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어야 시청률 오른다” 불문율
- 종편·공중파·인터넷…매체마다 대세
- 해외 언론도 관심…‘음식 포르노’ 평가도
- 시각 문화 발달, 전통적 性역할 파괴 반영
차승원은 tVN ‘삼시세끼’에 출연해 ‘인기대박’을 터드렸다.
남녀노소 불문 食神
식성 좋은 연예인은 제철을 만난 것 같다. 개그맨 정준하는 대표적 먹방 스타다. 짜장면 한 그릇을 10초 안에 ‘들이마시는’ 실력으로 ‘식신(食神)’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살려 맛집 소개 프로그램을 8년째 진행한다.
배우 하정우는 연기자를 대표하는 먹방 스타다. 유독 먹는 장면을 맛깔 스럽게 연기해 보는 이들의 식욕을 자극한다. 인터넷에는 그의 먹는 연기를 편집한 동영상이 인기를 끈다.
이영돈 PD 역시 먹방 스타로 분류된다. 그가 지금과 같은 대중적 유명세를 얻은 것은 날카로운 고발 전문 PD로서가 아니다. 채널A ‘먹거리 X파일’ 프로그램에서 “제가 직접 먹어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유행어가 된 덕분이다. 이 프로그램은 진행자가 김진 기자로 바뀐 뒤에도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다.
이제 방송가에선 “먹어야 시청률이 오른다”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먹방이 대세가 되자 예쁜 척하기 바빴던 여성 스타들도 먹방 찍기에 여념이 없다. 걸그룹 ‘걸스데이’ 멤버 혜리와 라이벌 그룹 ‘에이핑크’의 보미는 여군 체험 프로그램에서 ‘군통령’의 지위를 놓고 먹방 승부를 벌였다. 걸그룹 해체 후 뚜렷한 활동이 없던 박수진은 음식 소개 프로그램 ‘테이스티로드’를 시즌3까지 진행하며 뒤늦은 전성기를 맞았다.
이들 프로그램을 보면 ‘음식을 약간 남기는 것이 숙녀의 예절’이라는 인식은 구시대 유물이 된 듯하다. 숙녀가 대중 앞에 자기 식성을 마음껏 드러내도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내숭 안 떨고 솔직하다며 찬사를 보낸다.
최근엔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까지 ‘먹방화’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KBS2 ‘해피투게더’는 오래된 포맷으로 시청률이 하락했다. 폐지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야간매점’이라는 먹방 코너를 삽입하며 인기가 되살아났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펀치’는 검찰을 소재로 한 내용이지만 유독 먹는 장면이 많이 등장했다. 먹방을 통해 캐릭터를 설명하거나 복선(伏線)을 깐다. 예컨대 검찰총장과 검사가 짜장면을 함께 먹는 장면에선 늘 음모가 논의된다. 이들은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기도 하고 중국음식점에 직접 가서 먹기도 한다. 면을 씹고 단무지를 깨무는 모습은 권력을 향한 탐욕을 상징한다. 줄거리의 대반전이 이뤄지는 곳도 한정식집이다.
유아들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먹는 장면을 많이 내보낸다. 시청자들이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 어디가’의 스타 윤후,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민국이는 비슷한 또래들 가운데 유달리 좋은 먹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종편 ‘음식-건강’ 장르도 인기
먹방을 다양한 장르에 접목하는 시도도 눈에 띈다. SBS ‘정글의 법칙’은 리얼리티와 서바이벌에 먹방을 끼워 넣었다. 해외의 오지에서 원시인처럼 최소한의 도구로 먹을거리를 마련하면서 생존하는 콘셉트다. 결국 식량을 구해 요리하고 이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하이라이트가 될 수밖에 없다.
KBS는 먹방을 인류학적 차원에서 조명한 다큐멘터리 ‘요리인류’를 방영했다. 지난해 3부작까지 방영한 데 이어 올 2월 8부작으로 완성했다. 또 ‘한국인의 밥상’은 원로 배우 최불암을 통해 요리와 여행을 접목한다.
