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낮으로 육아에 시달리느라 축 늘어진 뱃살을 돌볼 틈도 없던 아내가 어느 날 곡기를 끊었다. “살 좀 빼!” 아내의 후줄근한 모습이 못마땅한 남편의 한마디가 계기였다.
- 그 좋아하던 밥도, 빵도, 국수도 모두 끊겠노라 선언한 아내, 가정의 평화까지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다.
- 요즘 사회적 화두가 되는 탄수화물 중독.
- 여성에게 더 강렬하고 치명적이다.
문제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탄수화물 섭취에 있다. 한국인은 식습관상 탄수화물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서구화한 식습관까지 일상화하면서 흰 쌀밥 외에 식빵, 파스타, 피자, 쿠키, 케이크, 도넛, 아이스크림, 초콜릿까지 자주 먹는다.
생리 전 단 음식 당겨
탄수화물이 유독 중독성이 강한 첫 번째 이유는 특유의 ‘단맛’에 있다. 비단 설탕과 같은 당질지수가 높은 탄수화물뿐 아니라 일반적인 탄수화물도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을 낸다. 그런데 여성은 생리적으로 단맛을 찾는다.
‘좋은 클리닉’ 유은정 원장(정신과 전문의)은 “여성의 경우 호르몬의 영향으로 단맛을 탐닉한다. 특히 생리 전의 불안감과 초조감으로 탄수화물을 찾는 생리전증후군이 원인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나 우울증이 찾아오면 세로토닌의 분비가 감소한다. 이때 뇌는 세로토닌의 수치를 높이기 위해 탄수화물 섭취 욕구를 증가시킨다.
남성이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면 여성은 탄수화물류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할 수 있다. TV 드라마에선 남편의 외도를 안 주부가 한밤중에 양푼 가득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흔하게 나온다. 많은 직장 여성은 함께 파스타를 먹으며 수다를 떨면서 일터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하지만 탄수화물 섭취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 우리 몸은 세로토닌 과다분비 상태에 맞춰진다. 따라서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탄수화물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우울증에 빠진다. 상당수 여성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수화물에 중독된다. 탄수화물을 먹으면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 역시 탄수화물 중독의 원인이다. 도파민은 마약을 복용할 때처럼 쾌락과 행복감에 관련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게임 중독이나 마약중독에 빠졌을 때도 활성화한다. 문제는 도파민의 ‘중독성’이다.
일부 여성은 탄수화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손이 떨리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불안해지고 답답해진다고 호소한다. 일종의 탄수화물 금단증세인데 이를 일으키는 주요한 요인이 도파민이다. 도파민 분비가 늘수록 몸은 도파민에 내성을 갖는다. 같은 쾌락을 느끼기 위해 더 많은 도파민을 필요로 한다.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쳐 끊임없이 식탐을 자극한다.
유 원장은 “마약중독이나 알코올중독은 몸에 해롭다고 의식한다. 그러나 탄수화물 중독에 대해선 경각심이 덜하다. 이 때문에 탄수화물 중독이 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탄수화물의 유혹은 몸의 신진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진대사에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 탄수화물의 가장 작은 단위인 포도당이다. 포도당이 혈액 속에 들어가면 혈당이 올라간다. 그러면 당을 분해해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해 췌장이 인슐린을 분비한다. 인슐린은 혈당을 급속히 분해해 다시 저혈당 상태를 만든다. 그러면 또다시 탄수화물 섭취 욕구를 느낀다. 우리 몸은 이런 순환을 반복한다. 탄수화물 과다섭취가 일어나기 쉬운 구조다.
“생각 많으면 더 찾아”
여성이 남성에 비해 생각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쉽게 탄수화물 중독에 빠진다는 가설도 있다.
‘WE 클리닉’의 조애경 원장(가정의학 전문의)은 “대체로 남성은 육체 활동이 많고 생각이 단순한 데 비해 여성은 육체 활동이 적고 생각이 많다. 그만큼 뇌에서 필요로 하는 당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남성보다 탄수화물을 더 찾는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포도당은 뇌세포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영양소인데 스트레스가 많을수록, 신체 활동보다 감성적인 부분이 발달할수록 뇌에서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많아지고 이로 인해 단맛을 더 찾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다이어트를 자주 하는 점도 영향을 준다. 정상적인 다이어트가 아닌, 무리한 다이어트를 통해 체중을 감량한 여성은 이후 요요현상으로 탄수화물을 폭식할 가능성이 커진다.
‘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 연구소’가 작성한 설명서에 따르면 성인에게 필요한 1일 탄수화물 양은 활동량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가벼운 작업량의 경우 체중 1kg당 3~5g, 걷기와 같은 1시간 이내 가벼운 운동의 경우 5~7g, 1~3시간의 강도가 있는 운동의 경우 6~10g, 4~5시간의 강렬한 운동의 경우 8~12g의 탄수화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체중이 60kg인 사무직 여성은 하루 300g의 탄수화물, 즉 1200kcal 정도의 탄수화물만 섭취하는 게 적당하다.
전문가들은 탄수화물 중독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건강의 적’으로 분류한다. 과다한 탄수화물의 섭취는 당연히 비만을 부른다.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등의 합병증이 나타날 수 있다.
