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시인이 시인에게 묻다

더운 김이 오르던 사랑이 길을 잃고 흩날려<나희덕>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신경림>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4-03-19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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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척박해지더라도 사랑은 이루어질 것이며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강을 파헤치고 산을 허물어도 꽃은 다시 피고 초목은 성장한다. 시인은 광산의 카나리아처럼 세상의 어두움에 오감을 곤두세우면서도 우주 뭇 생명의 삶과 꿈을 노래할 것이다.
    시인이 시인에게 묻다

    나희덕 시인(왼쪽)과 신경림 시인이 2월 23일 서울 정동길을 걸으면서 담소하고 있다.

    팔순 나이를 살아냈다.

    1935년생.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신경림, ‘별’

    신경림 시인은 2014년 1월 다음과 같이 썼다.

    “늙은 지금도 나는 젊은 때나 마찬가지로 많은 꿈을 꾼다.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 때로는 그 꿈이 허황하게도 내 지난날의 재구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꿈은 내게 큰 축복이다. 시도 내게 이와 같은 것일까?”

    신경림의 새 시집 ‘사진관집 이층’은 우주 뭇 생명의 삶과 꿈을 담았다. 오래 살다보니 깨어 있을 때의 생각도 다 꿈이더라고 시인은 말한다. ‘사진관집 이층’의 시들은 오래된 LP 음반을 글로써 읽는 듯하다.

    시집을 낸다는 것

    여(女)시인이 6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노(老)시인에게 묻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노시인은 “모르겠다”고 답한다.

    “시를 왜 쓰는가? 글쎄요. 시라는 문학 형식이 있고 그것이 나와 맞으니 그냥 쓰는 것이지요. 나희덕 씨는 몇 살 때 등단했어요?”

    “스물넷이요”

    “나하고 비슷하네. 나는 23세 때니 똑같지 뭐.”

    “30년을 반환점으로 삼으면 아직 반환점도 못 왔죠. 25년 됐거든요. 선생님은 60년 쓰셨죠?”

    “59년. 오래전엔 내 나이면 시를 안 썼어요. 할 일 없으니 시를 써서….”

    “이번 시집에서도 나이 드신 느낌이 전혀 안 나요. 저는 일곱 번째 시집이에요. 갈수록 시집 내기가 겁나요. 아직은 뭐랄까? 세상사의 무거움과 불순물을 되도록 시에 묻혀가면서 무거워지는 과정인 것 같아요.”

    나희덕 시인은 1966년생이다.

    “시집 낼 때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도 똑같아요. 첫 시집 낼 때의 흥분 같은 것은 물론 없지만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예요. 나희덕 씨가 새로 낸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잘 읽었어요. 첫 시집이 ‘뿌리에게’ 맞죠? 창비에서 낸 것. 그때는 젊음이 팔팔 느껴졌는데, 이번엔 뭔가 아우른다고나 할까? 인간의 약한 점을 내보여 읽는 재미가 있더라고. 원숙한 느낌이 들어. 모범생을 벗어나 퇴폐와 방랑의 길로 들어갔어. 이번 시집 제일 앞에 놓은 시가 제목이 뭐더라? 상당히 감동적으로 읽었어요. 나희덕 씨도 세상 보는 눈이 옛날하고는 다르게 뾰족하지만 않고 상당히 부드러워졌어요. 올바른 것만 최고로 치지 말고, 올바르지 않은 것도 보듬어야 한다는 느낌을 주데. 그렇죠? 그런 뜻이 있었지요?”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나희덕 ‘어떤 나무의 말’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의 첫 시 ‘어떤 나무의 말’은 에로스가 충만한 봄의 노래가 아니라 죽음 충동이 가득한 늦가을의 읊음으로 읽힌다. 봄의 언어는 식물적 생명에서 나온다. 상실과 덧없음을 경험한 가을에 이르러서야 언어는 차가워진다.

    나희덕의 등단 작 ‘뿌리에서’(1991)는 이렇게 시작한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나희덕은 새 시집에 실린 ‘뿌리로부터’에서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고 묻는다. ‘뿌리에게’에서 “더운 김이 오르”던 사랑은 ‘뿌리로부터’에서 “허공에서 길을 잃”고 “흩날”린다.

