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대의 도난사건으로도 유명한 이사벨라 미술관의 설립자는 재벌가 며느리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다.
- 그녀는 사후에 자신의 뜻대로 미술관이 운영되지 않을 경우 미술관 자산을 모두 하버드대에 기증하라고 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미술관 정원도 일품으로 이탈리아 베니스 궁전을 거니는 듯하다.
도난당한 그림들은 값으로는 매길 수 없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34점만 남아 있다는 베르메르의 ‘콘서트(The Concert)’, 렘브란트 작품 3점, 마네 작품 1점, 드가의 드로잉 5점 등이 털렸다. 그중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는 렘브란트가 그린 유일한 바다 풍경이다. 전 세계 매스컴과 미술 애호가들은 아연실색했다.
이 미술관의 정식 이름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보스턴 펜웨이(Fenway) 거리에 자리 잡은 궁전 같은 건물이기 때문에 펜웨이 궁전(Fenway Court)이라고도 한다.
그림 도둑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배짱 좋은 도둑은 없지 않을까 싶다. 도난품의 시가 총액은 5억 달러(약 5500억 원)로 세계 최대의 미술품 도난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 사건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다. 연방수사국(FBI) 보스턴 지부는 현재도 수사본부를 해체하지 않고 수사 중이다. 미술관은 작품 회수에 도움이 되는 정보에 현상금 500만 달러를 내걸었다. 그림 값의 1%다. 그래도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미술관은 누구든 이 작품들을 보관한다면 온도와 습도를 잘 조절해 작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한다. 사라진 그림들은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랬고, 뭉크의 ‘절규’가 그랬다. 대작은 훔쳐 가도 돈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한들 누가 감히 이런 유명 작품을 사겠는가.
어둡고 산만하고 불편하지만…
이사벨라 미술관은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건물은 ㅁ자형의 대저택으로 한가운데 아름답게 가꾸어진 중정(中庭)이 있다. 층마다 정원 쪽을 향해 회랑(回廊)을 만들어놓아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다. 전시실은 1~3층에 마련됐다. 그림에서부터 조각, 가구, 카페트, 도자기 등 2500여 점의 온갖 종류의 값진 골동품이 전시됐다. 수두룩한 명품들은 컬렉터 이사벨라의 안목을 웅변한다.
궁전이라 해도 전혀 손색없는 건물 구조와 내부 장식을 갖췄지만, 이곳의 전시실은 여타 미술관과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전시실 내부는 어두침침하고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돼 있지 않다. 작품들은 복잡하고 산만하게 걸려 있어 고택의 그림 창고 같은 느낌이다. 내부 조명도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있는 듯 없는 듯 아리송하게 해놓았다.
이런 생소한 분위기 탓에 관람하기가 편안하지 않다. 심지어 각 작품에는 안내 표지가 없다. 책받침 같은 것에 작품 배열 지도만 그려 놨다. 이걸 들고 다니며 실제 작품과 연결해야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이사벨라 미술관의 매력이고 품격이다. 이사벨라 미술관은 해마다 남부럽지 않은 관람객 규모를 자랑한다.
2012년 이 미술관은 본관 옆에 새 건물을 지어 공간 문제를 해결했다. 건축비는 우리 돈으로 무려 1300억 원에 달한다. 두 건물은 통로로 연결되는데, 새 건물에서 옛 건물의 외관도 감상할 수 있다.
아들 잃고 세계여행 나선 재벌 부부
미술관을 설립한 이사벨라(Isabella Stewart Gardner·1840~1924)는 이름에서 보듯 스튜어트 가문에서 태어나 가드너 집안으로 시집간 여자다. 친정과 시댁 모두 거부로 친정아버지는 뉴욕, 시아버지는 보스턴 재벌이었다.
이사벨라의 아버지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뉴욕에서 아마포로 침대시트, 타월, 의류 등을 만드는 리넨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리넨은 당시 가장 중요한 생필품으로 수익성이 매우 높았다. 이사벨라의 아버지는 품질 좋기로 유명한 아일랜드산 리넨을 독점해 많은 돈을 벌었고 광산업에도 투자해 크게 성공했다.
