성공하자 이집트 국민은 기대에 차 ‘아랍의 봄’이 왔다며 환호했다. 세계 언론 또한 이집트의 민주화 혁명이 시민에 의해 성공한 것을 크게 보도했다.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 9개월 후, 이집트에서는 30년 만에 자유 총선이 치러졌다. 80%에 가까운 투표율을 보인 이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은 다수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 이집트의 이스마일파(派)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하산 알반나가 창시한 종교 정치조직이다.
이들은 코란과 하디스를 현대 이슬람 사회의 지침으로 삼는다. 이집트는 물론 수단·시리아·팔레스타인·레바논 및 북아프리카에 급속도로 확산되며 범(汎) 아랍권 이슬람 정치조직화를 선도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영향력이 가장 큰 원리주의 단체였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폭력 사용에 반대하지만 실제로는 과격 급진운동을 주도했다.
후세인 배출한 무슬림형제단
1952년 등장한 이집트 혁명정권은 무슬림형제단을 불법 단체로 지목, 공식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무슬림형제단은 많은 지도자가 투옥되고 반역죄로 사형을 받는 등 정권의 거센 탄압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의 지원을 받는 모임과 정기간행물이 있었지만, 후원자나 조직원의 존재는 거의 비밀에 부쳐졌다. 이들은 비밀리에 후원금을 받아 단체를 유지했고 이들의 사상은 아랍 전역에 걸친 이슬람 운동의 기초가 됐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의 탈레반이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도 이 무슬림형제단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도 이집트에 유학 시절 무슬림형제단 활동을 한 바 있다. 이집트에서의 정권 창출은 무슬림형제단으로서는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집트에서 처음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을 때, 무슬림형제단은 시위대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나가고 시위가 격해지면서 무슬림형제단은 조금씩 부상했다. 시위 초반 페이스북으로 만난 다수의 시민은 정치적 슬로건이나 지도자가 없었다. 무바라크 독재 시절 야권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여론에 떠밀리며 자연스럽게 이집트 정부와 시위대 간의 공식 협상 창구가 됐다.
2012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은 카이라트 알샤테르를 후보로 내세웠다. 그는 무바라크 잔재 세력과 군부가 민 샤피크 후보에 맞섰다. 그러나 당시 임시 정부를 맡았던 군부가 알샤테르의 과거 전력을 이유로 후보 자격을 박탈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당황한 무슬림형제단은 무함마드 무르시를 대타로 내보냈다. 1952년생인 무르시는 카이로대학에서 공학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1982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C)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였다. 1985년부터 2010년까지 자가지크 대학에서 재료공학과 교수 겸 학과장을 역임했고, 이후 무슬림형제단 의원연합(2000~2005년)을 이끌었다.
무르시는 유세 과정에서 ‘이슬람이 해결책이다(Islam is the Solution)’라는 선거 구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대다수 이집트 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혁명을 통해 무바라크를 몰아낸 이집트 국민이 원한 것은 ‘이슬람 율법국가 건설’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였다.
이집트는 자유분방하고 세속적인 나라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국가다보니 술과 서양식 풍습에 익숙하다. 관광지마다 나이트클럽이 성행하고 낯 뜨거운 복장을 한 무희들이 벨리댄스를 추는 나라다. 이슬람 율법보다 관광산업이 앞서는 곳이다.
국민이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린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었다. 지난 20여 년간 이집트 경제는 줄곧 하향곡선을 그렸다. 유럽인 관광객이 줄었기 때문이다. 무바라크 정권이 여러 대책을 내놨지만 성과가 없었다.
현재 이집트 국민 약 9000만 명 중 절반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연명한다. 이집트발 ‘아랍의 봄’은 배고픈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민혁명이었다. 이집트 국민은 무르시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관광업을 망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논란이 된 무르시 헌법
이런 우려에도 대통령이 된 무르시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따라 술·도박·매춘·음악·마약 등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여성의 옷차림에 대한 규제도 발표했다. 무르시를 배출한 무슬림형제단은 정부에 술 판매 금지를 요구하는 한편 이집트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음주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해안에서 남녀가 따로 지내고, 비키니처럼 노출이 심한 수영복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여파로 겨우 회복기미를 보이던 관광산업은 무르시의 정책이 나오면서 다시 곤두박질쳤다.
무르시 대통령이 만든 헌법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2012년 11월, 그가 발표한 새 헌법 선언문은 대통령에게 지나친 권한을 주는 반면 여성 권리와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이슬람교에 치우쳐 있었다. 6세 이상 여성의 결혼을 허용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까지 헌법에 담았다. 야권은 ‘현대판 파라오 헌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야권과 기독교 의원 14명이 빠지고 무슬림형제단 회원과 살라피스트(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한 파) 등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뤄 만든 이 헌법의 내용은 이슬람 경전(코란)과 비슷했다. 국민이 피를 흘리며 바랐던 민주주의가 오히려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화사키는 이상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집트 국민은 무르시의 정책에 즉각 반발했다. 언론계와 학계, 심지어 대법원까지 파업에 들어갔다. 관광업계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이집트관광협회 회원인 아하마트 샤픽은 이렇게 말했다.