    ‘뿌리로부터’의 시정(詩情)은 나희덕의 문학과 삶이 서 있는 현 지점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나이 듦과 詩

    노시인과 여시인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신경림 오래전엔 나희덕 씨 시를 읽으면서 너무 반듯하다고 여겼어요. 이번 시집엔 그런 모습이 흐트러져 있어요. 그것이 아주 좋게 보여요.

    나희덕 문단에 막 나왔을 때 선배들이 저한테 퇴폐나 악이 부족하다고 그랬죠.

    신경림 시라는 게 오래 썼다고 잘 쓰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오래 써도 시 쓸 때는 항상 똑같은 기분이고 그러니까.

    나희덕 맞아요, 매번 막막하고 그래요.

    신경림 과연 시를 제대로 쓰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

    나희덕 선생님 연세가 되어도 그래요?

    신경림 마찬가지야.

    나희덕 그래선지 선생님 시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쓴 구절이 없고, 아주 잘 정리되어 있고, 힘주지 않고 얘기하면서도 굉장히 묵직한 느낌을 주더라고요.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시는 팔순 나이에도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시인의 얼굴을 닮았다. 관상쟁이가 들으면 화 낼 얘기겠으나 생긴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살아온 모양대로 얼굴이 늙는 것이리라.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산이 있고 논밭이 있고 마을이 있고,

    내가 버린 것들이 모여 눈을 맞고 있다.

    어떤 것들은 반갑다 알은체를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섭섭하다 외면을 한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버렸다고 강변하면서,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서 행복하다.

    -신경림, 설중행(雪中行)

    눈(雪)은 마음과 몸이 아주 깨끗하여 조금도 더러운 때가 없다. 시인은 겨울의 눈밭에서 버려진 것을 되찾고 있다. 그러면서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그래서 “행복하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스무 살 첫 순정

    나이가 들면서 밝아지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目)만은 아닐 것이다. 익숙하게 사귀어 알게 된 세계는 그렇지 못한 세계에 비해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 신경림의 시는 우리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눈에 익은 곳, 익숙한 곳, 사귈 수 있는 곳으로 느끼게 한다.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선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산다.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 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지금도 살고 계신다”(‘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 // (…) 번지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금도 이 번지에 산다”(‘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에 살던 때 시인은 고단했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와 중풍에 걸린 아버지가 다퉜다. 형사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사찰하려 집을 찾았다.

    시인은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면서 웃었다.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시들엔 사람 사는 실정(實情)이 맑은 낱말로 엮여 있다. 사회의 부조리를 응시하던 시인의 시선은 과거보다 끝이 무뎌졌다. 나이 듦은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신경림은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첫날을/ 다시 그 삐걱대는 사진관집 이층에 가 머물고 싶다”(‘역전 사진관집 이층’)고 적었다.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은 죽음일 것이다. 그러면서 ‘첫 순정 그 애’를 그린다. “그 툇마루에 가 앉고 싶다, 네 등 뒤에 숨어./ 네 가슴팍 사이에 숨어, 너로 해서 비로소 스무살이 되어”.(‘네 머리칼을 통해서, 네 숨결을 타고’)

    신경림 첫 순정? 그렇게 거창하게 얘기할 건 없고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요. 그냥 다 이름 없이 살던 사람들이에요. 한번 되살려보고 싶었던 거예요.

    노시인이 여시인을 바라보면서 소리 내어 웃는다, “나이 들면 철든다는 것도 다 헛소리 같다”면서.

    나희덕 시인이 원래 철이 안 드는 종족 같아요. 오히려 20대 때는 상당히 어른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사려도 깊었던 것 같고요. 시인으로 살다보니 오히려 어려지는 것 같습니다.

    신경림 그건 나하고 똑같다. 젊을 때는 점잖고 인품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이 들수록 인품이 없어져버렸어요.

    나희덕 개구쟁이가 되고 어린아이같이 되고 그렇게요?

    신경림 철딱서니가 없지.

    나희덕 철이 안 들어야 시를 쓰는 거 같아요.

    신경림 아이의 눈을 갖지 않으면 시를 못 쓴다고.

    나희덕 시인은 끊임없이 뭔가가 궁금해야 하잖아요. 선생님 시 보면 맨날 본 곳인데, 어제 못 본 게 있을 것 같아 오늘도 들른다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신경림 그것도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소리야.