조 원장은 “당질의 과잉 섭취는 인슐린의 과다 분비, 급속한 저혈당, 대사 기능의 저하를 일으킨다. 영양소 불균형으로 결국은 더 많은 지방 축적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탄수화물 중독에 빠질 경우 혈당 변동 폭이 커지면서 인슐린 과다 분비와 췌장의 과다 노동 탓에 당뇨병이 생길 위험마저 생긴다. 그뿐 아니라 단순 당질은 중성 지방의 형태로 간에 축적돼 지방간을 만들고 혈관에 쌓여 동맥경화를 일으킨다.
“어머, 내 피부가…”
조 원장은 또 탄수화물 중독이 피부 트러블과 색소 침착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혈당 변동 폭이 커지면 몸은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면서 코티솔 호르몬을 분비하는데, 이 호르몬은 신진대사를 떨어뜨려 쉽게 피로하게 하고 피부 대사를 저하시킨다. 또 멜라닌세포를 자극하는 호르몬을 분비시켜 피부를 어둡게 하는 것이다. “어머, 피부가 왜 이렇게 됐지?” 하는 한숨이 나올 수 있다.
특히 당질지수가 높은 단순 당질, 즉 설탕, 쌀밥, 빵, 국수 같은 정제된 탄수화물은 탄수화물 중독의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조 원장은 “단순 당질은 체내에서 빠르게 당으로 바뀌어 순간적으로 혈당을 높이는데 저혈당과 단순당질 공급을 반복함으로써 탄수화물 중독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탄수화물 중독에 걸린 사람이 탄수화물을 끊으면 2주 정도 금단 증세를 겪게 된다. 탄수화물 중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먼저 탄수화물 특유의 단맛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섭취하는 탄수화물의 종류를 달리할 필요도 있다. 조 원장은 “같은 탄수화물이라도 현미나 통밀 같은 도정이 덜 된 곡분이 분해 속도가 느려 중독을 예방한다”고 했다.
물을 자주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조 원장은 “식사를 했는데도 출출하다고 생각되면 탄수화물 부족이 아닌 수분 부족일 수 있다. 물을 수시로 마시고 단맛이 당기면 오이나 토마토를 먹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탄수화물 과다 섭취를 예방하려면 견과류를 대신 섭취해도 좋다.
서울백병원 비만클리닉 강재헌 교수(가정의학전문의) 역시 탄수화물 중독을 피하는 첩경은 ‘좋은 탄수화물’을 골라 먹는 식습관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식품에는 혈당을 얼마나 높이는지를 나타내는 ‘당지수’가 붙는데 당지수가 낮은 식품일수록 좋은 탄수화물이다. 강 교수는 “고탄수화물 요리, 설탕, 과자, 인스턴트식품, 청량음료의 섭취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도 조 원장과 마찬가지로 흰 쌀밥 대신 현미나 잡곡밥을, 흰 밀가루 대신 도정하지 않은 통밀가루를 권했다. 이렇게만 해도 탄수화물 과다섭취를 막을 수 있으며 비만, 당뇨, 변비, 고혈압, 대장암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견과류를 대신 섭취하라고도 했다.
음식에서 탄수화물 비중을 줄이고 단백질과 섬유질 비중을 높일 필요도 있다고 한다. 양질의 단백질은 소화 속도가 느리고 포만감을 줘 식욕을 줄인다. 섬유질은 탄수화물이 혈당으로 바뀌는 속도를 완화한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규칙적으로 조금씩 먹는 습관도 중요하다. 한꺼번에 많이 먹는 식습관이 혈당치를 높여 탄수화물 중독에 다가가게 하기 때문이다.
유 원장에 따르면, 탄수화물 중독은 단 음식을 달라는 몸의 외침이 아니라, 나를 위로해줄 공갈젖꼭지를 달라는 마음의 외침이다. 그는 “탄수화물 중독은 폭식증 여성 환자 대다수에게서 발견된다”면서 “폭식증을 해결하기 위해선 심리적 허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폭식증 환자는 자기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경향이 있다. 살이 찌면서 자기가 음식마저 통제하지 못한다는 자기비하와 자존감 상실이 더 심해진다. 이에 따른 스트레스로 더 음식을 찾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다이어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것도 탄수화물 중독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다. 탄수화물을 무조건 제한하는 원 푸드 다이어트는 스트레스를 너무 높여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공갈젖꼭지 달라’는 외침
유 원장은 “귀가할 때 습관적으로 간식을 사들고 들어가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식사 대신 목욕, 음악 감상, 산책 등으로 휴식의 방법을 바꿔보라”고 조언했다. 일상의 피로와 우울을 날려버리고 심리적 허기를 채워준다면 스트레스에서 해방돼 탄수화물에 집착하는 일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한다.
실제로 일부 연구는 산책, 느린 걸음, 애착, 수면이 세로토닌을 올려주어 우울증, 무기력,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을 막아준다고 보고한다.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어떤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것도 탄수화물 중독에서 헤어 나오게 하는 방법이다. 사랑에 빠지면 쾌락물질인 도파민이 생성돼 탄수화물에 대한 욕구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여성은 연애를 하면 통상 살이 빠진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여성은 밥과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