“이집트를 찾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서구 사람이다. 그런데 술도 안 되고 비키니도 안 된다고 하면 누가 이집트에 관광을 오겠는가. 무르시는 관광업을 무시하는데 이집트 국민은 이 법 때문에 굶어 죽게 생겼다.”
민주화 혁명의 성지 타흐리르 광장에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무르시는 민간인 체포 권한을 들며 시위대에 대해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무르시에 동조하는 친정부 시위대도 나타났다. 이들은 무르시를 찬성하는 무슬림형제단의 지지자들이었다. 반정부 시위대는 친정부 시위대에 둘러싸여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됐다. 무르시 지지파와 반대파의 충돌로 이집트 전역에서 연일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때 조용히 움직이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군부였다. 군부는 민주화 세력을 지지했다. 군부로서는 반정부 세력의 편에 서면 무르시 대통령을 몰아낼 충분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전 세계 여론도 반정부 세력에 호의적이었다. 이집트 군부의 판단은 적중했다. 군부는 이런 명분을 등에 업고 지난해 7월 3일 무르시 대통령을 긴급 체포하고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무르시가 체포되고 무슬림형제단의 시대가 끝나자 이집트 국민 수십만 명이 카이로 민주화 성지 타흐리르 광장과 대통령궁 앞에 모여 군부를 지지했다. 이때 군 전투기와 헬기들이 카이로 상공을 저공비행하며 반정부 시위대를 보호했다. 이집트 군부의 최고 실권자인 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은 무르시 축출 이후 야권 지도자 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 로드맵을 발표했다. 관광업계는 일제히 환호했다.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하던 무르시를 군부가 없애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여행사 대표인 마그디(37)는 “무르시 때문에 손해를 본 이집트 국민이 많다. 무르시를 몰아낸 군부는 나의 영웅이다”라고 말했다.
군부의 등장
군부는 무바라크의 몰락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군부는 무바라크의 진압 명령에 불복종하고 국민 편에 서서 군중에게 발포하지 않았다. 당시 군은 성명을 통해 “이집트 군은 지금까지 이집트 국민에 대해 무력을 사용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무력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적인 표현의 자유는 모든 국민에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자신에게 복종할 군대가 없어진 무바라크는 바로 이빨 빠진 사자 신세가 됐다. 국민은 카이로 도심에 진주한 탱크와 군인을 환영하며 찬사를 보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도 이집트 군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 단체는 당시 국방장관이던 탄타위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우리는 당신이 역사적 책임을 짊어지고 현재의 이행 과정이 완수되도록 지원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무바라크와 무슬림형제단 정권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군부와 국민의 우호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8월 14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라바 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군부가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당시 군부는 “신과 우리는 무르시 대통령을 지지한다” “무르시를 석방하라” 같은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탱크와 불도저를 앞세운 채 발포를 시작했다. 제일 앞줄부터 하나둘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총에 맞아 머리가 뚫린 시신이 도망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혔다. 시위대 중 상당수는 인근의 알아다위아 모스크(사원) 쪽으로 도주했다. 군인들은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서도 총격을 퍼부었다. 친구의 시신을 둘러 메고 도망가다 쓰러지는 젊은이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피의 살육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이슬람 교도들이 모스크로 예배를 가기 전날이었다. 이날 하루에만 라바 광장과 나흐다 광장에서 6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노의 날’로 명명된 다음 날에도 무르시 지지파 215명(민간인 208명, 군경 7명)이 사망했다. 이 중 104구(具)의 시신은 카이로 도심 람세스 광장 인근의 파테 모스크에서 발견됐다. 8월 16일 금요예배 직후에도 최소 173명이 군경과 시위대의 충돌과정에서 숨졌다. 8월 한 달간에만 군부의 학살로 2200여 명(무슬림형제단 집계)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무르시 지지파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했다. 군부에 대한 공포가 전국을 휩쓸었다. 무슬림형제단의 간부인 압둘카림은 “모스크와 병원에 밀려드는 시신을 보고 우리는 피가 솟구쳤다”고 말했다.
라바 대학살
‘라바대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이집트를 찾는 관광객은 거의 사라졌다. 단기간에 몇 천 명이 죽어나가는 이집트는 더 이상 관광객이 드나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라바사건이 벌어지자, 독일·스웨덴·이탈리아·벨기에 등은 이집트 입국 자제를 권고했고, 예약 취소가 급증했다.