이사벨라는 스무 살이 되던 1860년 보스턴 출신의 청년 잭 가드너와 결혼했다. 친구의 오빠였다. 시아버지는 선단을 거느린 무역상으로 나중에는 철도, 광산 등 투자에도 성공해 보스턴 재벌로 불렸다. 부잣집 며느리 이사벨라는 미술품 수집과 예술가 후원, 그리고 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쓸 수 있었다. 그녀는 미국 최고의 미술품 수집가로 군림하며 많은 예술가와 교우했고, 활달한 성격 덕분에 사교계의 여왕으로도 불렸다.
그녀 인생이 늘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부부는 오랜 기다림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어려서 죽고 말았다. 부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세계여행에 나섰고, 이 여행은 세계 미술품 수집으로 이어졌다. 그 후에도 부부는 유럽은 물론 중동과 아시아 등지로 자주 여행을 다녔다. 이사벨라는 특히 이탈리아 베니스를 좋아해 그곳에 오래 머물며 베니스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작품도 구입했다.
1891년 친정아버지가 죽고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이사벨라는 본격적으로 미술품 수집에 나섰다. 도난당해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베르메르의 ‘콘서트’는 1892년 프랑스 파리의 경매에서 구입한 것으로 그녀의 수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896년 즈음에는 더 이상 집에 보관할 수 없을 정도로 수집품이 쌓여갔다. 집을 한번 확장했음에도 늘어나는 소장품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1898년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다. 이사벨라는 평소 남편과 함께 꿈꿔왔던 미술관 건립을 실천에 옮겨야겠다고 다짐한다. 마침내 펜웨이에 땅을 매입하고 유명 건축가인 월러드 토머스 시어스에게 “르네상스 시대의 베니스 궁전 같은 건물을 지어달라”며 설계를 의뢰했다. 그녀는 설계 전 과정에 자기 생각을 관철해나갔다. 시어스가 할 일은 이사벨라의 아이디어를 도면에 옮기는 정도였다. 건물 한가운데 중정을 만든 4층짜리 건물은 당시만 해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건물이 완공된 뒤 소장품 전시를 완료하기까지 1년 가까이 소요됐을 정도로 이사벨라는 미술관에 온 정성을 쏟았다.
드디어 1903년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사벨라는 미술관 4층에 거주 공간을 마련하고 예술가 및 학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신의 소장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도록 했다. 이 공간은 지금 미술관 사무실로 사용한다.
그림 한 점 걸려고 미술관 뜯어고쳐
이사벨라는 많은 예술가와 교유하면서 지냈는데 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와 특히 인연이 깊다. 사전트는 미국인이지만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선 거의 활동하지 않은 인물임에도 미국의 유명 미술관엔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이사벨라 미술관의 소장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전트의 작품이다.
이사벨라 미술관에 들어서면 스페인 플라멩코 극장에 온 것 같은 환상에 젖는다. 입구 바로 왼쪽에 기다란 스페인식 회랑(Spanish Cloister)이 있고, 그 끝벽 가득히 역동적으로 플라멩코를 추는 스페인 집시 무희의 대형 초상화(237×352cm)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무희 뒤에서 남자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다른 무희들은 춤에 환호한다. 나는 1998년 스페인 세비아 여행 때 본 플라멩코 공연을 잊지 못하는데, 여기서 바로 그 장면을 다시 만났다.
이 그림은 사전트의 1882년 작 ‘엘 잘레오(El Jaleo)’다. 사전트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특히 스페인 음악과 춤을 좋아했던 만큼, 그림은 연주 소리가 들리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는데, 구성과 준비에만 1년 이상이 소요됐다. 하지만 막상 그림을 그려나가는 데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은 파리 살롱에 출품돼 호평을 받았고, 보스턴의 컬렉터 T 제퍼슨 쿨리지에게 팔렸다. 이사벨라는 1888년 보스턴에서 공개 전시된 이 그림을 보자마자 반했다. 1914년 이사벨라는 이 그림을 자신의 미술관에 전시하기로 맘먹고 건물 개조 공사까지 해서 스페인식 회랑을 만들었다. 이사벨라의 인척이던 쿨리지는 이런 정성에 감복해 이 그림을 아예 그녀에게 줘버렸다. 사전트는 이 소식을 듣고 ‘엘 잘레오’를 그리기 위해 작업했던 스케치와 드로잉을 모두 이사벨라에게 선물했다.
사전트는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안과 의사였는데, 사전트의 누이가 어려서 죽자 부부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를 떠돌며 방랑자 생활을 했다. 그 와중에 사전트를 임신한 어머니는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콜레라를 피해서 플로렌스로 피신해 거기서 아들을 출산했다.
