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려명黎明

6장 머나먼 강

  • 입력2014-07-22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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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순미는 윤기철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중국으로 탈출하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 윤기철은 정순미에게 돈과 자신의 휴대전화를 건넨다.
    • 마침내 정순미는 중국행 트럭에 몸을 싣는데….
    려명黎明

    일러스트·박용인

    긴장한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장난으로 허튼소리를 뱉다가 무안을 당한 꼴이다.

    “무슨 일이야?”

    윤기철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울렸다. 그때 정순미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졌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정순미가 흐린 눈으로 윤기철을 보았다.

    “제 부모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셨어요.”

    윤기철이 숨을 들이켰고 정순미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집에 혼자 남았지만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될 것 같아요.”

    “갑자기 왜?”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온 제 말을 들은 윤기철이 입맛을 다셨다. 놀라서 멍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큰아버지가 체포되었기 때문에, 반역 혐의로….”

    정순미의 목소리가 점점 또렸해졌다.

    “저는 연락원 일을 하기 때문에 풀려났지만 곧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아?”

    “연락원이 바뀌겠지요.”

    “정순미 씨는?”

    “집도 내놓으라고 했으니까 공장도 다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윤기철은 정순미를 응시한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생각을 정리해보려는 시늉이었지만 뭐가 떠오를 리가 없다. 결국 윤기철이 이렇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이달 안에 결정되겠지요.”

    조금 차분해진 정순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가를 꼼꼼하게 눌러 닦았다. 이달 안이면 일주일 남았다.

    “아무래도 앞으로 못 뵐 것 같아서요. 제가 수용소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조 대표도 알아?”

    “지도총국장만 알아요. 지금은요.”

    정순미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총국장이 그러더군요. 집안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요.”

    “…”

    “제 생각이지만 과장님이 이번 일을 끝내고 오시면 저도 교체될 것 같습니다. 반역자 가족이 이런 곳에서, 더구나 연락원 과업까지 수행할 수가 없거든요.”

    윤기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씩 정리돼간다.

    “내가 도와줄 일 있어?”

    윤기철이 정순미를 똑바로 보았다. 정순미가 신세한탄이나 하려고 내막을 털어 놓았을 리는 없다. 지금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저 표정을 봐도 그렇다. 절박하지만 뭔가 결심이 선 얼굴이다. 그때 정순미가 말했다.

    “저 여길 떠나겠어요.”

    윤기철은 움직이지 않았고 정순미의 말이 이어졌다.

    “도와주실 수 있어요?”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에 불안한 기색이 낀 것 같아서 윤기철이 헛기침을 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저도 모르게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정순미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조·중 국경 쪽으로 올라가려면 며칠 걸릴 건데 돈이 없어요. 보위부에서 다 가져갔기 때문에, 선물로 주신 롤렉스도 가져갔어요.”

    “…”

    “200달러만 빌려주세요.”

    “줄게.”

    바로 대답한 윤기철이 심호흡부터 했다.

    “언제 갈 건데?”

    “과장님이 내일 서울 가시고 나서요. 내일 밤에 출발하겠어요.”

    거기까지 또렷하게 말하던 정순미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나 정순미는 곧 눈물을 멈추고 윤기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과장님, 고맙습니다.”

    “고맙긴, 200달러 가지고…. 그런데 200달러면 돼? 국경은 어떻게 넘을 건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시 손수건으로 눈가를 꼼꼼하게 닦은 정순미가 심호흡을 했다. 이제는 다시 얼굴이 차분해져 있다.

    “국경을 넘기만 하면 견딜 수 있어요. 제가 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웠거든요.”

    “달러 있어요?”

    윤기철이 묻자 장원석이 주머니에서 지갑부터 꺼냈다.

    “얼마?”

    “얼마 있는데요?”

    공단 매점은 상품값을 달러로 받기 때문에 과장들은 대부분 달러를 갖고 있다.

    “한 300달러 되나?”

    “오늘 환율로 바꿔드릴 테니까 다 주세요.”

    그러면서 윤기철이 지갑을 꺼냈더니 지나던 시설과장 오석준이 물었다.

    “아까도 나한테 200달러 바꿔가더니만, 뭐 살 것이 있다고 그래?”

    “술 좀 몇 병 사가려고요.”

    “그거 누가 마신다고.”

    윤기철이 장원석에게 원화를 건네고 대신 달러를 받았다. 10달러짜리, 5달러짜리까지 있어서 꽤 두툼했다. 오후 10시 반이다. 특근을 끝낸 직원들이 돌아온 숙소는 떠들썩했다. 다음 달 초 100명이 충원된다는 결정이 난 후부터 회사 분위기는 밝아졌다. 개성공단 파견 요원들에게 특별 보너스가 지급된다는 소문도 났다.

    방으로 들어간 윤기철이 구입한 달러를 세어보았더니 575달러다. 100달러짜리가 두장, 나머지는 소액권이다. 정순미가 쓰기에는 이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달러를 세던 윤기철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는 머리를 들었다. 주방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또 소주를 마시는 모양이다. 대개 장원석이 바람을 잡으면 모이는데, 마시자고 부르지는 않는다. 달러를 모아 쥔 윤기철이 심호흡을 했다. 내일 오후에 허가증을 받아 개성을 떠나면 정순미 또한 내일 밤에 개성을 떠날 것이다. 하나는 허가증을 받고 떠나지만 또 하나는 탈출이다.