이란 정부까지 자국민의 이집트 방문을 전면 금지했다. 영국도 중대 사유가 없는 한 이집트행을 금지했고, 카이로 학살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는 한국도 카이로 등 주요 도시에 대해 여행 자제를 권고하는 2단계 여행경보를 내렸다. 한국과 이집트 간 직항 노선을 운항하던 대한항공은 운항을 중단했다. 무슬림형제단이나 군부나 관광객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셈이다.
라바사건으로 범이슬람권은 충격에 빠졌다. 무슬림형제단이 지난 반세기 중 이슬람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비중 있는 단체고 이들이 배출한 이슬람 학자가 세계 곳곳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타격을 입은 무슬림형제단은 짧지만 정권을 쥐고 흔들던 화려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물밑에서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이웃나라 중 리비아와 팔레스타인은 현재 이슬람 무장단체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다. 400여 개의 부족과 1000여 개의 이슬람 무장단체가 난립한 리비아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사이에 이집트는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다. 이집트의 치안 상황이 악화되자 리비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무기와 무장세력이 유입됐다.
이집트 성지 순례 도중 폭탄 테러를 당한 충북 진천중앙장로교회 신도들이 2월 1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 테러사건이 났을 무렵, 시나이 반도는 이미 수백 개의 무장 세력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수도 카이로에서 차로 7시간이나 걸리는 데다 전통적으로 베두인족이 살고 있고 중앙 정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이슬람 무장 조직이 활동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2011년 혁명 당시 시나이 반도에 주둔하던 이집트 정부군이 철수한 뒤 수감돼 있던 무장 반군도 대거 풀려나 이들에 가세했다. 무르시가 축출된 직후 이들이 벌인 시나이 반도 내 테러는 주로 이집트 정부군과 경찰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 100명이 넘는 군인과 경찰이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됐다.
지난 1월, 이집트 정부군도 무장세력에 의해 군 헬기가 격추된 이후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나서 60명 안팎의 무장반군을 사살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에도 이스라엘 남성과 노르웨이 여성 등 관광객 2명이 베두인족 무장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가까스로 풀려났다. 한 달 뒤엔 이집트 남부의 유명 관광지 아부심벨의 지역 주민 수십 명이 아부심벨과 아스완 시를 연결하는 주요 고속도로를 차단해 외국인 관광객 600여 명을 태운 버스 수십 대의 통행을 막는 일도 벌어졌다. 그해 7월에는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와 요르단을 연결하는 천연가스관이 무장 세력의 공격을 받아 폭발하고 경찰이 살해됐다. 무장한 이슬람주의자들이 군 시설을 공격하기도 했다. 시나이 반도를 근거지로 삼은 이슬람 단체는 무르시 대통령이 축출되자 군부를 향해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여왔다. 이들 각종 무장 세력들의 테러 명분은 ‘군부에 대한 반대’다.
관광객 테러는 ‘경제전쟁’
이들은 이집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이번 한국인 테러 사건을 계획했다. 사건 직후 이집트 방송에서도 연일 이 사건을 크게 다뤘으며 아랍권 방송 알자지라는 하루에도 몇 차례 이 사건을 주요 시간대에 방송했다.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한 ‘안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는 ‘성지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무장단체로 알카에다와 연계된 조직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건 직후 이슬람 무장단체 홈페이지에 성명을 내고 “우리 단체의 영웅 중 한 명이 이스라엘로 향하는 관광버스를 폭발시키는 데 성공했다”며 “국고를 약탈하고 국민 이익을 돌보지 않는 배신자 정권에 대한 경제전쟁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말하는 경제전쟁은 바로 관광업에 타격을 주어 이집트 정부에 직격탄을 주겠다는 뜻이다. 이집트의 안전 전문가 마흐리드 압달은 “이집트는 누가 정권을 잡든 관광업이 살지 못하면 민심을 잃는다.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무장단체는 이를 노리고 한국인을 테러한 것이다”라며 경제전쟁의 의미를 분석했다.
한국인 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이집트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주요 일간지들이 거의 일주일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이집트 일간지인 알 아하람의 한 기자는 “이 사건은 한국인들만큼이나 이집트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앞으로도 이런 형태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이집트의 관광산업은 완전히 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랍권의 위성채널인 알아라비아도 “이번 한국인 테러 사건은 이집트 관광업에 직격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사건은 4월 실시되는 이집트 대선을 앞두고 발생했다. 군부는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대통령을 체포하고 무슬림형제단을 학살했다. 관광산업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강경 이슬람주의자들을 군부가 대신 응징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때문에 관광업계는 군부를 지지하는 편이다.
