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순간에도 오류는 발생한다.
- 물론 오류를 피하는 게 좋지만, 오류가 없는 사유만 건강한 사유는 아니다. 명제만 있는 사유는 골동품이다.
- 질문하는 사유, 의심하는 사유, 창조하는 사유가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에서의 항우(項羽, 오른쪽). 사마천은 항우를 천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본기’에 넣어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막상 매듭을 지으려니 빠진 자료, 못한 말이 줄줄이 떠오른다. 또 나의 무능을 자책할 수밖에 없게 됐다. 역사학의 기록과 서술이라는 두 축 중에서 역사를 탐구-서술-논쟁하는 과정을 축으로 진행하다보니 일단 ‘서술’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이에 따라 정작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그 순간에 발생하는 오류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본고에서 조금 언급해두고자 한다. 말하자면 보강이다.
역사 공부의 지위
역사학(역사 공부)은 분과학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학문에 공통된 양식이자 방법이다. 언뜻 보면 역사학은 이과대, 문과대, 어문학, 인문학으로 나뉜 대학에서 인문대학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분과학문의 하나일 뿐이다.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조금 왜소하다.
한편 역사학은 교양수업으로 철학과 함께 개설되기도 하면서 특별한 지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것은 교양이라고 표현될 만큼 역사학이 뭔가의 베이스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베이스란 이런 것이다.
역사학의 한 분야로 경제사, 정치사, 문화사가 있지만, 개별 학문 차원에서 봐도 경제학엔 경제학사(史)가 있고, 정치학엔 정치학사(史)가 있다. 심지어 물리학에도 물리학사(史)가 있고, 언론학에도 언론학사(史)가 있다. 이는 역사[史]가 모든 학문의 공통된 양식(Form, 형식)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러한 양식의 공통성 때문에 역사는 모든 학문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존재하는 것들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양식(형식)에서 연유한 것이겠는데, 역사학에서 변화를 설명하는 방법, 인과를 설명하는 방법, 사료를 비판하는 방법은 각각의 개별 학문에서 여전히 유용하게 쓰인다. 물론 다른 학문의 방법을 역사학에서 가져오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학의 양식과 방법이 갖는 보편적 기여 때문인지, 필자가 ‘신동아’에 연재하는 동안 다른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연재에서 보여주는 오류의 사례들이 해당 분야에서 도움이 됐다는 격려를 들었다. 언론계의 기자들이나 의학, 경제학, 철학 등에 종사하는 분들이었다.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시민들의 호응도 있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공감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인간의 조건에 있다. 지난 호에서도 오류는 ‘나만은 예외겠지’ 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다. 건강한 시민은 자신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류를 범해도 자책하거나 합리화하기 전에, 즉 오류에 치이기 전에, 아니 잠깐 자책도 하고 합리화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방향을 바꿔 그 오류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도 “잘못을 저지르면 고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過則勿憚改(과즉물탄개)]”고 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저지를 오류도 적어진다. 왜 오류를 범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오류를 저지르는 일이 훨씬 많지 않을까. 알았다면 저지르지 않았을 오류가 내 주변에 더 많이 널려 있지 않을까.
실제로 학생들에게 내가 연재하는 글을 ‘역사학개론’ 시간에 함께 읽도록 권한다. 필자도 배워본 적 없는 학습 방법이니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몇 번 하고 나면 글과 생각이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나이 들어가는 역사학도가 역사 공부의 오류를 줄이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이것도 ‘과즉물탄개’다.
한발 나아가 공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 자체라기보다,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한다[過而不改, 是謂過矣]”고 했다. 오래된 지혜는 새길 필요가 있다.
유지기의 ‘사통(史通)’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나 하면, 코앞에 두고도 멀리서 찾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 역사학의 오류를 논하면서 정작 내가 번역한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을 소개할 생각은 못했다는 것이다. 실력이 부족한 내가 번역하기엔 너무 값진 책이어서 출간하면서도 다소 민망했지만, 앞으로 널리 읽혔으면 하여 짧게 나의 서문을 소개해둔다.
‘사통’은 뭐니뭐니해도 인류 최초의 ‘역사학개론’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역사서의 범주, 사관제도의 역사, 역사서에 담기는 기록의 종류, 역사서의 장단점, 분류사의 서술과 특징, 역사 사실의 왜곡과 오류에 대한 사료 비판에 대한 종합적인 관찰과 서술이다. 특히 역사서와 사학사를 다룬 일부를 빼면, ‘사통 내편’ 후반, ‘사통 외편’ 중후반 등 거의 모든 논의는 사료 비판에 할당되어 있다. 공자도 사마천(司馬遷)도 그의 비평을 피하지 못하였다. 학부 때부터 역사학을 전공한 나 역시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료 비판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유지기의 ‘사통’이 갖는 가치는 충분하다.
