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곡 이이가 문제를 냈다. 서애 류성룡은 문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가장 정확한 답을 내놨다. 멸망이 눈앞에 있던 때, 서애는 조선을 살릴 답을 머리가 아닌 손과 발에서 끄집어냈다. 이순신을 알아본 건 류성룡이다.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찌 됐을까.
서애 류성룡의 초상화
선조 때 인물로 조선 중후기 사상사의 기둥이던 율곡 이이(1536~1584)의 말이다. 이이는 탐욕과 권력욕에 눈이 먼 리더, 국가와 지배층의 수탈로 죽어가는 국민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 이이는 “반드시 토붕와해(土崩瓦解·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짐)할 것”이라고 준엄히 경고했다. 그의 예측은 10년도 안 돼 적중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데,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다면 백성이 없는 것이며, 백성이 없다면 나라도 없는 것이다(伏以民依於食, 國依於民, 無食則無民, 無民則無國).”
이이는 ‘위에선 빼고, 아래는 더해주는’ 방식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기득권 공동체의 집요한 저항에 꺾였다. 이이는 한창 나이인 마흔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이이의 개혁론에 대해선 비판과 찬사가 공존한다. 어떤 이는 ‘구체성이 없는 선언적 수준’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이익 같은 이는 “나라가 열린 이후로 세상일을 아는 이는 오직 율곡과 반계(유형원) 뿐이다”라며 이이의 사상을 극찬했다. 이익은 율곡 이후에 나온 수많은 개혁사상가·실천가의 문제의식이 율곡이 던진 화두를 넘지 못했다고 봤다.
‘조선의 장자방’
이순신(1545~1598)의 친구로 널리 알려진 서애 류성룡(1542~1607)은 율곡의 개혁론을 실천해 조선을 구하고자 했다. 류성룡은 율곡이 밝힌 현실의 난제를 적극 살피면서 해법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이이가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이라면, 서애는 출제 의도를 간파하고 가장 정확한 모범답안을 작성한 수제자였다.
이이는 조선 제왕학의 획을 그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고, 개혁사상의 뼈대를 세운 ‘만언봉사(萬言封事)’와 ‘만언소(萬言疏)’를 써서 조선 중후기의 이데올로그가 됐다. 서애는 율곡의 실패와 기득권 세력의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방식이 불러온 사상 초유의 국난을 겪으면서 뼈를 깎는 반성의 기록인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서애는 전란의 한복판에서 율곡의 화두를 낱낱이 파헤쳐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해 나라를 구하려 애썼다. 서애는 율곡이 예견한 위기보다 훨씬 더 살벌했던 비극의 시대를 살았기에 그의 저작이나 행동은 율곡의 그것과는 달리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손과 발에서 나왔다. 그의 주장에는 백성의 분노와 핏물이 튀는 전쟁터의 아우성이 담겨 있다.
류성룡에 대해 스승인 퇴계 이황은 일찍이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했다. 정조(正祖)는 그를 가리켜 “참으로 우리나라의 유후(留侯·장자방)”라고 평했다. 류성룡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즉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임진왜란 3대 대첩(이순신 한산대첩, 권율 행주대첩, 김시민 진주대첩) 뒤엔 지인지감의 천재 류성룡이 있었다.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무명의 인물인 정5품 형조 정랑 권율을 4단계 뛰어넘은 정3품 의주 목사로, 종6품 정읍 현감 이순신을 6단계 뛰어넘은 정3품 전라 좌수사로 발탁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 허균은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한 한 건(件)이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라고 평가했다. 이익은 이순신을 평가하면서 “진실로 류성룡이 결연히 (이순신을) 발탁하지 않았다면 개천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정조, 허균, 이익은 이순신이라는 고리를 통해 류성룡을 ‘하늘이 낸 조선의 장자방’이라고 본 것이다.
이이와 이순신은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먼 친척이 아니었다. 이이가 이순신보다 7세 위지만 가문의 항렬로는 이순신이 아저씨뻘이다. 이순신이 38세 때(1582년)인 전라도 발포만호(종4품) 시절 군기경차관 서익의 불시검열로 파직되자 선조의 비서 노릇을 하던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이조판서 이이를 찾아가 해법을 모색토록 조언했다. 이이가 이순신의 명성을 듣고 류성룡에게 주선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친척이라 만나볼 수는 있지만, 관직을 임명하는 자리인 이조판서이기에 만날 수 없다”며 거부했다.
1583년 이이가 병조판서로 북방의 여진족 침입 대비를 고심하던 때, 이순신은 그 현장인 함경도 건원보에서 여진족 울지내를 유인해 격퇴, 이이의 시름을 덜어줬다. 이이의 후원을 받아 출세할 상황이었으나 이순신은 부친상을 당했고 이이도 곧 병사하면서 길이 끊어졌다. 아마도 이이가 더 오래 살았다면 류성룡이 아니라 이이가 이순신의 후원자가 됐을 것이다.
