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맹씨행단의 대청마루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03-19 17: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연락이 끊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홀로 책 읽으며 이치를 궁리할 수 있는가.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오래전, 황지우 시인이 쓴 칼럼이 생각난다. 그는, 문구점에서 펜이라도 사게 되면 ‘잘 써지나?’하고 써본다고도 했다. 누구는 선을 그어보고 누구는 자기 이름을 써보고 또 누구는 근사하게 사인도 해본다지만 시인은 ‘잘 써지나?’라고 써본다는 것이다. 그런 글을 읽으면 갑자기 황지우 시인이 진짜 시인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된다.

    시인은 또 어떤 일로 혼자 무료하게 있게 되면, 빈 종이에 그림을 그려본다고 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지만, 극작에 연출도 하고, 조소도 했으며, 그렇다고 장르 욕심으로 이것저것 해본다기보다는, 요즘의 그 흔한 말로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는 장르 간 경계 뛰어넘기를 1980년대 초 다 이룬 시인이니만치 그가 빈 종이에 뭐라도 그린다고 하면 어떤 것일까, 궁금했는데, 집을 그린다고 했다. 내 기억이 정확지는 않은데, 아마도 방을 그려본다고 했던 것 같다. 방이든 집이든, 빈 종이에 서로 다른 크기의 네모 칸들을 쳐보고 이리저리 구획도 해보고, 그래서 현관의 위치며 안방의 크기며 서재의 방향 같은 것을 낙서처럼 그려본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공간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도 이런 습관이 있는 분이 있을 것이다. 꼭 빈 종이에 실제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좋다. 혼자서, 어쩌다 생긴 막연한 시간을 무덤덤하게 보내야 할 때, 집을 생각하고 방을 생각하고 그러다가 시간이 더 남으면 서재라든지 집필실이라든지 아무튼 자기 혼자만 쓸 수 있는 방을 구상한 후, 그 안에 책상이며 오디오며 편안히 쉴 수 있는 의자라도 한번 생각해보는 것,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중엽 이후 팽팽한 긴장과 갑작스러운 충돌의 시간을 거의 살인적인 속도로 통과해오는 동안, 이 거대 도시에 몰려 살기 시작한 가족의 필사적 목표는 집 한 칸 장만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거나 어떨 때는 폭락했다. 올라도 걱정이고 내려도 걱정인 게 아파트 값이다. 무리해서 대출이라도 끼고 사는 순간부터 남은 사회적 활동기를 그 이자와 원리금 갚는 것으로 허덕였어야 했다. 그 사이에 자식들 학교도 보내야 하고 혼사도 치러야 한다. 겨우 그 힘든 짐을 다 부리고 나면, 어느덧 노년이 되는데, 달리 말하면, 병원의 종합검진을 받으러 가기가 겁이 나는, 그런 나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한평생 살면서 지상의 방 한 칸을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도 그런 경우에 속하지만, 그래도 하는 일이 책을 읽거나 책을 쓰거나 책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라서, 일찍부터 집 바깥에 작업실을 둘 수 있었다. 수천 권의 책과 음반을 따로 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인 까닭에 혼자만의 공간을 가져보는 호사를 누린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마무시’한 스케일에 밖의 풍광은 수려하고 안의 조명은 아늑한 곳이었느냐 하면,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신혼 초에는 동네 고시원이 작업실이었고, 그 후로도 고작해야 대여섯 평 남짓한 크기의 공간을 옮겨 다녔다. 한번은 저 파주 헤이리의 어느 근사한 집의 교실 크기만한 지하실을 통째로 썼는데, 습기가 그토록 무서운 놈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장마철이면 책마다 곰팡이가 안개처럼 피어올라서 귀한 책을 많이 버렸다. 어쩌다 피곤해 소파에 엎어져 잠이라도 들면 바로 그곳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만큼 몸속 깊이 습기가 파고들어 귀한 시간도 많이 버렸다.

