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에서는 두 집을 지어야 산다. 그전까지는 미생(未生)이다. 살았다 말할 수 없는 상태다. ‘미생’이 만화에 이어 드라마로도 히트한 것은 왜일까. 강호제현의 폭풍 공감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미생’에 담긴 생활정치의 함의를 살펴봤다.
“직장은 전쟁터, 바깥은 지옥”
만화와 드라마 미생이 인기를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기업 비정규직의 고달픈 직장살이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씁쓸하기도 하다. 시청자는 금요일과 토요일 밤 이 드라마에 빠져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다 월요일 동이 트면 직장에 늦지 않게 출근하려 서두른다. 정글 같기도 하고 놀이터 같기도 한 그곳에서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호한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하루를 보내야 한다.
조훈현의 145수
1989년 9월 5일은 한국 바둑계로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날이다. 주인공은 조훈현 9단이다. 2대 1로 뒤지던 상황에서 2대 2를 만들더니 마지막 제5국에서 상대를 잡았다. ‘빠른 창’ 조훈현 9단과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 9단의 대국은 145수로 끝났다. 미생은 이 기보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미생의 주인공은 145수만에 정규직을 땄나? 대기업 상사의 인턴사원으로 출발한 주인공 장그래는 계약직을 따낸다. 직장인이지만 직장인이라 말할 수 없는, 그래도 실직보단 나은 상태다.
위기십결
정규직이 되어 승승장구하기 위해선 145수만으로 충분치 않을 수 있다. 수는 생물처럼 꿈틀거린다. 상대방의 다음 수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자신이 묘수를 두었다고 해도 그 결과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다. 또 이번에 먹힌 묘수가 다음번에 먹힐 거라는 보장도 없다. 상대방에게 읽혀버리면 패착이 되기도 한다.
미생이 인기를 끌면서 바둑인에게는 널리 알려진 위기십결(圍棋十訣)이 새삼 주목받는다. 당나라의 바둑 명수 왕적신(王積薪)이 펴낸 책이다. 드라마 미생 9회에서 장그래가 위기십결 가운데 세고취화(勢孤取和)를 인용한다. 비결 가운데 가장 어려운 비결을 인용한 것이다.
위기십결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①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지 말라 ②입계의완(入界宜緩): 경계를 넘어설 때는 완만하게 하라 ③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나부터 되돌아보라 ④기자쟁선(棄子爭先):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⑤사소취대(捨小就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⑥봉위수기(逢危須棄): 위기를 만나면 버려라 ⑦신물경속(愼勿輕速): 조급해하지 말고 신중하라 ⑧동수상응(動須相應): 서로 호응하게 움직여라 ⑨피강자보(彼强自保): 적이 강하면 지켜라 ⑩세고취화(勢孤取和): 고립되면 조화를 꾀하라. 다 맞는 말 같다.
장그래 따라 하다간 낭패
바둑의 바이블인 위기십결을 토대로 직장인의 생존 전략을 제시한 미생에 딴죽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위기십결은 너무 어렵고 미생은 너무 극적이라는 점은 지적해두고자 한다. 미생은 많은 좌절을 담고 있지만 그래도 요행수를 버리지 않는다. 여느 직장인이 장그래처럼 따라 하다가는 굴욕을 겪을 수도 있다. 계약직이 사장과 전무의 눈에 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미생은 비현실적이다. 직장인을 위한 신데렐라 동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묘수보다 정석
‘레알 미생’직장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석이다. 묘수 찾다 낭패 본다. 미생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암투와 갈등이 난무하는 혼돈 속에서 장그래는 관찰자에 가까운 정석 행보를 더 많이 보인다. 절대 함부로 나대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직장 문화
미생 직장인의 정석, 그 첫째는 복종이다. 대기업 등 대다수 직장은 민주주의와 상극이다. 오너 또는 CEO가 절대권을 행사한다. 부서 내에선 부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위계적 구조가 공고하다. 유교문화 탓이라고?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미국의 직장도 크게 보면 위계구조다. 거긴 해고가 훨씬 자유롭다. 오너와 부서장이 직원의 명줄을 더 틀어쥔 셈이다. 직장 내 위계구조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기인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구조가 완화되어 세련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게 직장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까라면 까야 한다
따라서 상사가 까라면? 까야 한다! 이유를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도 CEO에 오를 수 있다. 자꾸 역심(逆心)이 든다면 차라리 뛰쳐나가 창업을 하는 게 좋다. 역심이 드는 자신의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적잖게 역심을 노출했다면 상사나 경영진의 마음속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더 열심히 복종해도 만회가 될까 말까일 것이다. 신경심리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권력이 뇌의 화학적 작용을 바꿔놓는다며 과도한 권력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권력의 맛을 아는 상사는 이미 당신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저절로 승복이 되는 상사를 만나는 것은 직장인에겐 홍복이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상사가 윗분의 인정을 받는 경우는 더더욱 희박하다.
무조건 버텨라
미생 직장인의 정석, 그 둘째는 끈기다. “무조건 버티라”는 선배들의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하루하루 버티다보면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가고 10 년이 간다. 10년 만에 한번 찾아오는 기회만 잡아도 성공한다. 어떤 사람은 일생에 단 한 번 온 기회를 잡아서 성공하기도 한다.
미생에서 계약직 장그래에게 상사인 오상식 차장이 이렇게 말한다. “이왕 들어왔으니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기는 버티면 이기는 곳이야.” 맞다. 버텨야 이긴다.
