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담 후세인이 죽고 미군도 떠났지만, 이라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천년이 넘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이라크는 사실상 두 개로 쪼개졌다. 시아파 정부에 맞선 수니파 무장단체는 이라크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이슬람 국가’ 건설을 선언했다. 스스로 칼리프가 된 반군 지도자 알 바그다디의 학살과 테러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부패한 시아파 정권은 수도 바그다드를 지키는 데만 혈안이다.
“지금 이라크 사람들은 2003년 미군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을 때와 똑같은 고통에 빠져 있다. 날마다 들리는 폭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에 떤다. 어제는 우리 앞집에 사는 이웃이 총에 맞아 죽고 오늘 아침에는 시장 갔던 우리 뒷집 아주머니가 폭탄에 사망했다.”
세계인은 2011년 미군이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며 끝난 줄 알았던 이라크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에 혼란스러워한다. 내전의 여파가 아랍권 전체로 번질 수 있다는 점도 큰 걱정거리다. 대체 이라크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2006년, 미국은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수니파인 그를 제거한 미국은 새롭게 들어선 시아파 정권에 힘을 실어줬다. 시아파는 이라크 국민의 60%에 달한다. 수니파는 20%에 불과하다. 미군이 밀어준 시아파 정권은 수니파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수니파 인사들을 정권에서 몰아내고 불법으로 체포, 구금했다. 시아파가 이렇게 수니파에 적대적인 것은 과거 사담 후세인의 정책에 대한 일종의 보복 차원이었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의 시작은 1980년대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이었다. 후세인은 자국 내에 있는 시아파가 이란 편에 서서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담은 시아파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반정부 발언을 하는 시아파 인사를 가차 없이 투옥, 고문, 처형했다.
필자는 2002년 이라크를 취재할 당시 시아파 모스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이라크 정부의 정보국 직원 감시하에 필자의 취재가 허용됐다. 시아파 모스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표정이 어두웠다. 화장실에 가다 마주친 어느 시아파 노부인은 화장실 문을 잠근 채 필자에게 몰래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들 7명 중 6명을 사담 후세인이 죽였다”고 숨죽여 말했다. 노부인은 “나 같은 사람이 시아파 가정에 넘쳐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불행은 후세인이 사라진 다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미국 덕에 정권을 잡은 시아파는 후세인의 수니파 정권을 쫓아내는 데 혈안이 되었다. 정권만 바뀌었을 뿐 같은 비극이 반복된 것이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떠나자마자 시아파는 수니파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완전 철수한 바로 다음 날인 2011년 12월 19일 수니파 정치 지도자인 타리크 알 하시미 부통령에 대해 시아파는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법원은 터키로 도망간 알 하사미 부통령이 궐석한 재판에서 어이없게도 사형선고를 내렸다. 부통령뿐 아니라 많은 수니파 정치인이 불법으로 체포되고 구금됐다. 후세인 정권 시절 정적을 잡아 가두는 데 쓰였던 악명 높은 ‘아부 바카르’는 시아파 정권이 수니파 정치인들을 탄압해 투옥하는 감옥으로 바뀌었다.
시아파 정권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은 누리 알 말리키 총리였다. 한 수니파 국회의원은 “종파와 사람만 다르지 알 말리키는 사담 후세인과 똑같은 공포 정치를 한다. 미군이 떠난 바로 다음 날 그가 죽인 수니파 정치인만 수십 명이다”라고 말했다. 2006년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지로 총리에 오른 알 말리키는 전쟁 이후 분열된 이라크의 사회 통합과 경기 부양보다 자신의 정권 유지와 연장에 더 집중했다. 그 결과 2006년부터 시아파와 수니파 간 종파 전쟁이 심해졌다. 폭탄 테러를 주거니받거니 했고, 상대파의 모스크를 폭파했다는 뉴스가 매일 보도됐다. 2007∼08년 종파 간 학살 이후에도 알 말리키 총리는 수천 명의 수니파 인사를 잡아들이고 내각에서도 철저히 배척했다.
