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순천만과 ‘무진기행’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07-23 09: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 김승옥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순천만 근처의 논.

    “그러면…내기할까요?”“…?”

    “9시 20분 기차라, 내 딱 그 시간까지 용산역으로 달립니다. 타쇼.”

    “…가능할까요?”

    “제때 도착하면, 팁이나 주쇼.”

    “…그럽시다.”



    택시는 탄환처럼 튀어나갔다. 오전 8시 53분, 경기도 능곡역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모든 파탄은 집에서 나오기 전에 ‘커피 한잔 마시고 가지 뭐’ 하는 부주의 때문에 발생했다. 원래 예정은 9시 20분에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익산행 KTX에 무조건 타는 것이었다. 그걸 놓치면 1시간 30분 뒤에나 출발하는 KTX를 타야 하는 상황. 그런데 이게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원래 예정된 기차를 타면 익산에서 금세 출발하는 구례 가는 새마을호를 탈 수 있다. 거기서 또 버스를 타면 오후 1시 30분 전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시각, 나는 그곳에서 강의를 해야만 했다. 이 연쇄 작용에서 이탈하면 강의는 4시 넘어서야 할 수 있게 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믹스 커피 한 모금 마신다는 것이 5분을 소요했고 부랴부랴 버스정류장으로 나갔으나 일산에서 서울 한복판으로 직진 직행하는 좌석버스들은 만차가 되어 무정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거기서 또 10분 쯤 소요한 후, 일단 능곡역으로 갔다. 능곡역에서 공덕역까지 전차를 탄 후, 그곳에서 택시를 탈 예정이었다. 그러나 능곡역에 도착하는 순간 전차 한 대가 들어섰다. 택시 한 대가 보였지만, 우선 전차를 잡기 위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전차는 잠깐 서 있었다. 나는 승강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사이 전차는 매정하게도 출발하고 말았다. 나는 멀어져가는 전차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빛의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용산역, 익명의 공간

    역 앞에는 조금 전에 본 택시가 그대로 서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담배 한 대 피우기 위해 밖에 나와 서 있었다. 그는 한눈에 내 처지를 간파한 터였다. 슬며시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나는 9시 20분 기차를 꼭 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해볼 만한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노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태풍 너구리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흔들거리는 자유로를 광란의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비 탓에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그는 자유로와 올림픽대로와 한강변 산책로를 무섭게 선택하며 약속대로 용산역 앞에 나를 세워줬다. 9시 18분.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2분 안에 플랫폼까지 뛰어가서 KTX를 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어쩌겠는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냈는데 마침 5000원짜리였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서 용산역 안으로 들어갔다. 플랫폼까지 갈 것도 없었다. 구내에 들어서는 순간 9시 21분이 되고 말았다. 나는 구석의 빈 의자를 찾아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갑자기 안도감이 몰려왔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모든 가능성이 좌절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갑자기 이 넓은 용산역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익명의 공간을 동경했는가, 확실치 않다. 지난해 8월, 지방 어느 도시의 모텔에 갇혀 지냈는데, 그 지역의 문화 기관에 관한 ‘정책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근사한 조명에 기이한 냄새를 풍기는, 그 공간에서 며칠씩 머무르면서, 갑자기 내가 그러한 익명의 공간을 지독히도 편애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적 있다. 왜 그랬을까. 이를테면 나는 607호나 304호의 ‘손님’일 때, 부산행 KTX의 8호차 5D 좌석 ‘승객’일 때, 치과 병동의 치주염 환자이거나 혼잡한 은행에서 대기번호 582번 쪽지를 들고 있을 때, 불현듯 마음이 안정되곤 한다.

    페르소나 향한 집착

    인간은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벗어날 수 없다. 집단 속에서 성장하고 교류한다. 일을 하고 여가를 누리고 가족을 구성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자아의 또 다른 측면을 갖게 된다.

