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정상회담 대가 요구는 분명한 사실
- 北 김양건, 정상회담 협상 때 우리 측에 애걸복걸
- 盧 쇠고기 협상, 일본·대만 얘기했지만 뉘앙스 달라
- MB 정부는 朴 정부가 이해 못할 고통 겪었다
MB 회고록을 총괄 집필한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 같은 내용이 실린 신동아 3월호가 출간된 뒤 이의를 제기했다. 특히 MB 정부가 자원외교 실패의 책임을 현 정부 장관들에게 떠넘기는 것처럼 비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김 전 수석은 신동아 3월호에서 “핑계 댈 생각은 없지만, 최경환 경제부총리(MB 정부 때 지식경제부 장관)와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MB 정부 때 청와대 지식경제비서관)에게 묻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회고록 내용 중 논란이 된 사안에 대한 이 전 대통령의 견해를 듣는 형식으로 김 전 수석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 전 수석이 지난해까지 상임이사를 지낸 한국정책재단 서초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MB 정부는 세종시를 기업도시로 만드는 수정안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문제로 정운찬 총리가 떠났다. 왜 좌절됐다고 보나.
“청와대 핵심 실세들이 오만했던 면이 있다. 원안보다 더 좋은 안을 만들어 내놓으면 충청도, 박근혜 대통령(당시 의원)도 안 받을 수 없을 거라고 봤다. 공을 들여 박 대통령과 야당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 회고록엔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기 위해 충청 출신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에 임명했다는 식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정 전 총리는 “세종시 때문에 나를 총리로 간택했다면 유감”이라고 했다.
“대통령께 여러 번 물어봤다. 그런데 대통령은 ‘아니야’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도 세종시 수정안 문제는 정 전 총리를 영입한 여러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정운찬 주장 이해한다”
▼ 정 전 총리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당시 청와대가 세종시 수정안 관철에 의지가 없었다”고 했다.
“정 총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정 총리가 간절하게 주장하던 국민투표가 결국 성사되지 않았으니까. 당시 대통령 주위엔 세종시 문제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같은 주장을 한다. 분명히 의지는 있었다. 그리고 삼성, LG, 한화 같은 기업들로부터 대단한 규모의 투자 약속을 다 받아놨었다. 토지분양 가격까지 다 결정한 상태였다. 수정안대로 됐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기업도시가 됐을 것이다.”
▼ 국민투표를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장담할 수 없다. 야당이나 박 대통령 측에서 투표 자체를 보이콧했을 수 있다. 그래서 투표율이 50%를 못 넘겼다면 국론이 분열됐을 것이다. 서울시 무상급식 문제 때처럼.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 정 전 총리가 대통령께 ‘세종시 수정안 통과를 도와주면 대선 때 밀어주겠다고 박근혜 의원에게 약속하라’는 주문도 했다는데.
“사실이다. 그만큼 정 전 총리도 절박했다. 그런데 그런 약속은 그 자체로 위법이다. 그리고 그런 약속은 비밀이 지켜질 수도 없다. 불가능한 요구였다.”
▼ 전직 총리들은 회고록 작성에 참여하지 않은 걸로 안다.
“한승수 전 총리는 박 대통령과 특수관계(사촌형부)라 참여하기 어려웠다. 정 전 총리는 정치적으로 왔다 갔다 했던 분이라 부담스러웠다. 민주당의 차기 주자 후보군이었다가 MB 정부 총리가 됐지만 2012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김황식 전 총리는 아직 정치적으로 할 일이 있는 분이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분이라 같이 작업하기 어려웠다.”