그렇다면 이슬람교 내에서 시아파와 수니파는 왜 갈라진 걸까. 또 어떤 점이 다를까. 이를 이해하려면 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아파 알 말리키 총리의 보복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632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한다. 그가 죽자 후계 자리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다. 당시 수니파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회의를 통해 선출된 4명의 칼리프(종교 지도자)를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러자 무함마드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중심으로 한 무리가 생겨났다. 그들이 바로 시아파다. 수니파는 자격을 갖춘 이들 중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핏줄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리하면 후계자 결정 과정에서 시아파는 핏줄, 수니파는 회의를 주장했다. 현재 전 세계 이슬람교도의 85%는 수니파다.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예멘, 레바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 수니파에 속한다. 반면 10%가량을 차지하는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 등에서만 다수 종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레바논과 아제르바이잔, 시리아 등에 분포해 있다. 시아파 나라들은 서로 인접해 있어 스스로를 ‘시아파 벨트’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 이라크 일반 국민 사이에서는 시아파나 수니파 간 갈등이 없었다. 시아파 부인과 수니파 남편, 혹은 그 반대인 결혼도 흔했다. 천년 이상 시아파와 수니파가 섞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도 종교적 갈등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그다드에 사는 샤이드(47) 씨는 “종파 간의 갈등은 권력과 정권을 쥐고자 하는 사람들의 명분일 뿐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종파가 문제 되지 않는다. 이런 걸로 죽고 죽인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이라크 사람들은 종파 간 갈등을 원하지 않고 종파를 초월한 새로운 정치 세력을 원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종파 갈등을 없애려는 노력도 시작됐다. 그 결과 ‘이라키야’라는 시아파와 수니파를 망라한 연합 정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정당은 이라크 국민에게 화합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2010년 치러진 이라크 총선에서 이라키야는 알 말리키의 ‘법치연합’(시아파)을 누르고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종파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라크 국민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결과였다.
그러나 이내 반전이 일어났다. 알 말리키 총리가 종파 갈등을 부추겨 시아파 소수정당을 모두 규합해 자신의 총리 연임을 밀어붙인 것이다. 이렇게 정권을 쥔 알 말리키는 이라키야 정당에 관여된 수니파 인사들을 탄압했다. 투옥과 체포가 공공연히 벌어졌다. 알 말리키는 일반 국민의 고통보다는 오로지 ‘시아파 정권 창출’에만 몰두했다. 이라키야 정당의 한 관계자는 “사담이 떠난 자리를 알 말리키가 그대로 차지했다. 우린 후세인 시절과 다른 것을 거의 모를 정도의 독재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발표된 미국의 이라크재건사업 특별감사팀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특별감사팀은 이라크 복구비용 중 최소 80억 달러 이상을 낭비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중 상당액을 시아파 정치인이 챙겼다고 밝혔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 이후 사용한 재건사업비용은 총 600억 달러(한화 약 61조2000억 원)에 달했지만, 이라크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인다. 높은 실업률과 생활고는 이라크에서 일상이 됐다. 그러나 알 말리키 총리와 시아파는 종파의 정권 장악에만 매달렸다. 정권을 쥐고 있어야 각종 원조금과 재건 비용에서 나오는 이득과 이라크의 돈줄인 유전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키야 정당의 또 다른 정치인은 “알 말리키에게 시아파는 그저 정권을 쥘 수 있는 명분에 불과하다. 그렇게 종교가 중요하다면 시아파 이맘(종교 지도자)이 되지 왜 정치를 하는지 모르겠다. 정권이 곧 부와 명예이기에 그는 시아파라는 종파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시아파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정치인 쌈짓돈 된 복구 비용
이라크 사람들의 경제난이 가중되던 2011년, 이라크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아랍의 봄’을 타고 이라크에도 민주화 바람이 상륙한 것이다. 특히 시아파 정권에 억눌려 있던 수니파 지역에서는 이 영향을 받은 ‘반정부 시위’가 더 크게 일어났다. 2013년부터는 수니파 지역인 서부 안바르 지역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더욱 극심하게 벌어졌다.
