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선유도공원의 나목(裸木)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12-19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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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자서 해변을 산책한다. 차디찬 해변에 선, 그저 그런 나무 한 그루 아래 무릎을 꿇고는 한참을 운다. 그 장면을 못 잊어, 적층된 시간의 켜를 오롯이 기억하려 나는 선유도공원에 갔다.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영화를 보았다.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 예전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놓치면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았을 텐데, 그 무렵이라 해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비디오테이프를 비치해놓은 가게는 드물었을 것이다. 인터넷 기반의 주문형 다매체 시대가 됐다. 원하는 영화를 클릭 몇 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리모컨 버튼을 몇 번 누르고 나니 금세 화면에서는 기이한 이야기가 물고 물리는 ‘옥희의 영화’가 시작됐다.

    ‘옥희의 영화’는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 흘러간다. ‘주문을 외울 날’에는 진구, 즉 이선균의 지리멸렬한 하루가 흐른다. ‘키스왕’에는 옥희, 즉 정유미가 등장한다. 옥희는 진구와 ‘썸 타는’ 중인데 예전에는 송 교수, 즉 문성근과도 인연이 있어 보인다. ‘폭설 후’로 넘어가면 문성근의 순서다. 그는 지금 이 시대에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아니 허위의식 안에서 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 장 ‘옥희의 영화’는 정유미의 시선에서 두 남자가 교차한다. 옥희, 즉 정유미는 두 남자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울 동부의 아차산에 간다.

    정유미의 시선에서 마무리되는, 이 세 사람의 돌고 도는, 물고 물리는, 꼬리가 머리가 되고 머리가 꼬리가 되는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고 서로가 서로의 기억에 침입하고 서로가 서로의 기억을 자기 것인 양하는 가짜 기억과 진짜 기억 사이의 따스한 위선과 날카로운 진실 사이의, 허위의식과 진정성 사이의, 그 모든 기억 속에서 서성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선이 노니는 풍광

    영화의 끝부분, 겨울 아차산 풍경에서 옥희는, 그리고 두 남자는, ‘잘생긴 나무’를 바라본다. 사실 그 장면에 보이는 나무는 무성했던 잎을 다 떨어뜨리고 추위에 떠는 별 볼일 없는 나무였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그 나무는 ‘잘생긴 나무’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겨울나무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선유도공원으로 갔다.

    매서운 추위가 갑자기 몰아쳤다. 12월이 시작되는 첫날, 추위가 예고되더니 다음 날 진짜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거기에 무서운 바람까지 몰아쳤다.

    한강 둔치 선유도공원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주차 관리하는 분이 왜 오셨냐? 묻기까지 했다. 공원 구경 왔어요, 대답했더니, 정말인가 하는 의아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주차장은 텅 비었고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후 묵묵히 걸었다. 내 앞에서, 또 한참 후에는 내 뒤에서 두꺼운 외투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람들이 이 칼바람에도 자전거를 타면서 지나갔고 나는 그 자전거길을 버리고 선유도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 올라섰다.

    한강을 종횡무진하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쳐서 하마터면 눌러쓴 모자를 저 창공 위로 날려 보낼 뻔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공무 때문에 그리고 공원 안에서 카페를 운영하느라 오가야 하는, 결국 몇 사람을 보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영하의 날씨에 구경 삼아 선유도공원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봄가을처럼 계절이 참 좋은 때는 산책하는 사람, 나들이 나온 가족, 데이트하는 연인, 사진 찍으러 몰려나온 아마추어 사진가 등으로 선유도공원은 늘 북적이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仙遊)’라는 이름처럼 수려한 풍광의 섬이다. 양녕대군이 이곳에 영복정(榮福亭)을 지었다고 한다. 양천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양화도, 선유도 일대를 많이 그린 겸재 정선과도 인연이 깊다. 일제강점기의 대홍수와 여의도 비행장 건설을 위한 건설 자재 충당 등으로 인해 겸재의 그림에 나오는 선유도의 정취는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정수장이 들어서 있었다.