‘사통’은 또 다른 지평을 열어준다. 동아시아 인문학을 받쳐온 두 축은 경(經)과 사(史)였다. 그 한 축이었던 역사[史]라는 말은, 기록을 남기고(Recording), 기록을 보존하고(Archiving), 그것을 통해 역사를 서술하고 이야기하는(Histori-ography) 세 영역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현대 역사학은 이 중 주로 마지막 역사 서술에 국한되어 왔다. 학문이 분과(分科)로 발달한 결과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만이 아니라, 일상 쓰는 일기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사진도 역사이며, 무엇보다 보관하고 있는 행위 자체가 역사이다. 유지기는 ‘사통’을 통해 인간 존재로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항우(項羽)가 왜 거기에
우리는 주로 역사의 탐구-서술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다뤘지만, 유지기는 역사서의 체재에서 나타나는 오류부터 지적했다. 이는 본기니, 열전이니 하는 구획이 있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가 나라별 역사의 편찬체재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천자의 행적을 본기라고 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였고, 이는 후세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사기’에 천자를 본기로, 제후를 세가로 한 것은 합당하지만, 실제 내용이 분명치 않아 의미를 알기 어렵게 된 경우도 있었다. 진(秦)나라 백예(伯·#53667;)부터 장양왕(莊襄王)까지를 본기에 둔 것은 오류다. 진나라가 시황제(始皇帝) 때 중국=천하를 통일하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황제 이전까지 본기로 넣게 되면, 잘 모르는 사람은 전에도 황제였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지기가 볼 때 군웅(群雄)의 하나였던 항우(項羽)에게 본기를 배정한 것도 대표적인 오류다. 항우는 천자였던 적이 없다. 유지기가 이 문제점을 지적한 뒤 항우를 본기에 배정한 점을 놓고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사마천이 항우에 대해 천자 이상의 역사성을 부여한 것이라는 둥, 자신을 궁형(宮刑)에 처한 한 무제에 대한 반발에서 은근히 초나라 항우를 높인 것이라는 둥. 반대 측에선 변명할 여지없는 비일관성이며 사마천의 잘못이라고 했다.
유지기는 제후를 낮추고 천자와 구별하려는 이유에서 세가(世家)라고 이름 붙였다고 보았다. 이 역시 사마천의 창안이다. 진승(陳勝)처럼 변방 군졸에서 봉기한 뒤 왕을 칭한 지 여섯 달 만에 죽어서 대를 잇지 못한 경우조차 세가에 편재한 것은 기준이 잘못된 것이다.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집안 역사를 기전체로 저술한다고 생각해보자. 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아버지가 들어갈 자리에, 작은아버지나 당숙이 들어간 셈이다. 반고는 ‘한서’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사마천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다. 중간에 몇몇 오류를 답습한 역사서도 있지만, 대체로 이후론 사마천의 세가 분류는 사라졌고 반고의 체재가 전해졌다.
유지기가 못마땅해했던 부분은 표(表)다. 표는 족보와 세계(世系)의 연표(年表), 월표(月表)다. 여기서도 유지기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판한다. ‘사기’를 보면 본기, 세가, 열전, 직관(職官) 등이 각 편에 갖춰져 있어서 표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표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사기’의 열국 연표 정도는 남겨둘 만하다.
반고의 ‘한서’나 ‘동관한기’에도 이런 문제점이 있다. 더 심한 것은 반고의 ‘고금인표(古今人表)’다. 사람 등급을 9품으로 나눠 구별했는데, 열전이든 세가에서든 이런 구별은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표로 만들어 제시하는 건 의미가 없다. 게다가 ‘한서’가 포괄하는 한(漢)나라를 넘어 옛날 옛적 복희, 신농까지 포함시키는 무리를 범했다.
유지기는 ‘서지’의 논의에서 천문지(天文志), 예문지(藝文志), 오행지(五行志)로 나눠 설명했다. 그런 만큼 내용도 긴 편이다. 천문지나 오행지는 자연사의 영역이고, 예문지는 문화사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유지기가 의학(醫學), 양생(養生)의 관점에서 인형지(人形志)를 만들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시했던 점이다. 또 천하가 넓어 언어가 다른 데도 방언지(方言志)를 만들지 않은 데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다. 의학사, 언어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전반적으로 역사서의 서나 지가 최선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지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유지기는 도읍지(都邑志), 씨족지(氏族志), 방물지(方物志·특산물) 등을 꼽았다. 이들은 각각 여복지(輿服志·복식과 수레), 백관지(百官志), 식화지(食貨志·경제사)에 배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족보나 지리서들이 대대로 적지 않게 편찬됐으므로 이들을 모아 지를 만든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지적이다.