    융은 이를 ‘페르소나’라고 했다. 원래 연극이나 영화와 관련된 용어다. 연극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배우가 썼던 가면이 페르소나다. 외적 인격, 곧 사회적 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즉 사회적 가면은 단 하나가 아니다. 사회적 삶은 매우 복잡하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그 과정의 복합적인 전체가 사회적 삶인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은 페르소나를 형성한다. 개인이 외부 세계에 내보이는 이미지, 즉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 내보이는 사회적 모습이다. 융에게서 이 페르소나란 한 개인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체계 또는 그가 사용한다고 생각되는 태도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자아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너무 사랑하고 집착해 동일시할 때 위험한 정신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융은 지적한다. 개인이 사회적 역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자아가 오직 이 사회적 역할만 동일시하면 성격의 다른 측면이 발달하지 못한다고. 페르소나는 일종의 사회적 가면, 즉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역할에 가까운데 이를 완전히 내면화하고 자기 속의 다른 자아를 형성해내지 못하면 이 사회적 가면의 위상, 그 역할의 수준, 사회적 평가 등에 얽매이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구례 버스터미널.

    가령 회사 임원을 생각해보자. 그는 책임과 권한을 쥐고 있다. 그러나 혼자서 차를 타고 귀가할 때, 서재에 앉아서 메모라도 할 때, 가족과 함께 외식이라도 할 때, 그때도 임원으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그만의 독자적인 내면이 있다. 그 내면 공간에 자아가 있을 수 있다. 임원의 사회적 위치, 책임, 권한 등은 그 자신의 내밀한 자아와는 점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임원으로서 위엄과 자부심과 권력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이 온전히 그 개인의 섬세한 자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는 다른 무늬를 띠고 있을 수도 있다. 외로울 수도 있다. 섬세할 수도 있다.

    페르소나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상당한 중요하고도 편리한 기능을 한다. 이것이 없다면 개인은 아주 강심장이 아닌 한, 사회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사회 또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사회적 역할 속에서 서로 관계 맺으면서 공동체가 유지되고 개인도 정신적으로 지탱해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페르소나가 너무 강력해져서 자아와 멀리 떨어져버리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희생당하기 쉽다. 사회적 가면, 그 역할이 강화되면 될수록 페르소나와 자아는 충돌할 수 있다. 어느덧 페르소나가 자아의 영역을 침범해 자아 자체가 되는 수가 있다. 페르소나와 자아가 겹쳐버릴 때, 그의 진정한 자아는 희생당한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사회적 가면에 더 집착하게 돼 그만의 독특한 ‘개인적 삶’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그 임원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 곧 페르소나뿐 아니라 그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자아도 들여다봐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불협화음을 일으킬 경우 사회적으로 성공한 임원이라는 페르소나와 섬세한 자아가 충돌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페르소나와 자아가 적절히 대응하면서 서로를 지켜줘야 하는데 그것이 위태로워질 경우 심각한 정신적 교란을 겪게 된다. 직책이 올라가고 권한이 막강해질수록 자아를 돌아보고 보호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굴 핫바지로 알아, 내가 말이야….” 이런 호승심(好勝心)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는 못한다.

    익명의 공간!

    그래서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꽤 흘렀다. 나는 익산으로 가는 10시 55분 KTX를 타기 위해 무려 18분이나 일찍 어두컴컴한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순천만의 안개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순천 시내.

    순천만!

    이렇게 느낌표를 찍으면서 쓰는 중이다. 나는 지금, 태풍 너구리로 인해 너무 일찍 어둠에 갇혀버린 순천만을 한참이나 헤매다가 도시로 들어와서 어느 모텔에 자리를 잡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게 아침에 커피 한잔 마신다고 허비해버린 5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두 시간이나 늦게 시작한 강의는 6시에나 끝났고, 저녁을 급하게 먹은 후, 구례로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순천터미널에 도착하고 보니, 벌써 7시가 넘어버렸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집어타고 순천만으로 달렸지만, 곧 어두워지고 말았다. 전망대가 있는 생태공원 입장은 어렵게 되어 하는 수 없이 그 옆으로 끝도 없이 뻗어 있는 길을 택해 걸었다. 걷고 또 걷는 사이에 이미 어둠이 순천만을 지배해버렸다. 어떤 길이 어떤 쪽을 지향하는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나는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걷고 또 걸었던 길을 되짚어 걸어 나오니, 아까 탔던 택시가 그대로 서 있었다. 택시 기사는 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터미널로 가시죠.”

