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넘은 전국의 노래다. 굽이굽이 서러운 삶을 어루만졌다. 이 노래는 이난영의 목소리로만 완성된다. 이난영의 묘는 삼학도에 있다.
목포 도심 루미나리에.
지금 나는 2월과 3월 사이의 한가로운 오후 호남선에 올라 목포로 가는 중이다. 유달산, 삼학도를 보러 간다. 목포 오거리의 밤을 보러 간다. 머지않아 나는 광주로 갈 때, 목포로 갈 때 구불구불 느리게 달리는 이 선로 대신 쾌속의 KTX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곧, 새봄에 말이다. 그동안 수많은 선로를 이용하면서, ‘진주라 천~리길’, 그 머나먼 길과 ‘목~포는 항구~다’, 그 유장한 호남선을 가장 아득하게 여겼으나 이제 그 한 축이 사라지는 셈이다.
용산역에서 기차에 오를 때부터 KTX 호남선에 대한 안내문과 자료가 곳곳에 눈에 띄고, 기차 안에 비치된 월간지에도 그 정보가 제공되니, 대전까지는 눈을 감고 애써 잠을 청한 나는 KTX 열차가 아직은 평균시속 100㎞에 불과(?!)한 선로를 따라 논산으로, 익산으로, 광주로, 목포로 가는 동안 여러 안내문과 책자와 인터넷을 활용해 이 호남선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객차 안의 대화는 거의 전라도 말투로 바뀌었는데, 어떤 할머니는 잠결에 가족의 전화를 받고는 “으잉, 사방에 암것도 안 보잉께, 워디를 지나가나, 짐제(김제)를 지나가나 싶구마이”라고 말했다. 눈 들어 밖을 보니, 만경평야다. 사방이 탁 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지평선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KTX 호남선의 새로운 선로가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목포역.
호남선은, 열차가 서울 용산역에서 대거 출발하지만, 정확히는 경부선 대전역에서 분기해 충남, 전북, 전남을 관통한 후, 저 멀리 목포에 이르는 철도를 말한다. 조선총독부가 1913년 개통했다. 직접적인 목표는 호남 지방의 넓은 평야와 바다에서 어마어마하게 집산되는 농수산물을 수탈하기 위한 교통로의 확보였으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자국의 크고 작은 섬을 철도로 연결하면서 중앙집권통치를 완료했다. 그 연장선에서 부산과 마산과 목포를 축으로 삼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과 만주와 러시아까지 그들의 신경망을 최대한 확장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로서 경인선, 경부선, 경원선, 경의선을 건설했거니와 호남선 또한 농수산물 수탈은 물론 그 이상의 제국적 그랜드 디자인의 한 요소로 시공한 것이다.
그러나 곧 살피겠지만, 이 선로는 일제가 설계하고 완공했으나 대한제국 때부터 국가와 민간이 주체적으로 철도를 부설하고자 하는 운동이 있었다. 이를 주목해야 한다. 호남선의 계획과 공사와 운행은 여느 선로와는 다른 호남 지역의 특수한 정치적 정황을 담고 있다.
21세기의 오늘에까지 국토 계획과 활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근대 교통체제는 1883년 6월 치도국(治道局) 설치로 시작됐다. 곧 대한제국을 수립해 1899년 경인철도, 1905년에 경부철도를 개통한 것이 한반도 철도교통의 윤곽이다.
지금 ‘호남선’이라고 하는 선로 역시 이 무렵 일단 계획이 나온 것으로 1896년 프랑스 철도회사가 ‘경성~목포’ 부설권을 요구하면서 비롯했다. 대한제국은 외세에 의한 주요 자원의 침탈 계획 수립을 억제하고자 1898년 1월 철도 및 광산 등에 관한 허가를 무기한 금지하는 조처를 발표했지만 바로 그해에도 영국 회사들이 부설권을 요구했다. 사정이 이렇자 대한제국은 스스로 철도 부설과 경제적 이권을 활용하기로 하고 농상공부 주관으로 경성-목포를 잇는 경목선(京木線) 계획을 수립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호남선 종착 표석.
