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 못한 피터 슈라이어 전격 영입…‘디자인 경영’ 승부수
- 직원 喪家에서 소주잔 돌리고 e메일로 현장 결재
- 인재·소통 중시, 유연성, 소탈함, 글로벌 리더십
- 학창 시절 수학·역사에 흥미…클라리넷 연주회 열기도
- ‘여친’ 소개하던 날, 정주영 회장이 즉석에서 약혼날 잡아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글로벌 판매 800만 대’는 선두업체 도약의 상징이다. 일본의 도요타는 2006년 글로벌 판매 800만 대를 기록한 지 2년 만에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폴크스바겐은 2011년 800만 대 달성을 즈음해 ‘2018년 세계 1위’를 공언했다. 현재 두 회사는 글로벌 판매 1000만 대를 기록하며 업계 1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GM, 르노닛산, 현대기아차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현대기아차도 지난해 마침내 글로벌 판매량 800만 대를 돌파했다. 1986년 미국에 엑셀을 처음으로 수출한 이후 30년이 채 안 된 시점에 거둔 성과로 글로벌 자동차업계에서 보기 드문 고속질주였다. 이와 관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해 12월 15일 “만족하기엔 갈 길이 멀다. 800만 대는 새로운 시작이며 출발점”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앞두고 자동차 수요가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에는 포니를 시작으로 기술 독립을 선언했고, 88서울올림픽 이후 ‘마이카 시대’에 부응하며 쾌속 질주를 계속했다. 아들 정몽구 회장은 1998년 기아차 인수에 성공한 뒤 미국, 유럽, 중국, 인도 등지에서 현지 생산에 나서며 본격적으로 몸집을 불려갔다. 2000년 글로벌 판매 248만 대에 불과하던 현대기아차가 15년 뒤 800만 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내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2011년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신 브랜드 경영’을 선포하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한국 자동차업계의 초석을 놓았다면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이제 시선은 정 회장의 아들 정의선(45) 현대차 부회장에게 쏠린다.
현대기아차가 세계 판매 800만 대를 성취한 데는 정 부회장의 숨은 공로도 컸다. 아버지를 적절한 거리에서 보좌하고 임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자임하며 적잖은 기여를 했다. 아버지가 몸집을 불린 현대기아차를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몸매로 가꾸는 ‘질적 성장’도 그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정 부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와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경영학과(MBA)를 졸업한 뒤 일본 이토추(伊藤忠)상사 뉴욕지사에서 근무했다. 1999년 현대차 자재본부 이사로 입사하면서 3세 경영의 맥을 잇는다. 자재본부는 자동차 제조에 필요한 부품을 조달하고 협력업체를 관리하는 부서. 자동차회사의 기초가 되는 부품과 원자재를 관리하며 경영의 기초를 배우는 건 현대가(家)의 오랜 전통이다. 이후 그는 2002년 현대차 국내영업본부 부사장, 2003년 기아차 기획실장 부사장을 거쳐, 2005년 기아차 대표로 승진했다. 처음으로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업계와 언론은 물론 일반인도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1998년 부도 이후 현대차에 인수된 기아차는 인수 이듬해 흑자로 돌아섰지만, 국내 레저용 차량(RV ) 시장의 위축과 환율 하락 악재 속에 다시 적자로 돌아선 상황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정 부회장은 장고(長考) 끝에 ‘디자인 경영’ 카드를 꺼냈다. 기술이 평준화한 상황에서 성능이 비슷하다면 디자인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국내외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고, 여러 해외 모터쇼를 둘러보며 오랜 기간 고민해 내린 결론이었다.
2월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오찬’.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박근혜 대통령,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長考 끝에 꺼낸 카드
일단 결정을 내리면 즉각적으로 실행했다. 정 부회장은 아우디를 거쳐 폴크스바겐 총괄 디자인 책임자로 있던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려고 직접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몇 차례 끈질긴 설득 끝에 그를 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고, 이후 디자인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단행했다.
페르디난드 피에히 폴크스바겐 그룹 이사회 의장은 2012년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그간 잃어버린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로 가게 한 것이다”라고 털어놨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는 그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자랑했다.
당시 기아차에서 가장 우선시한 제작 기준은 성능이었다고 한다. 효율성과 디자인이 충돌하면 디자인을 포기했다. 하지만 슈라이어 부사장을 영입한 뒤에는 디자인 원안을 유지하며 성능과 효율성을 추구했고, 독자 디자인 개발에도 착수했다. 슈라이어 부사장(지금은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 사장)은 밋밋한 기아차의 얼굴에 ‘패밀리룩’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기아차 직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2006년 정 부회장이 ‘디자인 경영’을 선언할 때만 해도 기아차는 영업적자를 냈다. 현대기아차 안팎에서는 ‘정 부회장을 기아차에서 빼내야 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그룹 후계자가 적자 기업에 있으면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처지의 정 부회장으로선 일단 ‘단기 성과’를 내야 했는데, 느닷없이 디자인 경영을 선언했다. 디자인으로 성과를 보려면 최소한의 자동차 개발 기간인 3~5년이 필요했다. 그는 반짝 실적 대신 장기 처방을 선택한 것이다.”
