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북정책 주도권 논란
- 北에 외면 받고 靑에 휘둘리고
- “靑 감탄할 정책으로 기회 만들어야”
류길재 통일부 장관(오른쪽)이 2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북한 학자가 최근 정부의 한 관료에게 퍼부은 독설이다. 청와대가 천해성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을 국가안보실 대통령안보전략비서관으로 내정했다가 일주일 만에 철회한 사건과 국가안보실이 주도한 남북고위급회담 성사로 ‘통일부 소외론’이 한창 나돌던 시점이었다. 이명박 정부 집권 초 통일부 폐지론의 악몽에 시달린 통일부 사람들에겐 고약한 말로 들릴 법하다.
비슷한 시기 기자와 만난 북한 전문가도 가시 돋친 말을 남겼다.
“남북관계는 꿈틀거리는데 통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MB가 얼토당토않은 통일부 폐지론을 주장했을 때는 결사반대했지만 지금처럼 멍석 깔아줘도 통일부가 나서서 주도하지 못하면 오히려 문 닫는 게 낫지 않은가?”
2014년, 통일부 주변을 배회하는 통일부 위기론, 소외론, 위상축소론의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남북대화에서 통일부가 배제됐다는 인상을 세간에 심어준 계기 중 하나는 2월 11일 오후 갑작스레 전해진 남북고위급회담 성사 소식이었다. 회담이 열리는 12일을 하루 앞두고 급박하게 전해진 이 소식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회담의 전면에 나선 것은 통일부가 아니라 청와대 국가안보실이었다. 임명된 지 열흘이 채 안 된 외교부 제1차관 출신의 김규현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수석대표를 맡았다. 북한의 수석대표는 남북 협상에서 잔뼈가 굵은 원동연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었다. 북한은 원동연이 포함된 대표단을 ‘김정은의 뜻을 지닌 국방위원회 대표단’이라고 소개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대리회담이라고 할 만했다.
더군다나 청와대-국방위 회담을 제안한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2월 8일 서해 군 통신선으로 회담을 제의하면서 대화 상대로 청와대 국가안보실을 콕 집었다.
회담은 첫 접촉이 결렬된 뒤 북한이 2차 회담을 전격 제의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사실 북한은 애초 회담에서 한국이 원하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합의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이를 미끼로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北, 대화 상대로 안보실 지목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강조한 남북 간 비방 중단. 그것이야말로 북한 국방위가 한국으로부터 반드시 얻어내야 할 지상과제였다. 김정은이 야심 차게 신년사를 발표한 뒤 각 분야에서 이를 이행하는 각종 성과를 자랑하는 시점에 남북관계에서도 그 공적을 선전해야 할 숙제가 북한의 ‘대남일꾼’들에게 던져졌기 때문이다.
‘대남일꾼’들은 자신들의 오랜 카운터파트인 통일부 대신 국가안보실을 지목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김장수의 국가안보실, 청와대가 대북정책을 주도한다는 얘기가 언론을 통해 꾸준히 흘러나왔다. 북한도 반드시 관철해야 할 의제가 있으니 대북정책을 주도한다는 국가안보실을 대화 상대로 삼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한 인사는 청와대-국방위 회담을 박근혜-김정은 대리협상으로 보는 시각에 불쾌해했다.
“청와대가 나가면 대통령의 의중을 가진 대리협상이고 통일부가 나가면 대통령의 의중을 안 갖고 나가는 반쪽 협상이라는 논리인데, 이는 틀렸다. 어떤 남북대화든 정부 방침, 대통령의 의중을 갖고 나간다.”
하지만 청와대가 대화 전면에 나섰을 때의 무게감이 지금껏 통일부가 나섰을 때와 다르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청와대가 협상하고 통일부가 대화 상황을 공개했던 ‘이중 구도’의 남북 고위급회담 내내 통일부는 청와대로부터 협상 내용을 정확히 전달받지 못하거나, 협상 내용 발표 권한을 제약받았다. 정부 관계자는 “통일부 소외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통일부가 대북정책에서 힘을 못 쓴다는 인식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 자체가 남북대화 정상화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여론과 언론 보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북한이 자칫 통일부를 ‘껍데기’로 인식하고 향후 남북대화에서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필 남북고위급회담이 성사된 그 즈음 천해성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이 대통령안보전략비서관에 내정됐다가 철회되는 사건이 터졌다. 청와대의 설명은 석연치 않았다. 민경욱 대변인은 2월 12일 “천 전 비서관은 통일부 핵심 요원으로 통일부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내정 철회 사실을 하루 먼저 보도했다. 당시 한 정부 관계자는 “김장수 대통령국가안보실장이 말하길 ‘통일부에서 하도 천해성을 달라고 해서 내가 양보했어’라고 했다”고 말했다.
천해성 내정 철회 미스터리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청와대 인사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업무에 필요하다며 뒤엎은 셈이다. 한 인사는 “청와대 설명은 청와대도 통일부도 모두 죽이는 앞뒤가 안 맞는 논리”라고 답답해했다.
