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치 시절 선수 스카우트하면서 ‘바닥’ 배웠다
- 이상민, 문경은? 적장들과는 밥도 같이 안 먹어
- 역대 베스트 5는 허재 이충희 서장훈 김주성 신동찬
유 감독은 역대 2번째로 2년 연속 팀을 챔피언에 올렸으며 개인 통산 4회 우승을 달성해 최다 우승 감독이 됐다.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2010년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 은메달,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획득했다. 1999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현역 최장수 및 최다승 감독이다. 역대 감독 최초로 통산 500승 달성을 눈앞에 뒀다.
야구계에 ‘야신’ 김성근이 있다면, 농구계에는 ‘농신’ 유재학이 있다고 할 만큼 그의 위상은 실로 대단하다. 2014~2015년 시즌에도 좀처럼 1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유 감독을 12월 3일 울산 모비스 체육관에서 만났다.
▼ 시즌 전 미디어데이 때 “6강 플레이오프만 진출해도 성공”이라고 말했는데, 엄살을 너무 부린 게 아닌가. 시즌 초 살짝 불안했지만 빠르게 제자리를 잡았다.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농구월드컵과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을 맡는 바람에 5개월 넘게 내가 팀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외국인 선수를 뽑고 선수들 전지훈련을 시키며 시즌을 준비하는 동안 감독은 대표팀을 위해 존재했기에 올 시즌 전략을 완성하는 부분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많았다. 그런데 우리 팀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해준다. 주전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진 상태에서 백업 멤버, 젊은 선수들이 제몫을 다한다. 고마울 수밖에 없다.”
팀의 중심을 맡은 양동근마저 대표팀에 차출되면서 모비스는 벤치와 코트에서 전술의 핵심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창원 LG와의 시즌 개막전을 1점 차 패배로 시작했다. 초반 5경기 성적이 3승 2패였으나 이후 11연승을 내달렸다.
우승으로 이끈 기운
▼ 감독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식스맨 위주로 구성한 선수단이 존스컵에 출전해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2013년까지만 해도 존스컵에 출전하는 팀들이 대단한 실력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계선수권대회 등으로 1.5군이 주로 출전했고, 그런 가운데 모비스가 우승을 차지한 터라 실력으로 이겼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팀은 외국인 선수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백업 멤버였고, 달랑 7명으로 선수단을 구성한 팀이었다. 7명이 10일 동안 9경기를 치렀다. 살인적인 일정을 극복하고 우승했다. 평소 주전으로 뛰지 못하던 선수들이 이뤄낸 성과라 소식을 듣고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 2014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는다면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 아닐까.
“그렇다. 대표팀을 맡은 기간에 힘든 일을 많이 겪어 앞으로 대표팀 감독은 절대 맡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은 그 같은 고생에 대한 보답이었다. 금메달 덕분에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은 김종규, 오세근, 김선형, 이종현이 열심히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열심히 뛴 선수들이 있다. 양동근, 조성민, 양희종, 김주성이다. 고참들이 죽기 살기로 하니까 후배들이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대표팀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베테랑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다.”
▼ 아시안게임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예상했나.
“선수들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과연 금메달 획득이 가능할까 싶었다. 우승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출전국과 비교했을 때 전력 면에서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금메달은 실력과 노력 외에 운도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우승으로 이끄는 어떤 기운이 대표팀에 존재했던 것 같다.”
▼ 대표팀을 이끌며 여러 차례 고비를 맞았을 텐데,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
“김민구가 음주운전 사고로 빠질 때만 해도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런데 연습 게임을 시작하면서부터 민구의 공백이 느껴졌다. 그때 ‘아, 이게 크구나’ 싶었다. 선수의 인생을 생각하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일었고, 우리가 금메달까지 목에 걸면서 그 마음이 더 깊어졌다.