“‘이면합의’ 표현은 부적절”
▼ 회고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미국 측과 쇠고기 수입개방에 대해 이면합의를 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당시 협상에 참여한 이들과 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솔직히 ‘이면합의’라는 표현은 부적절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한 말과 내막을 살펴보면 알려진 것보다 좀 더 있다. 우리가 내용을 다 알고 있다. ‘이면합의’라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은 노무현 정부가 시작해 MB 정부가 마무리했다. 회고록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2007년 초 노 전 대통령이 미국 측과 (특정위험부위를 제외하고 미국산 쇠고기를 월령제한 없이 수입하기로) 이면합의를 했는지다. 김종훈 당시 통상교섭본부장과 송민순 당시 외교부 장관은 회고록 내용에 대해 부인했다. 송 전 장관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노무현 정부는 쇠고기 문제에 대해 정리된 의견이 있었다.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 존중, 아시아 국가들과 균형을 맞춰 합리적인 수준에서 결정, 금년(2007년) 내 해결이다. 이 내용을 2007년 3월 부시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밝혔다. 그런데 회고록은 노 전 대통령이 아시아 국가들과 균형을 맞춰달라고 요구한 부분만 빼고 설명했다.”
김 전 본부장도 “이면합의는 없었지만, 노 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약속한 바는 있었고, 이는 2007년 4월 대국민 담화문에 담겼다”고 주장했다.
▼ 회고록의 내용은 사실인가.
“두 정상 간의 전화통화 때 배석한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우리가 다 확인했다. 송 전 장관은 ‘우리는 끝까지 일본, 대만과 같은 수준을 요구했다’고 주장한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정상 간 대화에 일본·대만 얘기가 있긴 하다. 그러나 뉘앙스는 분명 다르다. 자세히 보면 ‘일본·대만과 같은 조건이면 수입하고, 아니면 수입하지 않겠다’는 거라곤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우리가 (수입)하면 일본·대만도 거기에 맞춰달라’는 정도였다. (송 전 장관의 주장은) 정치적인 견해로 본다.”
▼ 송 전 장관은 “MB 정부가 쇠고기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내용을 우리 정부(노무현 정부)가 아닌 미국으로부터 인계받았다”고 주장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노무현 정부에서) FTA 책임자, 통상교섭본부장 등을 지낸 한덕수 총리 등으로부터 다 보고받았다.”
“임태희가 모르는 것도…”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는 2월 6일 이렇게 주장했다.
‘회고록에는 북한이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과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나와 있다. 앞뒤 맥락 없이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처럼 썼다. 그러나 실상 북한의 그런 요구는 우리 측에서 바라던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고향 방문간의 교환조건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 회고록에 따르면, MB 정부가 추진하던 남북정상회담은 북측의 정상회담 대가 요구 때문에 불발됐다. 그런데 이를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온다.
“북한은 처음부터 정상회담 대가를 요구했다. 어떤 건 구체적인 기간과 내용까지 정해서.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에게 프라이카우프(freikauf) 방식을 제안한 듯한데, 북한은 그 방식에 동의한 적이 없다. 임 장관은 당시 우리 측 고향방문단이 북한의 고향을 찾게 해주면 얼마, 국군포로가 영구귀환하게 해주면 얼마,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북한은 이 방식을 거부했다.”
프라이카우프는 옛 서독의 동독 반체제인사 석방사업으로, 동독에 돈을 주고 정치범을 데려온 협상방식을 말한다. 한쪽이 ‘A’를 하면 다른 쪽이 거기에 상응해 ‘A-1’을 하는 방식이다.
▼ 임 실장은 2013년 1월 신동아 인터뷰에서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회고록 내용과 배치된다.
“임 장관이 모르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의 착각일 수도 있고. 회고록은 (임 전 장관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분명히 북한은 정상회담 얘기가 있을 때부터 아예 조건을 걸고 나왔다. 북한의 태도를 정확하게 말하면 ‘이걸 안 해주면 정상회담 안 한다’가 아니고 ‘정상회담 전에 이걸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쨌건 분명한 대가 요구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대가를 주고 하는 대화는 않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 회고록에 따르면, 싱가포르 협상 때 김양건 부장이 ‘이대로 (성과 없이 북한에) 가면 죽는다’고 했다는데.
“그저 ‘돌아가면 죽는다’ 정도가 아니고 거의 애걸복걸하는 수준이었다. 그 내용을 다 공개하면 김양건을 두 번 죽이는 거라 그 정도로 다듬었다. 공개한 것보다 훨씬 심한 말을 했다.”
