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농촌이 유럽풍 마을로 탈바꿈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인기 마을로 변했다. 각종 개발로 원주민이 흩어져 공동체가 해체되는 기존 형태를 답습하지 않고 주민이 똘똘 뭉쳐 ‘공동이주’와 ‘공동건축’ ‘공동운영’이라는 새로운 재정착 모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충남 아산 지중해마을의 이주개발 성공 스토리.
태풍 ‘너구리’ 북상 소식에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서울 공기를 뚫고 차로 1시간 40여 분 달렸을까. 나지막한 산과 들판 사이로 우뚝 솟은 선문대학교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서울 강남에서나 볼 법한 아찔한 고층 아파트 여러 동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곳을 지나쳐 조금 더 가자 시골이라고 믿기 어려운 유럽풍의 아름다운 집이 수십 채 나란히 줄지어 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 이색 마을로 뜬 일명 ‘지중해마을’이다.
충남 아산시 탕정면 일대에 삼성디스플레이시티가 형성되면서 산업단지 내에 자리 잡은 지중해마을은 프로방스풍의 아기자기한 집과 파르테논 신전을 축소한 듯한 집, 하얀 벽면에 파랑과 주황색 돔을 얹은 지붕이 마치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을 떠올리게 하는 알록달록한 집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국적 느낌을 자아낸다.
마을 초입으로 들어서자 푸른 유리벽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아치가 맨 처음 외지 손님을 맞는다. 아치 중앙엔 ‘블루 크리스탈 빌리지(BLUE CRYSTAL VILLAGE)’라는 마을 명칭이 새겨져 있다. 첨단산업 단지에 위치한 마을답게 붙인 ‘미래도시형’ 명칭이지만, 이곳을 다녀간 관광객의 입소문을 타고 ‘지중해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마을 주민이 주주로 참여해 2011년 설립한 탕정산업의 김환일 총무이사는 “주민들이 ‘블루크리스탈이라는 이름이 어렵다’고 해서 아예 ‘지중해마을’로 명칭을 바꿀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블루크리스탈 빌리지’
유럽의 화려한 밤을 연상케 하는 지중해마을 밤거리.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포도 산지로 유명했던 평범한 농촌이 유럽풍의 지중해마을로 탈바꿈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인기 마을이 된 배경에는 마을공동체가 있었다. 도심 재개발 등 각종 개발로 원주민이 흩어져 공동체가 해체되는 기존 형태를 답습하지 않고 주민이 똘똘 뭉쳐 ‘공동이주’와 ‘공동건축’ ‘공동운영’이라는 새로운 재정착 모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마을공동체를 구상하게 된 건 장차 주민이 겪게 될 위기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다.
마을이 개발로 술렁이자 주민은 불안감을 느꼈다. 평생을 대대로 농사지으며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던 70~80대 노인들은 “이대로 고향 친구들 곁에서 살다가 죽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20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결심한 50대 초반 변모 씨는 고향으로 내려와 농지 6만600㎡(2만 평)를 빌려 농사를 시작했다. 수천만 원의 명퇴금은 농기구를 마련하는 데 썼기 때문에 개발이 시작되면 가족을 데리고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자신의 땅 한 평 없는 탓에 넉넉한 보상비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그는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개발이 시작되면서 가옥 보상비로 3700만 원을 받은 40대 후반 배모 씨는 마을 주택을 공동으로 건축한다는 결정이 나자 지인들에게 “토지계약금만 도와주면 마을 주민과 같이 살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때까지 그의 수중에 남은 보상비는 고작 100만 원. 주민들로부터 토지계약금을 빌리면서 배씨는 그토록 원하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공동체마을을 구상하지 않았다면 마을 어르신들의 소망도, 변씨나 배씨같이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던 동네 친구들과도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김 이사는 누구보다 지중해마을에 대한 애착이 크다. 대기업 전무로 명예퇴직한 그는 천안에서 학원사업을 하다 실패해 낙향했다. 도시를 전전하다 삶이 무너져내린 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곳에 온 뒤 어릴 적의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다니며 천렵과 꿩 사냥을 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추억과 마음의 위안을 뒤로하고 다시 친구들을 떠나야 한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말했다. 개발 초창기 대다수 마을사람이 ‘반대’ 편에 섰을 때 내심 ‘찬성’ 편이었던 그가 주민과 끝까지 함께하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다.