대장감을 알아보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관계는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에 해당한다. 허균은 “나의 본가는 건천동(乾川洞·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에 있었다. 겨우 34가구뿐이었지만 저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근래는 류성룡, 나의 형 허봉(許?·1551~1588), 이순신, 원균이 한 세대”라고 했다. 허균에게 류성룡, 이순신, 원균은 한마디로 ‘동네 형들’이었다는 얘기다. 나이는 원균(1540년생), 류성룡(1542년생), 이순신(1545년생), 허봉(1551년생) 순이다. 그들이 동시에 거주하며 함께 놀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34가구밖에 없었다니 서로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관계로 보인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특히 긴밀했다. 류성룡과 이분(이순신의 조카)이 남긴 기록이 그 근거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기록에는 류성룡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건천동)에 살아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고 했고, “이순신이 글을 잘 알지만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고, 대장(大將)이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도 “류성룡이 어렸을 때 같은 동네에 살아 친구였기에 장수감이던 이순신을 알아보았다”고 기록돼 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은 어릴 때 똑똑하고 활달했으며, 틀에 구속받지 않았고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놀았다”라고 썼다. 류성룡이 기록한 이순신의 모습과 류성룡 자신의 모습도 비슷하다. 훗날 이순신의 사돈이 되는 홍가신은 청소년기에 18세의 과거 수험생 류성룡과 관악산에서 함께 공부했다. 그때의 류성룡에 대해 “얼굴빛은 부드러웠으나 말과 행동은 호걸 같았고, 때때로 농담도 잘했다”고 기억했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어린 시절이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유유상종이라 할까.
그러나 이들이 언제 만나 얼마나 같이 놀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순신은 건천동에서 태어났지만 상주 방씨와 결혼한 21세 이전에 어머니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이주했다. 류성룡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류중영의 관직 변동으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지냈다. 그의 서울생활은 서울 동학에서 공부한 13세부터 20세 전후까지, 그리고 과거 급제 이후다.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지방을 왕래하며 살았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나이 차이를 고려하면 이순신이 9~16세이던 시기에 서울에서 만난 듯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기록도 있다.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31세의 류성룡과 27세의 이순신이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즉 류성룡이 홍문관 관리로 근무하다가 잠시 귀향하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후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들이 탄 배에서 술 취한 권세가의 하인이 행패를 부렸다. 조용히 지켜보던 이순신이 강을 건넌 뒤 그를 제압하고 목을 베었다. 그 과정을 지켜본 류성룡은 대장감이라고 생각하며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뒤 류성룡이 군문(軍門)에서 이순신을 보고 그가 한강변의 그 대장감이었음을 알아봤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싱크탱크’
2006년 12월 한국국학진흥원 김종석 박사가 장판각에 보관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 목판을 보여주고 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은 바람 앞의 촛불 같던 조선의 역사를 바꿨다. 이순신의 장재(將材)와 문력(文力)을 알아본 류성룡은 그를 지켜보며 후원했다. 1586년 42세의 종6품 사복시 주부 이순신을 종4품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추천했고, 47세의 종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종3품 전라좌수사로 추천·발탁해 ‘불멸의 이순신’이 될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이 서로 존경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류성룡을 걱정하며 점을 치는 대목, 꿈속에서 만나 나라를 걱정하는 기록도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난중일기’와 ‘징비록’에 임진왜란의 시작부터 끝까지, 7년 동안의 일을 담았다. ‘난중일기’에는 친구이자 멘토인 류성룡이 자신을 후원하는 대목, 이순신이 류성룡을 그리워하며 걱정하는 광경, 서로 소통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함께 고뇌하는 장면을 기록해놓았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불패의 명장으로서 이순신의 모습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뒀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내가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훗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予其懲而毖後患)고 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쓴 까닭이다.”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시작한다. 이순신이 부임한 지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유비무환의 자세로 쉴 틈 없이 관할지역의 현장을 점검하고 무기와 전선을 살피던 시기였다. 류성룡에 대한 얘기는 그해 3월 5일 일기에 처음 등장한다.
좌의정(左台·류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읽어보니, 수전(水戰)·육전(陸戰)·화공(火攻) 등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논의해놓았다. 진실로 세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이론이었다. -1592년 3월 5일
현충사에 보관된 보물 제326호 충무공 이순신 장검.
류성룡이 병법서를 편집·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장자방’이라는 표현처럼 병법에 탁월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과 같은 도체찰사(都體察使), 국무총리와 같은 영의정으로 활약하면서 고대 중국의 병법은 물론 당시의 최신 병법인 척계광의 병법까지 받아들여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하고, 속오법(束伍法)을 실시한 것에서도 그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전시(戰時) 행정가로도 천재적 역량을 발휘했다. 이순신이 서남해에서 실시한 둔전(屯田), 섬을 활용한 염전(鹽田) 개발 노력도 부국강병을 위한 조치였다. 그 과정에서 류성룡과 이순신은 군사전략은 물론 전시 경영 노하우까지 공유하며 서로에게 싱크탱크가 됐다.
