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D아트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최모(25) 씨는 최근 매니저에게서 이런 통보를 받았다. 매니저는 회사의 내부 규정이라고 했다. 한 달을 놀다 회사로 다시 돌아온 최씨에게 건네진 것은 새 근로계약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씨는 회사가 왜 이렇게 하는지 몰랐다.
12개월을 넘겨 일하면 비정규직 근로자도 한 달치 월급을 퇴직금으로 받을 수 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8조)은 1년 이상 근무한 근로자가 30일치의 평균 임금을 퇴직금으로 받도록 한다. 최씨는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1년에서 한 달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자괴감 들지 않을 수 없어”
최씨처럼 고용주의 ‘꼼수’로 퇴직금을 못 받는 사례는 대기업은 물론 공공기관에서도 빈발하고 있다. 양태도 다양하다. 1년을 계약 기간으로 했더라도 그전에 그만두게 하는 경우, 처음부터 11개월만 계약하는 경우, 1년 이상 일하게 하면서도 미리 계약의 명의를 타인으로 바꾸도록 하는 경우…. 모두 사용자 측의 꼼수이고 편법이다. 최씨는 “구직난에 시달리는 20대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대우를 받으면 비정규직으로서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계열 S사는 얼마 전 공연장 도우미로 6개월 이상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면접에 합격한 박모(28) 씨는 그러나 채용 담당자로부터 “10개월만 일하자”는 말을 들었다. 박씨는 이유를 물었지만 내부지침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박씨는 “알고 보니 이곳에서 10개월 이상 일한 아르바이트생은 없었다”고 말했다. 대신 지인의 이름으로 ‘유령 계약서’를 작성해 계속 일한 사람은 있었다고 한다.
같은 계열사인 모 시네마에서 일한 이모(26) 씨도 채용 담당자로부터 11개월동안만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엔 계약 만기로 퇴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우리 같은 아르바이트생들은 퇴직금은 꿈도 못 꾼다. 실업급여라도 받으면 다행”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의 아르바이트 자리로 인기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은 어떨까. 김모(23) 씨는 커피빈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채용 담당자가 “근무기간을 9개월로 쓰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11개월로 계약하는 사람은 간혹 있지만 1년 넘게 일한 예는 전무했다는 게 그의 경험이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사용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간제 근로자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기간제 근로자를 뽑는다”면서 “이런 회전문 채용 방식은 민간과 공공기관을 막론하고 곳곳에 퍼져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이런 편법이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성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라고 덧붙였다.
필자는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11개월’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봤다. 기간제 근로자를 모집한다는 게시 글이 수두룩하게 떴다. 언론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에 Y사는 “최장 11개월짜리 임시직 근로자를 채용한다”는 글을 올렸다. M사의 게시 글도 11개월만 일해야 한다고 명시해두었다. 모 이동통신사의 게시 글 제목은 ‘장기근무 가능한 아르바이트생을 찾는다’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단 3개월에서 최장 11개월 단기 아르바이트 모집이었다.
한 대형 은행의 편법은 이보다 더 정교했다. 장모(50) 씨는 이 은행 안양 석수동 지점에서 2010년 8월부터 3년 8개월간 기간제 근로자로 일했다. 계약서는 한 달에 10일, 6개월 동안 일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은행은 한 달의 나머지 20일을 10일씩 나눠 장씨 가족 두 사람의 이름으로 된 6개월짜리 계약서 두 개를 각각 만들었다. 그다음 6개월은 장씨의 또 다른 지인 3명이 계약서의 당사자가 됐다.
은행 지점장은 “일의 효율이 높다”면서 장씨에게 계속 일을 맡겼다. 계약서상으로는 1년에 6명이 일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장씨 혼자다. 장씨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한다. 장씨는 “다른 은행도 이런 식으로 명의를 돌려가며 계약한다”고 말했다.
“5일 모자라게 계약”
공공기관의 편법 양태는 민간보다 더 교묘했다. 공공기관이 가장 흔히 쓰는 퇴직금 꼼수는 ‘부러진 1년 계약’을 맺는 것이다. 계약 기간이 언뜻 보기에는 1년이지만, 실제 근무 일수는 1년에서 며칠이 모자라 퇴직금을 안 줘도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에서 일했던 봉혜영(49) 씨는 “2012년 말 40명의 계약직 근로자가 일시에 해고당했다. 그중 15명이 퇴직금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말했다. 이 15명의 계약 기간은 2012년 1월 3일부터 12월 28일까지였다. 1년에서 5일이 모자랐기 때문에 ‘법대로’ 퇴직금을 받을 수 없었다.
40명 중 나머지 25명은 2011년 1월부터 1년 넘게 일해 퇴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도 근무 날짜가 2년에서 며칠 모자란 탓에 무기계약직 전환에는 실패했다.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인재개발부 담당자는 “이들은 단순한 계약 만료였다. 법대로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퇴직금은 다 지급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 담당자는 “우리 기관이 영리 단체도 아닌데, 무슨 악덕 기업처럼 계약을 무단으로 해지하고 그럴 일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공공기관 구직자가 부러진 1년 계약을 하는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공공기관에 채용되는 기간제 근로자는 대부분 파견 회사를 통해 1년 단위로 계약을 맺는다. 계약은 주로 회계연도인 12월 말을 기준으로 끊어서 한다. 1월 1일부터 계약해 일하지 않는 이상, 실질적인 근무 일수는 1년이 채 안 되기 때문에 퇴직금을 못 받는 근로자가 많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