그해 2월, 수십만 명의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시아파 정부의 수니파 차별에 항의하는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안바르 주 라마디와 팔루자에서 수도 바그다드까지 행진했다. 팔루자에서 정부군과 시위대가 충돌해 7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시위자 대다수는 실직 상태에 있는 젊은이였다. 알 말리키 총리가 반정부 시위에 강경대응하고 수많은 젊은이를 감옥에 집어넣자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 와중에 조용히 소외된 수니파 젊은이들을 모으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수니파 무장단체인 ISIL이다. 팔루자와 라마디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을 모은 이들은 수니파에 대한 시아파 정권의 차별을 거론하며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ISIL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근원을 살펴보면 중요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2006년 미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그중 한 사람이다. 요르단 출신인 알 자르카위는 2000년 초 방문한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종교 공부를 마치고 그해 6월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아프간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프간 서부지역에 알카에다와 연관된 무장캠프를 열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아메드 파딜 할라이레’이지만 `무사브의 아버지이자 자르카 출신’이라는 뜻의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쌓았다.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3년, 그는 이라크로 들어와 알카에다 지부인 ‘자마아트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일신교와 성전)를 세우게 된다. 이 단체는 한국인 김선일을 납치해 참수한 사건을 비롯해 각종 폭탄 테러와 납치를 주도했다.
알 자르카위는 2004년 10월 빈라덴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단체 이름을 ‘이라크 알카에다(AQI)’로 바꾸었다. 그리고 미군 점령에 맞선 수니파의 저항이라는 명분으로 알 자르카위는 2006년 1월 무장단체 6개를 통합해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를 조직했다. 미국은 알 자르카위를 공적 1호로 지정하고 이라크 북부 디얄라 주의 바쿠바시 인근 마을을 공습해 그를 살해했다. 2006년 6월의 일이다. 그가 죽기 전 그의 주변에는 알카에다를 추종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중 한 사람이 현재 ISIL의 최고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다.
알 바그다디는 그동안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알려진 바로는, 1971년생인 그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약 125km 떨어진 사마라에서 태어났다. 바그다드의 이라크대학교에서 이슬람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독토라(닥터) 이브라힘’으로 불렸다. 그가 언제부터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의 길을 걸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없으나, 고향에서 조용히 이맘(성직자) 생활을 하다가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자 알 자르카위 밑에서 지하드(성전)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고향에서 작은 무장단체를 이끌다가 알 자르카위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지하드의 길을 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알 자르카위 사망 1년 전인 2005년, 미군에 체포돼 바그다드 남부 ‘캠프 부카’에서 4년 정도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미국이 주목하는 거물급은 아니었다. 2009년, 미군이 철군을 앞두고 이라크인 수감자 전원을 이라크 정부에 인계하며 알 바그다디는 석방됐다. 2006년 미군의 공습으로 알 자르카위가 사망한 뒤 조직을 물려받아 이라크이슬람국가(ISI)로 이름을 바꿨다.
수니파 ISIL의 반격
2011년 3월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알 바그다디에게 기회였다. 그는 이라크에서 단련된 무장 전사들을 시리아로 보내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부 격인 ‘알 누스라 전선’을 조직했다. 알 누스라 전선은 시리아 반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우며 시리아 정부군을 압도했다. 반군과 연합해 반시리아 정부 전선을 이루었던 이 둘의 관계는 2013년 4월부터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애초 이들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시리아 반군은 알아사드 독재 정부를 몰아내고 ‘민주 정부 건설’을 구상한 반면 알 바그다디가 이끄는 단체인 알 누스라는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했다. 민주 국가와 이슬람 국가는 분명 다른 것으로 이 때문에 반군과 척을 지게 된 것이다. 또한 알 누스라 전선 안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알 바그다디는 알 누스라와 자신이 최고 지도자로 이끌고 있는 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알카에다 최고 지도자 아이만 자와히리는 이를 반대해 알 누스라 전선 안에서 알카에다와 알 바그다디 간의 사이가 벌어졌다. 그때 알 바그다디는 “알라(신)를 따를 건지, 아니면 자와히리(알카에다)를 따를 건지 결정해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알라를 따르겠다”고 말해 사실상 알카에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렇게 알카에다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알 바그다디는 단체 이름을 ISIL로 바꾸었다. 지난 2월, 알카에다는 알 바그다디와 공식 절연을 선언했다.
이후 알 바그다디가 눈을 돌린 곳은 자신의 나라 이라크였다. 올 초부터 팔루자·라마디 등 이라크 서부 안바르 주를 거점으로 알 바그다디의 ISIL은 실업난과 시아파 정권에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과 수니파 부족들에게 다가갔다.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의 수니파 부족들 간에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 이대로 시아파 정권에 의해 탄압받을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알 바그다디가 이끄는 ISIL과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수니파 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ISIL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안바르 주를 점령했고, 드디어 지난 6월 10일 이라크에서 두 번째로 큰 북부 도시 니네바 주의 주도인 모술을 장악했다. 모술도 수니파가 다수인 도시로 인구가 180만 명에 달한다. 로켓 추진발사기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ISIL 조직원들은 나흘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주요 군 기지와 정부기관 건물, 모술공항 등을 점령했다.