    개성은 직할시여서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더구나 명승지가 많아서 선죽교나 표충비, 공민왕릉과 고려의 여러 왕과 왕후의 무덤, 개성첨성대와 개성성균관 등이 학생들의 견학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밤 10시 40분, 정순미가 선죽동 집에서 500m쯤 떨어진 남대문 뒤쪽의 작은 공터로 들어섰다. 공터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지만 수백 명의 남녀가 움직인다. 공터 옆쪽의 골목에도 남녀가 웅성거렸는데 이곳이 바로 장마당이다. 어둠에 익숙한 정순미의 눈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이 앞에 펼쳐놓은 상품까지 다 보였다. 남조선의 드라마 테이프, 중국에서 들여온 휴대전화에 짝퉁 명품까지 없는 것이 없다. 정순미도 이곳에서 남조선 드라마 테이프와 짝퉁 운동화, 남조선 라면까지 산 적이 있다. 회사에서 받아온 초코파이를 판 적도 있기 때문에 거래는 익숙하다.

    “뭐 사려고?”

    옆으로 다가온 사내가 물었는데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40대쯤으로 어두웠지만 단정한 차림이다. 이곳은 전혀 불빛이 없었지만 모두 밤고양이처럼 활동한다.

    “아뇨, 그냥 구경.”

    정순미가 짧게 말하자 사내가 바짝 붙어 섰다.

    “남조선 드라마, 요즘 끝난 것 있는데. ‘별들의 사랑’, 10달러.”

    사내를 그냥 스쳐 지나가자 이번에는 여자가 다가와 붙어 같이 걷는다. 사람이 많아 부딪치고 비켜야 앞으로 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마당은 조용하다. 그저 작은 웅성거림만 울릴 뿐이다. 여자가 낮게 말했다.

    “뭐, 팔 거 있어? 다 살 테니까 말해.”

    “아뇨, 없어요.”

    “롤렉스 15달러. 정품이야. 보위부에서 나온 거야. 뒤에 장군님 서명도 있어.”

    숨을 들이켠 정순미가 걸음을 빨리 떼자 여자는 곧 사람들 사이에 묻혔다. 골목으로 들어선 정순미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양쪽 폐공장 담장에 붙어앉은 암상인 주위로 사람이 가득 몰려 서 있다. 행인은 그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그때 정순미가 담장에 붙어 서서 담배를 피우는 사내를 보았다. 담배를 빨아들이자 얼굴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정순미가 사내에게로 다가섰다.

    “아저씨.”

    “아, 단골 아가씨.”

    반색한 사내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잘 오셨어. 내가 ‘별들의 사랑’을 다 팔고 딱 두 개 남았어. 8달러만 내.”

    40대 중반의 사내는 조선족으로 그저 성이 김씨라는 것만 안다. 정순미와 정순미 어머니하고 2년 가까이 거래했으니 그에겐 단골손님인 셈이다. 정순미가 김씨에게 바짝 붙어 섰다.

    “단골 아가씨, 오늘은 뭐가 필요해?”

    김씨가 묻자 정순미가 숨부터 골랐다. 이 사람을 만나려고 온 것이다.

    “언제 돌아가세요?”

    “왜?”

    김씨가 금방 정색하더니 정순미를 보았다.

    “누구, 손님 있어?”

    진천의 장마당은 개성보다 오히려 더 넓은 데다 상품이 많았다. 중국에서 내려온 조선족 상인도 많았고 공터 옆쪽에는 10여 대의 트럭이 세워져 있었는데 모두 중국 번호판이 붙어 있다.

    “개성에 언제 돌아가세요?”

    트럭 옆에 쪼그리고 앉은 정순미에게 여자가 물었다. 3m쯤 떨어져 앉은 부부 중 여자다. 20시간이 넘는 동안 거의 말을 섞지 않다가 지금 말을 걸었다.

    “며칠 있다가요.”

    대충 대답한 정순미가 여자를 보았다. 이곳은 개성 장마당보다 좀 밝다. 공터 왼쪽 끝에 주체탑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100여 m 떨어졌지만 그 빛이 장마당을 비추고 있다. 여자는 파마머리에 진홍색 루즈를 발랐다. 미인형 얼굴이지만 입끝이 내려가 심술궂게 보인다. 옆쪽에 앉은 남편은 앞만 보고 있는데 트럭 안에서도 둘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개성 사시나요?”

    예의상 정순미가 물었더니 여자가 머리를 내저었다.

    “우린 강계 삽니다. 개성 사는 친척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네에.”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싫다는 몸짓으로 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렸지만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차주 김씨를 잘 아세요?”

    “예, 몇 번 거래했어요.”

    마지못해 대답한 정순미가 엉덩이를 들썩였을 때 여자가 불쑥 물었다.

    “강 건너려는 거죠?”

    정순미는 2초쯤 지나고 나서야 알아들었다. 숨을 들이켠 정순미가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시선이 정순미와 부딪치더니 떼어지지 않는다. 또 2초쯤 지났는데 그 순간이 긴 것 같았다. 숨을 뱉고 난 정순미가 되물었다.