그다음으로 힘든 일이 훈련 과정이었다. 훈련 스케줄이 나오면 선수단 모두가 계획한 대로 하나둘씩 단계를 거쳐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선수촌 생활이 지루해 선수들이 힘들어 하다보니 선수단 전체가 처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외국인 선수 귀화가 정답”
▼ 2013년 8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대만을 꺾고 16년 만에 농구월드컵 출전을 확정 지은 후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주장했다. 물론 현실로 이뤄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시아권 팀들이 귀화 선수를 대표팀에 합류시키는 것이 보편화해 있다는 것을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치르며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농구의 고질적 약점인 높이와 파워를 해결하려면 외국인 선수의 귀화가 정답이었다. 그러나 현 방열 농구협회장 이전의 회장단 및 관계자들은 귀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귀화 선수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또한 언론에서 우리가 외국 팀과 평가전을 많이 치르지 않는 것과 관련해 문제 제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다고 그런 평가전이 꾸려지는 게 아니다. 행정은 협회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열 회장이 부임한 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급조한 느낌이 들지만, 국내에서 외국 팀을 초청해 국제대회도 치렀다. 뉴질랜드로 전지훈련을 가 뉴질랜드 대표팀을 초청해 경기를 치렀다. 그런 경험이 농구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 2014년 8월 참가한 스페인 농구월드컵에서 5전 전패의 아픔을 맛봤다. 강팀과의 대결을 통해 한국 농구의 현실을 절감한 선수 중 일부가 운동을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니냐며 좌절했다는 얘기도 들리더라.
“결과는 참담했지만, 그 대회의 경험은 코칭스태프와 선수 모두에게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언론에서 ‘아시안게임을 위한 전초전’이란 표현을 쓰더라. 결단식을 앞두고 우리와 같은 조에 속한 앙골라, 멕시코의 경기 영상을 보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농구월드컵에 올인하는데 우린 아시안게임 전초전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솔직히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농구월드컵 출전을 아시안게임을 위한 경험 쌓기라든지 전초전으로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선수들과 ‘꼴찌를 하더라도 세계무대에 섰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배운다는 자세로 뛰자’고 약속했다. 아시안게임은 생각하지 말고 월드컵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KBL도 거친 몸싸움 허용해야”
▼ 농구월드컵을 통해 얻은 성과가 있다면.
“세계 농구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는 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만 성적에선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외국 팀과 맞붙을 때 전반전까지 잘하다 후반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잦다. 이유가 뭘까. 몸싸움이다. 체격이 좋은 선수들과의 몸싸움에 대한 연습과 준비가 덜 돼 있다보니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상대 팀 선수들은 늘 그런 상황에서 훈련하고 게임도 치르지만, 우리는 프로농구연맹(KBL) 룰에 의해 몸싸움을 많이 허용하는 경기를 못 하다보니 국제대회에서 상대 선수와 부딪치면서 뛰는 데 부담을 갖는다. 5전 전패를 하며 비참함을 곱씹은 부분이 아시안게임 때 효과를 봤다. 어느 팀과 맞붙어도 선수들이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 아시안게임에선 전승으로 퍼펙트 우승을 달성했다.
“가장 인상적인 경기가 필리핀전과 결승에서 붙은 이란전이었는데, 이란 전은 준비한 대로 경기가 흘러간 반면 필리전은 경기 내내 변수가 많았다. 슛이 그런 식으로 들어간 것은 한마디로 ‘미친 득점’이었다. 필리핀전을 치르면서 경기를 지배하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한국은 필리핀의 빠르면서도 조직적인 플레이에 고전했다. 3점 슛만 16개를 허용하며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2쿼터까지 44-51로 뒤졌고 3쿼터에서는 전의를 상실한 모습도 보였지만, 맹추격에 나섰다. 문태종이 종료 5분 35초를 남기고 2득점에 성공해 84-82로 전세를 뒤집었고 88-89로 뒤지던 상황에서 경기 종료 59.4초를 남기고 양희종이 3점 슛을 꽂으며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 소속팀에 5개월 넘게 자리를 비웠다. 감독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선수들이 훈련을 잘 소화한 것 같다.
“난 선수들이 이렇게 잘해줄지 몰랐다. 내가 없는 사이에 농구가 많이 늘었다. 김재훈 코치를 비롯한 코칭스태프가 비(非) 시즌 동안 내가 주문한 숙제를 완벽하게 해놓았다. 시스템을 다 만들어놓았기에 주어진 대로 숙제만 하면 됐지만, 코치들 처지에선 꽤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대표팀 차출로 팀을 나온 양동근의 공백은 내가 없는 것보다 더 컸을 텐데 그 부분도 잘 대응한 듯하다.”
▼ 올 시즌 11연승을 달리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펼쳐왔다. 비결이 뭔가.
