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 공직자 재취업 창구, 기업 방패막이 구실
- SK· 롯데 > 현대차 > 삼성 順
- 법원·검찰 244명, 국세청 129명, 청와대 47명, 감사원·금감원 각 30명, 공정위 29명
- 정권 출범 직후 대통령직인수위 출신도 영입
3월 14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제45기 정기 주주총회.
그러나 제도 도입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사외이사 제도의 실효성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사외이사가 전문지식이나 능력 없이 ‘거수기’ 구실을 한다거나, 경영진과 친분관계가 있거나 정부와 가까운 인물이 사외이사에 임명돼 ‘방패막이’ 노릇을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고위 공직자 출신의 재취업 통로로 활용된다는 비판도 많았다.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는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가 현대엘리베이터와 삼성생명 등 대기업 사외이사로 재직하며 이사회 참석은 소홀한 반면, 고액의 수당만 챙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기업으로 간 관료들
공직자가 퇴직 후 기업 사외이사로 진출했다고 해서 이들 모두를 ‘관피아’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재계에서는 사외이사가 기업의 투명 경영 확보라는 제도 도입 취지와 동떨어져 퇴직 관료들의 재취업 통로 구실을 한다는 비판 여론이 높다.
신동아는 국내 상장사 1738곳(2013년 12월 31일 기준)의 사외이사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 507개사에 공직자 출신 사외이사가 포진했고, 전체 사외이사 3401명 중 773명(22.7%)이 공직자 출신인 것으로 확인됐다. 상장사 사외이사로 진출한 퇴직 공직자 가운데에는 법원과 검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 출신의 비중이 높았다. 검사와 판사 등 사법기관 출신이 244명으로 가장 많았고, 국세청 출신이 129명으로 뒤를 이었다. 기업들이 권력기관에서 퇴직한 고위 공직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한 재벌 전문가는 ‘두 가지 이유’를 꼽았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사법기관 출신에 대한 전관예우가 남아 있다. 사법기관 고위직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인연을 맺어 필요할 때 조언을 받거나 사건을 의뢰하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일종의 보험 성격으로 기업이나 오너에게 닥칠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
사법기관 출신 사외이사 가운데는 이귀남(GS), 김성호(BS금융지주), 송정호(고려아연) 등 법무부 장관 출신과 정상명(아이에스동서, 화진), 김종빈(동양강철, 씨제이오쇼핑), 송광수(두산, 삼성전자) 전직 검찰총장 등 고위직 인사가 많다. 부장검사 또는 평검사, 판사 출신 사외이사도 적지 않다.
사법기관 출신 다음으로 많은 사외이사를 배출한 곳이 국세청이다. 이는 기업이 ‘세금’ 문제에 민감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많다. 국세청 출신 사외이사로는 손영래(삼천리) 전 청장과 오대식(SK텔레콤), 전형수(이마트), 윤종훈(한국공항) 등 서울지방국세청장 출신 등 고위직 비중이 높다.
국세청 출신 사외이사 가운데는 법무법인(로펌)의 고문이 눈에 띈다. 노석우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은 법무법인 바른의 고문과 계룡건설산업 사외이사이고, 정병춘 전 국세청 차장은 법무법인 광장 고문과 롯데하이마트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사법기관, 국세청에 이어 다수의 사외이사를 배출한 부처는 감사원,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이다. 감사원과 금융감독원 출신이 각 30명, 공정거래위원회 출신은 29명에 달한다. 김종신 전 감사원 감사위원(차관급)은 신세계 사외이사와 OCI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정태철 전 부원장보(키움증권), 김동원 전 부원장보(메리츠금융지주), 박찬수 전 변화추진기획단장(대신증권) 등 금융감독원 출신 인사들은 주로 증권, 보험사 등 금융업계에서 사외이사로 활약한다. 한편 손인옥 전 부위원장(신세계), 강대형 전 부위원장(롯데제과), 허선 전 사무처장(롯데하이마트) 등 공정거래위원회 출신 인사들은 주로 리테일 업계 사외이사로 간 것이 눈에 띈다.
‘권력의 정점’이라 볼 수 있는 청와대 비서실 출신 사외이사는 47명이다. 법무부 차관을 지낸 정동기 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롯데케미칼),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박봉흠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SK가스), 최중경 전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효성) 등이 현재 기업 사외이사로 활동한다. 대부분 재계 순위 30위 내 대기업 사외이사직을 수행한다.
