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의 한 수’.
이런 이유로 바둑은 쉽게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지 몇몇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바둑을 즐기는 장면이 양념처럼 등장했을 뿐이다. 장이모의 ‘영웅’(2002)에서 무명(이연걸)과 은모 장천(견자단)의 결투 장면 때 은모 장천이 바둑을 두는 설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올해 바둑을 주된 모티프로 하는 영화 두 편이 개봉됐다. 한 편은 ‘스톤’(조세래, 2014)이고 다른 한 편은 7월 초 개봉된 ‘신의 한 수’(조범구, 2014)다.
서양에선 바둑과 유사한 체스가 종종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영화로 프랑스 영화인 ‘데인저러스 무브스’(Dangerous Moves, 리차드 뎀보, 1983), 할리우드 영화인 ‘나이트 무브스’(Knight Moves,칼 쉔켄, 1992), 할리우드 영화인 ‘서칭 포 바비 피셔’(Search- ing for Bobby Fischer, 스티브 제일리언, 1993)가 있다.
동아시아 바둑 vs 서양 체스
‘데인저러스 무브스’는 냉전의 막바지인 1980년대 초반 만들어졌다. 소련에서 서방으로 탈출한 젊은 체스 천재 파비우스 프롬(알렉산더 아르바트)은 월드 체스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챔피언인 소련의 유대계 아키바 리브스킨드(미셸 피콜리)와 대결한다. 이 승부는 단순한 체스 대결이 아니라 서방과 소련의 자존심을 건 한판이 된다. 이에 따라 첩보기관까지 나서서 상대방의 심리적 약점을 잡아 무너뜨리려 한다.
‘나이트 무브스’는 스릴러물이다. 한 체스 챔피언(크리스토퍼 람베르)은 우연히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를 의심하는 경찰과 정신과 의사(다이안 레인)가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서칭 포 바비 피셔’는 미국의 체스 천재 조슈아 웨이츠킨의 실화를 다뤘다. 웨이츠킨의 아버지인 프레드 웨이츠킨이 쓴 책을 원작으로 삼았다. 스포츠 전문기자인 프레드(조 만테냐)는 어느 날 아들 조슈아(맥스 포메랑)가 체스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유명한 체스 코치인 브루스 판돌피니(벤 킹슬리)를 고용한다.
판돌피니는 조슈아를 월드 체스 챔피언이던 바비 피셔의 무자비한 체스 스타일에 따르도록 지도한다. 그러나 조슈아는 워싱턴에서 만난 체스의 달인인 비니(로렌스 피시번)의 속기 체스 스타일에 더 끌린다. 무협지에서 정통파와 변칙파가 서로 다른 무공 스타일을 놓고 대결하듯 판돌피니 식의 제도권 체스와 비니 식의 재야 체스가 대립한다. 이 영화는 바비 피셔가 체스를 두는 장면, 언론과 인터뷰하는 실제 장면을 삽입하고 있다. 이 장면들은 조슈아가 체스 선수로 성장하는 장면과 대비되게 배치돼 있다.
아버지 프레드는 조슈아를 정통 체스 플레이어로 키우려고 한다. 바비 피셔는 오로지 체스에만 관심을 둔 편집증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어머니 보니(조앤 알렌)는 아버지 프레드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체스에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데인저러스 무브스’는 체스를 둘러싼 국제정치 세계를 보여주고, ‘나이트 무브스’는 살인 사건과 연관된 스릴러물 형태를 취하며, ‘서칭 포 바비 피셔’는 체스 천재의 성장과 가족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 영화는 체스를 가장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 제목이 압권
‘신의 한 수’는 바둑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한국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이라는 독특한 소재에다 액션, 범죄 그리고 복수극을 결합했다. 한국 사회의 특성상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남북 간 바둑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남북 문제를 바둑에 대입하긴 어렵다. 현실에선 한국, 중국, 일본의 프로 바둑기사들이 각종 국제기전에서 치열하게 승부를 펼친다. 영화가 이러한 국가 간 바둑 대항전을 영화의 중심 이야기로 끌어와 민족주의에 어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대표’ 등 많은 스포츠 영화가 이런 이야기 구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신선미가 떨어진다.