우려와 달리 디자인 경영이라는 승부수는 이후 빛을 발했다. 2008년 6월 ‘직선의 단순화’를 기반으로 한 기아의 패밀리룩이 탄생했고, 로체 수정 모델을 시작으로 포르테, 쏘울 등이 잇달아 출시됐다. 쏘렌토R, K7, 스포티지R, K5 등 R시리즈와 K시리즈가 등장하자 기아차 영업이익은 조(兆) 단위로 상승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006년 27만 대에 불과했던 기아차 국내 판매 대수는 2010년 48만5000대로 79% 급증했고, 기아차는 이후 세계 3대 디자인상을 석권하며 전 세계에 ‘디자인 기아’를 각인시켰다. 정 부회장을 잘 아는 재계 인사 A씨는 이렇게 말했다.
‘단기 매출’보다 ‘브랜드 가치’
“정 부회장이 기아차 대표가 되고 나서 2, 3년 뒤를 내다보는 결정을 하는 걸 보며 그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수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수학은 논리적 사고 틀을 길러주고, 역사는 과거 사건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을 예측하는 힘을 길러준다’고 말하곤 했다.”
정 부회장은 디자인 경영과 함께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도 나섰다. 2006년 당시 기아차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환율. 환율이 달러당 900원대 초반으로 떨어지면서 기아차 이익은 급감했다. 기아차의 해외시장 판매 비중은 79%에 달하지만 해외공장 생산 비중은 9%에 불과해 환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구조였다.
결국 정 부회장은 해외공장 건설 프로젝트와 해외법인 체질 개선책을 들고 나왔다. 유럽에 최초로 세운 슬로바키아 공장과 미국 조지아 주 공장은 정 부회장이 직접 챙긴 ‘작품’이다. 장기 재고 차량으로 인한 비용 부담과 판촉비가 급증해 헐값 판매를 마다않던 해외 판매법인에는 밀어내기와 저가 판매 금지령을 내렸다. 단기 매출 증대를 위해 브랜드 가치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이 같은 체질개선 전략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2008년 169.1%에 달하던 기아차 부채 비율이 2010년 92.8%로 뚝 떨어졌다. 2008년 4조6000억 원이던 순차입금도 2010년 6280억 원으로 눈에 띄게 줄었고, 2010년 현금 보유액은 2조2560억 원으로 크게 늘었다.
‘현장을 알아야 올바른 경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현장 경영 철학이 이런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임직원들의 중론이다. 정 부회장이 2009년 현대차 부회장에 오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로 불안감이 커지자 유럽으로 날아가 현지 시장 상황을 파악하고 직원들과 대응전략을 논의했다. 지난 1월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는 현대차의 친환경차를 기자단에 직접 소개했다. 3월에도 중국공장을 살펴보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그가 해외 공항에서 수행원 하나 없이 백팩을 메고 직접 캐리어를 끌고 가는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 부회장의 지인 B씨는 정 부회장이 현장 경영을 중시하는 이유를 대학 시절의 경험에서 찾았다.
“정 부회장은 모교인 고려대 도서관 건설 현장에 할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이 안전모를 쓰고 감독하던 광경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고 했다. 가끔 현장에 가보면 가기 전에 보고받은 것과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하더라. 사업 현장을 방문하면 직원들의 생각을 읽고 소통하기 위해 애쓴다고 한다.”
백팩 메고 다니는 부회장
그의 말처럼, 정 부회장의 핵심적인 경영 리더십은 인재와 소통 중시, 유연성, 소탈함, 글로벌 감각 등으로 요약된다. 피터 슈라이어 영입 사례에서 보듯,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반드시 영입하고 전폭 지원한다. 단지 ‘스펙’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열정과 창의성을 가진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미술관에서 현대차 잡페어를 여는가 하면, 해외 유학생을 채용할 때 지원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오디션 방식을 도입한 것도 그였다. 그가 신입사원 수련회에서 늘 당부하는 말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실수하더라도 도전하는 게 낫다”이다.
유연성은 그의 또 다른 지휘봉이라는 평가다. 바쁜 일정에도 직원들과 번개 미팅을 하고, 직원들의 애경사(哀慶事)를 직접 챙긴다. 직원 상가(喪家)에서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과·차장들이 참여하는 ‘주니어 보드’ 성격의 모임인 차세대위원회에도 참석해 귀를 기울인다. 이 위원회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 활용하고, 논의 내용은 사장 결재를 얻어 실무에 반영한다. 일을 열심히 한 직원들에게는 영화표나 연극 티켓을 선물하기도 한다는 게 현대차 임원 C씨의 귀띔.
