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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詩 쏟아지는 봄

시인이 시인에게 묻다

더운 김이 오르던 사랑이 길을 잃고 흩날려<나희덕>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신경림>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시인이 시인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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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나희덕 ‘어떤 나무의 말’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의 첫 시 ‘어떤 나무의 말’은 에로스가 충만한 봄의 노래가 아니라 죽음 충동이 가득한 늦가을의 읊음으로 읽힌다. 봄의 언어는 식물적 생명에서 나온다. 상실과 덧없음을 경험한 가을에 이르러서야 언어는 차가워진다.

나희덕의 등단 작 ‘뿌리에서’(1991)는 이렇게 시작한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나희덕은 새 시집에 실린 ‘뿌리로부터’에서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고 묻는다. ‘뿌리에게’에서 “더운 김이 오르”던 사랑은 ‘뿌리로부터’에서 “허공에서 길을 잃”고 “흩날”린다.

‘뿌리로부터’의 시정(詩情)은 나희덕의 문학과 삶이 서 있는 현 지점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나이 듦과 詩

노시인과 여시인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신경림 오래전엔 나희덕 씨 시를 읽으면서 너무 반듯하다고 여겼어요. 이번 시집엔 그런 모습이 흐트러져 있어요. 그것이 아주 좋게 보여요.

나희덕 문단에 막 나왔을 때 선배들이 저한테 퇴폐나 악이 부족하다고 그랬죠.

신경림 시라는 게 오래 썼다고 잘 쓰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오래 써도 시 쓸 때는 항상 똑같은 기분이고 그러니까.

나희덕 맞아요, 매번 막막하고 그래요.

신경림 과연 시를 제대로 쓰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

나희덕 선생님 연세가 되어도 그래요?

신경림 마찬가지야.

나희덕 그래선지 선생님 시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쓴 구절이 없고, 아주 잘 정리되어 있고, 힘주지 않고 얘기하면서도 굉장히 묵직한 느낌을 주더라고요.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시는 팔순 나이에도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시인의 얼굴을 닮았다. 관상쟁이가 들으면 화 낼 얘기겠으나 생긴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살아온 모양대로 얼굴이 늙는 것이리라.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산이 있고 논밭이 있고 마을이 있고,

내가 버린 것들이 모여 눈을 맞고 있다.

어떤 것들은 반갑다 알은체를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섭섭하다 외면을 한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버렸다고 강변하면서,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서 행복하다.

-신경림, 설중행(雪中行)

눈(雪)은 마음과 몸이 아주 깨끗하여 조금도 더러운 때가 없다. 시인은 겨울의 눈밭에서 버려진 것을 되찾고 있다. 그러면서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그래서 “행복하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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