많은 직장인은 열심히 일하는데 상사를 비롯한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럴까? 잘라 말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걸 모르는 상사는 없다. 결국 알게 된다. 인정받지 못한다면 미련하게 일만 하는 건 아닌지 방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 버티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끈기와 복종의 융합이 더 중요하다. 구조조정 시기에 상사들은 충성하는 부하를 버리지 못한다. 부하의 충성은 실은 중독성 높은 마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버는 재미, 부리는 재미
경영인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답한다. 사업을 하는 첫 번째 재미는 돈 버는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사람 부리는 것이라고. 사람 부리기는 권력 행사를 의미한다. 권력이 커지면 마약이나 게임에 빠졌을 때 나오는 도파민이 뇌에서 분비된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회사니까요”
미생 직장인의 정석, 셋째는 말이다. 말을 잘해야 한다. 미생 13회에서는 장그래가 속한 영업3팀이 사장과 중역들 앞에서 요르단 중고차 사업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프레젠테이션 뒤 사장이 칭찬한다. 이어진 장그래의 말이 임원들을 울컥하게 한다. “우리 회사니까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장그래에게서 “우리 회사”라는 말이 나와 더 큰 울림을 줬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막판 판세를 가른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대전은요?” 유세 중에 얼굴에 커터 칼 테러를 당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마취에서 깨어나 했다는 이 말은 반전 드라마를 불러와 한나라당에 승리를 안겼다.
회의와 프레젠테이션에선 역시 말 잘하는 직장인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뇌에 업무 내용이 잘 정리된 상태로 입력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뇌의 역량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 능력은 후천적인 것이다. 말을 자주 해야 역으로 뇌도 성장한다.
말, 해 버릇하면 는다
어떤 직장인은 “원래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피하는 습성 때문에 그렇게 됐을 뿐이다. 말이란 해 버릇하면 금방 는다. 그 뒤엔 오히려 말려야 할 정도다.
처음 회의 참석 땐 자신이 할 발언 내용을 이슈별로 써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몇 개월만 하면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 프레젠테이션도 처음엔 설명 자료를 따로 메모판에 담아 손에 들고 하는 것이 좋다. TV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손에 들고 있는, 그런 메모판이다. 그러나 이것도 나중에는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이슈별로 정리하라
이 경지에 이르면 회사 내에서 ‘조리 있게 설명 잘하는 사람’으로 각인된다. 대외 프레젠테이션에도 동원돼 나가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그만큼 상사들 눈에 띌 기회가 많아진다. 그들은 그런 사람을 기억할 것이다. 적어도 회사에서 스타가 된다.
‘팬 서비스’와 T 이론
스타에게는 팬 서비스 능력도 중요하다. 팬 미팅 때 스타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호감도가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다. 스타라면 누구나 할 말을 미리 준비한다. 내일 아침 신문 연예면을 장식할 멋진 문구를 상상하면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작심 발언을 할 땐 헤드라인 개발에 몰두한다. 그 한 줄로 뜰 수도 있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직장인은 회의에 참석할 때,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비장의 코멘트 하나 정도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코멘트, 곧바로 화자를 떠올릴 트레이드마크 같은 코멘트 말이다. 동료들이나 선후배들이 사석에서 다가올 때 이런 직장인은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건넨다. 친근한 말이거나 농담이거나 상관없다. ‘일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성격도 밝고 좋네.’ 이 같은 평가가 나온다. 이런 게 팬 서비스다.
미생 직장인의 정석, 넷째는 ‘T 이론’이다. 업무 영역 중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잘하는 영역이 있다면 그 일이 몰릴 것이다. 거부할 이유가 없다. 주변엔 이것저것 광범위하게 능력 개발을 하려는 이가 많다. 팔방미인을 꿈꾸는 것이다. 좋은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T 이론’이 권장된다. 처음엔 수직적 역량 강화, 곧 ‘↑’ 기간을 거친 다음 수평적 역량 확산, 곧 ‘↔’ 기간으로 넘어가는 것이 ‘T 이론’이다. 입사 초기부터 10년 동안 눈 딱 감고 나만의 전문 영역 하나에 열중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10년이면 누구나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다.
혈관 만들고 실핏줄 잇고
업무가 전문성이 없는 분야라면,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에서 영역을 찾아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총무과에서 일하는데 회계에 관심이 간다면 재무관리 학습 모임에도 나가고 온라인 카페에서도 활동하는 식이다. 장래 목표를 임원이 아니라 재무이사로 구체적으로 잡는 것이 가능하다. 재무이사를 거쳐 CEO에 도전할 수도 있다. 수직적 역량 강화에는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진척도 더디다. 그러나 수평적 역량 강화 단계에 들어가면 속도가 붙는다. 학습 패턴이 생긴 까닭이다.
이 이론은 업무뿐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에도 적용된다. 처음엔 소수 인물과의 관계를 동지 수준으로 돈독하게 만들어가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 이어 그들을 매개로 해서 관계망을 넓혀가는 식이다. 혈관을 만든 다음 실핏줄을 잇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신뢰가 돈독한 인물을 통해야 견고한 관계망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누구의 소개로 찾아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소개한 사람의 격에 따라 찾아온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스마일, 한결같이 밝게
미생 직장인의 정석, 그 다섯째는 스마일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맞는 말이다. 가끔 가는 식당의 종업원 중에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늘 웃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아무리 자주 불러도 언제나 그 얼굴이다. 일행에게 말하곤 한다. “이 식당 사장은 이 종업원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
많은 직장인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기 표정 관리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오죽하면 여러 회사에서 돈 들여 친절 교육까지 실시할까. 한결같이 밝은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건 큰 경쟁력이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웃는 게 낫다. 연기라도 좋으니 웃는 게 낫다. 웃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보단 웃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더 끌리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