이라크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밀려났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미군이 점령하던 시절 이라크군은 훈련에 엄청난 예산을 들이고 노력을 기울였다지만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뿔뿔이 흩어지고 싸움 같은 싸움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모술을 넘겨줬다.
이라크군 관계자는 “군대 안에는 시아파와 수니파 출신 군인이 섞여 있다. 시아파 군인들은 혹시라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ISIL에게 포로로 잡히게 될까봐 무서워했고 수니파 군인들은 수니파를 도우러 온 ISIL을 상대로 싸울 수 없어 탈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모술공항을 ISIL에 빼앗긴 것은 이라크 정부로서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모술공항은 미군 점령 당시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ISIL이 공항을 점령할 당시 군헬기와 UH-60 블랙호크 및 화물 항공기가 활주로와 카고에 있었다. 익명의 모술 공항 직원은 “그들(ISIL)이 해뜰 무렵 총과 로켓추진포를 들고 공항 정문에 나타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을 열어주는 것뿐이었다. 이제 공항 주인은 그들이다”라고 말했다.
정부군이 군 기지를 버리고 도망쳐 ISIL은 다량의 무기를 접수했으며 시내에서 남쪽으로 60㎞ 떨어진 공군기지도 장악했다. 이들이 장악한 모술 거리 곳곳에는 이슬람 국가를 상징하는 검은색 깃발과 현수막이 내걸렸다. 15만 명이 넘는 모술 시민은 강제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 피난 행렬에는 정부군 소속 군인도 수백 명 포함돼 있었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ISIL이 아니라 이번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예상되는 이라크군이나 미군의 공습이 겁나 도망가는 주민도 상당수에 달했다.
후세인 고향 장악한 수니파
ISIL은 모술뿐 아니라 사담 후세인의 고향인 티그리트와 사마라, 디얄라 주의 바쿠바 등 수니파의 주요 거주지 대부분을 손에 넣어 이라크 영토의 3분의 1을 점령했다. 이어 그들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정부는 사실상 북부지역을 포기한 채 바그다드 방어에 주력하는 상황으로 과연 이들이 수도를 지켜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6월 25일, ISIL은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90㎞ 떨어진 야스리브의 이라크 최대 공군기지도 공격했다. 이 기지는 과거 미 공군기지 ‘캠프 아나콘다’가 있던 곳으로 미군으로서도 의미가 큰 장소다. 또한 ISIL은 같은 날 북부 살라헤딘 주 아질 유전지대로 진격해 최소 3곳의 유전을 장악했다. 이들 유전의 하루 원유 생산량을 합치면 2만8000배럴에 이른다. 이라크 최대 정유시설이 있는 바이지도 ISIL의 손에 넘어간 상태다. 전력 생산량이 이라크에서 두 번째로 큰 하디사 댐이 ISIL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현재 이라크 정부는 수도 방어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급해진 이라크 정부는 최근 바그다드와 그 인근에 배치된 병력을 두 배로 늘렸으며 바그다드를 지키기 위한 방호벽을 쌓고 있다.
아랍 위성방송 ‘알아라비아’는 “그들(ISIL)이 단숨에 이라크 제2 도시 모술을 장악한 것도 사전에 치밀한 물밑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알아라비아가 말하는 ‘사전에 치밀한 물밑작업’이란 ISIL이 온건한 수니파 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것을 말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정부군과 반군이 무장충돌을 벌이는 이라크 상황을 전하면서 반군에게는 지방 부족들의 지지가 힘이 된다”고 전했다. 또 이들 지방 부족은 ISIL의 잔인한 수법과 급진 이데올로기에는 반대하지만 시아파가 주도하는 이라크 정부를 몰아내자는 목표에는 지지한다고 전했다. 수니파 부족 지도자 중 한 명인 셰이크 카미스 알 둘라이미는 “이번 반란은 지난 11년 동안 불공정하고 박대받은 데 대한 혁명”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지방 부족 사회의 지지가 있었기에 겨우 수백 명만으로도 ISIL은 이라크 정부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ISIL이 수니파 지역 마을을 지나 바그다드로 향할 때 지방의 수니파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 대우하면서 환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알 바그다디의 ISIL은 점령한 지역을 기반으로 6월 29일, 드디어 ‘이슬람 국가(Islamic of state: IS)’설립을 선포했다.