“양파는 어디어디에 좋다” “스파게티는 어디어디에 좋다”라는 식으로 식재료나 음식을 건강과 연결하는 내용은 여러 종편 프로그램을 통해 널리 방송되고 있다. 관련 프로그램들이 워낙 다양해 하나의 ‘음식-건강 장르’로 비칠 정도다. 이들 프로그램은 시청률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한다.
‘의식주’ 대신 ‘식의주’라고 표현할 만큼 식문화에 높은 가치를 두는 나라는 중국이다.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먹을거리가 시원찮다”고 자주 말한다. 중국인은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런데 음식에 대한 관심에서 한국인은 이제 그런 중국인조차 뛰어넘을 태세다.
먹방의 유행은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방송가에도 여러 음식 채널이 있어서 다양한 음식 관련 콘텐츠가 생산된다. 일본에서도 ‘카모메 식당’ ‘심야 식당’ ‘고독한 미식가’처럼 제목만 봐도 내용을 짐작할 만한 먹방 드라마가 인기다.
문화권을 초월해 먹는 행위가 보편적 주제가 되는 것은 미각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증거다. 음식이 방송과 인터넷이라는 강한 확산력을 가진 매체와 만나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게 세계적 추세이며, 한국도 이에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채널A ‘먹거리 X파일’ 녹화 광경.
시청자는 1개당 100원인 별풍선을 구매해 좋아하는 BJ에게 준다. BJ 처지에선 별풍선을 많이 받을수록 수익이 올라간다. 시청자 처지에선 별풍선을 많이 줄수록 해당 BJ의 팬클럽 내 자신의 랭킹이 올라간다. 시청자 간 충성경쟁이 발생한다.
별풍선에 따른 수익금은 BJ와 방송사가 6대 4로 나눠 갖는다. 한 여성 BJ는 지난해 10월 한 시청자로부터 3500만 원어치의 별 풍선을 받았다. 연간 억대 수입을 올리는 BJ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입으로, 눈으로
지난 설 연휴 MBC 파일럿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인터넷 방송을 차용했다. 6명의 인기인이 각자 개인방송을 중계해 순위를 겨뤘다. 초반에는 걸그룹 AOA의 멤버 초아가 섹시댄스를 뽐내며 압도적 1위를 달렸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먹는 장면을 내보낸 요식업자 백종원이었다. 인터넷 먹방 콘셉트가 공중파에서도 통한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다.
해외 언론은 한국의 인터넷 먹방 유행을 신기해한다. 올해 들어서만 미국 CNN, 영국 BBC, 프랑스 르몽드 등이 이를 보도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음식 포르노’ ‘관음증’이라고 평했다. ‘가생이닷컴’에는 유튜브에 올라온 한 여성 BJ의 인터넷 먹방에 대한 해외 네티즌들의 댓글 반응이 소개돼 있다. “음식에 대한 내 갈망을 충족시킨다”는 긍정적 반응과 “왜 남이 먹는 모습을 보는 거지? 한국 사람들 참 특이하다”는 부정적 반응이 교차했다.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독특한 식사 문화에 호기심을 보인다. 예를 들어 혼자 먹기 싫어서 함께 식사할 사람을 모집하는 한국 모 대학의 새 학기 풍속에 대해 많은 외국인이 인터넷에 다양한 의견을 남겼다.
tVN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왼쪽), SBS 드라마 ‘펀치’의 짜장면 먹는 장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먹방 문화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고 개인 홈페이지가 생겨나면서 음식 사진을 올리는 것이 유행했다. 기혼여성은 자신이 요리한 사진을, 젊은 여성은 방문한 식당의 요리 사진을 올렸다. 이것은 오늘날 ‘위꼴사(식욕을 자극하는 사진이라는 의미의 인터넷 속어)’로 진화했다.