대한제국은 경목선 건설 등을 관장할 기구로 1898년 7월 철도사(鐵道司)를 설치했으며 곧 이를 철도국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재원을 확보하지 못해 계획만 수립하고 공사는 시작도 못했는데, 1904년 6월, 사업가 서오순이 부설권을 얻어 ‘경목철도’라는 이름 대신 ‘호남철도’를 사업명으로 삼고 부설운동을 개시했다. 서오순을 중심으로 한 호남철도주식회사 창립위원들은 청원서에서 “금차(今此) 철도는 전국의 혈맥(血脈)이 소계(所係)요 독립의 원인(原因)이 재시(在是)”라고 썼으니, 비록 제안과 기초 측량에 그치고 본공사는 일제가 추진했으나 호남철도 부설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전국의 血脈이 所係요…”
1909년 4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912년에 준공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손발 노릇을 한 내무대신 송병준이 1908년 11월, 전라남북도에 비밀훈령을 보내 민간의 철도 부설운동을 방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부설운동은 좌초되고 서오순의 부설권도 취소된다. 이렇게 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오호(嗚呼)라 한국동포여 이천만(二千萬)의 민족이 유(有)한 제공(諸公)이 차(此) 호남철도(湖南鐵道) 일개(壹個)를 득유(得有)치 못하니 제공(諸公)의 전도(前途)를 엇지 인언(忍言)하리오”라고 썼다.
곧 일제는 서오순에게 약간의 배상액을 일방적으로 던져주고 부설권을 인수했다. 일제는 1911년 7월 대전과 연산 사이를 우선 개통하는 것으로 공사를 시작해 1914년 1월 전 구간을 완공하고 목포에서 호남철도 전통식(全通式)을 열었다. 일제가 최종적으로 완공하고 또 곡창의 수탈과 그들 나름의 대륙 통치 계획의 일환으로 호남선을 장악했지만 그 이전에 좌초된 역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일제는 호남선과 경부선을 연결할 때 선로의 진행 방향을 서울이 아니라 부산으로 꺾었다. 호남의 쌀을 부산으로 직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대전역에서 열차를 서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정차 시간이 다소 길었는데 이때 승객들이 잠시 내려서 대전역의 가락국수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목포 옛 도심.
그러다가 1936년 서대전역이 당시 대전 서쪽 외곽에 준공됐다. 지금의 호남선이 이 축으로 달린다. 호남선뿐만 아니라 여수로 가는 전라선, 대천과 장항으로 가는 장항선,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잇는 대전선(대전삼각선)이 이 역을 이용한다. 1978년, 널찍한 한밭(大田) 북부에 거의 모든 열차가 잠시 대기 후 신호 조정을 받는 광활한 대전조차장이 완공된 이후 경부선은 대전역을 이용하고, 호남선은 서대전역을 이용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호남선은 1913년 개통 이후 오랫동안 단선철도였는데, 오랜 기간의 공사 끝에 복선화가 완료됐다. 다른 선로와 달리 호남선은 대한제국 정부와 민간이 계획을 추진했고, 그 권리가 강제로 박탈된 후 일제에 의해 식민 수탈의 근간이 됐으며 광복 이후, 정확히는 산업화의 도정에서도 이 지역에 대한 홀대와 차별로 인해 한동안 단선으로 운영됐다.
단선이 복선으로 오롯이 완공되는 데는 반세기가 걸렸다. 1968년 시공해 2003년 완공한 것이다. KTX의 완전 개통 또한 경부선 KTX 개통 후 11년 만의 일이다. 극심한 인구 편차와 산업화의 정도에 따른 교통 및 수송량의 절대적 차이가 엄연해 발생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러한 지역별 차이가 오랫동안 존재했다.
광주를 지나면서부터 확연히 20세기 후엽의 풍경이 나타난다. 나주, 함평을 거쳐 열차는 느릿느릿 목포역으로 들어갔다. 열차가 도착한 곳에는, 목포역이 호남선의 거점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었다.