    그래서 또 옮겨야 했다. 지금 있는 곳은, 비교적 저렴한 값에 널찍하게 쓰는데, 이번에는 소음이 문제다. 양옆의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소음들, 왼쪽 방에서는 왜 안 갚느냐, 언제 갚을 것이냐, 그냥 확 찾아가는 수가 있다, 이런 얘기가 하루 종일 들려온다. 가서 노크한 후,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하기 겁난다. 오른쪽 방에서는 저녁마다 술 한잔 걸치고 담소를 나누는데 얻어들을 거 하나 없는 중년 사내들의 농담이다. 이쪽 방에 가서도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농담을 듣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음악을 틀곤 하는데, 아마도 내가 듣는 천지가 진동하는 말러 교향악이나 가히 비명과 절규에 다를 바 없는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 소리가 좌우의 방으로 넘실거릴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가 꾹 참으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이런 판국이라, 나도 시인처럼, 무료한 시간이라도 생기면 빈 종이에 쓱쓱 칸을 그려본다. 집 전체를 그려볼 때도 있고, 직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네모를 그린 다음, 책상과 책장과 오디오와 소파를 이러저리 놓아본다. 딱 그 몇 분 동안은 행복하다. 때로 고민까지 한다. 빈 종이에 그리는 공상이건만 작업실 크기며 빛의 방향이며 오디오 위치 따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다시 그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가고,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거나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쌀쌀한 바람이 부는 충남 아산의 맹씨행단(孟氏杏壇) 대청마루에 앉아서 하는 중이다.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충남 아산시 맹씨행단의 방.



    외암리 민속마을

    아산에는 맹씨행단이 있고 외암마을이 있다. 도로의 진행 방향 때문에 먼저 나는 외암마을부터 들렀다. 이 마을들의 주산은 설화산이다. 이런 산이라면 풍수에 능하고 지리에 통하다는 이들의 고견이 필요 없을 정도다. 멀리서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편안하고 아늑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산 아래로 마을들이 흡사 아기새들처럼 어미새, 곧 설화산 품에 깃들어 있다. 산 모양이 붓끝처럼 생겨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름 덕분인지 산 아래 마을에서 수많은 문필가가 나왔다. 설화산의 한쪽 기슭으로 외암마을이 있고 반대편으로 맹씨행단이 있다. 나는 먼저 외암마을을 들렀다가 맹씨행단으로 넘어왔다.

    외암마을은 ‘외암리 민속마을’이라고도 하는데, 너무 관광지 같은 명칭이다. 하긴 산하 도처가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서 온통 ‘문화관광 사업단지’로 변모하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본다면 외암마을은 ‘민속마을’이라는 이름을 진즉에 들을 만한 곳이다. 원래 강씨와 목씨의 집성촌이었다가 조선 명종 때 예안 이씨의 이정(李挺)이 옮겨와 살면서 예안 이씨 세거지가 됐고 이정의 6대손 이간(李柬)의 호를 따서 ‘외암’이 됐다.

    외암마을은 물의 마을이라고 할 만하다. 마을 입구를 적시는 큰 개울이 있다. 설화산과 광덕산에서 흘러내린 물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넉넉한 물소리를 듣게 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부채를 아래쪽으로 완만하게 펼쳐놓은 형태로 마을이 조성돼 있다. 그 부챗살들 사이로 물이 넉넉하게 흐른다. 이로써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연못을 조성하기도 한다. 유려한 곡선의 초가지붕이나 단아한 기와집의 처마도 고개 들어 볼 만하지만 일부러 시선을 밑으로 하여 찬찬히 내려다보면 외암마을에 물이 넉넉하고 또 그 물을 일상생활에 두루 활용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제법 큼직한 집마다 조성된 연못은 그 자체로 미의식의 반영이자 화재 같은 위급한 일에 긴급히 대응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외암마을에는 건재고택으로도 불리는 영암댁을 비롯해 참판댁, 교수댁, 송화댁 등의 양반 주택과 여든 채가량의 초가가 옛 모양 그대로 남아 있다. 일찍이 ‘민속마을’로 지정돼 임의로 개편하는 것이 행정적으로 어려워진 까닭도 있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형태만 있고 삶은 없는 조잡한 테마파크로 전락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다. 직선의 도시에 익숙한 방문자에게 외암마을은 곡선을 보여준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은 초가의 지붕으로 이어지고 또 거기서 설화산의 능선과 잇닿는다. 그 능선 너머로 중리마을이 있고 맹씨행단이 있다.