요리男은 섹시하다
이렇게 음식을 시각적으로 즐기는 문화는 오프라인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장진우는 20대의 나이에 요식업으로 대성했다. 9개의 식당을 운영하며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에 ‘장진우 골목’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을 정도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원래 사진작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동료들을 불러 모아 요리를 해 먹이면서 시각적 요리에 눈을 떴다고 한다.
이미 한국인은 음식을 ‘입으로, 그리고 눈으로’ 즐기는 단계에 진입했다. 포만감에서 맛으로, 맛에서 미(美)로 점차 수준이 높아지는 셈이다. 먹방은 미각과 시각의 융합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여기에 일조했다. 지금 한국은 프랑스 못지않은 요리 생산과 소비의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듯한 양상이다.
먹방의 유행을 이끈 또 다른 배경은 여성의 지위 향상 내지 전통적 성(性)역할의 파괴일 것이다.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은 여성이 요리하고 남성이 먹는 관행에 충실했다. 그러나 최근엔 남성이 요리하는 사람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차승원의 제육볶음은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대신 여성은 요리를 대접받는 지위로 바뀐다.
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인식도 덩달아 확산됐다. 에드워드 권, 강레오, 최현석, 레이먼 킴 같은 유명 남자 셰프는 연예인 대우를 받는다. 남자 셰프가 스타로 대접받는 건 세계적 현상이다. 패션 분야와 마찬가지로 요리 분야에서도 종사자 수로는 여성이 훨씬 많지만 최정상은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 영국은 고든 램지, 제이미 올리버 같은 스타 셰프들을 배출했다. 그러면서 ‘영국 음식은 맛없다’는 통념에서 벗어나고 있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는 유명인들의 냉장고를 통째로 스튜디오로 옮겨놓고 그 안의 식재료로 꽃미남 셰프들이 즉석에서 요리 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여성 시청자의 반응이 뜨겁다고 한다. 전문 셰프들 대신 보통 남성들이 나와 소박하게 요리하는 내용도 인기를 끈다. 전자가 ‘쿡방’이라면 후자는 ‘해먹남(해먹는 남자)’이다.
‘꽃보다 할배’로 히트를 친 PD 나영석은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을 시즌2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는 농촌과 어촌의 격리된 환경에서 출연자들이 하루 세끼를 스스로 해먹는다는 내용이 전부다. 시즌1의 주인공 이서진은 황당한 콘셉트에 직면해 “이 프로 망했다”고 선언했지만 시청자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시즌2에서 차승원은 능숙한 요리솜씨를 선보였다. 그는 ‘차줌마’라는 별명과 함께 국민적 호감 캐릭터로 등극했다.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먹지?’ 프로그램에서 요리 대결을 펼친다.
이처럼 먹방에서 남자들이 요리하는 역할에 대거 진출하다보니 정작 먹방에서 요리하는 여자는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이 빚어졌다.
새 히트 메뉴 조작
그러나 뭐든 과하면 부작용을 낳게 마련. 지금의 먹방 열풍에도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대다수 맛집 소개 프로그램은 소비자를 위한 정보 측면과 자영업자를 위한 홍보 측면이 함께 반영된 영상을 내보낸다. 음식점 홍보가 꼭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균형을 잃을 경우 소비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다큐멘터리 ‘트루맛쇼’(2011)는 TV 맛집 프로그램들이 방송 내용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홍보를 원하는 음식점 업주들은 브로커를 통해 제작사와 연결된다. 이어 업주들이 브로커와 제작자에 지불하는 홍보비용 규모에 따라 프로그램 내용이 결정된다. 업주는 돈을 많이 내면 특정 코너를 통째로 구매할 수 있다. 이어 생면부지의 연예인이 단골손님으로 둔갑한다. 음식을 맛보고 탄성을 질러대는 손님들도 사실은 사전에 섭외된 엑스트라들이다. 호평을 연발하는 대사도 작가들이 써준 것이다. 모두 시청자를 기만하는 행위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셰프의 창조물로 소개된 음식이 사실은 작가들의 요청에 따라 즉석에서 만든 음식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이 음식은 방송 직후에만 메뉴판에 존재하다 슬그머니 사라진다. 웬만한 메뉴는 이미 다 소개됐고 시청자가 새로운 메뉴를 원하기 때문에 작가들이 머리를 쥐어짜 ‘조작된, 새로운 히트 메뉴’를 내놓는다는 이야기다.