    “그렇게 보여요?”

    “그래요.”

    머리까지 끄덕인 여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데 김씨한테는 말할 것도 없겠죠.”

    “…”

    “김씨가 친척이 아닌 이상 그냥 놔둘 것 같습니까? 아가씨 같은 늘씬한 미인이면 중국에서 3만 원쯤 받을 겁니다.”

    “…”

    “그런 횡재를 저 장사꾼이 놓칠 것 같아요?”

    “아주머니는 도대체 누구세요?”

    마침내 정순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을 때 앞쪽만 보던 남자가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우리도 강 넘어가려는 사람인데 아가씨가 딱해서 이런 이야기 해주는 거요.”

    사내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고 있다.

    이원호

    려명黎明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글쎄 언제 어느 쪽으로 가시냐고요?”

    “내일 밤, 이맘때 덕천, 회천, 강계를 거쳐서 가. 만포에서 국경을 넘지.”

    “강계까진 얼마죠?”

    “누가 가는데?”

    “내가요.”

    “아가씨가?”

    김씨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그러나 입가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강계에는 왜?”

    “외삼촌한테.”

    “80달러만 내.”

    “너무 비싸요. 돌아올 때 차비까지 합하면 100달러가 넘게요?”

    정순미가 머리를 내저으면서 한 발짝 물러섰다. 조선족 상인들은 트럭을 이용해서 합승 장사를 한다. 북한지역 곳곳을 다니는 데다 일반 교통수단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족 트럭은 허가증을 갖고 있어서 검문이 까다롭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김씨가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그럼 손님이 넷이군. 트럭 뒤쪽 짐칸에 숨어 타고 60달러, 그 이하는 안 돼.”

    “강계에는 언제 도착하죠? 미리 외삼촌한테 연락해놓으려고요.”

    “덕천, 회천에서 짐 실을 게 있고, 진천에서는 장마당에서 장사를 좀 해야 될 테니까 다음 날 새벽쯤에 닿겠군.”

    “내일 밤 몇 시에 만나요?”

    “여기 말고 자남산공원 입구 건너편에 우신상점이 있어. 그 상점 뒤에서 만나.”

    주위를 둘러본 김씨가 말을 이었다.

    “10시 정각, 알았어?”

    “몇 명이 타죠?”

    “거기까지 네 명.”

    김씨가 얼굴을 바짝 붙였으므로 정순미가 머리를 젖혔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강계까지 60달러 냈다고 하지 마. 아가씨한테는 너무 싸게 받은 거야.”



    집에 돌아왔을 때는 11시 반이다. 그동안 휴대전화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정순미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뛰듯이 집에 돌아와서는 옷을 벗지도 못하고 거실의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서 기다렸다. 집 안의 불은 다 꺼져 있는 데다 가구도 없어서 마치 빈집 같다. 아버지 어머니가 체포된 지 엿새째 되는 날 밤이다. 엿새가 오랜 세월처럼 느껴졌고 지금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할 뿐 그리움이나 서러움은 솟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있다. 멀리서 닥쳐오는 해일을 보는 것 같다. 그때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으므로 정순미는 소스라쳤다. 기다리고 있었어도 놀란 것이다. 정순미가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응, 집인가?”

    보위부 사내다. 오늘도 사내의 목소리는 늘어져 있다. 술 취한 것 같다.

    “예, 동지.”

    “별일 없지?”

    “예, 별일 없습니다.”

    “알았어.”

    휴대전화 위치 추적으로 집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였다. 통화가 끝났을 때 정순미는 손에 쥔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보았다. 가구는 다 가져갔지만 집 안 냄새는 아직 남았다. 안방에 가면 어머니 냄새가 많이 난다. 안쪽에는 아버지의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다. 그래서 정순미는 거실에서 잔다. 그날 밤 정순미는 꿈을 꾸었다.

    “빨리 와, 빨리.”

    어머니가 손짓하며 부르는 뒤에 아버지가 웃음 띤 얼굴로 서 있었다. 주위는 밝다. 어머니는 아끼던 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다.

    “밥 차려놓고 우리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아니? 빨리 와 밥 먹어.”

    정순미는 달렸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얼굴에서 땀을 쏟으며 달리던 정순미가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놀란 정순미가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없어진 것이다. 놀라 잠에서 깬 정순미가 휴대전화를 들고 시계를 보았다. 오전 5시 반이다.

    오전 10시40분, 총국에서 연락이 왔다. 윤기철의 허가증이 나왔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 늦게 신청했는데도 오늘 오전에 허가증이 나왔다. 빨라도 내일 오후에 나올 허가증이 반나절 만에 나온 셈이다.

    “어쨌든 윤 과장은 통뼈라니까.”

    법인장 김양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버님 수술 끝나는 거 보고 며칠 더 있어도 돼. 여긴 급한 거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부친 수술하신다는 데 당연히 가봐야지.”

    이번 출장 명분은 아버지가 갑자기 허리 수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

    “저, 점심 먹고 출발하겠습니다.”

    윤기철이 말하자 김양규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래.”

    김양규는 다음 인사 때 본사 중역으로 영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번 근로자 100명 충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비품창고로 들어선 윤기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순미에게 말했다.