ISIL은 이슬람 정치 토론 사이트에 올린 음성 파일을 통해 “(우리가 점령한 지역에) ‘칼리프’(이슬람 정치·종교 지도자)가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를 세운다. 앞으로 시리아 북서부 알레포에서 이라크의 동부 디얄라까지 영토를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들은 “ISISL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43)가 칼리프가 됐다. 서방의 쓰레기 문화와 민주주의를 거부하라”고 주장했다. 알 바그다디는 스스로 칼리프 자리에 오르면서 마침내 숙원을 이룬 것이다. 이집트의 수니파 대이맘 이브라힘은 “알 바그다디가 세운 이슬람 국가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목표다. 또한 그들이 벌이는 지하드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ISIL과 다른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은 왜 이미 100여 년 전에 사라져버린 ‘칼리프 제도 국가’를 원하는 걸까? 그 이유는 현대에 존재하는 다른 이슬람 국가가 부족한 이슬람 국가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서구식 통치제도와 옷차림, 그리고 현대 문물에 관대한 모습이 그들 눈에는 못마땅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 가장 거슬리는 것이 이들 국가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점이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합쳐진 정교(政敎)일치만이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이념이라고 이들은 믿는다. 이슬람 신정(神政) 일치의 국가가 바로 칼리프제 국가다. 무함마드 사후(632년) 아라비아 반도 일대의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유지하기 위해 칼리프제 국가가 만들어졌고, 아랍어로 계승자 또는 대리인이란 뜻의 ‘칼리프’가 통치했다. ISIL이나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은 시간을 거슬러 무함마드 시대로 돌아가 칼리프가 통치하며 이슬람 경전 코란과 하디스(무함마드 언행록)를 근거로 한 샤리아(이슬람 율법)로 국가를 통치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칼리프 통치 이슬람 국가 건설
하지만 이는 모든 이슬람 신도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극소수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원하는 국가 형태에 불과하다. 이라크대학의 이슬람학과 교수인 하산 오베이디는 “ISIL이 원하는 칼리프제의 이슬람 국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무함마드를 만나러 가는 것 같은 착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21세기이고 이미 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이슬람 국가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애초 수니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며 이제는 ‘이슬람 국가’를 만들었지만, 이들과 이라크 수니파의 관계는 불안하다. 시리아 내전과 같이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ISIL과 알 바그다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칼리프가 통치하는 이슬람 국가 건설’이다. 하지만 수니파의 목적은 시아파 부터 정권을 탈환해 수니파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런 동상이몽 관계가 ISIL의 국가 선포 이후 문제가 된다. ISIL을 지지하는 수니파 세력 중에는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바트당 잔당 세력인 ‘나크쉬반디아’도 있다. 이들은 ISIL이 선포한 이슬람 국가(IS)에 합류할 의사가 전혀 없다. 나크쉬반디아의 고위 지휘관인 아부 파티마(가명)는 ISIL이 자신들 영토라고 주장한 이라크 북동부 디얄라 주에서 활동한다. 그는 “그들(ISIL)은 지금까지 우리가 관할하는 디얄라에서 주민들을 존중해왔지만 만약 우리 주민과 전사에 대해 원하는 것이 우리 목적과 다르다면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우리는 그들의 극단적인 이념과 다르다”며 이슬람 국가(IS)에 동조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또 다른 수니파 지도자는 “알 바그다디의 칼리프 국가에서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다른 수니파 세력 안에서도 알 바그다디의 칼리프 국가를 지지한다는 성명은 전무하다. 시리아 내전 중 알 바그다디와 협력했던 시리아 반군 진영은 맹비난을 하고 나섰다. 시리아 반군 세력인 ‘이슬람군(Army of Islam)’의 대변인은 ‘IS 초대 칼리프’로 추대된 알 바그다디를 두고 “그의 패거리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며 “약탈과 폭격, 파괴행위로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고 비난했다. 비교적 온건적 수니파에 속하는 셰이크 바샤르 알-파이디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그들도 문제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며 수니파 진영의 ISIL 지지는 불가피한 선택임을 강조했지만 문제의 불씨가 있음을 시인했다.