“정 부회장은 오전 6시 반이면 출근해 일을 시작하는데, 업무 스타일은 무척 유연하다. 직원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e메일 보고를 하면 외부에 있어도 스마트폰으로 확인해 곧바로 답장을 보낸다. 며칠 뒤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해놨다가 직접 해당 부서로 내려와 의견을 나눈다. 덕분에 현대차의 회의 형태와 결재 프로세스 등 업무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의 유연한 업무 스타일은 부서 간 갈등 해소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가령 그의 입사 초기에 연구개발부서와 영업부서는 의견 차이 때문에 회의를 할 때마다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정 부회장이 두 부서의 공동 미팅을 정례화했고, 미팅이 끝나면 뒤풀이 자리를 마련해 자신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유연함과 함께 특유의 소탈함은 직원들과의 또 다른 소통 창구가 되고 있다. 기아차의 한 직원은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몇 해 전 일요일로 기억한다. 서울모터쇼에 정 부회장이 가족과 함께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 무척 긴장했다. 모터쇼 현장에 공연 무대가 있었는데, 직원들은 부랴부랴 공연장 앞줄에 정 부회장과 가족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막상 백팩을 메고 나타난 정 부회장은 ‘나는 오늘 가족과 관람객으로 왔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맨 끝자리에 가족과 나란히 앉았고, 행사장 안내 의전도 극구 사양했다. 그를 다시 보게 됐다.”
정 부회장의 친구들 중에는 그가 현대가의 장손이라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됐다는 이가 적지 않다. 다음은 한 친구의 전언.
‘정주영표’ 밥상머리 교육
“정 부회장은 휘문고에 다닐 때 테니스, 수영, 스키 같은 운동을 잘했고, 클라리넷 연주도 곧잘 해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초당두부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간 적이 있는데, 그때 정 부회장은 자기 할아버지도 초당두부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더라. 그때 할아버지가 정주영 명예회장인 걸 알았다. 그 전까지는 현대가 장손임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현대차 안팎에서는 정 부회장이 이런 성품을 갖게 된 데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입을 모은다. 정 부회장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새벽 5시에 온 가족과 아침식사를 했는데, 그 시절 장손인 정 부회장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밥상머리 교육은 나도 아버지한테 받았어. 네 증조할아버지께선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늘 말씀하셨지. 자기를 낮추면서 남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곤 하셨어.”
현대가의 이 같은 가풍은 계속 이어져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정몽구 회장 집에 모여 식사를 한다.
정 부회장의 부인 정지선 씨는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녀. 정 부회장의 친구 사촌여동생이라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한다. 정 부회장이 먼저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 지선 씨도 유학을 갔는데, 지선 씨가 미국에 온 걸 안 정 부회장이 연락해 교제를 시작했다. 그런데 결혼을 생각할 무렵 뜻밖의 장애물을 만났다고 한다.
“당시 정 부회장은 여자친구 이름이 사촌인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과 같고, 성씨도 같아 고민이었다. 일단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정주영 회장이 ‘우리는 하동 정씨, 지선이는 김포 정씨이니 괜찮다’며 그 자리에서 지선 씨 집에 전화를 걸어 일주일 뒤 약혼 날짜를 잡았다. 한번 결정하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정 회장의 추진력이 장손 결혼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거다.”(현대차 전직 임원 D씨)
정 부회장은 지난해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양궁 결승전도 가족과 함께 관람했고, 지난해 11월 코오롱의 고 이동찬 회장 빈소에도 부인과 함께 문상하는 등 그의 가족 사랑은 재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제 정 부회장은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 한다. 글로벌 5위로 순항 중인 현대차그룹을 지속 가능한 기업으로 만들고 미래 비전도 제시해야 한다. 그가 강조한 ‘사랑받는 현대차’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객 만족도도 높여가야 한다.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빌 게이츠와 다진 친분으로 마이크로소프트와 전략적 제휴를 이끌어낸 것처럼 광폭 대외활동에도 나서야 한다.
이런 과제를 풀어가려면 현재의 브랜드 가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프리미엄 시장에서 독일 등 유럽차와 일본차가 경쟁하며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선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지난해 국내시장에서 수입차 점유율이 처음 10%를 넘어서는 등 수입차 선호 현상이 심화하고 있고, 노사 문제와 경영권 승계라는 험난한 산도 넘어야 한다. 그가 기아차에서 풀어낸 숙제보다 훨씬 난도가 높다. 정 부회장앞엔 이런 험로가 놓여 있다.
아침식사를 하는 정주영 명예회장 일가.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정의선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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