    “그럼 이것이 마지막인가?”

    정순미는 시선을 내렸고 다가선 윤기철이 다시 물었다.

    “마음 굳힌 거야?”

    “저 오늘 밤 떠나요.”

    “어떻게?”

    “장마당에서 만난 조선족 트럭을 타고 북쪽으로 가요.”

    윤기철이 소파에 앉으면서 정순미에게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오후 12시 10분이다. 점심시간이어서 모두 식당에 모여 있다. 옆자리에 앉은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얼굴이 핼쑥하고 입술이 세로로 갈라졌지만 아름답다. 윤기철은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 느낌을 받았다. 지금 정순미는 목숨을 건 행동을 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은 그런 적이 있던가? 없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부모가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고 자신은 혼자 남게 된 경험은? 없다. 범죄에 연루되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밤을 새워본 적은? 없다. 윤기철이 똑바로 정순미를 보았다.

    “돈 가져왔어.”

    주머니에서 달러 뭉치를 꺼낸 윤기철이 정순미의 손을 잡아 쥐여주었다.

    “575달러야. 소액권을 많이 바꿨어.”

    “너무 많아요.”

    깜짝 놀란 정순미가 몸을 뒤로 물렸지만 윤기철이 손을 잡아 억지로 쥐여주었다.

    “나한테는 너무 적어.”

    “…”

    “무사히 잘 빠져나가야 할 텐데.”

    “…”

    “개좆같은 나라, 잘 빠져나가는 거야.”

    그때 정순미가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볼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러지 마세요.”

    정순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조국을 욕하지 마시라고요.”

    “알았어.”

    어깨를 늘어뜨린 윤기철이 길게 숨을 뱉었다.

    “시발, 근데 너무하잖아? 큰아버지가 반역자면 친척도 다 공모자란 거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우린 그래요.”

    “그래서 화도 안 난단 말야?”

    “하지만 저는 살고 싶어요.”

    어금니를 물었지만 정순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정순미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아, 천만에.”

    “혼자 있을 때는 울지 않는데 꼭 과장님하고 있을 때 눈물이 나요.”

    “언제 떠나는 거야?”

    “오늘 밤 야근 끝나고 나서 바로 조선족 화물차로 강계까지 가기로 했어요.”

    “국경을 넘어서 한국으로 올 거지?”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놀란 윤기철이 정순미를 쏘아보았다.

    “그럼 중국에서 살겠단 말야?”

    “아직 결정 안했어요.”

    윤기철이 입을 다물었고 정순미도 머리를 숙인 채 말을 잇지 않았다. 윤기철의 시선이 아직도 정순미가 손에 움켜쥐고 있는 달러 뭉치로 옮겨갔다. 하긴 그렇다. 정순미는 다른 탈북자들과는 다르다. 한국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한국 생활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그럼 못 만나는 건가?”

    문득 윤기철이 그렇게 물은 것은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는 너하고는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은 그렇게 나왔다. 그때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저 과장님 좋아했어요.”

    “…”

    “이렇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잘 넘어가.”

    했다가 숨을 들이켠 윤기철이 생각난 듯 물었다.

    “정순미 씨 휴대전화 있지? 번호 알려주면 내가 연락할게. 그리고 참, 내 휴대전화 번호도 알려줄 테니까….”

    “저, 떠나면서 휴대전화 버리려고 해요.”

    “…”

    “보위부에서 연락을 하기 때문에, 갖고 다니면 위치 추적이 된다고 해서….”

    “그렇다면.”

    눈을 치켜뜬 윤기철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정순미에게 내밀었다. 개성에서는 휴대전화를 쓸 일이 없어서 놔두었다가 오늘 서울로 떠나기 전에 미리 챙겨 넣었던 것이다.

    “그럼 이거 가져가.”

    놀란 정순미가 휴대전화를 보았고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이거, 북한에서는 안 터지겠지만 중국에서는 돼. 나는 한국에서 다른 휴대전화를 살 테니까, 내가 이 번호로 연락할게.”

    윤기철이 정순미의 손에 휴대전화를 쥐여주면서 물었다.

    “국경은 언제쯤 넘을 것 같아?”

    “사흘이나 나흘쯤 후에요. 내일 밤에 출발하면 이틀 후 새벽에 강계에 도착한다니까요. 거기에서 다시….”

    그것도 일이 잘 풀려야 그렇게 될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정순미의 손을 쥐었다. 한 손에 달러를, 다른 한 손에 휴대전화를 쥐고 있어서 윤기철은 정순미의 손등만 감싸 안았다. 그렇게 손을 잡힌 정순미는 윤기철을 마주 본 채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오후 6시, 소공동 사무실에서 만난 박도영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자주 나오시는 건 불편하지 않으시죠?”

    “핑계 대기가 좀 그렇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윤기철이 가방을 건네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허리 수술을 하신다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다음번에는 우리가 핑계를 만들어드리지요.”

    박도영의 눈짓을 받은 이인수가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윤기철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지요. 수당입니다.”

    이인수가 봉투를 내밀었으므로 윤기철은 받았다. 그러자 박도영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정보원 수당입니다. 당연히 받으셔야죠. 국가를 위해 일하시는데.”