“챔피언이 되려면 여러 가지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올 시즌은 운이 따르는 편이기도 하다. 연승 중에 패할 뻔한 경기가 있었는데, 상대 팀의 주요 선수가 부상당하면서 분위기가 우리한테 넘어온 적도 몇 번 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늘 불만족스럽다. 우리가 잘해서 이긴 게 많지 않아서다. 다른 해와는 달리 올 시즌은 팀마다 연패도 많고 연승도 많다. 그만큼 기복이 심하다. 다른 팀의 준비 부족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 외국인 선수를 다루는 남다른 노하우가 있나.
“선발할 때 인성부터 살펴본다. 그 다음에 우리 팀에 필요한 스타일의 선수인지 파악한다. 득점을 많이 하는 선수보다 팀에 힘을 보태주는 선수를 좋아한다. 즉 리바운드, 수비, 블록 등에서 도움을 주는 선수를 좋아한다. 훈련할 때도 그런 쪽에 중점을 둔다.”
▼ 지금까지 인연 맺은 외국인 선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아무래도 파괴력에서 특출한 실력을 뽐낸 브라이언 던스톤과 다재다능한 재능을 선보인 크리스 윌리엄스, 그리고 현재 모비스에서 3시즌 동안 최고의 활약을 보이는 라틀리프를 꼽고 싶다. 이 세 선수는 화려한 기술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데서 다른 선수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고, 이들이 존재했기에 우승이 가능했다. 특히 라틀리프는 8월 대만에서 열린 존스컵에도 출전해 대회 MVP에 오르며 팀 우승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유재학 농구=수비 농구”
12월 10일 울산 모비스는 부산 kt와 대결을 펼쳤다. 그런데 경기를 앞두고 라틀리프의 결장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오전 갑자기 심한 장염을 호소한 바람에 출전 명단에서 제외한 것. 라틀리프는 유니폼을 챙기지 않고 경기장에 왔는데, 3쿼터까지 kt와 51-51로 접전이 이어지자 출전 의사를 밝혔다. 유니폼이 문제였다. 구단 관계자가 기지를 발휘해 체육관 복도에 전시한 유니폼 중 라틀리프 것을 떼어내 입혔다.
라틀리프는 4쿼터 초반 출전해 승리(70-67)를 이끌었다. 8분 동안 4득점, 3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존재감만으로도 kt 선수들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모비스는 이날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가장 먼저 20승(4패) 고지에 올랐다.
▼ ‘유재학 농구’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다. 시스템 농구, 압박 농구 등 여러 해석이 나오는데, 스스로는 어떤 스타일의 농구를 구사한다고 생각하나.
“유재학 농구는 수비 농구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가진 기량으로는 공격 농구를 할 수 없다. 과거 우리가 선수로 뛸 때보다 지금 선수들의 기량이 많이 떨어진다. 특히 외국인 선수가 프로에 합류하면서 공격은 외국인 선수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공격은 기량으로 하지만 수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난 수비 농구를 택했고,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들에게 수비 능력을 갖추게 하려고 노력했다.
수비는 훈련하면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다만 스텝 같은 기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선수들은 어린 시절 슛하는 법만 배운다. 입시를 위한 농구를 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기 전, 즉 유소년이나 중·고등학생 때는 한국 선수들이 어느 국제대회에 나가도 경쟁할 만하다. 요령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성인이 돼 프로에 들어가면 외국 선수들과 기량 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
감독직에서 은퇴하면 유소년 농구를 위해 일하고 싶다. 성인이 된 후 스텝부터 다시 배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면 어릴 적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 한국 농구의 미래를 위해 여력을 바치는 게 또 다른 목표다.”
▼ 28세에 은퇴했다. 은퇴 후 연세대 코치로 최희암 감독 밑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한때 잘나가는 선수 아니었나. 코치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4년 동안 모교에서 코치를 하면서 ‘지도자=고생’이란 사실을 체득했다. 당시엔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스카우트였다. 스카우트는 사람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고등학교 감독과 식사하러 가면 내가 그 감독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고, 그 감독의 가방을 들고 다녔다. 선수였을 때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던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한 마음을 나타냈다. 모욕을 줘도 꾹 참고 감당해야 했다. 스카우트할 선수가 행여 변심할까봐 몇 날 며칠을 선수 집 앞에서 감시한 적도 있다. 코치 하면서 바닥을 배운 것이다.”
유재학(오른쪽) 감독은 독한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 1997년 프로 출범 원년 대우증권(현 전자랜드) 코치를 맡고 이듬해 인천 대우(현 전자랜드) 지휘봉을 잡으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신세기, SK, 전자랜드를 거쳐 2004~2005년 시즌부터 모비스를 이끌고 있다. 1998~1999년 시즌, 그러니까 34세의 나이에 감독이 됐는데, 당시로서는 최연소 감독이었다.