    맹씨행단은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1360∼1438)이 살았던 집이다. 고려 말의 최영 장군 손녀사위였고 조선 개창 이후에도 조정 안팎의 고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행단은 은행나무가 있는 단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뜻이 깊다. 공자의 묘나 공자 사당에 흔히 은행나무를 심었으므로 ‘행단’이라고 하면 공자 사상과 직결된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은행나무가 있어 유래한 것인데, 따라서 행단은 마을의 향교나 후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뜻하기도 한다.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아산시 외암민속마을의 장독대와 메주.

    소슬한 오후

    그러니 오래된 고택이라고 해서 이런 별호를 함부로 쓸 수 없으며 더욱이 정승 판서가 난 세도가라고 해서 행단 같은 말을 갖다 붙일 수도 없다. 오직 학문에 정진한 바 이를 존숭해 따르는 후학이 있어 단호히 질정하고 어질게 이끌어 무릇 스승이란 격에 어울린 학자의 집에 진정한 경칭으로 붙는 이름이 행단이다. 이 고택의 입구에 회화나무와 향나무가 서 있고 사랑채 곁으로는 역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을 견뎌왔으니 그 내용과 형식에 걸쳐 과연 행단이란 말에 어울리는 고택이다.

    고건축 전문가들은 이 고택이 고려 말의 가옥 구조와 조선의 그것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확연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처음 지을 때는 온돌이 없었으나 1482년 온돌을 설치한 점, 조선 세종 때 민가의 장식을 엄격히 단속했는데 그 전후의 양상이 동시에 다 확인된다는 점, 바람을 막기 위해 문지방 아래에 대는 널조각(머름)이 창의 위아래에서 모두 보인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창 아래에만 머름을 설치했다고 한다.

    쌀쌀한 2월의 평일 오후였으므로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그때는 5월이라 세상 만물이 잔뜩 부풀어 오른 화창한 계절이라 이 고택을 둘러싼 나무들이 유록색으로 찬란했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데, 2월 하순에는 한 줌 남은 겨울의 잿빛이 겨우 드리워져 있을 따름이다. 마침 바람도 쌀쌀해 찾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 덕분에 잠시나마 대청마루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지나가는 바람소리의 결까지 엿볼 수 있었다. 천하가 문화 관광지로 급변하는 시대에 이런 기회는 아주 귀하다.

    나는 마당을 거닐어보고, 대청마루에 앉아보고, 사랑채의 크고 작은 방에 들어가 앉아보고, 뒤란을 걸어보기도 했다. 후원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뒤란이라는 말이 훨씬 따스하다. 정원보다 마당이 편안한 이치다.

    요즘의 아파트 군락지에서 소요할 만한 구석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당도 없고 뒤란도 없고 대청마루도 없는 곳, 기껏해야 한 뼘의 베란다요 텔레비전 왕왕거리는 거실인데, 그 네모난 규격의 아파트를 벗어나면 또한 주차장이요 조금 멀리 걸어가야 겨우 공원이 나온다. 널찍한 공원이 일순간 시원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판에 박은 조경에 딱딱한 벤치에 조잡한 설치물을 보다보면, 곧 서둘러 일어나게 마련 아닌가. 그러므로 이런 공간에서 혼자 마당을 걷고, 대청마루에 앉고, 다시 일어나 뒤란으로 걸어가보는 일이란 귀하다.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돌담장에 내려앉은 빛

    아마도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게 될 무렵에는 산하가 봄볕에 들떠서 봄꽃들 피고 나무들은 서서히 유록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새들도 이 산에서 또 저 산으로 짖어대며 날아가는, 그런 초봄일 터인데, 지금은 모든 사물이 겨울의 마지막 압력에 눌려 있는 2월이다. 그러니 오히려 쌀쌀한 고택에 은일자의 기풍이 흐르는 듯하다.

    조선 후기 화원으로 장득만이 있다. 그의 그림 중에 ‘송하문동자도(松下問童子圖)’가 있다.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어보다’라는 뜻이다. 무엇을 물었는가. 장득만은,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를 화폭으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가도의 시를 읽어보자.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었더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 스승께서는 약초 캐러 가셨다고 한다.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다만 이 산중에 계실 것인데,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구름이 자욱하여 있는 곳을 알 수 없구나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맹씨행단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재상 맹사성이 살았던 집이다.