    시인이 시인에게 묻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더라”

    평론가 이경철은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시인은 4대강 공사로 강바닥이 파헤쳐지는 것을 제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파하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두보의 절창 ‘춘망(春望)’의 첫 구절을 인용해놓았다. 장쾌하게 현실을 초월해버린 시선(詩仙) 이백과 달리 백성들 틈에서 그들의 삶과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실감으로 담담하게 읊은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통한다. 나는 진작부터 신경림의 시적 자세와 시에서 우리 시대의 두보임을 읽어내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말해왔다.”

    춘망의 첫 구절 국파산하재(國破山下在,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는다)를 인용한 ‘옛 나루에 비가 온다’의 한 대목이다.

    “불도저가 파헤치고 있는 것이/ 강바닥이 아니라 제 심장이라는,/ 다이너마이트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바위너설이 아니라 제 팔다리라는,/ 오랜 촌로들의 항의 따위 한낱/ 힘없는 넋두리로만 들리는 강마을은 서럽다.”

    신경림 옛날 사람은 자연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지금은 자연이 바뀌라고 있는 거더라고. 자연이 안 바뀌는 나라가 어디 있겠어요? 바뀌는 게 당연한 거예요.

    나희덕 자연스럽게 바뀌어야 하는데 인위적으로, 폭력적으로 바뀌니까.

    신경림 4대강은 잘못 바꾸고 있는 거니 좋지 않은 거죠. 바뀌는 건 당연한데…. 4대강을 해서 한강은 다 망쳤어.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다 부숴서.

    나희덕 이경철 선배가 두보와 이백을 거론하면서 선생님을 두보에 비유했더라고요. 저도 문학사 시간에 시를 강의하면서 고은 선생님이 이백 같은 기질을 보여준다면 선생님은 두보 같은 기질을 갖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얘기 들으면 어떠세요?

    신경림 두보를 인류 최고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듣기 좋은 소리지만 두보만큼 할 수 있겠나. 어떻게 두보 같은 사람과 비교를….

    나희덕 두보는 선생님처럼 사람 속으로 들어가 시를 썼어요. 사람들 사이의 고단한 것들을 시로 만들었죠. ‘사진관집 이층’을 읽으면서 선생님과 제가 시선이 가는 지점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경림 서로 통하는 게 많이 있더라고. 시인이라면 다 통하는 게 있구나, 생각했어요.

    나희덕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 오래전 지나간 것.

    신경림 내가 쓴 ‘나의 예수’라는 시하고, 나희덕 씨가 쓴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의 소재가 노숙인이잖아.

    나희덕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죠. 엄마를 수레에 태우고 구걸하는 소년 이야기(‘수레의 용도’)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고요.

    신경림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폐지 더미를 실은 수레를/ 딸이 밀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에미를 닮아 허리가 굽고 주름이 깊다/ 그는 폐지 위에 쓰인 글귀를 입속으로 읽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 아침 집이 헐렸지만/ 중년의 아들은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폐지로 바뀐 에미를 실은 수레를 밀면서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하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썼다.

    나희덕은 ‘수레의 용도’에서 이렇게 적었다. “저에게는/ 늙은 어머니와 이 수레가 있을 뿐입니다/ 어머니는 걷지 못하고 우리는 아침 먹을 돈이 없습니다//(…) 오르막에서 소년이 수레를 밀어올리느라 낑낑거리자/ 보다 못한 어머니가 수레에서 내려섰다// 소년과 어머니는 언덕을 넘었다/ 조금은 경쾌하게, 빈 수레를 나란히 밀어올리며”

    우주 속에 들어 있는 나

    신경림 주제가 통하는 것이 상당히 많더라고. 깜짝 놀랐어.

    나희덕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유성(流星)’이라는 시나 자연에 대한 이야기, 지구 저편의 존재에 대한 시를 보면서 제가 쓴 시가 떠올랐어요. 저는 아메바, 불가사리, 물고기 같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인간을 얘기하려고 했어요. 더 나아가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그런 차원을 생각했고요.