“선수 생활을 일찍 끝냈으니 코치, 감독도 일찍 시작한 것이다. 당시 힘들었던 일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인천 신세기 빅스 시절 6강 플레이오프에는 종종 들었지만, 4강 플레이오프는 딱 한 번이었고, 꼴찌도 한 차례 기록했다. 혼자 울기도 했고, 그만두려고 한 적도 몇 번 있다. 어떻게 해서든 성적을 올리려고 하루 4번씩 훈련시키며 직접 가르쳤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니 자신감은 떨어지고 회의감만 엄습했다. 성적이 좋지 않아 외출도 잘 안 했다.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농구만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리 팀이 살아날 수 있을지만 연구했다.”
▼ 구단에 사직서를 낸 적도 있나.
“사직서를 내기 전에 구단에서 나를 내보내려 했다.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구단 관계자가 주도해 나를 쫓아내려다가 고위층에서 사유가 타당하지 않다며 무산시킨 일도 있다. 당시 구단 관계자는 내가 학벌 갖고 장난을 쳤다고 모함했다.
대우증권이 창단됐을 때는 연세대 출신이 주축을 이뤘고, 오리온스는 고려대 출신이 팀의 중심이었다. 연세대 출신 선수나 코치를 직접 뽑은 게 아니었는데, 내가 주도했다며 모함을 했다. 팀 성적이 꼴찌였으니 누군가 책임져야 했고, 사무국에선 그 책임을 내게 씌우려다 ‘연세대 출신들로 장난을 쳤다’고 고위층에 보고한 것이다.
그만둘 생각으로 인사하러 올라갔더니 구단주가 물어보더라.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그래서 ‘성적을 못 냈으니 감독이 물러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사유로 물러나야 한다면 억울하다. 난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구단주는 ‘유 감독을 믿는다. 그러니 팀을 일으켜달라’며 손을 잡아줬다. 신세기 빅스에서 SK 빅스로 넘어가면서 팀 성적이 좋아졌다. SK 빅스가 다시 전자랜드로 팀명을 바꿨다. 2004년 4강 플레이오프에 진입한 후 팀과의 계약이 끝났는데, 그때 울산 모비스에서 연락이 왔다.”
▼ 울산 모비스 사령탑에 부임할 때만 해도 팀 성적이 꼴찌였다. 대부분의 지도자가 꼴찌 팀을 맡는 것에 부담을 가질 텐데 왜 이 팀을 맡았나.
“너무 오랫동안 한 팀에 머무르다보니 점점 정체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됐는데 때마침 모비스에서 제안이 온 것이다. 꼴찌 팀이니까 더는 내려갈 데가 없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 색깔을 제대로 입힐 수 있는 팀이라는 생각에 의욕이 넘쳤다.
모든 걸 바꿨다. 선수도 바꾸고, 팀 색깔도 바꾸고. 당시 단장께서 내게 많은 권한을 주셨다. 간섭도 하지 않았다. 성적이 안 좋아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 신뢰가 큰 자극과 용기를 줬다. 2004년 부임 후 지금까지 구단주가 다섯 번 바뀌었고 단장이 네 번 교체됐는데 성적과 관련해 이러쿵저러쿵한 분이 없다.”
▼ 2005~2006년 시즌 크리스 윌리엄스와 양동근을 앞세워 정규리그 1위라는 이변을 연출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에 패했으나 농구계가 모비스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주목했다. 2006~2007년 시즌에는 정규리그 1위는 물론이고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승리했다. 말 그대로 꼴찌에서 일등까지 내달린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가 모든 팀의 타깃이 됐다. 우리만 만나면 다들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그래서 1위를 하고 있어도 방심할 수가 없다. 꼴찌 팀과 만나도 1위인 우리가 힘들다.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독한 훈련을 선수들에게 시키고 있다.”
모비스는 2007~2008년 시즌에는 6강에 들지 못했고, 2008~2009년 시즌에는 주목받지 못하던 김현중, 함지훈 같은 선수를 조련해 정규시즌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9~2010년 시즌에 두 번째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2012~2013년에는 정규시즌 준우승을 차지한 후 챔피언결정전에서 SK를 4-0으로 무찔렀다. 2013~2014년에도 챔피언에 올랐다.