천 전 비서관이 내정되기까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더더욱 그렇다. 청와대에 파견된 통일부 인원은 통일비서관실에 국장 1명과 과장 2명, 국가안보실에 과장 1명, 위기관리센터에 과장 1명 등 실무진 위주다. 군인과 외교관 출신이 국가안보실을 장악한 점을 감안하면 통일부로서는 국가안보실이 확대되는 김에 중량급 인사를 보내는 일이 절실했다.
류 장관은 대통령안보전략비서관 자리에 천 전 실장과 또 다른 통일부 관료 1명을 추천했다. 청와대에선 안보전략비서관에 학계 인사가 갈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천 전 실장이 내정됐다. 통일부에선 천 전 실장이 아닌 다른 관료가 안보전략비서관에 내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가 천 전 실장을 낙점한 것이다.
청와대의 설명은 통일부가 관료를 국가안보실에 보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해놓고 막상 대통령이 인사를 하자 태도를 바꿔 되돌려달라 했다는 논리가 된다. 한 전문가는 “내정 철회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모르지만 외부에서는 청와대가 통일부를 우습게 본다는 인식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1주년에 전격 발표한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가 통일부 소외론에 기름을 부었다.
박 대통령은 “통일준비위원회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남북 간 대화와 민간교류의 폭을 넓혀갈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간 민간교류와 대화의 창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실제로 통일준비위원회는 단순한 대통령 자문위원회가 아니라 사무국을 갖춘 집행위원회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걱정 반, 기대 반
당시 통일부 관료들의 얼굴이 굳었다. 정부 관계자는 “통일부 관료들이 통일부 입지의 위축을 매우 심각하게 걱정했다”고 말했다. 이런 우려는 청와대에도 전달됐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통일부 관료들에게 “통일준비위원회가 통일부의 업무를 빼앗는 게 아니라 오히려 통일부의 업무영역이 넓어지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통일부는 그 나름대로 박 대통령이 내세운 통일준비위원회가 하게 될 일을 준비해왔고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그런 계획을 밝힌 터였다. 그 일들을 청와대가 온전히 흡수해갈지, 통일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될지 통일부 안팎에는 여전히 걱정 반 기대 반의 시각이 존재한다.
통일부는 이미 올해 초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통일 대박론’에 한번 놀란 적이 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표현을 쓸 줄은 류 장관도 미처 몰랐다고 한다.
그 뒤로 류 장관은 통일 대박론을 채워나갈 ‘21세기형 통일 비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새벽 3시에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며 통일 비전을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핵심 인사들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박 대통령을 ‘통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다. 5년이라는 임기 동안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정권 차원의 한 수를 내보일 것이다. 벌써 집권 2년차이고 참모들은 “시간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집권 3년차가 넘어 레임덕이 시작되면 정권의 명운을 건 대북정책을 이끌 동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북장관급회담과 관련한 실무 접촉을 위해 지난해 6월 9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을 찾은 북측 수석대표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왼쪽)이 남측 수석대표 천해성 당시 통일부 통일정책실장과 악수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의 얘기다.
“그동안 통일부 혼자 통일, 대북정책을 해오면서 힘에 부쳤다. 경제부처를 비롯해 여러 부처가 긴밀하게 협업해야 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 말에야 통일정책에 관심을 갖는 등 과거에는 그런 걸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청와대가 판을 벌여줬으니 오히려 통일부에 기회다. 통일부가 정책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보여준다면 통일부에도 얼마든지 대박의 기회가 올 것이다.”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이 통일준비위원회를 발표했던 당시와 달리 현재는 통일부 관료들도 “우리가 잘만 하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얘기다.
다른 관계자는 “통일부는 정부조직법에 따라 역할이 규정돼 있고 통일준비위원회는 대통령령에 따른 자문기구다. 법령에 보장된 통일부의 일을 통일준비위원회가 건드릴 수 없다. 통일준비위원회 때문에 통일부의 기능이 축소된다고 보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정홍원 국무총리도 최근 회의에서 “각 부처는 통일정책과 남북교류 관련 업무를 통일부 중심으로 집중하라. 필요하면 국무총리실에서 통일부가 통일정책을 주도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 이후 외교부, 기획재정부, 농림식품축산부 등이 저마다 앞다퉈 내놓는 정책들의 컨트롤타워를 통일부가 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통일부 이외의 부처들이 통일, 남북협력 정책을 내면서 아직 통일부와 구체적인 협의를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아이디어 단계를 지나 정책 성과를 위해 북한과 협의해야 하는 단계가 오면 통일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남북대화 과정에서 사소하다고 생각해 무시하고 북한의 뜻을 읽지 못해 합의하지 못하거나 헛수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통일부의 전문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통일부 앞에 놓인 길이 순탄하다는 뜻은 아니다. 통일준비위원회 구성을 국가안보실과 외교안보수석비서관실 등 청와대가 주도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통일부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통일부 관료들이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통일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펼쳐지고 있는데, 통일부가 아직 순발력 있고 속도감 있게 대응하지 못한다는 우려다.
한 전문가는 “대북정책을 청와대가 주도한다 하더라도 통일부가 단순히 그 지시에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가 감탄할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적극 건의해 성사되는 일이 거듭돼야 일방적 지시가 아닌 쌍방향 소통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통일부의 역할과 공간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통일 대박론의 박근혜 정부에서 통일부의 해피엔딩이 가능할지 여러모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