    “감사합니다.”

    봉투를 주머니에 넣은 윤기철은 그 순간에 정순미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오면서 망설였던 것이다. 말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일인지 아닌지, 정순미한테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 국정원에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줄 것인지, 오히려 북한 측에 정보를 줄 것인지 등을 궁리하느라고 자유로에서 사고가 날 뻔도 했다.

    “며칠 휴가를 내셨지요?”

    박도영이 말머리를 돌렸으므로 윤기철의 어깨가 늘어졌다.

    “예, 이번에는 나흘인데요.”

    “가방 내용물을 보고 시간이 필요하면 연락드리지요.”

    그때는 휴가 기간을 연장하라는 말이었다.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이 급해진 때문이다.

    “그럼 제가 먼저.”

    “너, 자주 나온다?”

    오늘은 서초동의 카페로 임승근을 불러냈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투덜거렸다.

    “시발놈이 서울에서 뒹구는 나보다 좋은 데는 더 잘 알고 있구먼.”

    “나도 오늘 첨 온 거야.”

    오후 8시, 서초동에서 내린 윤기철이 우연히 들어선 카페다. 임대료가 비싼 곳이라 어설프게 꾸미고 건성으로 장사했다가는 금방 망하는 터라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손님이 반쯤 차 있는 카페 안은 장식도 세련되었고 손님 분위기도 좋았다. 잘되는 집안은 서로 윈윈이 된다. 윤기철이 임승근의 잔에 위스키를 따르면서 말했다.

    “형한테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왜? 신이영이가 임신했대?”

    “아, 그게 아니고.”

    “그 기집애는 이제 네 이야기 안 하려고 해. 그건 널 좋아한다는 표시거든.”

    “그게 아니라….”

    “회사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데서 술 시켜먹는 걸 보면.”

    “형, 나 좀 심각한데.”

    한 모금 술을 단숨에 삼킨 윤기철이 똑바로 시선을 주자 임승근도 입을 다물었다.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개성 우리 회사에 내 보조사원이 있어. 여사원인데 북한 근로자야.”

    “옳지.”

    임승근이 머리를 끄덕였다.

    “건드렸구나.”

    입맛을 다신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려명黎明
    10분쯤 지났을 때 임승근이 눈을 치켜뜨고는 윤기철을 보았다. 상체도 반듯이 세운 채 숨도 쉬는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네가 국정원과 북한 측의 비선(秘線) 연락원 노릇을 해왔단 말이지?”

    윤기철은 머리만 끄덕였고 임승근이 잇새로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북한 측 연락원이었고?”

    “맞아.”

    “그럼 지금 떠났냐?”

    “오늘 야근이야. 야근 끝나고 밤에 조선족 화물차를 타고 떠나.”

    “야단났군.”

    어깨를 늘어뜨린 임승근이 투덜거렸다.

    “시발놈, 이건 특종감인데.”

    “나, 형이 오기 전에 생각했는데.”

    다시 한 모금 술을 삼킨 윤기철이 붉어진 눈으로 임승근을 보았다.

    “내가 중국으로 가서 걔를 데리고 와야 될 것 같아.”

    “어어.”

    임승근이 외침을 뱉었는데 마치 누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이 새끼가 미쳤나?”

    “아니, 나한테 미쳤다니. 형이 지금 제정신이야?”

    “뭐?”

    “그냥 놔두고 회사일 하는 놈이 미친놈이지, 안 그래?”

    “어?”

    “더군다나 걘 날 좋아한다고 했어.”

    “으?”

    심호흡을 한 임승근이 헛기침까지 하고나서 물었다.

    “좋아한다고?”

    “내가 여자한테 그런 말 들은 건 처음이야, 아마.”

    “숱하게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로는.”

    했다가 입맛을 다신 임승근이 갈증이 나는지 위스키 한 모금을 단숨에 털어넣었다.

    “야, 진정해.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내일 새 휴대전화 하나 사야겠어.”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형은 걜 데려오는 방법 좀 알아봐줘.”

    “어, 왔어?”

    김씨가 다가온 정순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니, 그게 뭐야? 이웃 마을 놀러가나?”

    그도 그럴 것이 정순미는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점퍼 차림이다. 등에 배낭을 멨지만 얄팍했다. 김씨 뒤쪽의 어둠 속에 트럭의 거대한 형체가 드러나 있다.

    “짐칸 안쪽에 자리 만들어놓았어. 지금 둘이 와 있으니까 자리 잡아.”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운임을 내라는 말이다. 정순미가 잠자코 주머니에서 달러를 꺼내 내밀었다.

    “강계에서 오는 차편 구할 수 있을까요? 아시면 소개해주세요.”

    “언제 돌아오는데?”

    지폐를 세면서 김씨가 물었다.

    “30일쯤요.”

    셈을 끝낸 김씨가 머리를 들고 다시 물었다.

    “짐이 있나?”

    “감자, 술까지 석 자루쯤 될 건데요.”

    “짐이 있으니까 100달러는 받아야겠는데.”

    “누구 트럭인데요?”

    “내 친구지만 같이 일하니까 나하고 결정해도 돼. 트럭도 새것이야.”