직서(直書)란 무엇일까?
사실의 수집이나 서술보다 어려운 것이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유지기가 말한 식(識)의 단계에 해당하는 식견과 덕성을 요구하는 역사학의 영역이다. 인간은 똑똑하고 못난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악업은 알려서 세상의 교훈으로 삼고 선행은 후세에 보여줘야 하는데, 그 책임이 사관에게 있음을 유지기는 ‘인물(人物)’ 편에서 강조했다. 그렇다고 군소 무리의 은밀한 사실까지 일일이 모아 기록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사관이 그들의 가계를 조사하고 고향이나 작위를 모아 허위사실까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조작해 열전을 만드는 건 더욱 용납할 수 없다.
이어 강조한 것이 직서(直書)다. 동호(董狐)와 조순(趙盾)처럼 피아 간에 유감이 없고 행동에도 의심이 없어야 역사의 진실과 직필을 기록하고 고금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직필을 지키려다가 형벌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세상사이기에, 사신(史臣)이 강직한 풍모로 권력에 빌붙지 않는 절개를 유지하는 것만도 어려울 것이다. 때로는 손성(孫盛)처럼 몰래 다른 판본을 만들어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비밀 일기라고나 할까? 이것도 재앙을 피하고 다행스럽게도 저술과 당사자가 온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곡필(曲筆)’ 편은 ‘직서’와 짝이 되는 편이다. 역사서 중엔 사실마다 거짓 증거이고 문장마다 터무니없는 것도 많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에 가탁해 자신의 은혜로 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악행을 꾸며내어 자기 원수를 갚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반고조차 다른 사람에게 금을 받고서야 비로소 기록을 남겼다.(‘사고전서총목’ 권45에서 유지기의 견해를 소개하는 한편 반고의 일은 사실이 아니라는 ‘문심조룡’ ‘사전(史傳)’의 말도 인용했다.)
경(經)도 예외는 아니다
‘삼국지’로 알려진 진수(陳壽)는 쌀을 빌려줘야만 열전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진서’의 ‘진수열전(陳壽列傳)’에 “정의(丁儀)와 정이(丁)는 위(魏)나라에서 명성이 있었다. 진수가 그의 아들에게, ‘천 곡(斛)의 쌀을 주면 그대 아버지를 위해 좋은 열전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 아들이 주지 않았더니 끝내 열전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했다.(그러나 하작(何 )의 ‘곤학기문(困學紀文)’에서 “문제(文帝)가 즉위하고 정의와 정이를 벌주어 남구(男口)를 묻어버렸는데, 어떻게 진나라 때까지 자식이 있겠는가. 쌀을 달라고 했던 일은 무함이다”라고 한 말을 소개했다.)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실은 내가 직서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어디까지 곧이곧대로 서술하는 것이 직필일까? 부모에 대한 일을 다 써도 되는가. 부모의 일이 아니라도 사람의 일이란 감출 일도 있고 드러내서 좋지 않은 일도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지나보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관은 20대 젊은 사람으로만 운영했을 것이다. 아예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편이 나을 것이므로. 그때는 그때고, 지금 나의 고민은 고민이지 않은가? 직서의 뿌연 경계를 아직 모르겠다. 이런 판단에 필요한 것을 두고 유지기가 식(識·식견)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사통(史通)’. 중국 당나라 때 사관(史官) 유지기가 저술한 세계 최초의 역사학개론이자 체계적인 역사비평이론이다.
‘의고(疑古)’는 ‘서경’을 중심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기술을 지적했다. ‘서경’의 ‘요전 서’에 “장차 제위를 물러나려고 순임금에게 양보했다”고 했고, 공안국(孔安國)의 주에서는 “요임금은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선위(禪位)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급총쇄어’엔 “순은 요를 평양으로 추방했다”고 했고, 어떤 책에는 “어떤 곳에 성이 있는데, 이름을 수요(囚堯)라고 불렀다”고 했음을 들어 ‘서경’의 말에 의심을 표현했다. 수요란 요임금을 가뒀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의심나는 점 10조목을 지적했다.