    신경림 삶을 반성해보면 시를 통해 남 앞에서 잘난 척해 보이려고 한 때가 있었거든요. 사람이라는 게 자기를 내세우려고 해요. 그런 모습을 보인 시는 참 재미없는 시가 됐어요. 생명성 같은 게 없어요.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남을 끌고 간다고 생각하고 쓴 시도 나빠요. 1980년대 민중운동이 대세를 이룰 때 쓴 시 중에 어떤 시는 이 시대에 무슨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에 쫓겨 쓰기도 했어요. 시는 남을 가르치거나 잘난 척하려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요즈음 가장 경계하는 것은 남을 가르치거나 하는 건방진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자는 거예요. 지금도 누가 시에서 ‘아, 민중이여 나를 따르라!’ 이런 소리를 하면 내다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생명력이 없어요. 시인이 민중 속에 들어가 삶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데, ‘나와서 싸우라’는 식으로 썼다면 그것은 선동이에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의 경우에도 저항시가 오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은 사례가 적어요. 일제강점기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속한 이들의 시 중 지금도 읽을 만한 것은 임화 씨가 쓴 것뿐이에요. 임화 씨가 쓴 시 중 상당 부분도 지금은 좋은 시가 아니지만 일부는 지금 읽어도 재미난 게 있어요.

    시인이 시인에게 묻다
    나희덕 선생님 세대는 어떤 시대적 요구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문학을 일궈온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1990년대부터 시인으로 살았기에 집단적 목소리보다는 ‘나’라는 개체가 중요했어요. 저한테 문학은 나를 이해하는 과정, 내 경험을 통해 삶의 보편성을 발견해내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자폐적으로 가라앉지 않고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신경림 시인들이 자폐적으로 흐르는 게 요즈음 현상인 것 같아요.

    나희덕 자폐성을 넘어서야 해요. 나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했으되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타인과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을 통해 ‘나’라는 개체를 되비추는 거울이 바로 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이해로부터 다른 존재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았던 것 같아요.

    신경림 시에 있어서 자아의 발견은 참 중요하죠. 그런데 독립된 자아라는 게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 나’ ‘우주 속에 들어있는 나’를 인간, 우주와 함께 발견할 때 그것이 진짜 발견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범주 속에서 ‘나’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렇다는 겁니다. 자아를 아무리 탐구하더라도 옆에 있는 타자나 우주와 독립된 자아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육체의 변화, 생명의 진화, 우주 창조 과정에 걸친 인간의 총체적 운명에 참가하는 정신 작용이 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림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시라는 게 거창한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 그냥 사람 사는 세상에 시가 있는 것 같아. 시는 옛날부터 있어왔는데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 달라. 시는 그냥 있는 거야. 사람이 있으면 말이 있고, 말에는 리듬이라는 게 있잖아. 리듬은 생명력의 발산이야. 살아 있다는 것의 증거고. 시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뒷사람들이 만들어낸 얘기지. 시가 전체성의 탐구라는 식으로 규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희덕 예전에 시는 세계와 자아의 동일화, 그러니까 어떤 합일된 순간에 태어난다고 했는데, 한국의 현대시는 그 지점을 훨씬 넘어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인이 오히려 주목할 것은 통일성이나 전체성이 아니라 파편화하고 분열된 것의 간극 속에 시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균열이나 간극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시의 구실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가 아닌 것이죠. 또한 시가 어떤 전체를 얘기하더라도 이야기하는 방식은 굉장히 다양해요. 순간을 통해 영원을 이야기하고, 아주 작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요. 선생님 시 보면 아주 평범한 사물을 갖고 굉장히 큰 세계와 인간의 긴 생애를 다 얘기하시잖아요. 이번 시집의 첫 시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에서 어머니가 늘 다니던 그 길, 그 평범하고 짧은 길에 세상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 않습니까? 통일성, 전체성을 찾기보다는 아주 작은 것을 통해 넓은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것이 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통일성이나 전체성을 인위로 아우르려고 할 때 그것이 가르치려고 하는 시, 혹은 과도한 스케일의 시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신경림 자연스러워야 해, 시는.

    나희덕 자연스럽고 소박하면서도 그 속에 폐부 깊은 곳을 찌를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겠죠.

    신경림 대한민국 사람 중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예요. 우리 젊을 때 하곤 지금 비교도 안 되게 잘살잖아. 그런데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이 시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본질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가 주장하는 것만 옳고 남이 주장하는 것은 전면 부정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 북쪽은 주체사상을 가지고서 그것에 위배되는 건 절대로 용납 안 하고 남쪽에서는 반공이라는 것을 딱 내세워가지고서 이데올로기만 가지고 뭐든지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양쪽이 비슷한 거 아니야? 다른 생각도 인정해주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을 거 같아요. 우리 시대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남의 말을 하나도 안 들으려고 해요. 요즘 반공만 내세우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런 것은 큰 문제야. 국민이 성장했기 때문에 되질 않아요. 야당도 옛날 방식으로 투쟁해서는 안돼요. 먹고사는 걱정 할 때와는 다르거든요. 1970년대, 1980년대식으로 하는 것 같아, 야당도.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나희덕 전적으로 공감해요. 사회가 너무 돈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불행의 원인 같습니다.