‘재정착’의 첫 단추를 꿰다
이주 대상 지역 주민들의 성공적인 고향 재정착과 행복한 공동체 탄생 배경엔 주민과 주민, 주민과 기업 간 양보와 배려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중재 노력도 한몫했다. 하지만 개발을 둘러싼 복잡한 과정이 처음부터 매끄러웠던 건 아니다. 이들도 개발 초창기엔 여느 개발지역과 유사한 갈등과 팽팽한 대치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4년 4월 중순, 삼성전자는 아산시 탕정면 갈산리, 명암리, 용두리 일대 325만3800여 ㎡(98만6000여 평)를 ‘탕정 제2 지방산업단지’로 지정해줄 것을 아산시를 통해 충남도청에 공식 요청했다. 이에 해당 마을 주민 70여 명이 도청으로 몰려가 ‘반대’ 시위를 벌였다. 현행법상 민간이 산업단지를 개발할 경우 택지나 아파트를 분양할 수 없지만 삼성 측이 단지 내 주거지역에 아파트를 지어 일부를 일반인에게 분양하겠다고 나서자 “막대한 개발이익이 원주민이 아닌 기업에 돌아가는 땅 투기”라며 들고일어난 것.
지중해마을 주민들이 운영권을 따낸 함바식당.
주민 반발이 거세고 특혜 시비에 휘말리자 충남도는 건설교통부(국토교통부)를 상대로 산업단지 지정을 위한 협의요청을 거둬들였다. 1차 승리에 고무된 주민은 삼성 측에 수차례 대화를 요청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친 주민은 2004년 9월 소송 절차를 밟으면서 사건을 토지보상·재개발·도시개발 전문인 김은유 변호사(법무법인 강산 대표, 성균관대 건축토목공학부 겸임교수)에게 맡겼다. 산업단지지정처분 취소소송에서 김 변호사는 “개발 예정지에 원주민이 비닐공장, 화학공장 등 4개 공장을 갖고 있다. 삼성도 산업단지에 공장을 짓는다는데 왜 똑같은 민간인인데 힘없는 개인이 공장을 대기업에 빼앗겨야 하나? 원주민을 몰아낸 산업단지에 아파트를 짓는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된다”는 요지로 변론했고, “원고 측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재판부는 “삼성 측에 납득할 만한 논리를 대든지, 아니면 주민과 합의하라”고 했다.
합의가 결렬되고 재판이 길어지면서 소송이 해를 넘기자 강희복 전 아산시장이 자리를 마련했다. 담당 공무원을 포함해 시장실에서 삼성 측과 마주 앉은 마을 주민 대표 5명은 네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이주택지에 공동으로 주택을 건설할 수 있게 자금을 빌려줄 것. 또한 가구당 3억 원에 연이자는 국민주택기금에 준하는 3%로 책정하고 분할 상환기간을 20년으로 해줄 것. 둘째, 무허가 불법주택에 사는 원주민도 이주대상자로 선정해줄 것. 셋째, 산업단지 내 함바식당 운영권을 주민에게 주는 등 생계대책을 마련할 것. 넷째, 주민이 공동으로 임시 이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 등이었다. 주민 요구사항을 파악한 강 시장의 중재로 삼성 측과 대화의 물꼬를 튼 주민은 소송을 취하했다.