‘의고’에서 비판 대상이 ‘서경’이었다면, 유지기가 ‘혹경(惑經)’에서 비판했던 대상은 ‘춘추’다. 공자가 편수한 역사서가 ‘춘추’인데, 검토해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대표적인 기사가 열두 군데 이상 있다. 그런데도 ‘춘추’의 실제를 탐구하는 사람은 적고 명성만 따르는 사람은 많아 서로 부화뇌동하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공자가 ‘춘추’를 편수할 때 다만 이미 각국의 완성된 기록을 조금 다듬었을 뿐인데도, 사마천은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 기록해야 할 사실은 모두 쓰고 깎아야 할 사실은 모두 깎았으므로 글에 뛰어났던 자유나 자하 같은 제자들도 여기에 한 마디도 가감할 수 없었다고 칭찬했다.
내가 바로 오류의 출발이다
유지기는 반고의 ‘한서’ ‘오행지’를 집중 분석해 오류를 밝혔다. 그것은 크게 책을 인용할 때 적절하지 않은 점, 기사 서술이 이치에 맞지 않은 점, 재해에 대한 해석이 터무니없는 점, 고대의 학문에 정통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지기는 이 오류의 네 범주에 세세한 항목을 나누고 같은 부류끼리 구분해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사관의 기록과 ‘좌씨전’이 섞인 경우, ‘춘추’와 사관의 기록이 섞인 경우, 서술에 일정한 스타일이 없는 경우, 역사서 인용에 범례가 없는 경우, 단서만 꺼내놓고 징험을 제시하지 않은 경우, 서사에 수미가 없는 경우, 논란만 제기하고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경우, 서사가 조리 없이 섞여 있는 경우, 연호 표시에 기준이 없는 경우 등이다.
역사서의 수준 차이, 역사서에서 발견되는 사료 선택부터 해석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오류와 착오, 의문 등을 논의한 뒤, 유지기는 ‘암혹(暗惑)’ 편에서 사실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상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상식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도 없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를 통해 이런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어떤 측면에서 보면 구조적으로 논리가 오류인 논의라도 모든 점에서 오류인 건 아니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복잡한 사건에 대한 탐구나 논쟁은 숱한 추리가 체인을 이룬다. 몇몇 체인이 잘못됐다고 전체가 잘못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남의 말 중 어딘가 틀렸다고 해서 모두 듣지 않는 것, 오히려 그것이 오류다.
둘째, 구조적으로 어떤 측면 또는 모든 점이 오류라고 하더라도, 사실의 측면에서 결론이 오류인 건 아니다. 추론과 전제가 그르더라도 사실은 참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탐구나 논쟁에서 발견되는 오류는 저자가 지닌 악덕이 밖으로 표현된 게 아니다. 유능한 역사가도 오류를 저지른다. 아니, 유능한 역사가일수록 작품을 많이 남기므로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커진다. 그가 독자를 속이려 했는지 수사하는 건 역사학의 몫이 아니다. 속였으면 속였다고 적고, 속인 듯하면 속인 듯하다고 적고, 정황이 없으면 안 적으면 그뿐이다.
넷째, 오류가 없는 사유만 건강한 사유는 아니다. 명제만 있는 사유는 골동품이다. 질문하는 사유, 의심하는 사유, 창조하는 사유가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 오류를 피하는 게 좋지만, 오류를 피하려고 풍요로움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다섯째, 오류는 특정한 목적이나 전제와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비논리적 오류의 형태는 언제나 특정한 논리적 목표나 전제와 연결돼 있다. 이들이 분리돼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사사로운 의도의 개입을 의심해야 한다. 언제나 오류가 생기고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해서 오류가 자의적인 건 아니다.
공감과 연대감
역사 공부의 효용까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친구나 연인이 처음 만나 친해질 때, ‘호구 조사’부터 하는 이유가 곧 역사 공부의 효용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경험에 대한 공유와 이해를 통해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 공감과 연대감, 편안함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굳이 덧붙이자면, 다 변한다는 사실이다. 인생이 변하듯이, 때가 되면 죽듯이, 민주주의도 자본주의도, 곁에 있는 가족도 역사적이다. 언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서로 살만하게 만들고, 수명이 다할 때 다시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말이다. 이런 역사성을 인식할 때 역사 공부가 가슴에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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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말이, 쓴 글이 사는 데 도움이 될까. 늘 이게 고민이고 걱정이다. 도움이 되는 배움은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반성을 통해 이뤄진다. 혹여 내가 설교 비슷하게 말했어도 시민 여러분께서 반성의 계기로 승화시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