목포를 겨울과 봄 사이에 걸어보았다. 광주를 벗어나 나주, 함평을 지나면서 목포가 다가올수록 내 마음속에서 옛 노래 ‘목포의 눈물’이 잔잔한 바다 위의 일렁거리는 파도처럼 미세하게 들려왔다. 부산이 그렇고 또한 인천이 그렇듯이 항구는 노래를 낳는다. 노래를 낳는 항구 하면 역시 목포이고, 목포의 노래라고 하면 역시 ‘목포의 눈물’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1935년 발표한 곡이다. 문일석이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했다. 노래는 이난영이다. 이난영 이후 수많은 사람이 불렀지만 이 노래는 이난영의 목소리로 완성된다. ‘왜색 곡조’라 해 석연치 않은 질타를 받은 적도 있지만, 오히려 이 곡은 일제강점기 목포 사람들의 정서적 일체감과 눈물의 저항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일경들이 치안 방해를 들어 금지했을 정도였고, 산업화 시절에는 서울로 인천으로 돈 벌러 떠나온 사람들의 애틋한 탈향(脫鄕) 의식이 사무쳐 흐르던 곡이었으며, 민주화 시절에는 ‘인동초 노래’로 널리 불린 바 있으니, 목포 하면 ‘목포의 눈물’이요 특히 이난영의 목소리가 아니면 ‘목포의 눈물’도 아닌 것이었다.
목포가 낳은 노래는 전래하는 민요 또는 그러한 가락에 새로운 생활양식을 얹은 신민요가 있고 일제강점기의 행진곡풍 가곡과 대중가요가 있다. 행진곡풍의 가곡은 대체로 생활의 개선과 활기찬 삶을 그렸는데 일제의 식민 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1930년대 ‘목포 행진곡’ 같은 노래가 그렇다. 광복 이후에는 조희관 작사 이동욱 작곡의 ‘유달산 아침’, 박정은 작사 이동욱 작곡의 ‘유달산 낮’, 박정은 작사 이동욱 작곡의 ‘유달산 저녁과 밤’ 같은 노래가 만들어졌다. 1960년대 초반에는 권일성의 시에 선율을 입힌 ‘목포시민의 노래’가 불려졌다.
이러한 노래들은, 곡조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서민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지는 못했다. 어떤 곡은 관 주도의 행사용으로만 불렸다. 이를테면 1980년대 목포시는 너무나 구슬픈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기찬 노래 ‘목포의 웃음’ 같은 곡을 만들었고 여러 단체에서도 이 같은 찬가를 다수 만들어 배포했으나 행사장에서는 제법 울려 퍼졌으되 세시의 풍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목포청년회의소에서 만들어 배포한 ‘목포의 찬가’, 목포시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목포지부장 최덕원이 시인 김일로와 노산 이은상에게 의뢰해 가사를 얻고 서만종이 작곡한 ‘예향목포행진곡’, 강석화 작사 김수환 작곡의 ‘목포청소년의 노래’, 목포를 대표하는 작가 박화성이 가사를 짓고 ‘목포의 눈물’ 작곡가인 손목인이 만든 ‘목포의 찬가’ 등은 행사용으로 쓰이거나 한두 번 쓰이다가 사라졌다.
이난영, 옴무 쿨숨을 만나다
어떤 목적으로 노래를 지어서 그것으로 민간의 오랜 정서에 깃든 선율을 대체하려는 것만큼 비문화적인 것도 없거니와 그런 의도에 의해 대체될 만큼 ‘목포의 눈물’의 역사가 가벼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86년, 박화성이 지은 ‘목포의 찬가’는 “육지도 열리고 바다도 열려 세계의 사연이 오고 가는 곳/ 내 고향 목포는 문화의 고장 알차게 뻗어나갈 미래를 향해/ 나가자 더 나가자 힘차게 더 힘차게”라는 가사인데, 관가의 행사나 이벤트 말고는 이런 노랫말을 일상에서 부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의 ‘목포의 눈물’, 박남포 작사 이봉룡 작곡의 ‘목포는 항구다’, 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의 ‘목포의 달밤’, 천지엽 작사 송운선 작곡의 ‘영산강 처녀’, 박춘석 작사 작곡의 ‘목포 블루스’ 같은 가요가 목포의 노래가 되거니와 여기에 ‘남행열차’도 포함돼야 한다. ‘남행열차’라는 제목으로는 두 곡이 있다. 노래방에서, 야구장에서, 회갑 잔치에서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로 신나게 울려 퍼지는 김수희의 ‘남행열차’는 1987년 곡으로 정혜경이 작사하고 김진룡이 작곡한 것이다. 또 하나의 ’남행열차‘는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역시 이난영이 부른 “끝없이 흔들리는 남행열차에 홍침을 베고 누워 눈물집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떠나를 가며/ 가엾다 내 청춘을 누구를 주나”라는 가사로 1939년 발표된 곡이다.