장·차관 출신 사외이사도 눈에 띈다. 장관 출신 사외이사는 29명. 6·4 지방선거 부산시장에 출마하기도 한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부산은행의 지주회사인 BS금융지주 사외이사를 맡은 바 있고,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SK에너지를 거쳐 SK이노베이션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임인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은 아시아나항공 사외이사를 맡은 바 있다. 차관 출신 사외이사는 50명. 수출입 화물·항만하역 전문 업체인 선광 사외이사를 맡은 전승규 전 한국선급 회장이 해양수산부 차관 출신이다.
SK·롯데 > 현대차 > 삼성 순
계열사를 포함했을 때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가장 많이 포진한 대기업은 SK그룹과 롯데그룹으로 상장계열사에 포진한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24명에 달했다.
SK그룹 사외이사는 다양한 부처 출신 관료가 각 계열사에 고르게 포진한 점이 특징적이다. 권오룡 전 중앙인사위원장(SK),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SK가스), 이환균 전 건설교통부 장관(SK C·C), 한영석 전 법제처장(SK C·C), 이재훈 전 지식경제부 차관(SK텔레콤), 주순식 전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SK C·C), 허용석 전 관세청장(SK네트웍스), 조성익 전 재정경제부 경제자유구역기획단장(SK증권), 남상덕 전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1국장(SK)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SK그룹 사외이사만 한데 모아도 미니 내각을 구성할 수 있을 정도다. SK그룹 사외이사 가운데에는 신현수 전 대검찰청 부장검사(SK가스), 이승섭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SK증권), 구태언 전 대전지방검찰청 검사(SK커뮤니케이션즈), 윤세리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SK하이닉스) 등 검찰 출신이 상당수 포진한 점도 눈에 띈다. 최태원 회장이 구속돼 재판을 받는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식음료 제조와 유통 계열사가 많은 롯데그룹도 7개 상장계열사에 24명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포진했다. 롯데그룹에는 법원과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 권력기관 출신 인사가 특히 많다. 김종훈 전 대법원장 비서실장과 조근호 전 부산고검장, 김용재 전 중부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담당관이 롯데손해보험에, 김태현 전 대검 감찰부장, 백명현 전 금융감독원 기획조정국 팀장,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은 롯데쇼핑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정동기 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은 롯데케미칼 사외이사로 신규 임용됐다.
SK와 롯데그룹 다음으로 퇴직 공직자 출신 사외이사가 많은 대기업은 현대차그룹이다. 9개 상장 계열사에 모두 22명의 퇴직 공직자가 포진했다. 현대차그룹에 포진한 관료 출신 사외이사는 거의 예외 없이 검찰과 법원,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 권력기관 출신이다. 계열사별로 살펴보면 현대차에는 오세빈 전 서울고등법원장과 임영철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강일형 전 서울지방국세청 조사3국장이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고, 기아차에는 김원준 전 공정위 경쟁정책국장, 신건수 전 서울고검 형사부장, 홍현국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이 포진했다.
삼성그룹도 상장계열사에 21명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뒀다. 삼성증권은 이영균 전 한국은행 부총재보와 안세영 전 산업자원부 무역정책과장, 오종남 전 통계청장, 유영상 전 특허청 차장 등 4명의 관료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에 선임했고 삼성전기와 삼성생명보험도 각각 3명의 전직 관료를 사외이사로 뒀다. 삼성전자는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유일했다.
정권 따라 바뀌는 사외이사?
공직자 출신 사외이사는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한다. 이명박 정권 출범 후 경제개혁연구소가 274개 기업 사외이사 1227명을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 대선후보 시절 정책자문단이나 선거대책위원회, 당선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친이계’ 인사 54명이 2008년 기업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제개혁연구소는 이명박 당선인 부대변인을 지낸 송태영 전 한나라당 부대변인(한화생명)과 이명박 후보 후원회장을 지낸 송정호 청계재단 이사장(고려아연)이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새롭게 사외이사에 선임됐다고 밝혔다.
정권과 가까운 인사가 기업 사외이사로 진출하면 기업의 경영 감시라는 사외이사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질 개연성이 크다. 경제개혁연구소 측은 “기업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 제도가 정치권력과 영합하면 오히려 기업 지배구조를 악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