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얼짱 몰려드는 ‘꿀알바’ 검은손 유혹에 눈물도

‘살아 있는 마네킹’ 피팅모델의 세계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4-12-23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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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욕을 자극하라! 깜찍한 외모, 늘씬한 몸매를 지닌 10~40대 여성이 앞다퉈 인터넷 쇼핑몰로 몰려든다. ‘피팅모델’을 꿈꾸면서. 한 번 촬영에 30만~50만 원, 많게는 주 3회 촬영에 억대 연봉까지 거머쥔다. 인기는 ‘보너스’다.
    얼짱 몰려드는 ‘꿀알바’ 검은손 유혹에 눈물도
    “양허벅지를 붙인다는 생각으로!” “오른다리를 살짝 들어 왼쪽으로 붙이세요.” “몸을 살짝 틀면서 한쪽 다리를 붙여봐요. 그래야 다리가 예쁘게 나와요.” “예쁜 동작 서너 개를 계속해서 잡아주면 연속 촬영으로 갈게요.”

    연이은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사진가의 주문이 숨 가쁘게 쏟아졌다. “아까처럼 다리 크로스 포즈 한 번 더 가고, 오케이! 다음은 다리 풀고 살짝 더 벌려줘도 돼요. 좋아요!” “이제 오른쪽으로 턴(turn)할게요. 접힌 다리 풀면서 정면으로 날 봐요.”

    쉴 틈 없는 지시에 모델이 우왕좌왕하자 답답해진 사진가가 직접 세트 위로 나서 거구를 뒤틀며 시범 자세를 취했다. 10여 분간 촬영이 계속됐고 마침내 사진가의 “오케이!” 소리와 함께 모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부리나케 탈의실로 사라졌다.

    컴컴한 어둠 속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1월 말 오후 8시. 서울 성북구 길음동 주택가의 한 건물 3층에 위치한 사진 스튜디오는 바깥의 고즈넉하고 썰렁한 공기와 달리 열기로 가득했다. 당장 내일 안으로 인터넷 쇼핑몰에 업데이트해야 할 ‘신상(신상품)’ 촬영 스케줄이 촉박하게 잡힌 데다, 촬영 예정 시각이 한 시간 넘게 지연된 탓에 업체 직원을 비롯한 촬영 스태프의 조급한 마음이 더해져 현장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이후로도 한참 계속된 촬영은 돌발 상황의 연속. 처음부터 하이힐 사이즈가 맞지 않아 힘들어하던 모델이 더 버티지 못하자 직원이 응급처방으로 휴지를 뭉쳐 구두 속에 넣었다. 모델은 치마의 허리 사이즈가 커 허리춤을 감싸 쥐고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피팅모델 5대 여신’

    이날 4벌의 미니스커트와 20여 켤레의 스타킹을 갈아 신으며 밤늦게까지 고된 촬영을 이어간 20대 초반의 팔등신 미녀는 최근 젊은 여성 사이에 인기 상종가를 달리는 ‘피팅모델(Fitting Model).’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과 구두 등 패션 상품을 돋보이게 해줌으로써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게 그들의 일. 하지만 원래 피팅모델은 패션디자이너 또는 의류제조업자가 마네킹 대신 사람에게 새로 만든 옷을 입혀보고 착용감과 핏(fit)감, 외관 등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돼 ‘살아 있는 마네킹’으로 불려왔다.

    의류회사 직원 또는 아르바이트로 소수에게만 주어지던 피팅모델 일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2000년대 중반 인터넷 쇼핑몰이 급증하면서다. 2006년 온라인 피팅모델 중개 사이트 ‘피팅모델닷컴’을 설립한 구민수 실장은 “2000년대 초 인터넷 쇼핑몰은 제품만 촬영해 사이트에 올리는 식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착용한 모습을 소비자가 가늠할 수 없으니 쇼핑몰 대표가 직접 나서거나 지인 등에게 옷을 입혀 촬영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 쇼핑몰이 급증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전문 피팅모델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반 의류 쇼핑몰에서 시작된 피팅모델의 수요는 갈수록 영역이 확장되면서 속옷, 임부복, 스타킹, 레깅스 외에 신발, 액세서리, 안경, 가발, 악기, 인형 등 광범위해졌다. 기존 전문 모델을 주로 활용하던 웨딩업체 카탈로그 촬영이나 쇼핑몰 사이트 메인 모델 등 광고 부문에서도 피팅모델이 활약하면서 이들의 인기는 갈수록 치솟는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5대 얼짱’이란 말이 회자됐듯, 최근엔 ‘피팅모델 5대 여신’이 대중의 관심을 끌 만큼 미모에 늘씬한 몸매, 깜찍한 매력을 두루 갖춘 피팅모델들이 인기인 대열에 합류했다.