그리고 ‘목포의 눈물’이 있다. 1934년 조선일보 후원 ‘자기 고장 노래 가사 공모전’에 문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눈물’이 당선돼 당대의 작곡가 손목인이 노래로 만들어 1935년 열아홉 살의 청초했던 이난영의 목소리로 발표됐다. 발표되자마자 당대 최고의 히트곡이던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앞질러버렸다고 한다.
이후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넘어 전국적인 노래가 되어 현대사 굽이굽이 서러운 삶을 어루만졌다. 이 노래가 서럽다 해, 한이 많다 해, 너무 구성지다 해 다른 씩씩한 노래로 대체해 목포의 노래로 삼아보자고 한 것은 앞서 말했듯 지극히 비문화적이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일을 문화계 내부에서 자생으로 제안한 게 맞을까 의심스럽지만, 설령 관가의 시도에 못 이긴 체했다고 하더라도 시늉만으로 그쳤어야 할 일이다.
오거리에서 시를 짓다
오히려 이 노래를 문화적 사건으로 삼은 예술가가 따로 있다. 2014년 6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상실과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중동미술 특별전을 기획한 독일 출신 큐레이터 샘 바더윌과 레바논 출신의 틸 팰라스다. 그들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배어 있는 한과 상실의 정서에서 중동현대미술전의 착상을 얻었다”면서 식민과 전쟁을 공통적으로 경험한 한국의 이난영과 이집트의 옴무 쿨숨이라는 두 여가수의 가상 만남을 통해 ‘상실과 사랑’이라는 정서를 현대미술로 표현한 전시를 기획했다.
가상의 이야기는 이렇다. 1967년, 가수 이난영은 미국 CBS 방송사의 유명 프로그램 ‘에드 설리반 쇼’에도 출연한 바 있는 딸들(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김시스터즈)을 만나러 뉴욕에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파리를 경유한다. 여기서 이난영은 이집트의 가수 옴무 쿨숨의 공연을 보는데, 둘은 한순간에 ‘솔 메이트’가 되고 공연 이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다.
전쟁과 가난과 핍박으로 서러웠던 이집트와 한국의 현대사, 그 현대사를 여성으로 가수로 살아내야 했던 두 스타는 비록 ‘가상 대화’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미래를 언약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중동의 미술가 18명이 옴무 쿨숨의 다양한 메시지를 안고 광주시립미술관을 찾는다. 이란 출신의 쉬린 네샤트 같은 세계적 미술가들이 충격적인 작품으로 미술관을 채워 제국과 식민, 전통과 현대, 전쟁과 평화 등을 피의 연대기로 거쳐야 했던 한국과 중동의 삶을 다뤘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정답은 없이 수많은 답을 제출하는 것이 문화다. 이러한 문화의 화두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제시됐다는 것 자체가 이 노래의 역사성, 불멸성을 말해준다. 관변의 찬가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목포 오거리는 시인 김지하가 밤을 보낸 곳이다.
그랬는데, 2000년 초부터 10여 년 가까운 복원공사를 진행해 옛 모습을 일부 재현했다. 무려 1243억 원을 들여 평지가 된 삼학도에 흙과 자갈을 깔고 가급적 원형에 가깝게 봉우리를 만든 후 760m의 물길을 새로 냈다. 이렇게 가까스로 지형을 재현한 후 삼학도공원을 기점으로 어린이바다체험과학관, 카누캠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난영공원 등을 조성했으니 이 삼학도의 간척과 해체와 재현만 검토해봐도 목포의 역사, 나아가 한반도 역사의 어떤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이 삼학도에 이난영의 묘가 있다. 원래 경기 파주시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었는데 2006년 3월 25일 유해를 고향 목포로 옮겨 삼학도공원에 새로 심은 백일홍 나무 아래 안장한 것이다. 이 수목장(葬)한 나무 부근에 ‘목포의 눈물’을 비롯한 이난영의 불멸 곡들을 들을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사~공의 배햇~ 노호 래 가아~무을 거리며 사~암 하악 또오~ 파도호 깊이 스~며~ 드느흐흔 데~”
열아홉 살 때 목포에 온 적 있다. 자전거를 타고 춘천을 지나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울진으로, 다시 거기에서 경북 내륙으로 꺾어 영주로, 상주로, 대구로, 다시 거기서 남해안을 따라 마산, 하동, 광양, 보성 지나 광주 찍고, 그 아래로 다시 내려가 목포에 온 적 있다.