    그렇게 해 나는 시내로 들어와 숙소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시 살폈다. 요즘 인터넷 환경에서는 2분 정도 검색하면 이 빛나는 단편의 전체를 다시 읽을 수가 있다. 오늘날 일정 수준의 공민 교육을 마치고 바쁜 일상에도 약간의 독서 생활을 유지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단편소설을 들어서 알고 있으며 읽어서 알고 있는,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본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안개는 강과 호수에 생성된다. 공기 중에 물의 비율이 높을 때, 그 물 분자들이 서로 뭉치면서 구름이 되기도 하고 지상의 낮은 곳에 안개가 되어 자욱하게 끼게 된다. 순천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항아리 모양으로 내륙 깊숙이 밀려들어간 만(灣)이다. 전체 35.5㎢에 달하는 면적이고 3.5㎞의 하류 구간과 2221㏊의 넓은 갯벌, 230㏊의 갈대밭으로 구성된 곳이다. 내륙 깊숙이 밀려들어온 순천만, 그곳의 습지가 안개의 모국이다. 김수용 감독이 영화 ‘안개’로 이 소설을 다룬 적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충남 당진의 갯벌과 김포에서 찍었다. 영화를 찍기 위해 순천에 내려온 김수용 감독은 “순천만의 갈대밭과 넓은 펄이 너무 아름다웠던 까닭”에 촬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만 아름다울 뿐이런가.

    세상에 대한 지독한 환멸! ‘무진기행’을 진공팩에 넣어 끝도 없이 압축하면 결국 이 한마디가 남게 된다. 환멸! 타락한 세상, 부조리한 세상, 천박한 세상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타락하고 부조리하고 천박한 세상에 끼어들어 한 목숨 부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쓰디쓴 환멸! 그것이 ‘무진기행’이다. 소설 속의 ‘무진’은 순천이다. 김승옥의 고향 순천이다. 요즘이야 순천만 갯벌 체험에 생태 여행 그리고 ‘정원 박람회’ 등으로 인해 찾는 사람이 늘었지만 오래전에는 그런 사정이 못 되었다.

    환멸의 세상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경전선의 한 터널.

    특히 1948년 10월 이후 순천은 이른바 ‘여순반란 사건’으로 인해 극도로 위축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반란’이라는 말이 빠지고 ‘여순 사건’으로 호명되고 일부에서는 그 사건 진행 당시 벌어진 일에 주목해 ‘양민 학살’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수준으로 전개되었지만, 오래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소설가 김승옥의 가계 역시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부친이 연루되어 죽어갔다. 그래서 김승옥은 어느 회고 산문에서 이렇게도 썼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대이기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공포심밖에는 없었지만, 그러나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존재란 사실이 절실한 나의 인생 문제가 되어버렸다. 왜 인간은 태어날까? 일단 태어났으면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죽어 없어질 바엔 아예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한편 좌익이다 우익이다 나누어서 서로 죽이는 이유가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설명이다. 생각이 다르면 서로 죽여야 하는 게 인간이란 말인가?”

    이런 뿌리 깊은 상처와 환멸이 그의 소설 속에 내장되어 있다. 특히 단편 ‘건(乾)’은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본 처절하고 환멸스러운 세상에 대한 잔인한 소묘다. 뒤숭숭한 마을, 빨치산 시체, 일찌감치 애늙은이가 된 소년들, 어린 소녀, 그 소녀를 강간하자고 모의하는 동네 형들…. 이런 세계 속에서 소년은 환멸을 익히며 성장하는 것이다. 필사적인 공부, 그것이 그곳을 떠나는 길이었다. 대도시로 탈출해 공부 잘해서 출세하는 것, 그것이 그곳을 완전히 이탈하는 방식이었다.

