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운하의 古都

풍요와 전쟁의 공존

  • 글·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5-03-19 1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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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쑤성의 ‘자랑’은 꽤 많다. ‘물고기와 쌀의 마을(魚米之鄕)’이라 불릴 정도로 예부터 물산이 풍족했고, 운하가 만들어낸 절경과 부드러운 말투의 미녀도 빼놓을 수 없다.
    • 하지만 개혁·개방의 여파로 장쑤성의 아름다움이 점점 색이 바래져 안타깝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운하의 古都
    강남의 봄은 따뜻하다. 훈훈한 남풍에 꽃은 일찍 피어나고, 운하에는 쪽배가 한가로이 떠다닌다. 강남에 몰려든 사람들은 제각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진을 찍고 낭만적인 풍경을 화폭에 옮겨 담는다.

    ‘소’는 ‘자소 소(蘇)’자다. 쑤저우(蘇州)의 고소(姑蘇)산에 자소(紫蘇) 박하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소생하다’는 다른 뜻처럼, 쑤저우의 봄은 실로 소생하는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장쑤(江蘇)성은 이 지역 양대 중심도시 장닝(江寧·난징의 옛 이름)과 쑤저우(蘇州)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를 단 한 글자로 압축하니 ‘소(蘇)’가 되었다. 장쑤성의 성도는 난징이지만, 문화적 헤게모니는 쑤저우가 쥐고 있다.

    베이징 능가한 강남의 영화

    ‘하늘 위에 천국이 있고, 땅 위에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

    이 속담에 ‘낚여’ 쑤저우를 찾은 중국인들은 “이게 천국 같다고 한 거야?”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쑤저우 역시 급속한 개발로 옛 정취가 상당 부분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천국 같다’는 말이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맹자는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 보면 배고픔에 대한 투쟁의 역사다. 장쑤성은 ‘물고기와 쌀의 마을(魚米之鄕)’이라고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했다. 사마천도 “(강남은) 쌀로 밥을 짓고, 물고기로 국을 끓인다. 과일과 어패류를 자급할 수 있고, 땅에 식물이 풍부하여 기근 걱정이 없다”고 했다. 이런 땅이 천국으로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으리라.

    풍부한 물산이 밖으로 유통되지 않고 자체 소비로만 끝난다면 부를 창출할 수 없다. 사마천의 말처럼 “강남에는 굶어죽는 사람도 없지만 천금을 가진 부자도 없다.” 강남은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로 큰 전환점을 맞는다. 고구려를 침공한 장본인이기도 한 수양제는 6년간 550만 명을 동원해 총 1750km의 운하를 건설하고 향락적인 뱃놀이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운하의 古都

    쑤저우 강남명원에서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운하는 강남과 강북의 교역을 활성화해 경제를 성장시켰고, 중국을 사회문화적으로 통합하는 데도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징항대운하는 중요한 수상 교통로로 여겨지니, 대운하 건설은 여러모로 큰 업적이다. 당나라 시인 피일휴는 “사치스러운 뱃놀이만 안 했다면, 수양제의 공로가 우임금보다 어찌 작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풍요로운 경제는 화려한 문화를 낳았다. 많은 시인묵객은 강남의 정취에 흠뻑 젖어 시와 노래를 남겼다. 은퇴한 고관대작들 역시 날씨 좋고 풍경 좋은 강남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들은 집에 있으면서도 자연 속을 노니는 처사(處士)처럼, 초야에 은거한 선비처럼 살고자 했다. 이런 배경에서 강남명원(江南名園)이 탄생했다. 정원에 기암괴석이 있고 연못이 있다. 집 안에서도 산과 호수를 벗하며 사는 기분을 내게 해준다.

    강남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명대에 이르러 강북을 완전히 압도했다. 조선 선비 최부(崔溥)는 중국을 두루 살핀 후 물산, 재력뿐 아니라 인심과 문화적 수준까지 모두 강남이 강북보다 낫다고 기록했다. 천자가 사는 베이징조차 “주민의 번성함, 누대의 훌륭함, 물화의 풍부함이 쑤저우나 항저우에 미치지 못한다”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청말(淸末) 서태후는 별장 이화원을 지으면서 쑤저우 거리를 재현한 구역을 만들었다. 강남의 영화는 천하의 중심마저 능가했다.