재판 과정에서 “절대 삼성을 이길 수 없다”며 패배의식에 젖은 주민도 일부 나왔지만 끝까지 똘똘 뭉쳐 힘을 발휘한 주민은 삼성 측으로부터 네 가지 요구사항을 핵심으로 한 ‘합의서’의 사인을 받아내면서 염원하던 ‘재정착’의 첫 단추를 꿰게 됐다. 김 이사는 “무허가 불법주택 거주자를 이주대상자에 포함시킨 건 어려운 사람들을 보듬어 함께 가자는 취지였다. 해당 주민이 3~4명이었는데 당시 법은 무허가 건축물을 인정하지 않아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이주대상자가 아니었다. 주민들이 배려한 것인데 나중에 애를 좀 먹었다. 그리고 투기꾼들을 끌어들이는 빌미가 됐다”며 후회했다.
‘이주규약’ 통해 한 몸으로
김환일 탕정산업 총무이사(오른쪽)와 김은유 변호사.
현재 이곳에서 일하는 마을 주민은 1명이다. 종업원은 외부에서 뽑았다. 원래 주민이 종업원이었지만 평균연령이 72세인 마을 노인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기엔 힘에 부쳤다. 이곳을 통해 벌어들이는 월 매출은 6000만 원 정도. 수익은 마을 공동운영 자금으로 쓰인다. 이 돈으로 탕정산업이 유지되고, 회사는 주민의 구심점이 되었다. 탕정산업은 식당뿐 아니라 마을 전체 1층 상가의 임대도 책임진다. 상가마다 크기가 119~181m²로 다양하고 임대료도 제각각이지만 회사가 임대료를 매기고 거기서 들어온 수익금은 주민 수에 따라 n분의 1로 분배한다.
주민의 눈물과 땀, 열정을 딛고 세워진 지중해마을은 지난해 4월 입주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1년여 지난 지금, 전국에서 개발을 앞둔 지역의 주민과 기업, 지자체 등이 앞다퉈 찾는 마을이 됐다. 이주개발의 새로운 모델로 벤치마킹 대상이 된 것. ‘희망하는 원주민의 100% 재정착’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내고 관광 명소로 꼽히는 마을이 된 데는 공동건축을 통해 마을 외관을 통일하고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이 주효했다. 주민 스스로 정한 ‘이주규약’을 통해 공동체가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도 도움이 됐다. 규약 중엔 5년 내 집을 팔고 공동체를 이탈할 경우 1억 원의 벌금을 물도록 한 강력한 조항도 있다.
성공적인 공동체마을 탄생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주민들 사이에 ‘브레인’과 ‘야전사령관’으로 통하는 김 변호사와 김 이사다. 두 사람은 “마을 계획사업 전체를 관리·감독하며 지금의 환경을 조성한 마스터 플래너(Master Planner) 오기열 교수(건설산업교육원)를 빼놓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김 변호사와 김 이사의 첫 만남은 아슬아슬했다. 삼성 측과의 싸움을 앞두고 원주민 처지에서 정당한 개발 논리를 고민하던 김 이사는 주민 대표 5명과 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김 변호사의 첫인상은 권위 있고 세련된 도시의 변호사 모습이 아니었다. 대화를 할수록 불신은 더 커졌다. “개발과 관련한 지자체 산하기관 고문변호사를 맡았다”는 김 변호사의 자기소개에 김 이사가 “그럼 우리 같은 주민들 때려잡는 일 하셨네요?” 했더니 김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던 것. 실망감에 돌아서려는 김 이사 일행을 향해 김 변호사가 한마디 툭 던졌다. “사업시행자가 법만 지키면 이주대상자들이 지금처럼 거지처럼 쫓겨나거나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김 이사는 “그때 김 변호사가 우리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인연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김 변호사는 탕정산업 주주이자 자문변호사다. 이주대상자가 아니었지만 마을에 집도 한 채 가진 어엿한 주민이다.
