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대립과 갈등이 정치의 모든 것은 아니다. 권력을 획득하는 것 못지않게 공존과 통합을 이뤄내는 것은 정치에 부여된 또 하나의 과제다. 공존과 통합이 중요한 이유는 대립과 갈등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그 사회는 결국 깨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데 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사회라는 공동체는 유지돼야 하며 이런 공동체 유지에 정치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열리는 정치의 계절에 통합을 말하는 것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사회통합이 상당히 약화됐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이에 관해선 먼저 한 사건을 주목하고 싶다. 얼마 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 송파구의 한 반지하방에 살던 세 모녀 사건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 당뇨병을 앓은 큰딸, 만화가를 지망한 작은딸은 집주인에게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내고, 정말 죄송하다는 쪽지를 남긴 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누구는 이 사건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맞다. 우리 사회에선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반복돼왔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것은, 이런 사건이 되풀이해 발생하는 곳은 구성원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이뤄진 ‘정글’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정글로서의 특징은 자살률 통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2년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고의적 자해 사망자 수)은 29.1명을 기록했는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또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 사망률이 가장 빠르게 상승해온 나라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00∼2010년 자살 사망률은 101.8% 상승했다.
무엇이 자살을 불러왔는가. 경찰통계연보에 따르면, 2012년 자살 1만3940건 가운데 정신적·정신과적 문제 3861건(27.7%), 육체적 질병 문제 2887건(20.7%)에 이어 경제생활 문제가 2618건(18.8%)으로 세 번째를 차지했다. 전체 자살자 가운데 5분의 1이 먹고사는 문제가 힘들어 세상을 떠난 셈이다.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자살 충동에 관한 통계다. 통계청이 2012년 15세 이상 인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 1년 사이에 심각한 수준의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는 답변이 9.1%에 달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39.5%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다시 말해, 전체 인구의 3.6%에 가까운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회가 다름 아닌 우리 사회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우리 사회통합에는 노란불이 아니라 빨간 경고등이 이미 켜졌다고 봐야 한다. 사회통합은 스스로를 사회 구성원으로 자각하게 하고 동료의식을 갖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통합이 약화되는 데는 물질적 요인과 정신적 요인이 존재한다. 심화된 양극화와 취약한 사회복지 등이 물질적 요인이라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사회를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는 정신적 요인을 이룬다.
이런 물질적 요인과 정신적 요인은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긴밀히 연관돼 있다. 먹고사는 게 갈수록 힘들어지는데 사회나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 그 사회나 국가는 낯선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결국 이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사냥터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에 따르면, 현대사회에는 두 가지 삶의 전략이 존재한다. ‘정원사’와 ‘사냥꾼’ 모델이 그것이다. 정원사는 앞선 시대의 인간상이다. 세계와 삶은 하나의 정원이며, 정원사는 자신의 계획대로 정원을 가꿔왔다. 바우만은 이런 행복한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 인간은 사냥꾼이 돼서 끝없이 펼쳐진 사냥터에서 짐승들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냥꾼이 되느냐, 아니면 사냥감이 되느냐가 이 시대의 현주소라는 게 바우만의 견해다.
바우만의 주장을 적용해보면, ‘경쟁에 의한, 경쟁을 위한, 경쟁의 사회’가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가야 할 직장이 없어도 이력서에 스펙을 빼곡히 써넣어야 하는 청년 세대,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료들과 또 다른 경쟁을 벌여야 하는 30대, 그리고 직장에서 은퇴한 다음 치킨집·피자집을 열어도 거기에 또 다른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는 50~60대는 바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경쟁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며, 이런 사회에서 사회통합이 약화되는 것은 사실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사회통합이 약화될 때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자살률이 상승하고, 범죄율이 높아지며, 경우에 따라선 특정 세력을 ‘악마화’함으로써 통합 약화의 원인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선동주의가 강화되기도 한다. 최근 모바일 설문조사 전문기관인 두잇서베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시 태어난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57%)는 응답이 ‘태어나고 싶다’(43%)는 응답을 추월했다. 그 이유로 지목된 것이 과도한 경쟁, 치열한 입시, 스펙 쌓기 등이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것이 바로 201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60%에 가까운 사람들이 태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를 과연 온전한 공동체라고 볼 수 있을까? 지난 50여 년 동안 모범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왔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우리 앞에 펼쳐진 사회는 통합이 사실상 고갈된, 아주 낯설고 기이한 행성과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를 이런 상태로 계속 놔둔다면 우리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는 사회 해체 과정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선 사회통합을 서둘러야 한다. 사회통합의 속도를 높이려면 우선 제도와 의식이 동시에 크게 변화해야 한다. 교육과 문화로 대표되는 의식의 영역은 장기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사회안전망과 복지정책을 포괄하는 제도의 영역은 마음먹기에 따라 단기간에 개선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정치가 중요하다. 제도의 변화를 담당하는 최종 의사결정 영역이 다름 아닌 정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정치가 여전히 사회통합에 큰 관심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정부만 하더라도 2012년 대선 당시 ‘국민통합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출범 후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사회통합을 위한 노력에 인색했다.
야당의 경우도 면책되지는 않는다. 정부가 사회통합에 소극적이었다면 야당이라도 나서서 양극화 해소와 복지정책 추진의 정치력을 발휘했어야 했는데, 그러하지를 못했다.
정치가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인 제도 개혁을 주도할 수는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열리는 정치의 계절에 대립과 갈등이 부각되면서 정치사회가 사회통합을 선거를 위한 수사로만 활용할 뿐 그 해법에 대한 관심을 더욱 멀리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희망’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이제 정치는 ‘무관심’ 내지 ‘절망’과 동의어로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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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하나. 시민사회의 감시도 중요하지만, 결국 정치사회의 자각이 가장 중요하다. 정치사회 안에도 고충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정치인이 되기를 결심하고 정치를 직업으로 하고 있다면 막스 베버(Max Weber)가 일찍이 말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동시에 발휘해야 한다. 우리 정치인은 공동체의 유지라는 선(善)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신념윤리와 정책의 결과로써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게 보답하는 책임윤리를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깊게 새겨야 한다. 열리는 정치의 계절에 정치사회의 자기계몽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