    “그럼 80달러로 해주세요.”

    “이 아가씨가 깎는 게 버릇이 되었구먼.”

    입맛을 다신 김씨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턱으로 트럭을 가리켰다.

    “자, 타라고. 오는 건 다시 상의하지.”

    김씨에게 돌아오는 차비 흥정을 한 것은 의심받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조선족 차를 타고 국경까지 간다면 의심받을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트럭에 오른 정순미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10시 30분이다. 조금 전에 자남산공원 입구에서 휴대전화를 분해해 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보위부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어, 왔냐?”

    식탁에 앉아 소주를 마시던 윤덕수가 붉어진 얼굴로 윤기철을 반겼다.

    “한잔 할래?”

    “아뇨, 아버지.”

    밤 11시 반이다. 동생 윤영철은 편의점 알바를 하는 중이어서 집에 세 식구가 모였다.

    “밥 좀 줄까?”

    이정옥이 주방에서 물었지만 윤기철은 손만 젓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자주 오는 터라 박도영을 만나고 나올 때 이정옥한테 왔다고 전화는 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아직도 술잔을 쥐고 있던 윤덕수가 불렀다.

    “야, 한잔만 해라.”

    위스키 한 병을 임승근과 나눠 마셨지만 술이 취하지도 않았으므로 윤기철은 식탁 앞자리에 앉았다. 윤덕수가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야 너 걔한테 전화 한번 해라.”

    “예? 누구요?”

    물었지만 뻔하다. 윤덕수 친구 딸 서정아다. 제 남친하고 잘 풀릴 때까지 사귀는 시늉을 하자던 가구회사 직원, 까맣게 잊어먹었다가 지금 생각이 난다. 그때 그 조건으로 한 번씩 대달라고 했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런 요구를 했으니 그런 대답이 나올 수밖에, 그때 윤덕수가 한 모금 술을 삼키고 나서 웃었다.

    “아, 며칠 전에 그놈 집에 놀러갔었다. 그 애가 있기에 너 요즘 어떠냐고 지나는 말로 물었더니 글쎄 네가 서울 나오면 연락하겠다는구나.”

    “아이구, 이 양반아. 그냥 인사치레로 한 소리라니까 그러네.”

    다가온 이정옥이 데운 김치찌개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더니 윤덕수는 벌컥 화를 냈다.

    “아, 나한테까지 실없는 소리를 할까? 요즘 애들은 대놓고 싫으면 싫다고 한다면서?”

    “아버지, 그렇게 며느리가 보고 싶으세요?”

    불쑥 윤기철이 물었으므로 둘이 일제히 시선을 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자식아?”

    그건 윤덕수의 말이었고.

    “누구 있냐?”

    이건 이정옥의 말이다.

    “아뇨, 아직.”

    대답을 그렇게 했지만 윤기철의 얼굴은 굳어 있다.

    “아픈 모양이다.”

    조경필이 김현주와 유민희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오전 8시 반, 사무실 보조사원 김현주가 오늘 정순미가 출근하지 않은 것을 보고한 것이다. 그러나 조경필은 이미 반장 유민희로부터 정수미가 공단행 버스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대표실의 소파에 앉은 조경필이 말을 이었다.

    “요즘 무리를 한 모양이다. 그렇지?”

    “예, 대표 동지.”

    김현주가 대답했다.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좋아. 내가 알아서 보고할 테니까.”

    조경필이 끝났다는 시늉으로 머리를 끄덕여 보였으므로 자리에서 일어선 둘은 방을 나갔다. 소파에 등을 붙인 조경필이 문득 전화기에 시선을 주었다가 곧 돌렸다. 근로자가 무단결근을 하면 총국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정순미는 특별한 신분이다. 총국 국장을 제쳐놓고 그보다 한참 윗선인 당 조직 지도부 부부장급 동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연락원인 것이다. 부부장의 지시를 수행 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조경필은 보고를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남측 연락원인 윤기철이 마침 어제 서울로 떠난 것이 떠오르자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북남의 연락원이 제각기 임무를 수행 중인 모양이다. 덜렁 보고했다가 총국 국장까지 병신 취급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짐칸에 탄 넷 중 둘은 부부고 하나는 30대 여자다. 남자 하나, 여자 셋인데 부부는 오른쪽 구석에 자리 잡았고 정순미는 30대와 나란히 앉았다. 운전석 쪽에 등을 붙이고 앉은 것이다. 운전석에는 조선족 운전사와 차주 겸 물주인 김씨가 앉았다. 트럭은 덜컹거렸지만 쉬지 않고 잘 달렸다. 넷이 앉은 공간 앞쪽에는 수십 개의 자루가 쌓였는데 모두 북한에서 구입한 물품이다. 위쪽에 널빤지를 깔고 다시 자루를 쌓아서 트럭의 짐을 다 내려야 안에 탄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오전 10시가 되었어도 안은 어둡다. 양쪽 판자 틈새로 여러 줄기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자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 윤곽도 다 보인다.

    “난 회천까지 가는데 동무는 어디까지 가요?”