스페인 무희의 플라멩코 댄스를 그린 존 사전트의 ‘엘 잘레오(El Jaleo)’
존 사전트가 그린 두 점의 이사벨라 초상화, 'Isabella Steward Gardner'(1888)와 'Mrs. Gardner In White'(1922)
사전트가 그린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두 점인데, 동일한 모델임에도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하나는 1888년 작품으로 매우 활동적인 48세 중년 여인의 완숙미를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34년이나 지나, 82세 할머니가 된 이사벨라의 꺼져가는 촛불 같은 모습의 작품이다. 3층 고딕전시실(Gothic Room)에 걸린 48세 때의 초상화 ‘Isabella Stewart Gardner’는 이사벨라가 구입한 사전트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사전트는 이 그림을 1887년 9월부터 1888년 2월까지 보스턴에서 그렸다고 한다. 이사벨라는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양손을 모은 단정한 자세로 서 있다. 목걸이와 허리에 걸친 보석이 매우 돋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박하고 적당히 나이 든 중년 여인의 모습이다. 가는 허리에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배경은 마치 아우라를 넣은 듯 장엄하게 장식돼 있다. 그녀의 입술은 말을 하려는 듯 살짝 벌어졌다. 여느 초상화에서는 잘 관찰되지 않는 모습이다.
죽을 때까지 공개 안 한 초상화
사전트는 이 초상화를 8번이나 다시 그렸고 마침내 9번째에 성공했다. 이사벨라도 만족했다. 그런데 얼굴이 바보 같다느니, 자세와 보석이 잘못 설정됐다느니 하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사벨라의 남편은 화가 나서 이 그림을 전시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이 걸린 고딕전시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관람객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이 그림은 이사벨라의 강인한 영혼과 의지를 그 어떤 자서전보다도 더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사전트가 1922년에 그린 82세 때의 초상화는 1층 맥나이트실(Macknight Room)에 전시돼 있다. 할머니가 된 이사벨라는 온몸을 하얀 천으로 감쌌다. 그림 전체가 매우 창백한 느낌이다. 제목도 ‘Mrs. Gardner in White’다. 1919년에 중병을 앓고 나서인지 매우 나약해진 모습이다. 이사벨라는 이 작품이 완성되고 2년 후에 사망했다.
또 하나 꼭 짚어봐야 할 이사벨라의 초상화가 있다. 스웨덴 화가 조른(Anders Zorn·1860~1920)이 그린 ‘베니스에서의 이사벨라 가드너(Isabella Gardner in Venice)’다. 이 그림에서 이사벨라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양손을 옆으로 쭉 뻗으며 뭔가 소리친다. 매우 동적인 그림이다. 10점이 넘는 이사벨라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생동감 있게 그려진 작품이라고 한다.
이사벨라가 1894년 여름을 베니스에서 보낼 때, 조른이 부인과 함께 파티 중인 그녀를 방문했다. 파티장에는 음악이 흘렀고, 이사벨라는 바깥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양팔을 뻗어 “여러분, 나와보세요!” 하고 외쳤다. 화가 조른에게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고 한다. 베니스의 깜깜한 그랜드 커낼(Grand Canal) 창공에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고, 이 광경에 감격한 이사벨라가 친구들에게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상은 이사벨라의 남편이 자신의 일기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사벨라 생일엔 무료 개방
조른은 자신을 후원하는 이사벨라를 화폭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한 그림이 이 초상화다. 이사벨라가 54세 때다. 이틀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니 매우 즉흥적으로 그린 셈이다. 조른은 스웨덴 화가 중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영국, 프랑스, 발칸,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등을 여행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인물의 개성을 잘 끌어내는 초상화 작가로 평가받는데, 미국 대통령 초상화만 해도 루스벨트 등 세 명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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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는 생전에 미술관에 100만 달러의 현금과 수억 달러의 수익자산을 남겼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요구 조건을 걸었다. 그중 하나가 자신의 소장품을 일반인에게 영구히 공개하되, 철저히 자신의 미적 가치관에 맞추도록 했다. 만약 이 조건을 지키지 않는다면, 미술관 소장품과 자산을 모두 처분해 하버드대에 기부하라고 했다.
미술관은 설립자와 이름이 같은 ‘이사벨라’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2009년부터는 이사벨라의 생일인 4월 14일에 전면 무료로 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