    반복된 대학살의 역사

    장쑤성은 강북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다. 물산은 풍부하고 도시마다 중요한 거점이 된다. 쑤저우는 신흥강국 오나라의 수도로서 춘추전국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오왕 합려는 이곳에서 힘을 키워 남방의 강국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했고, 그 아들 부차는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중원을 위협하며 춘추시대의 네 번째 패자로 등극했다.

    난징은 삼국시대 손권이 오나라의 수도로 삼은 이래 6개 왕조, 10개 정권의 수도가 되어 ‘육조고도 십조도회(六朝古都 十朝都會)’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북쪽은 거친 장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다. 제갈양도 난징을 보고 “종산(鐘山)에 용이 서려 있고, 석두(石頭)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으니 실로 제왕이 자리 잡을 땅”이라고 극찬했다. 오의 손권, 명의 주원장, 태평천국의 홍수전, 중화민국의 쑨원과 장제스 등 숱한 영웅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았다.

    장강 북변에 자리 잡은 양저우는 강북과 강남을 잇는 요지로 대운하 건설 이후 크게 부유해졌다. 당나라 시인 장호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양저우에서 살다 죽는 것만이 합당하다”고 노래했다. 양저우에 온 수양제는 수도 낙양에 되돌아가지 않았고, 건륭제는 수서호(瘦西湖)의 별장에서 휴가를 즐겼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운하의 古都

    강북의 경극과는 다른 쑤저우의 쿤취(昆曲), 전통 방식으로 옷감을 만들고 있는 장쑤성 저우장의 여인, 쑨원의 묘가 안치된 난징의 중산릉(中山陵).

    쉬저우(徐州)는 삼국지에서 유비가 다스리던 서주다. 쉬저우는 장강과 회하 사이의 비옥한 화중 평원을 끼고 있고, 교통이 편리해 백만 대군을 육성하는 최적지였다. 또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고, 초패왕 항우의 근거지였다. 이 땅을 두고 후한말 조조, 유비, 여포가 다투었고, 먼 훗날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결전을 벌였다.

    이외에도 창저우(常州), 전장(江鎭), 우시(無錫) 등 여러 지역이 풍요를 누리며 국제도시 상하이의 배후지역으로 눈부신 성장을 한다.

    하지만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장쑤성은 평화로운 때에는 번영을 누렸지만, 난세에는 중요 전쟁터가 되었고 대량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삼국시대 조조는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서주대학살을 벌였다. 너무 많은 시체로 강이 막혀 흐르지 못할 정도의 대학살이었다. 명말청초 베이징을 점령하고 남하한 청나라 군대는 장쑤성에서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라는 대학살을 벌였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은 중국인들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6주에 걸쳐 난징대학살을 벌였다. 지난해 중국은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국가추모일로 지정했다. 시진핑 주석은 ‘대도살희생동포 기념관’을 참관하며 “(일본이) 역사 범죄를 부인하는 것은 다시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한국 영화 ‘명량’이 예정보다 2주 늦춰진 12월 12일 중국에서 개봉한 것도 난징대학살 추모일에 맞춰 항일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겠냐는 해석이다.

    장쑤성의 역사는 치세의 화려한 번영과 난세의 처참한 학살로 점철된다. 좋은 위치에서 풍요를 누리는 장쑤성의 행운이자 불운이다.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인 장강은 강북과 강남을 매우 이질적인 지역으로 갈라놓았다. “강북 사람은 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고, 강남 사람은 쌀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생활방식까지 다르다. 장강은 장쑤성을 관통한다. 같은 장쑤성이라도 쉬저우를 위시한 강북 지역은 중원 문화권이고, 난징·쑤저우 등 강남 지역은 남방 문화권이다.