카이로 중심부의 알칼릴리 시장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다. 각종 이집트 여행 기념품은 물론 카펫이나 수공예품을 값싸게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시장은 텅 비어 있다. 기념품가게를 운영하는 오마르(28)는 “지금은 외국인을 구경하기도 힘들다. 가게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2월 16일(현지시각) 샤름 엘셰이크에 있는 한 병원에서 권세영 주이집트 대사관 공사(오른쪽), 헤샴 자주 이집트 관광장관(왼쪽)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레드 포다 남시나이 주지사가 두손을 모아 치료받고 있는 한국인 관광객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
엘시시는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후세인 탄타위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에 임명된 뒤 군부를 이끌어왔다. 영국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이집트 군부 내 대표적인 미국통이며 뛰어난 연설 실력과 카리스마로 군부는 물론 국민에게도 신뢰를 받는다. 길거리에는 엘시시의 신분증을 복사한 카드가 우리돈 160원 정도에 팔리고 그의 사진이 담긴 컵과 티셔츠가 인기다. 엘시시가 대선에 진입하면 현재로서는 당선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군부와 엘시시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다. 군부가 혁명 당시 무바라크를 도와주지 않은 것은 대통령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무슬림형제단을 학살한 것도 자신들이 정권을 잡기 위한 기초공사였다고 다수의 언론은 추측한다. 군부는 민주화운동 세력에도 암묵적 위협이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마지드(가명)는 “군부는 라바 학살을 통해 이미 자신들의 힘을 보였다. 민주화 혁명의 성과를 엘시시의 한 입에털어 넣어주는 격”이라고 우려했다.
문제는 엘시시가 대통령이 되고 정권을 잡는다 해도 이집트 국민의 바람대로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엘시시가 현재의 난관을 타개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현재 엘시시를 지지하는 관광업계도 언제든 등을 돌릴 확률이 높다. 카이로 대학의 한 교수는 “군대만 지휘하던 사람이 빈곤을 한 방에 퇴치할 수 있는 경제정책을 성공시키고 민주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군부에 등 돌리는 시민들
게다가 무슬림형제단의 항의시위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3월 7일 저녁, 이집트 전역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최소 3명이 숨지고 48명이 다쳤다.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 가스를 발사했고, 시위대, 경찰 양쪽이 투석전과 총격전을 벌였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화염병 투척과 경찰차 방화가 곳곳에서 목격됐다.
이런 상황을 이집트 군부는 강경대응으로 일관한다. 이집트 군부는 연일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물론 정권에 해가 되는 인사들을 수시로 체포구금한다. 언론인을 체포하고 군부에 반대하는 언론사는 강제로 폐쇄한다. 급기야 유엔인권이사회(UNHRC) 소속 27개국이 이집트 정부의 폭력적인 반정부 시위 진압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회원국은 이 성명에서 “이집트 내에서 집회·결사·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상황과 함께 치안 당국의 부적절한 폭력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집트 정부의 시위 진압으로 유혈사태가 벌어진 이후 국제사회가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제 여론이 점점 엘시시에게 등을 돌린다는 조짐이다.
민생 문제는 엘시시에게 산 너머 산이다. 현재 카이로에는 전기와 가스가 부족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심지어 카이로 국제공항까지 전기가 끊겨 비행기 이착륙을 멈추는 위험한 상황도 벌어진다. 가정용 연료로 쓰이는 가스값이 계속 오르고 그나마도 물량이 딸리는 실정이다. 밀가루 값과 설탕 등 생필품의 가격은 계속 오르고 이집트 파운드 가치는 나날이 떨어진다.
관광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일거리가 없어지자 불법으로 옷이나 벨트, 신발 등을 파는 좌판을 벌여 길거리가 거대한 시장이 되었다. 왕복 4차선 도로 중 양쪽 일차선씩 이런 좌판이 차지하니 차로가 좁아져 차들은 통행에 큰 불편을 겪는다. 이런 현상은 현재 군부가 이집트 사회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거대한 혼란의 세상이 된 이집트를 엘시시가 과연 파라오 같은 카리스마와 출중한 능력으로 바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 이집트 최대 시민단체 가운데 하나인 ‘4월6일 청년운동’은 엘시시 국방장관의 대선 출마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다. 3월 5일, 이들은 수도 카이로에서 성명을 내고 “엘시시의 대선 출마는 이집트 사회를 더 분열시키고 대립시킬 뿐”이라며 “이번 반대 의사 표시는 군부가 나라를 통치하는 것보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나라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집트 대선 구도는 다시 ‘민주세력 대 군부’의 대결이 될 수도 있다. 이집트 국민이 군부를 선택할지, 아니면 다시 민주화 열기가 불어닥칠지 4월이 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년에 한 번 이맘때 온다는 카마신(모래폭풍)이 이집트 수도 카이로 시내를 덮쳤다. 건물과 하늘은 잿빛으로 변하고 오후가 되어도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집트에 파라오 같은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