‘브레인’과 ‘야전사령관’
취재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김 변호사, 김 이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 마을 초입의 음식점을 찾았다. 젊은 층 취향에 맞춘 콘셉트로 5월 말 문을 연 ‘온더그릴(on the grill)’은 뼈 없는 갈빗살을 주방에서 구워내 썰어 먹는 스테이크식 고기요리와 와인을 곁들일 수 있는 곳. 실내는 문화예술의 거리 이미지와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고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식사 도중 들어온 20~30대 젊은 여성 5명이 김 이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합석했다. “밤에 작업하는 야행성이라 이제야 작업실을 나섰다”는 그들은 탕정산업이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운영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Artist Ressidency)’ 프로그램에 따라 한 달여 전 마을로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 김 이사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회사와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오늘이 첫 번째”라며 이들을 소개했다. 주인공은 설치·미디어아트·페인팅·드로잉 등의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 채진숙·박혜원 씨, 작업실을 함께 쓰는 아티스트 그룹 강유진·이상정·정은율 씨였다. 사운드·미디어 아티스트 송은성 씨는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열흘 전 스튜디오 개관식 때 공연과 퍼포먼스를 통해 마을 주민과 인사를 나눴다”는 채진숙 씨는 “가을에 6명이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고 했다. 박혜원 씨는 “마을에서 1층 상가를 작업실로 내줬다. 20평 공간을 혼자 써 대작을 하기에도 부담이 없다. 작업실과 숙소 임차료가 없을 뿐 아니라 수도세, 전기세 같은 공과금도 마을에서 다 부담한다. 함바식당에서 식사도 무료로 할 수 있어 잡다한 일상생활에 신경 쓰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이날 미팅에선 마을 곳곳의 설치물과 벽화 작업, 프리마켓 운영 등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제안이 오갔다.
오후 7시를 넘어서자 월요일 저녁임에도 끊임없이 손님이 음식점으로 밀려들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직장 동료와 친구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과 연인들로 70여 개 좌석이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땅거미가 내려앉은 마을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슬리퍼에 평상복 차림의 주민들이 ‘마실’ 가듯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가 하면 낮 동안 푸른빛을 띠던 아치는 빨강과 보라로 순간순간 색을 바꾸며 환한 빛을 발했다. 골목 한가운데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에 불이 들어오자 마을은 순식간에 유럽의 화려한 밤거리 풍경을 연출했다.
올해 2월 중순, 주민들은 빛 축제를 열었다. 검정 실크 햇(silk hat)에 나비넥타이, 검정 벨벳 재킷을 차려입고 능숙하게 말을 모는 마부가 이끄는 유럽풍 꽃마차 투어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풍등 날리기, 노래자랑 등으로 밤늦게까지 흥겨운 마을잔치가 이어졌다. 마을엔 지역문화예술협동조합을 비롯해 도자기 공방과 미술학원이 들어섰고, 1층 상가 곳곳에 명품 로드숍과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자리 잡고 있다. 4인조 록밴드 제이모닝(Jmorning)은 이곳에 재즈카페를 열고 상주하며 종종 공연을 펼친다. 주말이면 문화예술의 향취를 즐기려고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샘솟는 주민 아이디어
마을이 지금의 성과를 얻기까지는 ‘두둑한 보상금’ 대신 ‘재정착’을 목표로 힘을 모은 주민의 공이 컸다. 김 변호사는 “삼성이 자사의 이익을 포기하고 식당 운영권을 마을 주민에게 준 것도 대단하지만 아예 식당까지 지어줬다. 출발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주민이 고마워한다”고 했다. 보상비를 받은 원주민이 흩어지지 않고 건축이 끝난 다음 다시 모여들어 공동체를 이루는 데도 삼성 측 도움이 컸다. 주민의 ‘공동이주’ 요구를 받아들여 아산 시내 아파트 2단지에 가족별로 임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전세금 없이 무상으로 확보해줬기 때문. 그뿐 아니라 삼성 측은 공동체마을 설계를 위한 마스터플랜 비용도 지원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삼성과 주민 양측이 맺은 합의서 내용의 70%가 지켜졌다. 특히 핵심 요구사항은 대부분 지켜졌다. 주민회관 건립 등 남은 부분은 앞으로 양측 협의하에 시간을 두고 진행될 예정이다. 개발 초기 삼성 측이 주민 주장에 귀 기울이고 요구를 수용하면서 주민도 한발 물러섰다. 66가구가 한곳에 들어갈 공동택지를 받는 대신 전체 173가구 규모로 조성된 이주택지의 노른자위 위치를 양보하고 큰길에서 수십 m 뒤로 물러났다. 한편 주민이 요구하던 대출금의 이자율이 ‘3%’가 아닌 ‘7%’로 결정되자 삼성 측은 차액만큼 건축자재를 제공했고, 주민은 대출금 상환기간을 삼성 측 요구대로 20년에서 10년으로 앞당겼다.