    김승옥은 천재였다. 서울대 불문과 1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9월 1일부터 서울경제신문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네 칸 시사 만화를 그렸다. 순천에 있는 고향집 번지수를 따서 ‘김이구’라는 필명으로 1961년 2월 14일까지 모두 134회에 걸쳐 시사 만화를 그렸다. 그렇게 하던 대학교 1학년 때 ‘4·19 혁명’을 겪었다. 그때 그는 거리에 서있었다. 이듬해 그는 ‘생명연습’으로 등단했고 1964년에 ‘무진기행’을 썼으며 1965년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탔다. 이때가 겨우 24세였으니 그는 천재였다. 그러나 환멸의 세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순천을 벗어나고자 했던 ‘무진기행’의 주인공은 어찌되었던가. 며칠 고향에 머무르면서 복잡한 일을 겪은 후, 그는 다시 고향 ‘무진’, 곧 순천을 떠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편지를 쓴다. 그런데 찢어버린다.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경전선의 기억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경전선 횡천역(경남 하동군 횡천면).

    나는, 아침 늦게 다시, 순천만으로 가보았다. 월드컵 시즌이었고, 슬프게도 브라질이 독일에 7골이나 내주며 대패한 날이었다. 그 경기를 다 보고 나서, 잠깐 졸다가 급히 일어나 다시 택시를 타고 순천만으로 나갔다. 태풍 너구리로 인해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안개는 없었다. 아침에 몰려왔던 안개들이 다 사라진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어젯밤에 한참이나 걸어 들어갔던 길을 다시 걸었다. 맘먹고 걷는다고 하면 하루 종일 끝도 없이 걸어야만 할 것 같은 길이었다. 나는 중간에 다시 걸어나왔다. 점심 때 출발하는 경전선을 타지 못하면, 진주에 가지 못하고, 거기서 대구로 출발하는 KTX를 타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저녁 일정이 또 헝클어지게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순천만을 빠져나왔다.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태우고 여기까지 왔던 택시가 그대로 서 있었다. 태풍 때문에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택시 기사는 내가 곧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순천역으로 가시죠.”

    나는 일반적인 사회생활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살아왔기 때문에 비교적 일찌감치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26세 때 처음 원고료를 받는 원고를 쓴 뒤로,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여러 분야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지내왔다. 4대 보험료를 내본 일이 없고 갑근세를 내본 일이 없다. 하고 싶은 공부가 너무 많았지만 열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어느 한 분야를 탐독하고 집중해 일가를 이루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 대신,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과 쓰고 싶은 글과 하고 싶은 강의를 자유롭게 하면서 20여 년을 보내왔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적 가면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도 대여섯 개를 번갈아 쓰면서 지내기도 했다. 축구 칼럼을 쓰고 클래식 강의를 하고 최근 벌어진 문화 현상에 대해 TV 인터뷰를 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학위 논문을 위해 난해한 책을 읽고, 다시 브라질 월드컵에 대해 칼럼을 쓰고, 그런 날들이었다. 그래서 익명의 공간을 동경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혼자서 경전선을 타고, 순천에서 진주 사이, 그 작은 역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한 익명의 시간, 익명이 공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작은 역들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옥곡, 진상, 횡천, 북천, 완사…. 그중 몇몇 사진이 기특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러자 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렸다. 구례, 순천에서 찍은 사진도 올렸더니, 댓글이 더 달렸다. 그중 몇몇 글로 인해 오래전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다가 지금은 핀란드에서 인권과 평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깊이 하고 있는 서현수 선생과 댓글로 다시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의 고향이 순천이었다. 그는 내가 올린 사진에 이렇게 글을 달았다.



    “돌아가신 이모님이 오래전 진상면 옥곡리에 사셨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랑 놀러갔던 적이 있지요. 굽이굽이 작은 야산 밭길을 따라가니 마당의 감나무 그루들이 아름다웠던 덕분에 오래된 추억 하나 떠올립니다.”



    어느 음악평론가는 돌아가신 부친을 모셨던 애틋한 마음을 댓글에 남겼다. 나는 마음이 울컥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고교 시절에 언제 어디서나 붙어다녔던 친구 녀석이 댓글을 달았다. 옥곡의 산골짜기에 내려와 산다고 했다. 아! 방금 전 내가 스쳐 지나간 순천과 하동 사이, 어느 산골짜기에 친구 녀석이 있는 것이다. 대구에서 예정된 일만 아니라면 나는 다음 역에서 무조건 내려야만 했다. 익명의 공간은 그러니까 완전히 폐쇄된 것만은 아니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