“첫해 성적은 선수빨”
▼ 농구 지도자들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 kt 전창진 감독과는 초등학교·중학교 동창이고 이상민 삼성 감독, 문경은 SK 감독과는 연세대 선후배 사이다.
“가까울 수가 없다, 이 직업에서는. 창진이는 친구, 문경은·이상민은 제자지만, 코트에선 상대해야 할 감독이라 경기 전에 밥도 같이 안 먹는다. 내일 싸워야 할 사람과 어떻게 식사를 함께하겠나. 아주 특수한 상황이라면 몰라도 일부러 그런 자리를 갖진 않는다.”
프로농구 감독 중에는 친분이 있는 다른 팀 감독과 경기 전날 따로 만나 식사하거나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도 있다.
▼ 올 시즌 이상민 삼성 감독이 ‘초보’ 타이틀을 달고 혹독한 시즌을 치렀다.
“얼마 전 경기 끝나고 지나가면서 만났는데, ‘감독 첫해는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해줬다. 또 ‘첫해에 성적이 좋은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다. ‘선수빨’이다. 지금 성적에 실망하지 말고 계기로 삼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꼴찌를 해봤기에 이 감독의 현재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너무 힘들어하지 않으면 좋겠다.”
▼ 경기 때 상대 감독의 패를 잘 읽는 편인가.
“다른 건 몰라도 얼마나 준비하고 나왔는지는 보인다.”
▼ 야구는 한국인 메이저리거, 축구는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를 배출했다.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릴 적 기본기를 착실히 익혔다면 김주성 같은 선수는 충분히 NBA에 진출했을 것이다. 신장도 크고, 슛도 잘 쏘고, 패스도 빠르다. 다만 기본기가 부족한 탓에 몸싸움을 싫어한다. 다치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오히려 부상당하는 상황이 반복되더라. 한국 농구가 발전하려면 KBL이 거친 몸싸움을 허용해야 한다. 요즘 운영되는 것을 보면 자꾸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 답답하다. 농구인 출신 총재께서 연맹을 맡았으니 현장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국제대회 나가면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다. 몸싸움이 약한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절대 성공 못한다. 내가 누구보다도 강도 높게 협회나 연맹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이다. 지금 한국 농구는 윗사람들이 다 망친다. 농구인들이 농구 발전 가로막는 것들을 앞세운다.”
농구에 최적화한 心身
▼ 이번 시즌 우승하면 대표팀 감독을 또 맡을 수 있겠다.
“더는 안 한다. 몸도 안 좋다. 지난 4년 동안 휴식 없이 달려왔다. 가족이 미국에 있는데,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온갖 스트레스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젠 대표팀도 전임 감독제로 운영해야 한다.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고 모든 걸 바꿔야 한다. 양동근, 김주성 등 나이 많은 선수를 빼고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해 그들을 성장시켜야 한다.”
▼ 대표팀은 프로에서 제일 잘하는 선수들이 뽑히는 곳 아닌가. 키워서 성장시키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당장의 성적을 내기에 급급하기보다는 먼 미래를 보고 대표팀을 운영하자는 뜻이다. 내년에 올림픽 예선전이 있다. 대학생 위주의 젊은 선수들을 뽑아 그들이 앞으로 5년, 10년 대표팀에서 활약하게끔 해야 한다. 지금 중국이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 언젠가는 감독직에서 잘릴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
“당연하다. 언제까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마지막 질문이다. 대한민국 농구사에 영원히 기억될 ‘베스트 5’를 꼽아달라.
“제일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애매하긴 한데, 일단 서장훈은 무조건 들어가야 하고, 이충희 허재도 이름을 올려야 한다. 김주성도 2002년의 전성기 때라면 뽑힐 수 있다. 그리고 가드인데, 난 개인적으로 신동찬을 좋아한다. 우선 신장이 190㎝인 가드는 없었다. 박수교, 강동희, 이상민, 김승현 등 손에 꼽히는 가드들이 있지만, 그래도 신동찬이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본다. 허재, 이충희, 서장훈, 김주성, 신동찬…. 이렇게 대표팀이 구성된다면 NBA도 부럽지 않을 듯하다.”
“농구란 무엇이냐”라는 우문을 던지자 그는 “재미있는 스포츠”라고 답했다. 농구 외에 다른 스포츠에는 관심조차 없다고 말한다. 농구 감독들의 흔한 취미인 골프도 치지 않는다. 그의 몸과 마음은 농구만을 위해 최적화한 것 같았다. 유재학은 ‘우승을 부르는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