ISIL의 잔인함도 수니파의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ISIL이 공개한 사진 중에는 이들이 정부군 1700명을 처형했다고 주장하며 수십 명이 끌려가거나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장면이 찍힌 것도 있다. 처형 후 목만 모아놓은 사진, 20∼60명씩 손이 뒤로 묶인 채 처형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끌려가는 사진 등 잔인함이 극에 달해 국제적 비난을 받는다. 체면을 중시하는 수니파 부족사회는 이렇게 잔인한 단체와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 곤혹스러워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수니파 부족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시아파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불가피한 동거를 하던 ISIL과 수니파는 멀지 않은 장래에 갈등을 빚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도 알 바그다디는 대담하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지난 7월 5일 공개된 21분가량의 동영상에는 이라크 모술의 알누르 모스크(이슬람 사원)에서 알 바그다디가 설교하는 모습이 담겼다. 검은색 터번을 두르고 검은색 옷을 입은 알 바그다디는 “내가 신에게 복종하는 한 당신들도 내게 복종하라”고 촉구했다. 그동안 자신의 얼굴 공개를 극도로 꺼렸던 알 바그다디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등장한 것은 국가를 선포한 이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정도로 자심감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또 같은 날 ISIL이 자체적으로 발행한 여권사진도 인터넷에 공개됐다.
아랍권 위성방송사인 알 아라비아의 보도에 의하면, 이 여권의 상단에는 ‘칼리프제 이슬람 국가’가 표시돼 있고 하단에는 ‘이 여권의 소지자가 피해를 당하면 우리는 그를 돕기 위해 군을 파견할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다고 이 방송사는 전했다. ISIL은 이 여권을 이라크와 시리아의 접경 지역에 사는 주민 1만1000명에게 발급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황당무계한 상황이지만, 여권이 통용되는 것은 각 국가의 주권과 재량이므로 어떤 국가가 이들의 여권을 인정한다면 사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국가를 건설하든 안 하든 국제사회는 우려할 수밖에 없다.
칼리프가 된 반군 지도자
과거 알카에다와 탈레반으로 대변되던 이슬람 급진 세력이 이제는 알 바그다디의 ISIL로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잔인하고 더 급진적인 성향으로 이라크뿐 아니라 시리아, 터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중동 국가의 급진 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 이라크 정부군과 ISIL의 전투는 지금도 계속된다. 알 말리키 총리는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론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사퇴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4월 30일 실시된 총선에 따라 구성된 이라크 새 의회가 7월 1일 개원했으나 새 지도부 선출과 관련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2시간여 만에 종료됐다. 의회는 이날 회의를 시작으로 국회의장과 대통령, 총리를 순차적으로 선출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알 말리키 현 총리 교체와 관련해 논쟁이 가열되면서 합의에 실패했다. 결국 수니파와 쿠르드계 의원 상당수가 도중에 회의장을 떠나 의사 정족수 부족으로 회의가 중단됐다.
이라크 북부도시 티그리트에 사는 카심(12)은 한밤중에 들이닥친 무장 대원들 때문에 잠이 깼다. 무장 대원들은 모두 도시에서 나가라고 소리쳤고 갓난아기를 포함한 세 동생, 그리고 카심의 부모는 서둘러 짐을 꾸려서 칠흑 같은 밤중에 집에서 나왔다. 카심은 “나는 왜 우리가 도망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트럭을 운전하셨고 어머니는 우는 동생을 달래기 바빴다”라고 당시를 증언했다. 카심과 그의 가족이 살던 집에서 쫓겨 나가야 하는 이유는, 그가 사는 마을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전투를 벌이면 무고한 이들 가족이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이라크 북부 아르빌로 피난 온 카심은 “우리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나”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그런 카심에게 이라크의 어른들 중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재 이라크 국민의 5분의 1이 카심 가족처럼 집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선 상황이다. 지난 6월 한 달간 각종 폭력사태로 사망한 이라크 국민은 1922명, 이는 2007년 5월 이래 월간 기준으로 최고치다. 후세인이 죽고 미군도 떠났지만, 이라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