‘신의 한 수’가 바둑에다 액션, 범죄, 복수를 버무린 것은 이런 상황을 고려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이라는 새로운 소재, 어느 정도 상업성이 보장된 액션 범죄 복수담을 연결해 지금까지 시도된 적 없는 이야기 구도를 만들어보려 한 것이다. 특히 영화 제작사가 이 영화의 제목을 ‘신의 한 수’라고 정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고 할 수 있다. ‘신의 한 수’라는 용어는 일상적 관용어로서 대중에게 친근하면서 수 싸움으로 이해되는 바둑 게임의 극적인 상황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프로 바둑기사인 태석(정우성)은 불법 도박 바둑에 연루된 형(김명수)을 원거리에서 훈수를 두다가 발각돼 살수(이범수)에 의해 형을 잃는다. 설상가상으로 태석은 형을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여기서 조직폭력배 두목에게 바둑을 가르쳐주고 싸움 실력을 쌓는다. 이후 영화는 석방된 태석이 꽁수(김인권), 주님(안성기), 허목수(안길강)를 규합해 살수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의 전반적 이야기 구조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각 시퀀스의 제목을 바둑 용어에서 따온 것은 화투 영화인 ‘타짜’(최동훈, 2006)가 화투놀이패의 의미로 매 시퀀스를 이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불법 도박 바둑과 화투는 큰돈을 건 비정한 승부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신의 한 수’는 ‘타짜’와 많은 면에서 닮았다. 그러나 두 영화에선 다른 점도 적지 않다. ‘타짜’에선 주인공 고니(조승우)가 화투판의 고수 평경장(백윤식)을 만나 화투의 고수로 성장하는 성장담과 고니가 죽은 평경장의 복수를 위해 아귀(김윤석)와 화투판을 벌이는 복수담이 결합돼 있다. 이에 비해 ‘신의 한 수’에선 태석의 복수담이 주종을 이룬다. 태석은 형을 죽이고 자기를 괴롭힌 살수의 부하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이런 전개는 영화 ‘킬 빌’(쿠엔틴 타란티노)에서 따온 듯하다.
영화는 태석의 형이 죽고 태석이 누명을 쓰는 도입부 ‘패착’, 태석이 감옥에서 나와 복수 계획을 꾸미는 ‘착수’, 팀을 짜서 본격적인 복수를 시행하는 ‘행마’, 살수의 행동대장인 아다리(정해균)를 제거하는 ‘단수’, 훈수를 받아 바둑을 두는 선수(최진혁)를 응징하는 ‘회도리치기’, 훈수꾼인 왕 사범(이도경)을 제거하는 ‘곤마’, 그리고 살수와 태석이 일전을 벌이는 ‘사활’, 살수를 죽이고 복수를 끝내는 ‘계가’로 진행된다.
바둑 같은 인생
각 장의 이들 용어는 바둑 한 판 같은 우리 인생을 묘사하는 듯하다. 이들 용어는 바둑의 형상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각 시퀀스에서 벌어지는 복수 과정을 함축한다. 이때 각 시퀀스에서 나오는 과도한 폭력과 잔인한 장면은 각 용어가 갖는 추상적 의미를 시각화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바둑용어를 따라가는 복수극이다. 혹은 바둑의 원리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잔인한 삽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태석은 꽁수, 배꼽(이시영), 량량(안서현)과 함께 귀수라는 인물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떠난다. 귀수는 감옥에서 태석과 바둑을 두어 매번 이기는 바둑의 최고 고수다. 그러나 귀수는 영화 내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태석이 살수와 둔 바둑은 목숨을 건 한판 승부였다. 반면 태석이 귀수와 둔 바둑은 감옥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였다. 전자에서 바둑은 인간의 탐욕을, 후자에서 바둑은 인간의 유희를 상징한다. 여기서 바둑을 세상으로 바꿔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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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대사는 “세상은 고수에게는 놀이터요, 하수에게는 생지옥이야”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사회다. 살면서 냉혹한 승부를 경험해본 사람은 영화의 이 대사에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