    신경림 가장 큰 원인이지.

    나희덕 상대적 박탈감 탓에 풍요로워졌는데도 그것을 못 느끼잖아요. 선생님이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이라는 시를 쓰셨는데, 가난했지만 굉장히 행복했던 풍경을 말하는 것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가난한 아이들, 부모 없는 아이들과 성장기를 보냈어요. 그런데 제 유년기가 불행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더불어 살았거든요. 부모가 있든 없든 한 운동장에서 흙투성이가 되어서 놀고 그랬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그런 동심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돈 많이 벌어야 하고요. 아이부터 노인까지 생을 저당 잡힌 채로 끝도 한도 없이 나아가고 있잖아요. 순간의 소박한 행복을 다 놓치고 빼앗긴 채로 살아가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경림 형제가 있어도 장성해 분가하면 서로 관계를 안 하고 완전히 남이 되어 살잖아. 가족주의가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남이 되어 사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 이렇게 된 데는 물신주의 탓이 커요. 자본주의 속성이 그러니 그 속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게 아닌가 싶어. 공산주의도 틀렸지만 자본주의도 글렀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가 있어야 건강하게 클 수 있어. 공산주의가 죽는 바람에 같이 죽고 있는 거야. 지금 읽어보면 마르크스 이론은 오류 판이야. 공산당 선언도 오류투성이고. 인간에 대해 아주 잘못 파악하고 있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공산주의가 설명할 게 있는 거거든. 공산주의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가치가 없어. 이제와 보면 박현채 씨 생각, 리영희 씨 생각도 다 오류잖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리영희 씨 판단은 틀렸다기보다 웃긴 거지. 이석기? 넋 나간 사람이지. 그렇더라도 내란음모죄 처벌은 모기를 청룡도로 치는 것 아닌가 싶네.

    나희덕 불행하고 불평등하거나 소외되어 있는 현장에 대해 시인이 어떻게 마음을 보태고 나눌 거냐, 하는 고민이 선생님 세대하고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저희 세대에게 있거든요. 저보다 후배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온 것인데, 용산 참사 이후로 2000년대 작가들이 현실 문제에 대해 다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하고 대화해보면 정치적인 작가들이 아니에요. 굉장히 모던한 시를 쓰는 친구들입니다. 우리 세대처럼 학생운동의 경험도 없어요. 굉장히 개인적이고 자폐적인 내면을 가졌던 작가들인데, 그들이 왜 우리 시대의 소외된 현장에 가 함께 고민하는지 정치하는 사람들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빈익빈부익부가 상징하는 사회의 양극화 속에서 인간이 그런 지경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선에 대한 양심의 소리라고 생각해요.

    광산의 카나리아

    신경림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나와야 하는, 또한 나올 수밖에 없는 소리가 아닐까.

    나희덕 소외된 현장에 대해 감흥하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라고 여기는 기류가 젊은 작가 사이에 팽배해 있어요. 일사불란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리더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파하는 개개인이 모여 우리가 뭘 좀 보탤 수 있을까? 근원적인 문제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서로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작가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실존적이면서도 최소한의 공동체성을 회복해가려는 노력인 것 같아요. 시에 그런 고민을 녹여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후배들에게 많이 배워요. 시대가 작지만 예민한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경림 중요한 얘기야. 반성하는 쪽으로 말하면 1970~80년대 운동한 사람들이 옛날과 똑같은 태도로 옛날같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지루해해. 세상이 바뀌었는데, 1970~80년대와 똑같은 얘기를 하면 민중이 싫어해. 시대마다 달라져야 해. 젊은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졌는데, 늙은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어.

    나희덕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뒤표지에 실린 산문에서 이렇게 썼다.

    떠난 자는 떠난 게 아니다.

    불현듯 타자의 얼굴로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그들은 떠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고,

    끝내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된다.