    평야지대인 쉬저우는 중요한 곡창지대였지만, 자연환경의 변화와 함께 쇠퇴했다. 황하가 물길을 바꾸고 기후가 변하며 농업생산량이 감소한 탓이다. 반면 개혁개방 후 장강삼각주 지역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요한 상공업지대로 발전했다. 장강 이남의 난징, 쑤저우, 우시 등이 상하이의 배후지역으로 성장하자 남부와 북부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장강 바로 북쪽에 위치해 ‘강북의 강남’이라 불릴 만큼 번영을 누렸던 양저우조차 이제 가난하고 낙후한 지역으로 취급받는다.

    장쑤성 남부와 북부는 경제적으로 분단됐다고 할만하다. 여행 가이드북에서도 장쑤성의 북부는 거의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

    한편 장쑤성의 도시들은 역사적으로 독자성을 강하게 유지했다. 중원이 빠른 속도로 중앙집권화를 이룬 것에 비해, 강남 지역은 토착 호족이 제각기 세력을 형성했다. 손권의 오나라는 강남 호족의 연합체적인 성격이 강했다. 중앙집권을 일찍 이룩한 위와 촉에 비해 오는 잦은 내란에 시달렸고 대외공략에 소극적이었다.

    이질적인 강북·강남 지역의 행정적 병합, 지역 간 경제 격차, 뒤늦은 중앙집권화, 독자적인 토착 호족, 강한 개성 등이 모두 종합적으로 작용해 장쑤성 사람들은 애향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쑤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 사람들은 웬만하면 동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싱글벙글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하는데, 장쑤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입니까?”, “장쑤인데요”, “그렇군요” 하고는 그만이다. 대화를 더 이어가더라도 “장쑤 어디입니까?”라고 묻고는 “참 좋은 곳이지요” 하고는 끝낸다. 그래서 장쑤 사람의 애향심에 호소하면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왕하이팅,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 중에서

    “아츠꿜라?”

    “밥 먹었어요?”라는 뜻의 중국 인사인 “츠판러마(吃飯了?)?”의 난징 사투리다. 귀여운 난징 아가씨는 말도 참 예쁘게 했다. 얼굴은 생글생글, 말투는 사근사근. 인사만 들어도 마냥 흐뭇해졌다.

    미녀는 돈을 좋아해

    장쑤성은 미녀로 유명하다. 처음 장쑤성에 갔을 때는 생각보다 별로 미녀가 없어서 실망했지만, 차츰 헛된 명성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쑤성 여자는 비교적 싹싹한 성격에 강남의 부드러운 말투 덕분에 실제 미모보다 더 예뻐 보인다. 장쑤성에서도 유명한 쑤저우 미녀 역시 달콤하고 부드러운 쑤저우 사투리 덕을 보았다.

    그런데 미녀의 고장 쑤저우에서 기막힌 말을 발견했다. 자동차의 뒤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女人一生只愛兩種花,一是有盡花,二是錢量花!’

    ‘화(花)’는 ‘꽃’이라는 뜻도 있지만, ‘쓰다’는 뜻도 있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다. 따라서 이 말은 ‘여자는 평생 두 가지만 사랑한다. 하나는 돈이고, 또 하나는 돈을 펑펑 쓰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아, 결국 미녀는 돈을 좋아하는 걸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본주의적인 중국을 보여준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운하의 古都

    서양 관광객이 삼륜차를 타고 쑤저우를 둘러본다.

    공교롭게도 장쑤성을 의미하는 ‘소(蘇)’는 소비에트를 뜻하기도 한다. 소비에트의 중국어 음차가 ‘쑤웨이아이(蘇維埃)’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회주의적인 글자를 약칭으로 삼은 지역이 가장 자본주의적인 셈이다. 참으로 통렬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쑤성의 화시(華西)촌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마을로 손꼽힌다. 건평 400~600㎡의 유럽식 저택이 즐비하고, 고급 외제차들이 굴러다닌다. 으리으리한 74층 5성급 호텔의 60층에는 1t짜리 황금소를 놓았다. 돈을 들고 춤을 추며 돈 자랑하는 공연도 있다.