현재 마을 주택 매매가는 불과 1년 남짓한 사이 두 배 상승했다. 금전적 이득보다 주민이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옛 농촌공동체의 정과 인심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된다는 점이다. 그 결실을 무엇보다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냈다는 데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김 이사는 “어릴 때 농촌마을에선 어른들이 낮이면 모두 논으로 나가 일하기 바빴다. 마을에 아이들만 남겨져도 걱정하지 않았다. 동네마다 ‘호랑이 할아버지’가 꼭 한 명씩 있어서 야단도 치고 보살폈기 때문이다. 혼자 살다 죽으면 마을사람들이 수습해서 묻어주지, 쌀 한 톨 없어도 밥 굶을 걱정 없지…. 그게 우리가 개발을 통해 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렇게 됐다. 북유럽 복지 시스템보다 우리 마을 시스템이 더 좋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주민은 지금도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은다. 그동안 숱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집집마다 임대공간으로 지어진 2층 원룸의 빈 곳을 활용해 올해부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게 된 것도 그런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이밖에도 1층 상가 음식점들의 공동배달 시스템 도입, 다양한 분야 예술가를 위한 아티스트 레지던스 확장, 옥상을 활용한 녹지공간 확보와 별자리 관측, 차 없는 거리, 모노레일 또는 마차 등의 이색 교통수단 운영, 거리 포장마차 도입 등을 구상 중이다. 그 가운데 공동배달 시스템은 ‘산업단지 내 외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불리한 입지조건을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있다. 산업단지 내 아파트와 기숙사는 물론이고 주변 선문대를 비롯한 학교 등으로 배달 영역을 넓히면 상권을 확장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 별자리 관측이나 이색 교통수단, 노점상 도입, 아티스트 레지던스 확장도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 이사는 “주민 생계대책을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이라고 했다.
7월 7일 영일만항 건설로 피해를 당한 주민과 포항영일만신항 항운노동조합원 300여 명은 포항시청 광장에 모여 항만매립 피해주민에 대한 보상 약속의 이행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주민은 “생업과 삶의 터전을 시와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모두 내줬지만 포항시의 피해보상대책이 턱없이 미흡하다”고 주장했다. 집회 후 포항시장 면담을 요구하며 시청 진입을 시도하다 제지하는 경찰과 고성이 오가는 몸싸움을 벌였다. 이에 앞서 7월 3일에도 평택시청 앞에서 “부당한 토지보상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재산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주민 시위가 벌어졌다. 평택 일대 산업단지 개발 과정에서 토지 수용 대상이 된 주민들이 들고일어난 것.
정부나 지자체, 기업 등 주체가 누구든 개발이 벌어지는 곳마다 지난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한결같은 풍경이다. 지중해마을도 출발은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가지 않던 길을 선택해 독특한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김 변호사는 “기존의 개발 공식과 수순을 따랐다면 원주민 중 많은 수가 뿔뿔이 흩어져 도시빈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