일부 먹방 프로그램은 성공 창업 식당을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검증되지 않은 프랜차이즈 사업자를 홍보하기도 한다. 이는 미디어가 다단계 판매에 앞장서는 것과 같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퇴직자들이 미디어가 과대포장한 프랜차이즈 업체에 거액을 투자했다가 피해를 보기도 한다.
최근엔 먹방이 대기업의 간접홍보에 이용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가령 CJ는 다수의 케이블 채널을 보유하면서 식음료 기업을 모기업으로 두고 있는데, 이들 채널을 통해 노골적으로 자사 제품을 홍보한다.
이런 점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움직임이 없는 건 아니다. 채널A ‘먹거리 X 파일’은 우리 음식 문화에 담겨야 할 정직과 인본주의의 가치를 일깨운다. tvN의 ‘수요미식회’는 음식을 직접 먹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 대신 멤버들이 맛집을 사전에 방문해 평가하는데 제법 신랄한 편이다. 앞으로는 음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푸드 칼럼니스트가 음식을 직접 만드는 셰프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올라설 듯하다.
다 함께 뭉뚱그려서 먹방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방송에선 일류 셰프의 고급 요리와 자취생을 위한 저렴한 음식이 공존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
취업난과 1인가구 급증 탓?
연령대별로 보면, 중장년층은 먹방에서 더 건강에 좋은 음식, 더 맛있는 음식을 추구한다. 시청자의 연령대가 높은 종편은 이런 경향성을 뚜렷이 반영한다. 예컨대 MBN ‘엄지의 제왕’이나 TV조선 ‘살림9단의 만물상’은 요리사보다 의사를 더 많이 출연시킨다. 이와 대조적으로 젊은 층에게 먹방은 거세된 욕망의 분출구쯤 된다. 이는 우리보다 10여 년 앞서 먹방 열풍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와 중첩된다.
일본에선 ‘잃어버린 10년’을 겪고 난 2000년대쯤 먹방이 활성화했다. 당시 장기불황과 고령화로 활력을 잃은 일본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안정된 직장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많은 젊은이는 중산층의 상징인 주택과 자동차에 대한 욕망을 포기했다. 이런 큰 욕망을 포기하면서 대신 멋진 요리로의 탐닉이라는 작은 욕망에 천착했다. 중산층 가정의 보금자리에 대한 대리만족을 근사한 음식점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먹방 문화의 발달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엔 밥 먹는 모습을 담은 DVD가 유행했다.
일본에서 먹방 문화는 젊은이의 성욕 감퇴와도 깊이 연결된다. 일본의 젊은 남성은 이전의 ‘초식남’ 세대에서 더 나아가 우리말로 ‘득도’나 ‘달관’을 의미하는 ‘사토리’ 세대가 됐다. 이 세대는 ‘절식남’으로도 불리는데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에도 도통 흥미를 못 느낀다. 실제 애인 대신 애니메이션 속 여자주인공을 더 좋아한다. 성욕과 식욕은 인간의 두 가지 원초적 본능이다. 이렇게 억제된 성욕이 풍선효과에 의해 식욕으로 전이됐다는 것이다. 또한 혼자 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맛집이나 음식 레시피 관련 정보를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먹방 문화도 10여 년 전 일본의 이러한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 비친다. 우리 젊은 세대의 특성으론 취업난, 결혼 기피, 1인가구 급증이 꼽힌다. 집과 차로 상징되는 경제적 성공은 유보되고 있다. 정규직 일자리, 결혼, 자녀 출산 같은 안정적 미래 또한 잘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따른 억눌린 욕구가 식욕으로 분출되고, 미디어가 이를 상업적으로 잘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