    옆에 앉은 여자가 묻는 바람에 정순미는 눈을 떴다. 트럭은 밤 10시 50분에 출발했으니 거의 11시간을 달린 셈이다. 도중에 검문소 3개를 거쳤고 기름을 넣고 엔진을 식힌다고 산길 모퉁이에서 한 시간 반쯤을 쉬었다. 틈틈이 차주 김씨가 뒤쪽에 대고 소리를 질러 상황을 알려주었다.

    “강계까지 갑니다.”

    정순미가 여자를 보았다. 바지에 등산화를 신었고 등산복을 입었다. 정순미와는 달리 관광객 행색이지만 배낭과 여행용 가방에 물건이 잔뜩 들어 있다. 단발머리의 여자가 웃음 띤 얼굴로 짧은 숨을 여러 번 들이켰다. 냄새를 맡는 시늉이다.

    “냄새가 좋아요. 향수죠?”

    “네, 남조선 비누를 써서 그런가 봐요.”

    “남조선 비누?”

    놀란 듯 여자의 눈이 커졌다. 동그란 눈의 귀여운 인상이다. 그러나 속은 알 수가 없다. 여자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제가 개성공단의 남조선 공장에서 복무하거든요. 거기선 남조선 비누를 공급해주기 때문에….”

    “아아.”

    여자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개성공단에 복무한다면 신분은 확실하다. 공단의 근로자가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아, 그러시군요.”

    “강계에 빨리 다녀오려면 이 방법밖에 없죠. 외삼촌한테 가서 뭘 좀 가져오려고 이렇게 된 겁니다.”

    “할 수 없지요.”

    머리를 크게 끄덕인 여자가 말을 이었다.

    “전 회천군에서 중학교 교사로 복무해요. 개성 오빠한테서 양식을 얻어가는 길이에요.”

    여자가 수줍게 웃었으므로 정순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범법자를 잡으려고 승객 행세를 하는 인간만 아니라면 고발할 수는 없다. 자신도 같이 통행증 없는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정순미가 길게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통행 허가증 받고 떠나려고 했더니 시간이 맞지 않아서요.”

    이것으로 옆에 앉은 여자하고는 조금 신뢰감이 쌓인 것 같다. 그때 등을 붙이고 앉은 벽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김씨가 소리쳤다.

    “30분쯤 후에 덕천이야! 덕천에서 한 시간쯤 쉴 거요!”

    덕천에서 회천까지는 이제 이 트럭 속도로 한 시간쯤 걸릴 것이었다. 정순미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 반이다.

    “예, 조경필입니다. 국장 동지.”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선 조경필이 전화기를 귀에 붙이면서 말했다. 오후 2시 40분, 현장에 나가 있던 조경필에게 지도총국의 오영환이 전화를 한 것이다.

    “이봐, 거기 정순미를 나한테 보내라고.”

    오영환이 지시하자 조경필이 숨을 들이켜고 나서 대답했다.

    “예? 정순미 말씀이십니까?”

    조경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 결근했습니다. 국장 동지.”

    “아니, 그럼 집에 있는 거야?”

    “예? 저는….”

    “동무 왜 보고를 안했나?”

    “예, 저기, 그것은….”

    눈앞이 노랗게 변한 조경필이 몸을 굳혔다. 큰일 났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보고 안한 것이 탈났구나.

    “저는 부부장 동지께서 다른 과업을 주신 줄로만 알고….”

    “부부장 동지 팔지 말라우!”

    “예, 국장 동지.”

    조경필이 숨을 죽였을 때 통화가 끊겼다. 무슨 일인가? 조경필이 전화기를 든 채로 생각을 했지만 머리만 멍할 뿐이다.

    30분쯤 후 보위부의 정순미 담당 백순철이 빈 아파트의 거실에 서서 휴대전화를 귀에 붙이고 있다. 집 안에는 보위부 요원 셋이 더 들어와 있었는데 모두 감찰반원이다.

    “예, 없습니다.”

    백순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나 있다. 그때 송화구에서 보위부 감찰과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 집을 비웠는지는 파악 안 되었나?”

    “예? 그, 그것은 오늘 아침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젯밤에도 확인했으니까요.”

    이미 보고한 내용이지만 백순철이 기를 쓰고 덧붙였다.

    “예, 어젯밤 11시40분에 집에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과장 동지.”

    이렇게 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 어젯밤 11시 반쯤 술 취한 상태에서 전화를 했다가 정순미가 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신호가 열 번쯤 울렸다가 끊어지기에 정순미가 자는 것으로 생각하고 놔둔 것이다. 그래도 책임은 져야만 한다. 그때 감찰과장이 소리치듯 말했다.

    “상부에서 난리가 났어, 이 새끼야! 찾으라고!”



    이제는 셋이 남았다. 회천에서 교사가 내렸기 때문이다. 오후 5시 반, 트럭은 진천을 향해 달려간다. 북쪽으로 갈수록 검문이 잦아졌고 속도가 느려졌지만 아직 짐칸까지는 검사하지 않았다. 회천 근처의 검문소에서 짐칸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안쪽은 보지 않았다. 짐으로 덮여 있어 찾아내지 못했다고 봐야 맞다.

