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9월에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직파간첩으로 체포돼 수사를 받은 홍모 씨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는 홍씨의 자백이었는데, 법원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증거수집 절차에 문제가 있어 내용은 따져볼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국정원과 검찰은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진술거부권, 변호인 조력권을 고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법원은 변호인이 선임되기 전 홍씨가 혐의를 인정하며 작성한 의견서나 반성문도 인정하지 않았다. 10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북한 보위사령부 직파간첩 이시은(가명·39) 씨 사건도 논란이 일었다.
형사소송법 266조 16항
그런데 이들 간첩사건을 변호해온 변호사 2명이 최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유우성 사건을 포함해 여러 간첩사건 변호를 맡아온 장경욱(46) 변호사와 박준영(40) 변호사다. 이들은 재판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도록 한 검찰 수사기록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팀에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형사소송법 266조 16항을 어겼다는 것이다.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검사가 증거로 제출한 서류 등을 사건 또는 소송 준비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타인에게 교부·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다. 위반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문제가 된 것은 이시은 씨 사건이다. 박준영 변호사를 피의자로 만든 여간첩 이시은 사건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이씨는 2012년 12월 탈북해 이듬해 2월 동거남 A씨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입국 즉시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100일가량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간첩으로 확인됐다. 북한에서 한때 이씨를 사귄 탈북자 최○○ 씨가 “이씨의 탈북 경위가 의심스럽다”고 제보한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됐다.
검찰과 국정원에 따르면, 탈북 직전 북한 보위사 공작원으로 포섭된 이씨는 한때 연인관계였던 탈북자이자 반북활동가 최○○씨의 남북한 연계선과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됐다. 보위사는 남파되는 이씨에게 북한산(産) ‘기억 지워주는 반창고’(사진 참조) 2개를 줬다. 목과 배에 붙이면 며칠간 모든 기억이 지워지는 이 반창고는 어디에서도 존재가 확인된 적이 없는 기적 같은 약이다. 반창고를 떼면 기억은 다시 돌아온다. 이씨는 국정원 합동신문 과정에서 이 반창고를 몸에 붙인 채 조사를 받아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했다고 자백했다.
이씨는 국정원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받아 쓴 반창고를 그림으로 그려 보였고, 국정원과 검찰은 이 그림을 수사기록에 첨부했다. 하지만 이씨 외에 이 반창고를 봤다는 사람은 없다.
2심까지 간첩 주장을 유지하던 이씨는 2심이 끝난 뒤 장경욱, 박준영 변호사를 만났다. 그리고 “국정원 조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했다”며 그간의 주장을 번복하기 시작했다. 기억을 지워주는 반창고에 대해서는 “국정원 조사관을 골탕 먹이려고 지어낸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은 이씨에 대해 징역 3년의 유죄를 확정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지난 7월 ‘아가와 꼽새, 그리고 거짓말-여간첩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이씨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보도한 바 있다. 박 변호사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 국정원 수사기록, 이씨가 제작진에 보낸 편지와 변호사 증언 등을 제공했다. 검찰은 그 과정에서 이씨의 간첩혐의를 제보한 최씨의신원이 노출됐다고 주장한다.
이상한 제보자
12월 7일 박 변호사를 경기도 수원 사무실에서 만나 간첩사건으로 피의자 신분이 된 심경, 문제가 된 사건의 전말 등을 들었다. 박 변호사는 “솔직히 피의자 신분이 된 현실이 유쾌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는 바람에 더 이상 다툴 수 없었던 사건을 다시 한 번 다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법률심만 다루는 대법원에서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다툴 수 없었다. 검찰이 나의 형사소송법 위반 사실을 입증하려면 반드시 이씨 사건의 실체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걱정보다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 이씨가 간첩이 아니라고 믿는 이유는.
“‘기억 지워주는 반창고’는 빙산의 일각이다. 이 사건은 일단 간첩사건 제보자부터 이상하다. 이씨는 북한에서 한때 연인관계였던 탈북자 최모 씨의 권유를 받고 동거남 A씨와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그런데 최씨는 이씨가 탈북해 한국에 들어오자 간첩혐의로 국정원에 고발했다. 자기가 불러놓고 막상 오니 ‘탈북 경위가 의심스럽다’며 고발한 것이다. 국정원과 검찰에 따르면, 이씨가 보위사에서 받은 지령은 최씨의 동향 파악이다. 최씨는 국정원에 수감된 이씨를 3번이나 특별면회해 옷과 반지를 선물하고 영치금을 넣어줬다. 중요한 건 이 사건의 유일한 직접 증거가 이씨의 자백뿐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