知己知彼와 知彼知己
류성룡이 이순신에게 전한 병법은 난중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손자병법’을 상징하는 그 유명한 문장 ‘지피지기(知彼知己)’가 두 번 나온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已知彼, 百戰不殆)! -1594년 9월 3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고(知己知彼, 百戰百勝),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知己不知彼, 一勝一負).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不知己不知彼, 每戰必敗).
-1594년 11월 28일 일기 뒤의 메모
손자병법의 ‘모공(謀攻)편’과 ‘지형(地形)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공’에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은 모르지만 나를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라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와 손자병법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다. 난중일기에서는 ‘지기지피(知己知彼)’라고 했는데, 손자병법에서는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했다. ‘나와 적’‘적과 나’의 우선순위가 다르다. 이순신이 잘못 기억하고 메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손자병법에도 두 번씩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이순신이 두 번씩이나 잘못 기억하고 썼을 리 없다.
그 배경엔 류성룡이 있다. 류성룡은 병법에 무지해 패전하는 장수들을 위해 자신이 과거에 쓴 ‘증손전수방략’을 복기하고 다시 정리해 1594년 6월 선조에게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라는 이름의 병법 요약집을 올려 장수들에게 배포하도록 했다. 바로 그 ‘전수기의십조’에 손자병법과는 다른 이순신의 ‘지기지피(知己知彼)’가 나온다.
병법에 이르기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고, 나를 알지 못하고 적을 알지 못하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진다(知己知彼, 百戰百勝. 不知己不知彼, 百戰百敗)’고 했다. 이른바 나를 알고 적을 안다는 것은 적과 나의 장단점을 비교해 헤아린다는 뜻이다(所謂知己知彼者, 較量彼己長短).
-‘전수기의십조’
류성룡은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지기지피(知己知彼)’라고 썼다. 이순신과 같다. 난중일기의 날짜와 메모의 순서로 보면 이순신이 ‘전수기의십조’를 읽고 메모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순신이 류성룡의 표현을 따른 것은 ‘나를 아는 것’을 우선시하는 류성룡의 시각에 동의했음을 보여준다.
劍銘에 얽힌 사연
난중일기에는 이것 말고도 이순신이 류성룡의 지혜를 활용한 증거가 무수히 많다. 두 사람은 수시로 편지를 교환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그 단적인 사례를 하나만 더 보자. 현충사에는 1594년 4월에 제작된 약 2m 길이의 장검 두 자루가 있다. 보물 326호로 지정된 이 칼에는 이순신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결의가 담긴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다. 소설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이 소설을 쓰기 전에 매일 찾아가 보았다는 그 칼이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떤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과 바다를 물들인다.)
그런데 1593년 9월 15일 일기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있다.
兵鋒以至, 勢如風雨, 兇孼餘魂, 逃遁不暇.
(군대의 날카로운 기세가 이르는 곳마다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았다. 흉악한 무리들의 남은 넋들은 달아나 숨을 틈이 없었다.)
尺劍誓天, 山河動色.
(한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떤다.)
出萬死不顧, 一生之計憤憤不已.
(출전하여 만 번 죽을 일을 당했어도, 한 번도 살고자 생각하지 않았다. 분노하고 분노하는 마음 끝이 없다.)
현충사 장검의 ‘三尺誓天, 山河動色’은 난중일기에 한 글자만 바뀌어 ‘尺劍誓天, 山河動色’이라고 돼 있다. 이 메모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언뜻 이순신의 승전 경험과 각오, 자세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메모는 류성룡의 글이다. 1585년, 선조의 명으로 중국 송나라 명장 악비의 전기 ‘정충록(精忠錄)’을 편찬할 때 류성룡이 발문을 썼다. 발문은 책 끝에 내용 요약 혹은 간행 관련 사항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 발문에 이순신의 메모가 나온다.
이순신에게 악비는 나라와 시대를 떠나 존경스러운 선배 장수였다. 악비는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이순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순신과 악비의 삶도 거의 유사하다. 그런 삶 때문인지 시호도 둘다 ‘충무(忠武)’다. 이순신은 류성룡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정충록’을 읽고 싸움의 기술과 리더십을 공부했고, 멘토 류성룡의 글을 읽으며 각오를 다졌고, 이를 자신의 검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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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은 후대 사람들은 난중일기가 있어 이순신의 치열하고 고독한 삶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류성룡이 없었다면, 또 그의 ‘징비록’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결코 개천을 벗어날 수도, 군신(軍神)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이순신은 그를 무한 신뢰한 류성룡과 자신의 책무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온몸이 부서져라 실천한 이순신, 그 두 사람이 만든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