    ‘모델’의 특성상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연령층은 단연 20대다. 남녀 비율이 1대 9일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반 의류 촬영에서 20~25세가 전체 피팅모델의 60%를 차지한다. 다음이 20대 후반~30대 초반인데, 이들은 주로 ‘미시족’을 타깃으로 한 의류 촬영에 투입된다. 40대 여성도 피팅모델로 인기를 누리는데 주로 ‘마담’ 분위기의 의류 촬영이나 홈쇼핑 등에 투입된다. 중년 나이에 외모나 몸매 등에서 피팅모델 일을 소화할 수 있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희소성이 있다. 피팅모델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높아지면서 최근엔 10대까지 피팅모델에 뛰어든다.

    163~167㎝, 45~48㎏

    아르바이트 및 취업 중개 사이트엔 피팅모델이 되려는 젊은 여성과 이들을 찾는 쇼핑몰 업체의 구인·구직 글이 이어진다. ‘민○○, 여, 21세, 피팅모델 지원합니다. 신장 164cm, 몸무게 45kg, 신발 사이즈 235mm. 이제 막 시작한 초보 모델로 경력은 화려하지 않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청순, 귀염, 도도, 섹시한 매력의 소유자랍니다’ ‘○○○ 쇼핑몰에서 참신한 피팅모델 구합니다. 월평균 2회 정도 촬영 예정이고요. 키 160~165cm, 몸무게 42~45kg

    의 마른 하체형 모델을 구합니다. 저희 옷 콘셉트에 잘 맞고 열심히 해주시면 메인 모델을 할 기회도 있습니다. 평소 사진 찍기 좋아하고 밝은 표정으로 장시간 일할 수 있는 분 많이 지원해주세요.’

    피팅모델이 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첫째는 쇼핑몰을 운영하는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하는 경우다. 둘째는 자신이 직접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피팅모델로 나서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예가 김준희, 이혜영 등 연예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쇼핑몰이다. 이들은 사진 콘셉트부터 장소 헌팅 등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스스로 기획해서 사진 촬영을 한다. 또 최근 피팅모델 전문 중개 사이트나 섭외를 대행하는 에이전시, 피팅모델 카페 등이 인터넷에 많이 생기면서 이곳에 사진을 포함한 프로필을 등록하고 업체 연락을 기다리는 방법이 있다. 이 밖에 아르바이트나 구인·구직 사이트에 직접 글을 올리기도 한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거나 의류회사 취직을 염두에 두고 피팅모델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대학 졸업반인 김수민(23) 씨는 패션디자인에 관심이 많지만 이와는 거리가 먼 전공 때문에 경험 삼아 얼마 전 피팅모델에 지원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린 구직 신청서를 보면 ‘희망직종-디자인실 피팅모델 및 사무보조, 신체 사이즈-키 170cm에 55사이즈, 피팅모델을 통해 패션 관련 정보를 습득하고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채용도 좋습니다’라고 적었다. 김씨는 “언니가 패션디자이너로 일해 그 업체의 피팅모델을 하려고 했는데 나보다 더 마른 모델을 원해 실패했다. 평소 키 크고 예쁘단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곧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다. 피팅모델 일은 언니를 통해 알게 됐다”고 했다.

    피팅모델은 정해진 자격 기준이 없고 신장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마음만 있다면 도전할 수 있는 분야다. 하지만 쇼핑몰 업체들이 선호하는 기준은 있다. 최적의 기준은 여성의 경우 163~167cm에 45~48kg이다. 일반 여성의류 사이즈 중 가장 잘나가는 55사이즈를 무난히 소화할 수 있는 몸매면 좋고, 실물보다 사진이 약간 더 통통하게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가장 작은 44사이즈를 소화할 수 있어도 된다. 하지만 첫눈에 일반인보다 예쁘고 늘씬해보여야 선호한다.

    ‘초짜’도 최고 시급?