    사랑하는 것들은 대체로 부재중이다.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

    어떤 상실의 경험은 시가 되는 것을 끈질기게 거부한다.

    그러나 애도의 되새김질 역시 끈질긴 것이어서

    몇 편의 시가 눈앞에 부려져 있곤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거나 사라진 존재를 불러오려는

    불가능한 호명, 시.

    시인이 시인에게 묻다
    詩人의 죽음

    나희덕 세상을 먼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시가 많다는 것도 비슷하더라고요. 화가 여운 선생, 철학자 민병산 선생에 대한 시를 쓰셨더라고요. 예전에 여운 선생과 늘 인사동에서 함께 다니셨는데, 이제 선생님 혼자 남으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이 시집 쓰는 몇 년 동안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떠나보냈어요. 죽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그래서 죽음에 관한 시가 많아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 죽은 자들을 호명해 삶의 공간으로 불러내려 했다면, ‘사진관집 이층’에서는 앞서 언급했듯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살고 있다.

    신경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시도 있었는데 뺐어요. 쓸데없는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잘 모르겠어. 시가 아까워 언젠가는 시집에 넣을 생각이야. 나희덕 씨는 크리스천이지?

    나희덕 예.

    신경림 나는 불교도라고 하긴 어렵지만 친(親)불교적 생각을 가졌어요. 신심을 갖고 절에 들른 일은 없고 술 마시러 가는데,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해요. 그래서 절을 자주 찾아요.

    나희덕 죽음에 대해 조금은 편안하게 여기시는 것 같더라고요. 죽은 이들이 지금도 산 자의 집에서 살고 있거나 선생님이 죽은 사람들의 세상에 잠시 다녀온 것 같은…. 삶과 죽음이 사이좋게 동숙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신경림 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요. 그렇게 해야만 죽음을 편하게 맞이할 것도 같고요. 순간순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감정이 있어요.

    나희덕 남동생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거든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2부에 죽음에 관한 시를 모아놓았어요. 근친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애도의 시간 같은 게 필요했어요. 바로 시를 쓰지는 못하고 2년이 지나서야 죽음에 대해 뭔가를 간신히 대면할 수가 있었거든요. 비극적 죽음의 무게 같은 것이 저를 짓누르는 느낌이 드는데, 선생님 시를 보면 연배가 있으셔서 그런지 죽음이 편안합니다.

    신경림 죽음을 굉장히 실감나게 느낀다고나 할까? 죽음이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해요.

    나희덕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는데도 선생님 뵈면 늘 밝고 낙천적인 느낌이 들어요. 비결 있으세요?

    신경림 에이, 잘되겠지. 설마 어떻게 해결이 안 되랴, 하고 믿는 게 생기더라고. 어떻게든 되겠지, 이러면서 넘어갔다고. 다른 사람들이 싱글싱글 웃고 다니는 사람이 뭐 나쁜 일이 있었겠느냐고 그래요.

    나희덕 기질이 비슷한가? 저도 그렇거든요. 20, 30대 때 힘든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더러 힘든 일 겪은 사람 같지 않다고 해요. 고난을 중화시켜내는 이상한 힘이나 아니면 그런 일들을 시로 털어버릴 수 있는 낙관의 힘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2부의 동생 죽음과 관련한 시는 안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어떤 게 막 밀어닥쳤어요. 하룻밤에 4편을 쓰기도 했습니다.

    동생의 사망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2부에 실린 여러 시편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너’에 대한 연작이다. 시인은 ‘너’의 죽음을 대면하고 “어둠이 등뼈에 불을 붙이고/ 등줄기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는다.(‘추분 지나고’) “죽음이 만져지는 순간”의 “차갑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질감”(‘진흙의 사람’)을 느낀다. “마치 잠이 든 것 같았다 너는/ 확신에 찬 꿈을 꾸면서/ 어디 먼 곳을 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 눈과 뺨과 팔과 다리를 쓸어내리니/ 싸늘한 돌멩이를 만지는 것처럼/ 냉기가 손끝을 파고들었다”(‘피부의 깊이’) 시인은 “거기 춥지 않아?……어둡지 않아?……무섭지 않아?”(‘불투명한 유리벽’)라고 물으면서 죽은 자를 호명한다. 아니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건너가거나 망자를 삶의 공간으로 불러내려 한다.

    신경림 동생이 나이가 어떻게 돼요?