朴 정부는 이해 못할 고통
▼ 임 전 장관과 김양건 부장의 대화 내용은 문서로 남아 있나.
“국정원은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회고록은 당사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 회고록은 자원외교를 총리실 몫으로 돌렸다. 변명으로 들린다.
“안 믿겠지만, 사실이다. 처음부터 한승수 총리와 대통령이 역할분담을 했다. 자원외교가 MB 정부의 큰 방향인 건 맞지만 사실이 그랬다.”
▼ 한 총리 이후의 총리들은 자원외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총리실에 자원외교를 전담하는 기구가 있었다. 거기서 했을 것이다.”
▼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원외교 특사로 활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전 부의장은 볼리비아 리튬사업만 맡았다. 여섯 번인가 갔다 온 걸로 안다.”
▼ 이 전 부의장은 자서전 ‘자원을 경영하라’에서 ‘멕시코, 브라질, 볼리비아 등 12개국 다니며 23개 MOU 체결했다’고 썼다.
“…본인의 과장이다.”
▼ 이상득, 박영준 두 사람이 낸 성과가 한 전 총리보다 많다.
“대부분 MOU(양해각서)다. MOU는 말 그대로 MOU다. 한번 해보자는 의미의….”
▼ MB 정부 5년간 자원외교 성과의 대부분은 MOU다. MOU를 빼면 성과는 거의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따르면, MB 정부가 체결한 자원외교 MOU는 총 96건이고 이 중 16건이 본계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본계약 중 6건은 사업이 중단됐고 나머지 10건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다.)
“…나는 자원외교 부분을 회고록에 쓰지 않으려 했다. 내가 일단 그 부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자원외교를 들추다 보면 실무자 선에서 발생한 비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국회에서 국정조사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아예 뺄 수는 없어서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만 한 것이다.”
▼ MB 정부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가령 민간인 사찰 같은 건 왜 회고록에 안 담았나.
“대통령께서도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그런데 총리실의 해당 팀과 사람들은 어느 정권에서나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해할 부분이 있다. 그리고 우리 처지에서 얘기하면, MB 정부 초기에 언론 상황과 권력기관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전 정부 사람들이 요직에 남아 있어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됐다. 쇠고기 파동 때도 우리 정부는 경찰과 국정원 정보를 거의 받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정현 칭찬하자…
▼ 측근 비리 문제도 회고록에 없다.
“내 생각에 측근 비리라는 것도 이 정도면 비교적 적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상득, 신재민, 박영준, 최시중…그 정도 아닌가. 문제가 된 것도 수백만 원에서 1억~2억 원 수준이다. 정권의 핵심에 있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경우가 있다. 미국이나 영국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치러야 할 대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비교적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양호한 편이다.”
김 전 수석 인터뷰에선 회고록 내용과는 관계없지만 2008년 MB 정부 출범 직후 벌어진 공천 파동, 박근혜 대통령 측과의 갈등 등도 주제가 됐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 소개한다.
“2008년 3월 총선을 앞두고 공천 파동이 불거졌다. 친박(親박근혜) 정치인 다수가 공천을 못 받고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을 공천한 것 등이 문제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며 이명박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당시 박 대통령 측 사람들은 지역구나 비례대표 공천에서 학살을 당했다고 주장했는데, 지역구 공천은 그런 면이 있었지만 비례대표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박 대통령 측근이던 유정복 의원(현 인천시장)이 행정고시 동기인 박재완 전 장관에게 20명의 리스트를 보냈다. 우리는 그들 중 3~4명을 당선 안정권에 넣었다. 이정현 의원 같은 분들이다. 2008년 2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나는 박 대통령을 두 번 독대했다. 그때 내가 이정현 의원을 칭찬하자 박 대통령이 활짝 웃으면서 ‘그렇죠?’라고 했다. 이정현 의원이 박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게 됐다. 그래서 이정현 의원을 확실한 당선권에 넣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