    피팅모델 에이전시 신단주기획 김기태 실장은 “업체는 공통적으로 평균 키에 가장 많이 팔리는 사이즈의 옷들을 찍어서 올린다. 여성은 44~55사이즈, 남성은 95~100사이즈다. 그래서 피팅모델로는 키 큰 사람을 되레 꺼린다. 소비자가 보고 ‘나도 입을 수 있겠다’는 동질감을 가져야 매출이 좋아지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김 실장은 또 “피팅모델은 패션 전문 모델에 비해 포즈의 다양성이 없다. 대신 잘 팔리는 표정과 포즈가 있다. 깜찍하고 귀여운 포즈, 뒷짐 지고 앞으로 살짝 구부리는 자세 등인데 이는 패션모델에게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키는 크지 않지만 몸매 비율이 좋고 유연하면서 성격이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자신감 있는 사람은 피팅모델을 하기에 좋다.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4년 넘게 쇼핑몰 업체 사진을 찍어온 나르젠스튜디오 포토그래퍼 염진규 실장은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피팅모델을 하면 포즈나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아무리 예뻐도 의류 콘셉트와 피팅모델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져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며 “사람마다 자신의 이미지에 맞는 옷이 따로 있기 때문에 어떤 의상을 선택할지가 중요하다. 사진가와 피팅모델의 호흡도 중요한데, 서로 호흡이 안 맞으면 쓸 만한 사진이 별로 안 나온다”고 말했다.

    입문 과정이 비교적 쉽고 문호가 넓다보니 아르바이트나 투잡 등으로 피팅모델에 나서는 여성이 적지 않다. 그래선지 입문 과정을 보면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예쁘단 소리를 많이 들었다”는 얘기가 많다.

    경력 3년차 민송이(27) 씨의 원래 꿈은 패션모델. 하지만 165㎝의 작은 키가 받쳐주지 않았다. 그는 “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림은 혼자 하는 작업이라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도 별로 없고 답답했다. 지금 뭐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교류도 없이 청춘을 낭비하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어릴 때부터 ‘몸매 좋다’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커서도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옷을 차려입고 놀러 나가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좋았다. 남한테 관심 받는 걸 좋아하다보니 피팅모델을 하게 됐다. 촬영하면서 다양한 옷을 갈아입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얼짱 몰려드는 ‘꿀알바’ 검은손 유혹에 눈물도

    피팅모델의 비치웨어 촬영(왼쪽). 피팅모델 한소망 씨의 의류 상품 촬영.

    20대 젊은 여성이 피팅모델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적지 않은 수입 때문. 12월 4일 아르바이트 전문 구인·구직 포털 사이트 ‘알바몬’이 밝힌 알바 급여 통계 애플리케이션 ‘알바비책’의 브랜드별 급여 순위에 따른 ‘업·직종별 월간 평균 시급’에 따르면, 전체 아르바이트 업·직종 중 피팅모델의 시간당 급여가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6개월간 평균 제시 급여가 시간당 1만4879원이었다. 최저임금(시급 5210원)의 2.9배에 해당한다. 대학생과 20대 직장여성 사이에 피팅모델이 ‘황제 알바’ ‘꿀 알바’라고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업계에선 피팅모델의 최고 시급마저 “경험이 전무한 초짜나 받는 금액”이라고 잘라 말한다.

    한 번 촬영에 50만 원

    의류, 가방, 속옷 등의 모델로 활동해온 민송이 씨는 “5~6시간 촬영 기준으로 ‘데이페이(day pay)’를 많게는 50만 원까지 받는다. 속옷의 경우 노출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 100만 원을 받기도 한다. 나처럼 경력이 3년차쯤 되고 웬만큼 잘나가는 친구들은 월평균 300만~400만 원은 번다”고 했다. 김기태 실장은 “프리랜서 개념으로 일하는 피팅모델 속성상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평균적인 피팅모델은 주 1회 고정적인 일자리가 있고 3~4시간 촬영으로 버는 돈이 10만~20만 원”이라며 “10명 중 한두 명은 피팅모델을 정말 자기 업(業)으로 삼아 열심히 한다. 월 10회 이상 의류 촬영 외에 전시행사 같은 스케줄을 잡아 월정표를 짜서 일할 정도다. 전시행사에 1회 나가면 15만 원 정도 버는데, 그런 친구들은 월수입이 300만 원을 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구민수 실장에 따르면 피팅모델닷컴 회원은 현재 2만 명가량. 꾸준히 활동하는 사람은 10%쯤 되고 그중에서도 이른바 ‘잘나간다’는 사람은 1%인 200명쯤이다. 이른바 ‘1급 모델’인 경우 시급이 아닌 데이페이로 받는 경우가 많은데 경력이 4~5년차면 보통 한 번 촬영에 30만~50만 원을 번다. 구 실장의 설명이다. “하루 5시간 촬영에 200만 원 버는 모델들도 있다. 잘나가는 피팅모델은 쇼핑몰 업체와 전속계약을 맺기도 하는데 그럴 땐 주로 연봉으로 받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주 3회 촬영 기준으로 억대를 버는 경우도 있다. 남자 대학생들이 하루 종일 공사판에서 일하고 7만 원 정도 버는 것과 비교하면 프리랜서이자 아르바이트로 하는 피팅모델 보수는 엄청난 편이다.”