    정수장은 1978년 완공돼 2000년 12월까지 시민에게 수돗물을 공급했다. 그 시설의 규모가 상당했다. 탁한 강물을 마실 수 있는 물로 정수하는 작업은 고도의 기술과 집약된 노동과 상당한 장비를 요구한다. 게다가 일의 강도와 조건도 힘들었다. 수도 서울의 식수를 책임지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기술적 집중과 긴장이 요구됐으며, 그 위치 또한 한강의 한복판이면서도 도심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외딴 섬에 들어섰다. 그 선유정수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늘 맑은 물을 만들기 위해 고되게 일했고 때로는 홍수 같은 비상 상황에 대처하고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적층된 시간의 켜

    2002년 4월 이 정수장이 시민을 위한 공원, 그것도 생태공원으로 거듭났을 때 시민은 물론 전문가 그룹에서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은 바로 그 기억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공간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일상이 어우러져 소박한 미래를 비추는 곳, 선유도공원이 그렇게 변했다.

    비슷한 사례로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서서울호수공원이 있다. 경인고속도로 신월 인터체인지 옆에 위치해 있다. 미국조경가협회(ASLA)가 주는 전문가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1959년부터 신월정수장이 가동돼 하루 평균 수돗물 12만t을 공급하다가 2003년 10월 ‘서울시 정수장 정비계획’에 따라 가동이 중단됐다. 그 후 한동안 버려져 있었으나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2009년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물’과 ‘재생’이라는 주제에 따라 직경 1m에 달하는 수도관 등 옛 정수장시설이 물놀이장, 100인의 식탁, 놀이터 등과 어우러졌다. 녹슨 침전조 구조물과 이를 지탱해온 오랜 콘크리트 벽체가 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간의 흔적과 기억을 선물한다.

    서서울공원의 시설물 중에서 매우 이채롭고 신기하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것이 ‘소리 분수’다. 이 일대의 상공으로 하루 평균 360여 대의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가까운 곳에 김포공항이 있기 때문이다.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만 비행이 가능한데도 3분에 1대꼴로 이착륙하는 셈이다. 항공기 소음 기준을 웨클(WECPNL)로 표시하는데 이는 단순히 소리 크기만을 표현하는 데시벨(dB)과 달리 운항횟수, 시간대, 소음의 최대치 등에 일정한 가중치를 둬 측정하는 방식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설정한 단위다. 김포공항 일대의 2013년 항공기 평균 소음은 84.3웨클로 소음영향 지역 기준인 75웨클보다 높다. 신월동, 공항동, 방화동은 물론 부천의 고강동 사람들도 오랜 세월 비행기 소음에 시달렸다.

    기억을 담은 공간

    ‘소리 분수’는 바로 그 항공기 소리 및 궤적과 관련한 시설이다. 축구장 두 개 면적보다 큰 호수에서 분수가 솟구치는데 그 방향이 41개다. 항공기 노선을 따라 설치된 것이다. 상공으로 비행기가 지나가면 그 궤적에 따라 해당 분수가 자동으로 물을 뿜어낸다. 신기한 구경거리지만 동시에 착잡한 생각이 들게도 한다.

    이 같은 일들, 그러니까 산업화 시대의 시설을 공원이나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이 런던의 테이트모던 갤러리, 독일 에센 탄광지대의 공연장과 미술관들, 그리고 인천 군산 대구 부산 등지에서도 벌어지거니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매서운 칼바람이 한강을 스치며 날아와서 여지없이 겨울 외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이곳, 선유도공원에서 상당한 수준의 성취를 이뤄냈다.

    동아일보 2013년 2월 5일자 기사는 선유도공원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 잘 보여준다. 동아일보와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 SPACE’는 2000년대 이후 지어진 건축물 중 최고와 최악을 선정하는 공동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한 꿈마루, 의재미술관, 선유도공원이 20위 안에 모두 포함됐다.

    광진구 능동의 꿈마루는 이 나라 중년의 추억이 담긴 어린이대공원의 관리사무소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기억이 내장된 공간으로 개조한 곳이다. 선유도공원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뤄진 개가다. 기억과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우람한 콘크리트와 화려한 유리로 도시적 건물을 치솟게 하는 경향과 달리 조성룡의 두 작품은 ‘공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일정한 해답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 밖에 우규승의 환기미술관, 이타미 준의 제주도 포도호텔, 승효상의 웰콤시티 등이 베스트 건축물로 꼽혔다.

    한편 세빛둥둥섬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각각 ‘전시성 건축 행정의 전형’ ‘기억의 장소를 지워버리는 건축의 폭력’ 등의 이유로 워스트에 이름을 올렸으며, 그밖에 종로타워, 교보생명 광화문 사옥, 강남 아이파크타워 등도 장소의 의미를 무시하며 위세등등하게 군림하는 건축적 오만함의 사례로 꼽혔다.