    우런바오(吳仁寶) 화시촌 촌서기는 독특한 행복론을 피력했다. 행복을 위해서는 5가지, 즉 ‘돈, 자동차, 집, 자녀, 체면’이 있어야 한단다. 철저하게 물질적이다. 꿈이나 친구 따위는 거론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유물론이 ‘돈밖에 없다’는 유전론(唯錢論)으로 변한 걸까.

    개혁·개방은 장쑤성에 다시 번영을 가져다줬다. 이제 장쑤성은 중국 내 GDP(국내총생산) 2위로 광둥성에 버금가는 부유한 지역이다. 그러나 급속한 개발 속에서 잃은 것도 많다. 쑤저우는 한때 390개의 다리와 200개의 원림이 있는 아름다운 운하 도시였다. 그러나 수로보다 육로가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운하가 복개돼 전통적인 개성미가 크게 파괴됐다. 여행안내서 ‘론리플래닛’은 현재의 쑤저우에 실망한 나머지 독설을 퍼붓는다.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건설된 현대 중국의 여느 도시처럼 매력 없고 보기 흉한 쑤저우에는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지은, 못생긴 현대 건축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수많은 전통 촌락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개혁·개방이 시행된 지 20여 년이 지난 2000년만 해도 중국에는 360만여 개의 전통 촌락이 있었지만 2010년엔 270만 개로 90만 개나 줄었다. 환산해보면 매일 250개의 촌락이 사라진 셈이다. 2014년 중국 주택건설부는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1만2000개 전통 촌락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아직껏 연명해온 89만 개의 전통촌락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촌락들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쑤저우 인근의 퉁리(同里), 저우장(周莊) 등은 옛 운하마을의 정취가 여전히 남아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갈 때 입장료를 내야 한다. 옛 모습을 지키는 대가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마을 자체가 민속촌 또는 테마파크로 변했다.

    장쑤성과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은 일찍이 인민과 공산당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인민이라는 물속에서 공산당이라는 물고기가 살 수 있다. 그러나 고래처럼 거대해진 물고기는 오늘날 조그만 물웅덩이 따윈 안중에 없는 걸까.

    국공내전 초반 마오쩌둥의 홍군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피해 숨 가쁘게 도망 다녔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우리가 언젠가는 중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전국을 떠돌아 더부살이하면서도 “한실을 중흥하겠다”고 큰소리친 유비 같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진짜로 대륙을 통일해 천하의 3분의 1만을 차지한 유비를 넘어섰다.

    국공내전은 장쑤성에서 결판났다. 마오쩌둥은 회해 전투에 승리하고 장강을 건너 난징의 국민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마오쩌둥은 적벽에서 패해 장강을 건너지 못한 조조도 넘어섰다. 한편 장제스는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 장강을 참호 삼아 강남을 지킨 손권만 못하다.

    두 영웅의 승패가 역량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천하를 움직인 것은 바로 민심이었다. 국민당은 천하를 거의 장악했으나 일찍부터 부패했다. 국민당은 전쟁을 핑계로 민중의 재산을 멋대로 수탈해 ‘백비(白匪, 국민당 도적)’라고 불렸다.

    이에 반해 홍군은 민중에게 가능한 한 피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도망 다니면서도 마을 일을 도왔다. 꼬마들은 홍군을 ‘백비나 일본군과 싸우도록 도와주는 사람’ ‘우리 군대’라고 생각했고, 촌로들은 ‘쑤웨이아이 선생’을 만나러 홍군을 찾아왔다. 국민당은 땅을 차지했으되 민심을 잃었기에 땅마저 잃었고, 공산당은 땅이 없어도 민심을 얻었기에 땅도 얻었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운하의 古都
    김용한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6년 뒤면 중국 공산당은 창당 100주년을 맞는다. 현재로서는 승승장구하지만, 초심을 잃은 공산당은 부패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이제 중국인은 공산당을 ‘우리’가 아닌 ‘그들’로 생각한다. 민심의 향방에 따라 중국의 앞날은 달라질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 亦可覆舟,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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