    경력 1년차 피팅모델 한소망(25) 씨는 원래 일반 직장에 다녔다. 그가 피팅모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 우연이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한 한씨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 열심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는데, 그것을 보고 쇼핑몰에서 연락을 해왔다. 그의 얘기다. “그전까지 피팅모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는데 쇼핑몰 측의 연락을 받고 자세히 알아봤다. 첫 촬영을 나갔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3시까지 촬영하고 데이페이로 25만 원을 받았다. 당시 회사 월급이 120만 원이었는데 하루 잠깐 일하고 엄청난 돈을 받은 거다. 인턴으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고용에 불안한 점이 있었고 회사 일도 힘들어 첫 촬영 마치고 바로 직장을 그만뒀다.”

    ‘젊음’을 사진으로 남긴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 피팅모델로 나선 경력 4년의 김은지(22) 씨는 “인터넷의 모델 구인·구직 카페에 사진과 함께 프로필을 올리고 기다렸다. 그 뒤 얼마 안 돼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껏 레깅스, 구두, 속옷, 수영복, 액세서리 등의 제품을 촬영했다. 보수도 괜찮지만 신상을 제일 먼저 착용해보는 것, 젊을 때 예쁜 사진을 많이 찍어서 남길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가 피팅모델 일의 매력”이라고 했다.

    높은 보수와 까다롭지 않은 진입장벽으로 웬만큼 외모만 받쳐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일이 피팅모델이지만, 고충도 적지 않다.

    “촬영을 위해 스타킹 하나를 갈아 신으려면 10분이 걸릴 정도로 고된 게 피팅모델 일이다.” 압박스타킹 전문 쇼핑몰을 운영하는 ‘도도시크릿’ 강철호 사장은 “피팅모델이나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에 구인 광고를 내면 한 번에 40~50명이 이력서를 보내온다. 그중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와 신체조건을 갖춘 2~3명을 1차 합격자로 뽑은 뒤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최종합격자 한 명을 결정한다”고 했다.

    스타킹뿐만 아니라 일반 의류 촬영 때 2~3시간 동안 20~30벌의 옷을 갈아입고 일일이 그에 맞는 포즈를 취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김은지 씨는 “남들은 꿀 알바, 꿀 직업이라고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들다. 야외촬영이 잡히면 적당한 촬영 포인트를 찾느라 많이 걸어야 하고, 여름에도 거의 쉬는 시간 없이 6시간이나 촬영을 강행해야 할 때가 있다. 처음엔 행인들이 쳐다보는 것도 불편했다”고 말했다.

    “핏을 돋보이게 하려고 영하의 날씨에 겉옷만 입은 채 촬영해야 할 땐 정말 참기 힘들지만 솔직히 이 일이 다른 직업에 비해 힘들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근데 업체들이 페이를 말도 안 되게 깎는 경우엔 정말 짜증난다. 처음부터 금액을 깎자고 하면 아예 일을 안 하면 되는데 촬영이 끝난 뒤 약속한 금액보다 적게 줄 때가 있다. 어떤 업체는 원래 금액의 3분의 1만 주기에 일 시작 전에 문자메시지로 주고받은 내용을 증거자료로 제시해 다 받아낸 적도 있다.”

    10년차 경력인 변서은(24) 씨의 말이다.

    구직을 위해 자신의 사진과 프로필을 올리고 쇼핑몰을 통해 사진이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노출되다보니 때로 황당한 일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연지(가명·21) 씨는 “출사 나가는데 모델 좀 해달라는 사진동호회 연락을 받고 나간 적이 있다. 분명히 노출이 없다고 했는데 현장에서 촬영하면서 점점 심하게 노출을 요구해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인터넷 프로필 사진 보고 악성댓글을 다는 경우도 있고, 음란 카페에 자기들 마음대로 내 사진을 올려놓고 같이 일한다며 소문을 낸 적도 있다. 그런 일 때문에 경찰에 신고한 모델들도 있다”고 털어놨다.

    다른 피팅모델 최지윤(가명·23) 씨도 “피팅모델을 구한다고 해서 회사로 찾아갔더니 문패도 없었다. 알고 보니 키스방이었다. 피팅모델 미팅을 하자고 해서 나갔더니 ‘너무 예쁜데 만나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중년 남자도 있었다. 새벽에 전화해 스타킹 신은 사진과 발 사진을 보내달라는 경우도 있었다. 쇼핑몰 업체를 빙자했지만 거짓이었다”고 푸념했다.