    나희덕 마흔에 세상을 떠났어요. 뭐에 들린 것처럼 하룻밤에 4편을 썼어요. 울다가 쓰다가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시적인 기운이나 에너지가 나를 굉장히 강하게 사로잡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뭐랄까? 아기를 낳을 때처럼 몸에 무겁게 갖고 있던 생명체가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은 홀가분함, 글에 대한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어요.

    신경림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그날’이라는 시인데, 죽산(조봉암)이 죽었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 봤어요. 충격이 너무 커서 뭔가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서 ‘그날’을 썼는데, 한 자도 안 고치고 울듯이 한번에 그냥 쓴 시예요.

    나희덕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궁금하게 느껴진 게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못 본 것 같은데, 신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셔서 그런지 인생을 한 바퀴 쭉 살아오셔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쓰나미가 지나간 식당의 성모마리아상이라든지, 노숙자를 ‘나의 예수’라고 표현한다든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신발을 보면서 하나님이 지금 어디서 어떤 눈으로 우릴 내려다보실까, 하고 질문한다든지 신의 존재를 환기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았어요.

    시인은 “눈은 말라 눈물도 없”어진 “쓰나미 속에서 팔 하나가 잘려나간 부처님”이 “빙그레 웃고만 계”(‘빙그레 웃고만 계신다’)시는 모습에 어떤 감정을 느낀다. 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신발들을 보면서 “하느님은 지금/ 어데서 어떤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는가”(‘신발들’)라고 하소연하듯 묻는다.

    사람과 사람이 닿는 세상

    신경림 신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아요? 동생이 독실한 신자예요. 내가 성경을 안 읽으니까 동생이 일본말로 된 성경을 구해 보내줬어요. 일어로 번역이 잘돼 있으니 한번 읽어보라면서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아니고 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 해서 성경을 한 차례 통독했어요.

    나희덕 전체 다?

    신경림 신약만. 통독하면서 신에 대해 나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시 속에서 그렇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나희덕 저나 선생님이나 마르크시즘적인 역사 인식 속에서 살 때 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잖아요. 그럴 여력도 없었고요. 종교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금기처럼 돼 있기도 했고요. 그런 점에서 시인들이 상당히 자유로워진 게 아닌가. 또한 눈앞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신경림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시예요. 그것이 시가 해야 할 일이니까.

    나희덕 최근에 무슨 종교적 변화가 생기셨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경림 신이 과연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쪽으로 얘기를 했던 거지. 쓰나미가 있기 바로 전에 일본에 갔었거든. 굉장히 근사한 바닷가 마을에 들렀어요. 나중에 TV에서 보니 분위기가 똑같은 마을이 휩쓸려가는 거예요. 비참하게 떠내려가는 거 보니 집이 성냥갑 같아.

    나희덕 그렇죠, 인간세상이라는 게. 오십 가까이 사니까 내 안의 초라하고 모순된 모습이 확인되더라고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하고 문제 덩어리인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삶이다, 같은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그러한 문제들을 납득하고 넘어갈 수가 있게 되더라고요.

    신경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보다는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것 아닐까요. 나희덕 씨 이번 시집에서 그런 게 많이 느껴지더라고.

    형제가 남이 되어 사는 세상이 되었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척박해지더라도, 돈이 신의 반열에 오른 세상이 되었더라도 사랑은 이루어질 것이며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강을 파헤치고 산을 허물어도 꽃은 다시 피고 초목은 성장한다. 광산의 카나리아처럼 세상의 어두움에 오감을 곤두세우면서도 시인은 우주 뭇 생명의 삶과 꿈을 노래할 것이다.

    손보다는 섬모가 좋다

    인간다움이 제거된 부드러운 털이 좋다

    둥글고 잘 휘어지는 등이 좋다

    구불구불 헤엄치는 무정형의 등이 좋다

    휩쓸고 지나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온순한 맨발이 좋다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끌어안았던 태고,

    그 저녁의 온기를 기억해낸 것뿐이다

    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나희덕,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중

    시인의 말대로 사랑은 “어느 날 찾아온 목소리”(‘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를 듣는 것이리라. 풀 또한 “가느다란 혀끝으로 다른 혀를 찾”는다. “다른 몸도 자기 몸이었다는 듯 휘거나 휘감아들인다.”(‘풀의 신경계’) 사람과 사람이 닿는 세상의 감촉 또한 아메바, 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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