    같은 맥락의 기사가 2011년에도 있었다. 조선일보는 그해 6월 29일자 기사에서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30명(23명이 응답)을 대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설문조사했는데, 선유도공원이 13표로 최고의 건축물로 꼽힌 것이다. 이 조사에서는 원서동 공간 사옥, 인사동 쌈지길, 경주 선재미술관, 전북 무주 공공시설 프로젝트 등이 베스트 목록에 올랐고, 광화문광장, 예술의전당, 타워팰리스, 청계천, 독립기념관 등이 워스트로 지목됐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당 장소의 기억과 해당 공간의 맥락’이 판단의 대체적인 기준이었다.

    건축가 조성룡과 조경 전문가 정영선이 함께 만든 선유도공원은 역사적 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그것을 당대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안지와 같은 곳이다. 2004년 미국조경가협회가 수여하는 ‘2004 Professional Award’에서 전문가 부문 최고상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조경 분야의 획기적인 이정표로도 평가받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흐르는 것은 시간이다. 설계자들도 그 점을 최대한 고려해 착상하고 설계하고 조성해냈다. 누적된 시간, 퇴적된 기억, 적층된 흔적이 이 선유도공원에는 해변의 모래밭처럼 펼쳐져 있다. 설계 공모 과정에서 정수장 시설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흔하디흔한 도심형 공원 내지는 위락 중심의 테마파크 등을 조성하는 아이디어들도 제출됐으나 정수장의 시설은 물론 폐기물까지 최대한 활용하려는 조성룡의 제안이 결국 선택됐다.

    완공 이후 이 공원을 관리하는 쪽에서 과시적으로 보이는 각종 홍보물을 부착해 놓기도 했으나, 2013년 바닥재의 석면을 제거하고 여러 시설을 안전하게 보강하는 리모델링 작업을 10개월가량 진행하면서 이러한 홍보성 장치들을 모조리 떼어내고 현재의 모습처럼, 즉 옛 시설들과 기억들이 현재의 공간 안에 유영하는 방식으로 보완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옛 수돗물 생산시설의 밸브와 수관.



    인간의 노동, 기계의 동력, 그 시간들

    나는 찬바람을 위로 삼아 걷는다. 길쭉하게 조성된 공간을 따라, 오래된 콘크리트 시설물과 한때 맹렬하게도 엄청난 기계 장치를 돌렸을 거대한 밸브와 녹슨 수관들 사이를 걷는다. 그렇게 걸어가다보면 큼직한 기둥들이 마치 기념비처럼 서 있는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여러 기둥에는 식물들이 달라붙어 생명력을 드러냈고, 그 한가운데 있는 기둥은 오로지 콘크리트 그 자체로 기립해 있었다. 이곳의 시간들, 즉 인간의 노동과 기계의 동력이 결합한 기억들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 말고 또 다른 산책자가 들어선 모양이다. 그나마 햇볕이 한 줌 깃든 곳에 앉아서 소리의 방향을 찾아보니, 젊은 연인이 정수장 시설 사이를 걷고 있었다. 스물네댓 살쯤 돼 보이는 남녀였다.

    남자아이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있었다. 요즘 같은 스마트폰 대세 시대에 큼직한 카메라를 따로 장만한 걸 보니 나름대로 셔터 누르는 쾌감을 아는 친구처럼 보였다. 여자아이는, 두툼한 겨울 점퍼를 걸쳤지만 치마는 아주 짧았다. 바람이 치마를 흔들곤 했다.

    여자는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했다. 그러면 남자가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여자는 겨울 점퍼의 지퍼를 다 내리고 팔을 활짝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몇 걸음 앞으로 가서 콘크리트 벽에 기대면서 몸을 조금 비틀었다. 남자는 그녀의 주변을 돌면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여자는 몸은 그대로 둔 채 시선만 남자에게로 돌렸다. 여자는 포즈를 취할 줄 알았고 남자는 셔터를 눌러야 할 타이밍을 알고 있었다.

    쇼핑몰 촬영 나왔나? 우선 그렇게 생각했다. 홍대 앞이며 서촌이며 이곳 선유도공원도 온라인 의류 쇼핑몰의 유명한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옷 가방이 따로 없었고 여자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남자의 카메라는 쇼핑몰에 올릴 사진을 찍을 정도로 근사한 것은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 사이를 떠돌면서 그들은 기억을 생산하고 있었다. 나는 기억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기억의 생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둘은 연인이었다.