    그동안 쉴 적에 두 번 밖으로 나가 씻고 용변을 보았으며 점심까지 두 끼 식사는 가져온 초코파이로 대신했다. 회천에서 내린 교사가 주먹밥 하나하고 초코파이를 바꿔 먹자고 해서 두 개 주었지만 배낭에는 아직 여덟 개가 남았다. 어제 퇴근할 때 회사에서 12개를 가져온 것이다. 매일 계를 탄 근로자가 많아서 빌리는 건 일도 아니다. 벽을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김씨가 소리쳤다.

    “진천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고 갈 거야! 진천에서 강계까지는 세 시간쯤 걸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럼 언제 강계에 닿는 거야?”

    불쑥 옆쪽 남자가 소리쳤으므로 정순미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옆쪽 두 남녀하고는 말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40대 중반의 두 남녀는 처음 트럭에 탔을 때 눈인사만 했을 뿐이다. 둘이 부부 사이란 것도 김씨가 말해주었다. 그때 벽 틈으로 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천에는 오후 7시쯤 도착해서 11시쯤 출발할 거야! 그럼 강계에는 새벽 2시쯤 도착할 거네.”

    정순미는 길게 숨을 뱉었다. 그렇다면 강계까지 27시간쯤 걸리는 셈이다. 기차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했다면 여행증도 없는 터라 검문에서 바로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 시간에 개성직할시 보위부 지부장 조건호가 방으로 들어선 평양 고위층을 만난다.

    “어서 오십시오. 동지.”

    “수고 많으십니다.”

    40대쯤의 사내는 당 조직비서실 소속 과장이다. 이미 평양에서 전화를 하고 온 터라 상석에 앉은 과장이 앞쪽의 조건호와 감찰과장 박명규를 번갈아 보았다. 과장 이름은 강일주, 부부장 전성일의 부하다.

    “말씀드렸지만 정순미 실종 사건 때문에 온 겁니다.”

    조건호와 박명규는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 지부장 조건호는 현역 소장이고 박명규는 중좌지만 하루아침에 목이 잘릴 수가 있다. 감시 대상인 반역자 가족을 도망치게 만든 것은 중죄다. 지금 밖에 대기시킨 담당자 백순철은 총살감이다. 강일주가 다시 말을 잇기도 전에 조건호가 나섰다.

    “동지, 담당자 백순철이 정순미와 공모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백순철은 어젯밤에 정순미와 통화했다고 진술했지만 거짓임을 밝혀냈습니다. 정순미의 휴대전화는 10시 반에 끊겼고 자남산공원 근처의 공터에 버려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보위부 감찰반 추적팀의 성과입니다….”

    “잠깐만요.”

    조건호의 말을 막은 강일주가 먼저 심호흡부터 했다. 말쑥한 양복차림에 흰 얼굴, 손목에는 롤렉스 시계가 육중하게 걸려 있다. 장군님의 하사품이 분명하다.

    “좋습니다. 공모자를 색출했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강일주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둘을 훑어보았다.

    “이 사건은 개성 공장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정순미가 반역자 가족이며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공장 근로자는 물론 남조선 측도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그거야.”

    조건호는 강일주의 말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보았다. 모든 일에는 다 복선이 있는 것이다. 50대 초반으로 소장 계급까지 오르는 동안 얼마나 곡절이 많았겠는가? 공장 측이 모르게 하는 조건으로 책임 추궁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어깨를 편 조건호가 똑바로 강일주를 보았다.

    “알겠습니다. 공장 측이 전혀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오늘 개성 용성 근로자들이 퇴근해 오면 근로자 대표부터 잡아서 심문하려던 계획은 취소다. 조건호가 생기 띤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물론 정순미를 담당한 놈은 반역 공모죄로 처리하겠습니다.”



    오후 6시 35분이 되었을 때 식당 안으로 임승근이 들어섰다. 영등포시장 뒤쪽의 삼겹살 식당 안이다.

    “야, 왜 전번까지 바꾼 거야?”

    털석 앞자리에 앉은 임승근이 묻자 윤기철이 입맛부터 다셨다. 오늘 새 전화를 개통하면서 전번까지 바꾼 것이다. 그러고는 그 전화로 임승근에게 연락을 했다.

    “그 전화를 정순미 줬거든.”

    “뭐라고?”

    머리를 기울인 임승근에게 윤기철이 실토했다. 임승근을 속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이구, 이 자식.”

    어제는 휴대전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술잔을 든 임승근이 윤기철을 노려보았다.

    “그래, 너, 어쩔 거냐?”

    “결심했어.”

    “무엇을?”

    “내가 중국에 갈 거야.”

    숨만 들이켠 임승근에게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그쪽 국경지역에 가서 정순미를 만나야지. 다행히 넘어오면 말야.”

    “…”

    “내일쯤 넘어올지 모르겠어. 아니면 모레쯤일까? 어쨌든 난 모레 중국으로 갈 거야.”

    “…”

    “오늘 비자 신청을 했더니 내일 오후에 나온다는군. 대지급으로, 웃돈을 좀 줬지.”

    “…”

    “회사에는 일주일 휴가를 냈고 국정원에도 연락은 했어. 내 전번 바뀐 것하고 휴가 냈다는 것까지만….”

    “만나서 어쩔 거야?”

    불쑥 임승근이 물었으므로 윤기철이 눈을 치켜떴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윤기철이 뱉듯이 말했다.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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