    예부터 이런 물러섬의 세계를 존경할 만한 은일자의 삶으로 여겨왔다. 이렇게 소슬한 고택에 빛이 드리워졌다. 잿빛 하늘, 구름 사이로, 햇살이 잠깐 비친 것이다. 조금씩 서산으로 이울어진 늦겨울 오후의 햇살이 다행히 뒤란으로 넘어와 작은 방으로 스며들고 용케 대청마루까지 번졌다. 나는 그 빛을 보았다. 너무 귀해 손으로 쓸어보기도 했다.

    고택의 방은 크기가 저마다 달랐고 마당과 마루와 뒤란의 문도 저마다 달랐으므로 빛들은 섬세한 조형 감각을 가진 이가 일부러 공들여 빚은 듯 각양의 모양으로 고택 안에 기하학을 남겼다.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넌지시 내려다보고 다시 몸을 돌리면 뒤란과 돌담장이 조성돼 있는데, 그 전후와 좌우를 희미한 빛들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한참이나 보고, 다시 그 빛을 따라, 조금 더 소요했다. 문태준의 시 중 ‘빈집’이 있는데, 21세기의 ‘심은자불우’라고 할 만하다.

    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우리는 점점 더 혼자 있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혼자 있을 만한 공간 자체가 없고, 그런 시간도 부족하다. 마을은 사라지고 이웃은 소멸했는데 소음은 더 심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의 아파트 군락지를 마을이나 동네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위아래로 한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마을도 없고 이웃도 없는데, 수많은 사람이 소음과 매연과 음식 쓰레기를 내다버리면서 살아간다.

    긴 시간을 홀로 보낼 수 있는 힘

    그런 까닭에 더욱더 악착같이 혼자 있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 문학의 진짜 은둔자 에밀리 디킨슨은 자기 집 2층의 방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방을, 그 집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우리 같은 일상인이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용한 곳을 찾아 헤매던 윌리엄 포크너는 결국 자기 집 뒤에 서재를 만들고 그곳으로 출퇴근하며 글을 썼다. 우리 문단의 중진 소설가 중 한 분은 안방에서 정장으로 말끔하게 차려입고 2층 서재로 ‘출근’해 양복 윗도리를 단정하게 벗어놓은 후 원고지에 몰두했다가 다시 옷을 차려입고 1층으로 ‘퇴근’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어쩌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떤 물리적 공간을 혼자 마음 놓고 쓴다는 것,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점이다. 조금 무리해서 서재를 장만할 수도 있고 책과 음악을 제대로 읽고 듣기 위해 집 근처에 작은 공간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마련한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작업실을 꽤 오래 써본 경험에서 말한다면,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실하게 버텨내는 것, 그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은 채, 혼자서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 그런 힘이 중요하다.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다.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을 철저히 경계하라는 뜻이다. ‘대학’에 이렇게 쓰여 있다. “소인은 한가하게 있을 적에 불선을 행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가, 군자를 본 후에 슬쩍 그 불선함을 가리고 선함을 드러내지만, 남이 나를 보는 것이 폐와 간을 보는 듯하니 그러한 즉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것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에도 철저히 경계하는 것이다.” ‘중용’에도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잠시라도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고 쓰여 있다.

    철저한 경계로서의 신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홀로 고립된 신독이 아니라 주위와 어울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경계하는 신독이니 더욱 어렵다. 경주시 안강의 옥산리에 가면 옥산서원이 있고 그 안쪽 계곡에 회재 이언적의 고택이 있다. 그 사랑채의 당호가 ‘독락당(獨樂堂)’이다. 혼자 있을 때에도 능히 즐거운 곳이라고 풀이되지만, 그 뜻이 예사롭지 않다. 옛말에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으되, 여기서 친구가 찾아온다는 것을 너무 일상적인 교류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뜻이 맞는 이, 나아가 뜻을 함께 도모하는 사람, 혹은 그 뜻을 헤아려 천하를 도모하는데 함께하려는 군주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때, 그런 때에도 혼자 책을 읽고 만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즐거움, 곧 신독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역시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문제다. 혼자만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그게 어쩌면 우리 시대의 진짜 문제다.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하고 조금이라도 세상의 연락이 끊어지면 극심한 고립감에 빠진다.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나오면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것을 견디는 힘이 그 사람을 구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맹씨행단의 대청마루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사위는 어두워졌다. 오랫동안 고택을 시봉해온 두 그루의 은행나무 사이로 새가 한 마리 스쳐 지나갔다.

    신독(愼獨) 혼자서 견뎌내는 방법

    충남 아산시의 한 고택.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