    사실 흘러간 시간, 곧 과거에 대해 일관된 단일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하고 상이한 복수의 기억이 존재한다. ‘옥희의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이 동일한 사건과 관계를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영화다. 세 사람 모두 아차산의 ‘잘생긴 나무’를 기억하지만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기억은 선택적일 수밖에 없는데 누가 어떻게 기억을 지우는지, 혹은 기억하는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옛 정수장 시설 기둥에 식물이 달라붙어 살다 추위에 말라붙었다.

    기억은 기억돼야 한다

    이 ‘망각/기억’은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하나의 중요한 싸움이 된다. 사회학자 정진성의 언급처럼 ‘누가, 어떤 것을, 어떻게, 왜 기억(망각)하는가’의 문제는 민족, 국가, 계급, 권력, 젠더 등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맞물렸다. 사회적 기억, 즉 집단 기억은 개인적 기억의 총합이나 단지 역사적 증거의 집합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배분 및 공유된 상징적 이미지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일정한 권력과 담론 작용, 다양한 주체의 실천 등과 같은 개입에 의해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

    대체로 사회적 차원에서의 기억은 국가가 독점한다. 국가의 특정 이데올로기와 담론, 권력관계 등이 특정한 형태의 기억을 생산한다. 올림픽, 특히 그 개막식 같은 거대한 행사는 국가가 과거의 역사와 기억을 독점적으로 해석하고 강화하는 장이 된다.

    일례로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일본의 기억 투쟁’결과였다. 아테네 산정을 출발한 올림픽 성화가 일본이 강제로 복속하려고 한 오키나와에 도착하는 것으로 기획한 점, 일본 열도를 여러 갈래로 순회한 성화가 도쿄의 메이지 신궁에서 집화된 점, 올림픽 성화의 최종 주자가 히로시마 피폭 2세 소년이라는 점, 일왕이 개막을 선언할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국주의 군가를 다수 작곡한 고시키 유우지의 곡이 울려 퍼지게 한 점 등은 올림픽을 통해 일본이 ‘패전의 기억’을 지우거나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새로 의미를 부여하고 강화하려는 고도의 상징 정치였던 것이다.

    기억을 둘러싼 이 같은 시도와 모험은 개인에게나 집단에 자주 벌어지는 투쟁의 한 양상이다. 기억이 온전하게 기억되고 평가되지 않으면 어떤 강한 힘에 의해 기억이 망실되거나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을 응결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응결된 기억은 과거를 가리키지 않고 미래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점이다. 그에 따라 미래의 무늬와 방향이 달라진다.

    2014년 한국 사회가 치른 가장 커다란 비극이요 슬픔인 ‘4월 16일, 세월호 참사’에 대해 ‘기억하라’고 서로들 다짐하는 것 또한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제대로 기억하고 이로써 무엇이 문제였는지 확인한다는 것은, 그 상처를 통해 과거를 어루만지면서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살아갈 것인가. 만약 누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에 대한 해답은 미래에 대한 어떤 상상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또렷하게 되새기는 과정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나 개인의 차원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의식하는 주체만의 힘이다.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벤치 앞에 낙엽이 쌓였다.

    선유도의 겨울나무

    선유도공원에는 옛 시설물만 있는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어온 자연과 공원 조성 과정에서 덧대어진 자연도 더불어 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 차가운 벤치에 앉아서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헐벗은 겨울나무. 나무들은 제 잎을 다 떨어뜨렸지만 저 창백한 줄기 안에는 내년 봄의 잎들이 내장돼 있다.

    ‘옥희의 영화’에서 본, 그 마지막 장면의 ‘잘생긴 나무’가 생각났다. 더불어 기억나는 홍상수 감독의 또 하나의 영화는 ‘해변의 여인’이다. 김승우와 고현정, 김태우와 송선미가 출연한 영화다. 조금은 쌀쌀한 해변에서 벌어지는 남녀들의 자잘한 에피소드를 통해 지리멸렬한 삶에 떨어진 운석 같은 충격을 담았다.

    이 영화 속에서 영화감독으로 나오는 중래, 즉 김승우는 문숙(고현정)과 선희(송선미) 사이에서 썸을 타다가, 혼자서 해변을 산책한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잔뜩 찌푸린 얼굴로 걷던 중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선다. 그러곤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걸어가서 갑자기 무릎을 꿇는다.

    나무 한 그루!

    차디찬 해변에 서 있는 그저 그런 나무 한 그루 밑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는 얼굴까지 파묻고 운다. 울음을 억제하면서 운다. 한참을 그렇게 운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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