자전거를 팔아 한 끼 식사를 하고 남은 돈으로 제주도에 가려고 여객터미널에 갔는데, 뱃삯이 부족했다. 돈을 벌어서라도 제주도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목포역으로 가보았다. 허드렛일이라도 없을까 해 살펴보니 역 건너편에 있는 다방에서 DJ를 구한다고 했다. 숙식도 제공한다 했다.
2층의 다방 이름은, 요즘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줄여 부르는 이름 그대로, 별다방이었다. 별다방 아래에는 별문방구가 있었고 그 건물 3층에는 별당구장이 있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건물을 다 소유하고 문방구와 다방과 당구장을 다 운영하는 듯싶었다. 나는 별다방에서 오디션을 봐 합격했고 별문방구에서 이력서를 사서 빈 칸을 채운 후 별당구장에 가서 최종 면접을 보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다방 주인은 신원이 불확실한 낯선 사람을 쓸 수 없다고 했다.
27년이나 지나 그 건물로 가보니 다방도 당구장도 문방구도 사라지고 ‘임대중’이라는 글씨만 나붙어 있었다. 잠시 건물을 보다가 항구 쪽으로 걸었다. 목포역에서 오거리 방향으로, 또 오거리를 지나 항구 쪽으로 뻗은 대로에는 목포시가 장식해놓은 인공조명(루미나리에)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지금 내 기억에는, 19세의 내 앞으로 거센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와 부서지는 듯하다. 그런데, 정말 그러했는지는 의문이다. 시인 최하림의 글을 읽고, 나 자신의 기억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인 최하림은 “나에게 시 같은 것을 가르쳐준 것은 국어선생님도 아니었고 문예반도 아니었고 선배들도 아니었다. 사리 때의 해안통 거리였다”고 쓴 적 있다. 젊은 날의 최하림은 시인 김지하 등 목포의 문청들과 함께 목포 오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19세 소년의 노래
목포 문화예술의 산실이 바로 오거리의 수많은 다방과 술집과 화랑들이었다. 20세기 중엽의 목포의 삶과 문화를 다룬 ‘항구도시 목포의 추억 1번지, 오거리’ 특별전이 열린 적도 있다. 지금도 그 공간적 자취는 군데군데 남았는데, 실로 왕성한 문화예술이 밤낮으로 피어나는지는, 이번 한 번의 방문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어찌 됐든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본다’는 취지로 설치한 것처럼 보이는 인공조명을 따라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목포의 근대를 압착한 옛 건물을 여러 채 보았다. 일제의 대표적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옥과 당시 일본영사관 건물을 축으로 해 옛 목포 도심의 네모반듯한 지형과 그 위에 남아 있는 한 세기 전의 유산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살펴보면서도, 내가 마음속으로 찾던 것은 19세의 나였다. 열아홉 살의 내가 걷던 곳, 그 아이가 보던 항구의 불빛, 점심을 먹은 후 무안으로 터벅터벅 걷던 소년, 걷다가 낡은 트럭을 운 좋게 얻어 타고 광주역까지 가던 19세의 나 말이다. 트럭을 몰던 나이 든 아저씨는 환타와 카스테라를 사서 19세의 나에게 주면서 객지 돌아다니지 말고 기술을 배워서 기반을 잡으라고 했고, 나는 밤늦게 출발하는 호남선을 탔다.
비둘기호였다. 모든 역에 다 정차하는 비둘기호였다. 자리가 없어서 객차와 객차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서울까지 타고 온 호남선 비둘기호였다. 그 비둘기호의 냄새 나는 곳에 앉아서 나는 환타와 카스테라를 먹었다. 눈물이 났던가. 그것은 기억에 없다. 비둘기호는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다. 어른의 문턱에 갓 들어서서 목포역을 배회하며 제주도 아니면 서울,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서성거리던 19세 아이를 나는 사실 찾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