    사기에 성폭행까지

    실제로 2013년 3월 쇼핑몰 사이트를 운영하던 김모(54) 씨는 피팅모델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온 4명의 20대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 및 성추행을 저질렀고 고용된 여성 모델들에게 약속한 출연료 수백만 원도 주지 않아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됐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피팅모델들은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프로필 사진을 보고 ‘낮엔 쇼핑몰 모델이고 저녁엔 룸살롱 나가냐?’ ‘너 아가씨지, 성매매하냐?’라는 댓글을 단 남자도 있었다. 일 핑계로 밤늦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오거나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척하면서 ‘밥 먹자’‘차 마시자’며 집적대는 사람들도 있다. 일이 별로 없어 힘들어하는 친구들 중엔 거기에 응하는 경우도 있다. 유혹에 조심해야 한다.”

    또 다른 피팅모델 이혜미(가명·24)씨의 토로다.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도 매몰차게 거절하거나 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인터넷 중개 사이트나 모델 카페처럼 구인·구직을 연결하는 사이트의 경우 대부분 ‘불량회원’ ‘불량업체’를 신고할 수 있는 게시판이 있어서다. 혹여 상대방의 불만을 사서 리스트에 오르면 일이 끊길 염려가 있어 섣불리 대응하기 힘든 것이다.

    쇼핑몰 업체들이 피팅모델을 쓰는 이유는 제품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제품 판매에 도움이 안 되는 모델은 언제든 교체될 수밖에 없다. 매출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피팅모델의 힘든 점 중 하나다. 특히 전속모델의 경우 일이 지속적이고 수입이 높아 안정적이지만 단발성 모델에 비해 매출에 대한 압박이 훨씬 크다.

    한소망 씨는 첫 촬영과 함께 한 쇼핑몰 업체와 1년 전속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나기도 전 타 업체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자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한씨는 “전속계약을 맺으면 계약기간에는 타 업체와 일을 못 하지만 따로 계약금이 있는 건 아니다. 위약금 부담도 없어 회사와 얘기가 잘되면 계약기간 중에도 얼마든지 업체를 옮길 수 있다. 매출이 생각보다 잘 안 나와 엄청 스트레스를 받을 때 페이를 두 배로 올려주겠다는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회사를 옮겼다”고 했다. 현재 한씨는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피팅모델 에이전시 전속모델 면접을 앞둔 김은지 씨는 “일이 부담은 되지만 일단 에이전시에 소속되면 피팅모델뿐 아니라 쇼핑몰 광고도 들어오고 한 달에 1500만 원은 벌 수 있다고 들었다. 내일 면접 보는데 꼭 붙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직업 전망은 밝아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인터넷 쇼핑몰이 앞다퉈 중국 등 해외로 진출하면서 피팅모델의 직업 전망은 밝은 편이다. 우리나라 피팅모델의 표정과 포즈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면서 중국 현지 업체들이 국내 피팅모델들을 현지로 초청해 촬영하거나 직접 국내로 들어와 사진 스튜디오를 빌려 촬영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 경우 시급은 8만~9만 원대로 높다. 김기태 실장은 “기본적인 외모와 몸매를 갖추고 열심히 하면 월 300만 원은 번다. 20대 초·중반에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그만큼 돈 벌긴 쉽지 않다”면서도 “수입이 괜찮은 반면 누가 봐도 피팅모델로 ‘최고’라고 할 만한 객관적 기준이 없고 전문화가 안 돼 직업으로서 불안정한 면도 있다. 10명 중 6명은 수입이 들쑥날쑥해 힘들어 한다”고 덧붙였다.

    피팅모델 일은 한창 예쁘고 젊을 때 몇 년 잠깐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앞날을 염두에 두고 되도록 다른 일과 연계하는 게 좋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충고한다. 그래선지 피팅모델 중엔 미래를 내다보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가 많다.

    민송이 씨는 2014년 1월 ‘더위시’라는 브랜드로 자신의 쇼핑몰(블로그)을 열었다. 10대 때부터 피팅모델을 한 변서은 씨는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피팅모델 경험이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됐다”는 변씨는 “훌륭한 패션디자이너가 되려면 철학과 건축을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유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피팅모델로 좀 더 경험을 쌓겠다”는 한소망 씨의 최종 꿈은 의류회사 최고경영자(CEO)다. 반면 연예계로 영역 확장을 노리는 민씨는 “그동안 바쁜 피팅모델 스케줄로 인해 중단했던 연기 공부를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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